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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너지는 공공의료와 ‘하늘이 내린 명의(名醫)’ 허준
    역사/한국사 2023. 4. 1. 13:49

     

    무너지는 공공의료와 ‘하늘이 내린 명의(名醫)’ 허준

     

    코로나19 4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세계인들은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불안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삶이 불안할수록 세계인들은 공공의료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K 의료’로 불릴 만큼 의료산업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대학병원에서조차 아이들을 돌볼 소아 전문 의사가 없어 입원 진료를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합계출산율 0.78이라는 전 세계 최저 출산율로 전공의들은 ‘소아청소년과’ 지원을 기피하는 실정이며, 소청과 개원 의사단체가 지난 29일 ‘폐과’ 선언을 했다. 상황이 열악한 건 외과·흉부외과·응급의학과·산부인과 등도 마찬가지다.

    공공의료와 지방 의료계는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필수진료 과목 전문의의 태부족과 의료진의 수도권 쏠림 현상으로 의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응급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2020년 기준 국내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3.7명에 많이 못 미친다. 전국 의과대학 정원은 2006년부터 17년째 3,058명에 꽁꽁 묶여 있다.

    정부는 ‘교육개혁’ 차원에서 의료 인프라의 완성을 위해 의대 정원 확대, 소아청소년과 개원 유도, 필수진료 과목 전공자 우대, 지방 의무 근무 지역의사제 도입 등 최소한의 실효적인 개선책을 내놓아야 한다. 의협 등 기존 의료계는 ‘허준의 보민(保民) 정신’을 깊이 새겨 기득권을 내려놓고 정원 확대에 협조해야 한다.

    ‘하늘이 내린 명의’ 허준(許浚, 1539~1615)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다.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許碖)이며, 어머니 영광 김씨는 소실이었다. 서자 신분은 의관의 길을 택하는 데 작용하였지만, 허준은 양반 가문의 배경 덕에 경전·역사·의학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다.

    허준은 30세(1569)에 유학자 유희춘(柳希春)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한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유희춘은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했고, 1573년(선조 6)에 허준은 종4품 내의원 첨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던 중 1590년 광해군의 천연두를 고치자, 선조는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의 벼슬을 내리며 그 공을 치하했다. 임진왜란 중 다시 한번 광해군의 병을 고치면서 동반(東班)에 올랐다.

    임란이 끝나자 선조는 자신을 끝까지 호종(扈從)한 문무관 17명을 공신에 책봉하고, 허준에게 종1품 숭록대부 벼슬을 내렸다. 이처럼 허준의 출세는 조선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허준은 30여 년 동안 내의원의 어의(御醫)로 활약하는 한편, 8종의 의학서적을 집필하였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책임 어의로서 책임을 추궁당해 의주로 유배되었는데, 귀양 기간 중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다.

    중국판 서문에는 ‘천하의 보(寶)를 천하와 함께한 것’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跋文)에는 ‘보민(保民)의 단경(丹經, 신선의 글)이요, 의가(醫家)의 비급(秘笈, 소중히 보존되는 책)’이라 평했다.

    허준은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한국·동아시아·세계의학사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동의(東醫, 한국 의학)의 위상을 높였다. 1615년 허준은 76세에 타계했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 작위가 추증되었다.

    신묘한 의술로 박애를 실천해 ‘의성(醫聖)’이 되었고, 신분을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구암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杏林春滿顯人才(행림춘만현인재) (조선) 의술의 고명함이 인재(허준)로부터 드러났고

