한국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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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음( 偶吟) / 宋翰弼(송한필, ?~1594?)한국한시 2023. 4. 6. 21:16
우음( 偶吟) / 宋翰弼(송한필, ?~1594?) 花開昨夜雨 (화개작야우) 花落今朝風 (화락금조풍) 可憐一春事 (가련일춘사) 往來風雨中 (왕래풍우중)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졌구나 가련하다 한 봄의 일이여 비바람 속에서 왔다 가는구나 송한필은 송익필의 아우다. 이들 형제는 부친 송사련이 자신의 외가인 순흥 안씨 집안을 역모죄로 誣告(무고)하여 출세한 덕분에 유복하게 살았다. 이들은 노비의 소생인 까닭으로 관직에는 못 올랐으나 자신의 학문, 그리고 물려받은 재산과 두뇌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송한필이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순흥 안씨 집안에서 역모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무고임이 밝혀졌다. 그 결과 이들은 안씨 집안의 종이 되어야했는데 鄭澈(정철) 등의 도움으로 도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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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送人) /정지상(鄭知常, ?~1135)한국한시 2023. 4. 6. 21:15
송인(送人) /정지상(鄭知常, ?~1135)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비 그친 긴 강둑에는 풀빛이 푸르러오는데 님을 떠나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래가 가슴을 울리네 대동강 물이야 마를 수가 있을까 해마다 이별하는 눈물이 푸른 강물에 보태지는데 이 시 현판은 대동강가의 부벽루(浮碧樓)에 걸려있다고 전해옵니다. 평양 감사나 사또가 새로 부임하거나 중국 사신이 이곳을 지날 때면 현판을 바꿔 달았다고합니다. 그러나 한번도 바뀌지 않은 현판이 이 정지상(鄭知常, ?~1135)의 시 현판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에는 또다른 슬픈 전설이 전해옵니다. 고려 인종 때 사람인 정지상은 천재시인으로 어릴 때부터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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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소재 노수신의 한시한국한시 2023. 4. 1. 07:44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일시 ▪ 2022년 4월 2일(토) 13:30-18:00 장소 ▪ 고려대학교 서관 315호 / 온라인 회의실(Zoom) 주최 ▪ 소재노수신선생학술문화진흥회⋅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개회 (13:30-13:40) 사회: 조지선(충남대) 개회사 이동환(소재노수신선생학술문화진흥회 이사장) 축 사 김용재(한국양명학회 회장) 발표 (13:40-15:10) 사회: 조지선(충남대) 제1발표 (13:40-14:10) 이종묵(서울대) 소재 노수신 한시의 아름다움 1 제2발표 (14:10-14:40) 최재목(영남대)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 ―‘소재학(穌齋學)’ 규명을 위한 한 ‘방법’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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寓目 우목/두보한국한시/한국한시협회 2023. 3. 30. 21:33
寓目 우목 눈길 가는 대로 一縣葡萄熟1 일현포도숙 秋山苜蓿多2 추산목숙다 關雲常帶雨3 관운상대우 塞水不成河4 새수불성하 羌女輕烽燧5 강녀경봉수 胡兒掣駱駝6 호아철낙타 自傷遲暮眼7 자상지모안 喪亂飽經過8 상란포경과 온 고을에 포도가 무르익고 가을 산에 거여목이 많다. 관문의 구름은 늘 비를 머금는데 변방의 물은 강을 이루지 못한다. 강족의 아낙은 봉화를 가벼이 여기고 호족의 아이는 낙타를 끈다. 절로 가슴 아프나니, 노년에 눈으로 난리를 지겹도록 겪어 보았도다. 이 시는 두보가 건원 2년 진주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 一縣(일현) - 진주를 가리킨다. 2 苜蓿(목숙) - 거여목. 말이 즐겨 먹는 풀의 일종. [一縣 2구] 《사기․대원전 大宛傳》: 대원국 일대에서는 포도로 술을 만드는데 부자들은 만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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罷官歸田 到渡迷峽/서애 류성룡한국한시 2023. 3. 30. 07:39
罷官歸田 到渡迷峽/서애 류성룡 田園歸路三千里(전원귀로삼천리) 帷幄深恩四十年(유악심은사십년) 立馬渡迷回首望(입마도미회수망) 終南山色故依然(종남산색고의연) 전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삼천리지만, 궁중 휘장 아래서 대은을 입은 건 사십년일세. 도미협에서 말 세워놓고 고개 돌려 바라보니, 종남산 산색은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네. 戊戌冬 罷官歸田 到渡迷峽 下馬望京山四拜而行 盖過此則不復見京山故也 무술년 겨울에 관직에 파직되어 전원으로 돌아가는데, 도미협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서울 부근 산을 바라보며, 네 번 절을 올린 후에 떠났다. 대개 이곳을 지나가게 되면 다시는 한양의 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