    疫襲方知妙術開(역습방지묘술개) 역병이 엄습해서 비로소 신묘한 의술 만개 알았네

    立志成名渾破格(입지성명혼파격) 뜻을 세워 명의 명성 얻음은 순수한 파격이었고

    飛黃騰達忽鳴雷(비황등달홀명뢰) 지위가 급상승한 것은 홀연히 우레 울음 같았네

    家家祕笈華佗技(가가비급화타기) 집집마다 소중히 보존된 책은 화타의 의술 같았고

    戶戶丹經扁鵲材(호호단경편작재) 집집의 백성 지키는 신선 글은 편작의 재료였네

    寶鑑一時三國寶(보감일시삼국보) 동의보감은 일시에 조선·중·일의 보물이 되었고

    烏號至盛泰山嵬(오호지성태산외) 아! 지극하게 이룬 사람이 태산 같은 우러름 받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출처 : 일요서울i(http://www.ilyoseoul.co.kr)

    본관은 양천으로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2]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양천 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이며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지낸 허륜(許碖)이다. 어머니는 허륜의 소실 영광 김씨로 적모로 윤씨가 있고 서모로 일직 손씨가 있다.[4] 이복형으로 허옥(許沃)이 있으며[5] 바로 아랫동생인 허징(許澂)[6]은 같은 어머니가 낳은 동복형제로 허준은 허륜의 차남이다. 허륜의 소실 영광 김씨는 허준의 어머니로 김욱짐의 딸로 당대에서도 설명되고 있다.

    일단 허준이나 허징은 족보에는 서자로 표기되어 있다. 다만 천민 소생이 아닌 양인 신분의 첩의 소생으로 동의보감 원작이나 드라마 허준에서 묘사된 것처럼 천민 소생은 아니다. 허징도 형 못지 않게 비범한 인물로 서자이면서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시절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의 딸과 결혼까지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허준이 1575년 선조의 어의로 임명되었기에 이때 신분이 면천되어 어머니인 영광 김씨와 허준의 동복동생인 허징 또한 중인 출신이 아닌 반가의 혈족으로 인정받았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허징은 1586년(선조 19년) 문과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학관(學官)을 거쳐 목사(牧使)를 역임했는데, 형 허준의 능력으로 허징의 신분이 면천되어 대과를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7]

    본래는 서자나 얼자[8] 모두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나 서자는 양첩 사이에서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허준이 10살 무렵인 1550년부터 과거 응시가 가능하도록 법이 바뀌었다.[9] 현재 많은 사람들이 과거는 양반만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는데 법률상으로는 천민이 아닌 모든 사람이면 과거 응시 자격이 있었다.[10] 소설 동의보감 등에서는 그가 용천부사 허륜과 기생 출신의 손씨 상에서 난 얼자라서 설움받고 멸시받고 지내다가 아버지 곁을 떠나 경상도의 명의 유의태에게 의학을 배웠다고 나오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유의태라는 사람은 가공 인물이고 모델로 보이는 유이태라는 인물은 허준이 죽고나서도 약 150여년 뒤인 숙종 대의 인물이다. 허준이 어디서 어떻게 의학을 배웠는지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 아예 처음부터 서자가 아니고 후대의 족보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소수의 주장도 있지만 이를 확실히 입증할 만한 물증은 없다. 따라서 서자였다는게 중론인데 서자라고 유별나게 차별받거나 가난하게 사는 그런 환경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축첩이 당연한 일이었던 전근대 시대에는 서얼의 과거 응시 제한 같은 사회적 차별과는 별개로 서얼 개개인이 집안에서 받는 대우는 어디까지나 시대, 지역, 가풍에 따라 달랐다. 그래서 현대인의 통념과는 달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같은 사례[11]는 생각보다 적었다. 만일 허준의 집안이 서자를 강하게 차별하는 집안이었다면 같은 서자인 허준이나 허징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공부를 시켰을 리가 없다. 즉 허준이나 허징이 집안에서의 좋은 대우와 본인의 재능이 겹쳐서 성공했다는 게 정설. 허준이 어떻게 의학을 배웠는지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으나 내의원에 들어오기 전에 허준이 의학으로 명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아버지인 허륜이나 적모 윤씨, 친모 김씨, 서모 손씨, 이복형 허옥 등의 지원 아래 여러 스승을 들여 의학을 배웠다는 추론이 있으며 역사스페셜에서 한차례 다루었는데 서자를 차별하지 않는 깨어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지원을 받아 의학의 기초를 갖추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선조 대의 관료이자 학자인 미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1569년에 유희춘 자신이 허준을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에 천거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고 1573년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것으로 보아 1569년에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내의원에 천거되려면 기본적인 의학 수준 이상을 갖추어야 하고 집안의 배경도 추천의 근거가 되므로 본인 실력과 뒷받침해주는 가문의 배경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추천장을 성 대감에게 받고 유의태가 추천장을 불태우는데 실제 허준은 추천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다.

    1575년부터 선조를 진료하는 의원이 되었고 1578년에 내의원 첨정에 올랐으며 1587년에는 어의 양예수와 함께 선조를 치료하여 호피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1590년에는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하여 1591년 당상관[12][13]에까지 오르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호종을 해서 전후 호성공신 3등에 제수되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에는 류성룡,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이산해와 더불어 자신은 가족들과 함께 피난가지 않고 자진해서 조정에 남아 선조를 모셨다. 원작소설인 동의보감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허준 등에서 의료 기록을 빼내서 짊어지고 오느라 늦게 선조에게 도착한 탓에 선조가 분노했다는 내용은 완전히 허구다. 다만 의서는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선조가 피난길에 오를때 병을 앓아 치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만 이때도 의서를 옮긴 이들은 허준이 아닌 하급 서리들이나 짐꾼들이 했지 허준이 한 것이 아니며 의서를 옮기는데도 결정을 내린 이는 허준이 아닌 당시 수의[14] 양예수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1596년에는 세자 광해군의 천연두를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차관급)에 제수되었다. 또한 이때 선조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 편찬 작업을 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의보감 편찬의 시작이었다. 허준을 비롯해 어의(御醫) 양예수, 이명원, 김응탁, 정예남 등과 민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의(儒醫) 정작 등 6인이 공동으로 동의보감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15] 그러나 정유재란의 발발로 1년 만에 작업이 중단됐다. 이후 1601년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동의보감을 단독으로 편찬하도록 하되 보다 시급한 의학책인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등 3종을 우선 편찬하라고 명했다. 또, 내장방서(內藏方書) 500권을 내줘 편찬에 고증할 수 있게 했다.

    1600년(선조 33년) 정2품 지중추부사를 겸직하던 수의 양예수가 병사함에 따라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진왜란 당시 어가 호종의 공로로 호성공신 3등에 오르게 되고 이때 의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대권으로 정1품 양평부원군에 제수되었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인해 종1품 양평군(陽平君)으로 강격되었다. 참고로 군(君)은 왕의 서자나 당상(堂上)의 위계에게 주어지는 부군(府君)의 관작을 말한다. 종1품상계인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고 1606년 왕실의 병을 다스린 공로로 다시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제수되었으나, 보국숭록대부는 당상관의 문관이 받는 위계라는 이유로 허준은 의관이므로 관례에 어긋난다고 또 한 번 대간들의 반대를 불러 백지화되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어야 된다는 여론이 강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무마시켰다.

    대간들이 허준을 질투하거나 멸시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허준에게만 이례적으로 특혜를 준 것이기 때문에 대간들의 반대가 유별난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품서용 원칙이 적용되는 잡과 급제자는 정3품 당하관이 승진의 끝인데 허준은 종1품에 제수되고 봉군까지 된 상황에서 정1품으로 진급한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잡과 응시자가 순수하게 잡직으로만 근무하며 정1품을 달성한 유일한 사례이다. 이처럼 허준에게만 특례가 적용된 것은 무엇보다도 선조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며, 재위 내내 유능한 신하들에 대한 심각한 의심병과 열등감 폭발에 시달려서 이순신의 공적을 깎아내리고 원균을 찬양할 정도로 멘탈이 막장이었던 선조의 항구적이고도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전시에 대통령의 목숨을 구한 대통령 주치의나 국립중앙의료원장에게 대통령이 삼부요인급 의전을 준다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수준으로 9급 공무원이 국무총리까지 승진하는 넘사벽 난이도의 문제조차 넘어서는 것이다.[16]

    당시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중인에서 정1품까지 출세한 허준의 입지전적인 출세 스토리는 화제가 되었다고 하며 백성들 사이에 계속 회자되면서 허준 설화가 전국 곳곳에서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런 허준과 관련한 설화 혹은 전설들이 우리가 아는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면서 어의인 허준은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사실 조선에서 왕이 사망하면 왕의 건강을 책임지던 어의가 형식적으로 귀양을 갔다가 곧 풀려나는 것이 관례였다.[17] 그래서 1609년 말 1년 정도의 귀양에서 풀려난 허준은 광해군의 어의가 되어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1999년도 작 허준 드라마에서는 선조가 사망하고 그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서 십수년을 귀양살이를 하며 그 기간동안 동의보감을 완성한 것으로 극화되었다. 실제 동의보감은 선조가 살아있던 1596년 선조의 왕명으로 편찬된 것이라서 허준이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도 아니었고, 편찬 과정에 당시 책임자는 태의[18]인 양예수였고, 그 외에 유의 정작(鄭碏)과 김응택, 이명원(李明源), 정예남 등과 함께 편찬하였으니 허준 혼자만의 공도 아니었지만 허준이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속출세하여 허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그가 동료들과 함께 편찬한 동의보감이 허준 개인이 편찬한 것으로 오인받는 요인이 되었다. 1999년작 드라마 허준에서 선조가 사망하고 십수년간 귀양살이를 한 것으로 묘사된 것도 선조때부터 기획하여 광해군이 등극하고 완료된 것을 포함한 것이다.

    사실 허준은 귀양살이에서는 귀양만 살았고 귀양에서 풀려나 삼의사의 수의로 복귀한 1610년 동의보감의 편찬을 완료하여 광해군에게 바친다.[19] 1596년 선조에게 첫 왕명을 받은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허준은 그동안 바쁜 공무로 인해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도 동의보감의 편찬을 끝내지 못했으나 선조 승하 이후 유배로 인해 시간적 여유가 생긴 허준은 이미 사망한 태의 양예수 외에 생존해 있던 유의 정작(鄭碏)과 김응택, 이명원(李明源), 정예남 등 다른 동료들과 동의보감 편찬에 몰두하여 편찬을 마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는 전란 직후라 출판 사정이 좋지 않아 동의보감은 편찬 완료 후 3년 뒤에나 출판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의보감은 당시에 출판된 조선과 중국의 확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서를 참고하고 여기에 내의원의 연구가 더해져 완성된 일종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출판되자마자 조선, 청나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지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마다 북경서점에서 동의보감이 팔리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다만 동의보감이 처음부터 허준이 단독으로 시작한 작업은 아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596년 선조의 명으로 당대의 여러 명의들과 공동으로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작업 초반 정유재란(1597년)의 발발로 작업이 중단됐다. 이후 1601년 선조가 다시 허준에게 따로 동의보감의 편찬 작업을 재개할 것을 명한 것이다. 동의보감 편찬은 공동 프로젝트로 시작하였고 여러 명의들이 왕실 서고와 민간에 떠돌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하여 제대로 된 것을 추려내고 자신들의 의학관과 경험을 첨가하여 작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의보감이 허준의 단독 작품인 것처럼 취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란으로 편찬 작업의 참가자들이 모두 흩어지며 초반에 중지됐던 작업을 이후 허준이 허준이 책임자로 임명되어 다른 명의들을 지휘하여 편찬 작업을 완료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초반에 중단되어 무산될뻔한 프로젝트가 허준을 책임자로 하여금 무사히 끝마칠 수 있게 됐으니 동의보감 편찬에 허준의 공이 제일 큰 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동의보감이 허준의 단독 저작물이라는 오해가 생긴 것이다.

    허준은 이후에도 각종 의서 편찬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해 의학자로서 나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15년 10월 9일 향년 76세로 사망하였고 생전에 보류되었던 정1품 양평부원군 보국숭록대부에도 추증되었는데 그동안 반대했던 대간들도 동의보감 편찬에 공을 세운 것을 인정하여 이때는 반대하지 않았다.

    동의보감과 다른 한 권을 제외하면 전부 전염병 관련 저작이다. 원작소설인 동의보감과 이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침술의 달인으로 곧잘 나오지만 실제로는 탕약 및 역병의 예방 및 치료가 주 분야였다. 동의보감 원작에서 삼적대사가 탕약 및 병의 예방 및 치료가 주 분야이다. 실제로 허준은 광해군의 두창을 탕약으로 치료한 공로로 선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20]

    실록에서도 허준 본인이 선조에게 직접 "소신은 침 놓는 법을 모르옵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한 기록도 있다.

    이 이르기를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허준(許浚)이 아뢰기를,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미안한 듯하기는 합니다마는, 침의(針醫)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熱氣)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小臣)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21]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經脈)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하였다.

    ㅡ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년) 9월 23일

    다만 그렇다고 해서 허준이 침술에 아주 문외한이란 뜻은 아니다. 당대에 침술은 조선에서 의관이라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는 기본 기술이었다. 침의가 따로 있으니 겸양의 의미일테고, 주 전공은 아니었던 것. 허준의 경우 기록을 종합해보면 주 전공은 약제 분야로 추정된다.

    환자를 직접 담당하는 주치의가 기본 진료 및 처방 방침을 정하면 외과 등 직접 시술을 맡은 전문의가 방침에 따른 시술을 진행하는 것처럼 어의 역시 직접 진료하는 의관이 치료 방법을 결정하고 이를 따라서 침의가 침을 놓는 형태이다. 굳이 현대 의학으로 비유하면 실력있는 내과 전문의가 외과 수술 실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22] 또한 당대의 어의들도 현대 의사들의 협진처럼 진료 및 치료 시술을 분담하였다.

    3. 기타[편집]


    • 허준이 해부할 시체가 부족해서 제자들을 해부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당연히 사실이 아니니 믿지 말자. 당장 허준은 임진왜란을 겪은 인물이고, 비록 근왕을 해서 직접 전화에 휩쓸리지는 않았다고 하나 역병이나 기아로 인해 시체를 접할 기회는 충분히 많았을 것이다. 또한 허준은 내의원 소속의 의관인 만큼 제자를 두었다면 당연히 주변에 소문이 퍼졌을 텐데, 그런 사람의 제자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면 당대에도 상당한 이슈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당연히 그에 관련된 기록은 없다. 무엇보다 조선 사회는 유교 사회이며, 학파로 당파가 갈릴 정도로 사제관계가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허준이 제자를, 그것도 해부 목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을 정도로 사실이었다면 현재 동의보감의 저자는 허준일 수가 없을 것이다.
    • 허준의 묘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 위치해 있다. 아쉽게도 이 곳은 민통선 지역이라서 방문하기는 쉽지 않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1991년에야 발견되었는데[23], 발견 당시에는 봉분과 석물이 묘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방치된 상태였으며 묘비도 두 동강이 났을 정도[24]로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허준 묘 발견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사. 다행히 묘비에 그의 묘임을 알리는 '허준', '양평군', '호성공신'이라는 표기가 남아있어서 허준의 묘로 판명될 수 있었다.
    • 허준의 직계 후손들은 대부분 북한에 남아 있어서 자세한 파악이 되어있지 않다. 나는 북한사람이다~
    • 2005년, 서울특별시 강서구 허준로에 허준 박물관을 개관하여 운영 중이다.
    • 2009년, 동의보감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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