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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당쟁의 전개과정과 류성룡의 행보/류을하 前안보전략연구위원, 서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역사/한국사 2023. 4. 1. 07:46
서애학회 월례세미나 발표문
미래인력연구원 회의실, 2020.6.27.
초기 당쟁의 전개과정과 류성룡의 행보
류을하 前안보전략연구위원, 서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목차
1. 서론: 서애 선생이 마주한 ‘슬픈 조선’
2. 여러 가지 붕당론
3. 초기 당쟁의 발단과 전개 양상
가. 동인과 서인의 근본적인 차이점(훈척의 잔재, 혼맥,연령,지역,지향점 등)
나. 김효원과 심의겸의 등장 및 갈등 배경
다. 초기 당쟁의 발단과 전개 양상-사건 중심으로
4. 초기 당쟁의 조정 실패와 악화 원인
가. 동서보합 역할을 자임한 이이의 한계(기본 조건·인식·포용력·친화력 등)
나. 정철과 이발 등의 개인적인 불화 및 정인홍의 과격성
다. 선조의 태생적인 약한 위상과 동서갈등 역이용 전략
라. 서애 선생과 후대의 당쟁 평가 기록들
5. 서애 선생의 행보와 이이와의 관계
가. 중립 표방 보다는 대결을 피해 고비마다 낙향하는 방법 선택
나.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 등 원인과 시비에 대한 인식이 이이와 상반
다. 개혁은 공감하나 독단과 급진적 추진 방식에는 반대
라. 이이의 기질과 역량에 대한 평가기록들
6. 이이의 양병 관련 주장과 논의의 전말
7. 맺음말
붙임: 당쟁 초기 주요 인물 기본정보(연령 순)
1. 서론: 서애 선생이 마주한 ‘슬픈 조선’
1392년에 건국된 조선은 고려와 달리 유교를 국시로 하는 이상 사회 건설에 매진하여 세종대에 와서는 문물이 만개하고 정치적인 안정도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1453년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정치 도의가 무너지고 연산군의 폭정으로 국고가 탕갈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나라가 크게 휘청거림으로써 회복 불능의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특히 수양대군의 쿠데타는 훈신과 외척이 발호하는 길을 열어놓아 양심적인 관료나 지식인들이 국정을 좌우하기는커녕 난정의 희생물로 전락하였다. 중종 때에 사림파 조광조가 혜성처럼 등장했지만 불과 4년 만에 국왕의 배신과 훈척의 음모로 순식간에 무너져 사림들에게는 ‘몸조심하라’는 깊은 트라우마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암흑기가 100년 이상 지속된 관계로 세습노비제나 공납제 개선과 같은 국리민복을 도모하기 보다는, 왕실이나 훈척 등 지배층이 앞장서서 백성들을 착취하는 데 급급함으로써 백성들이 살던 곳을 떠나 산속에 숨고 조세와 군역자원이 고갈되어 버렸다. 그리고 관곡을 훔쳐 먹는 일이 공공연할 정도로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으며, 명종 말기에 와서는 기본적인 국가 통계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라 전체가 문란하여 망국 직전의 ‘슬픈 조선’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선조 즉위를 계기로 조정을 장악한 사림파들이 ‘슬픈 조선’을 초래한 원흉인 훈척의 시대 종결을 제일의 과제로 여기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열망은 ‘기묘사화의 전철’이라는 ‘왕권의 오작동’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가운데 순조롭게 성취되지 못하고 당쟁이라는 새로운 소용돌이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서애 선생은 이러한 ‘슬픈 조선’에 태어나 ‘私만 있고 公은 없는’ 당쟁의 와류 속에 고뇌하는 公人으로 힘든 길을 걸어갔다.
< 중국과 대비되는 조선의 나쁜 제도 >
○ 세습 노비제: 고려 10% 미만→조선 중기 40%
○ 현물세 공납 제도: 전세의 2배 이상 비중, 방납의 적폐
< 집권층의 부도덕과 탐욕 >
○ 왕실의 침학: 본궁장리, 궁방절수, 호화 사치, 내수사의 횡포
○ 훈척의 발호: 공신책봉 남발, 외척과 공신 동맹, 부와 권력의 세습화
< 개국이후 명종 때까지 공신책봉 개요>
훈호책봉 사유책봉 인원1인당 포상 전지개국공신1392년 조선 건국 기여조준․배극렴 등 1-3등 44명220-70결정사공신1차 왕자의 난 유공이방의․ 조준 등 1-2등 29명200-150결좌명공신2차 왕자의 난 유공하륜․이숙번 등 1-4등 47명150-60결정난공신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 집권 유공정인지․ 한확 ․ 권람 ․ 한명회 등 1-3등 43명200-100결좌익공신세조 즉위 유공한확․권람․신숙주․한명회 등 1-3등 44명150-80결(좌명 공신과 동일 기준)적개공신세조시기 이시애의 반란 진압강순 ․ 어유소 ․ 남이 등1-3등 44명150-80결익대공신예종시기 남이 옥사 유공유자광 ․ 신숙주 ․ 한명회 ․ 신운․ 한계순 등 1-3등 37명150-80결(좌익 공신과 동일 기준)좌리공신성종 즉위 및 보필 유공신숙주 ․ 한명회 ․ 최항 ․ 홍윤성 등 1-4등 73명40-10결정국공신중종반정 유공유자광․ 신윤무․ 박영문 등1-4등 116명불상위사공신(보익공신)을사사화 주도 유공이기․ 정순붕 ․ 임백령 ․ 허자 ․ 윤원형 등 1-3등 32명150-80결계총 10회총 509명평균 100결(추산)< 양심적 관료와 지식인들의 수난 >
○ 계유정난(癸酉靖難): ‘癸酉靖亂’이 아닌 이유, 김종서와 하위지를 기린 류성룡
육신전 禁書 이야기(윤근수, 이이, 류성룡, 박계현)
○ 연산군 재위 12년: 신유공안, 진주 5만개, 쇄골표풍, 추비전패(追飛電牌)
○ 중종반정: 신유공안 유지, 궁방절수 관행화, 왕자녀 호화사치 극성
○ 4대 사화: 무오·갑자·기묘·을사
< 훈척 114년의 결과는 망국 직전의 모습 >
① 국가 기강의 전반적인 문란
② 백성들의 몰락과 이산
③ 국가 재정의 고갈
④ 국가안보체제 붕괴(군적 유명무실화, 방군 수포)
⑤ 사림의 원기 상실과 피해의식
< 이러한 국가 위기에 대한 기록들 >
○ 김일손(연산군일기 1-5-28) : 소릉 회복 요구, 왜적 침입 경고, 노비종모법
○ 호조판서 고형산(중종실록 9-10-25): “각사가 축낸 곡식이 5만 7천 5백 석 추징해 야”, 중종 “그렇게 한다면 3공 6경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만두라”
○ 부제학 최보한(중종실록 34-05-08): 편작과 화타도 포기한 병자 같은 나라
○ 이언적 (중종실록 36-04-02) 등: 왕실의 호화사치, 민생 파탄, 기강 문란
○ 조식(명종실록 10-11-19): “100년 나무를 벌레가 먹어 진액이 다 말랐다”
○ 단양군수 황준량(명종실록 12-05-07): 공납의 폐단 등 10개 민폐
○ 호조판서 유강(명종실록 21-10-12): 국가 비축 26만 석에 불과
○ 호조참판 류경심(선조실록 1-12-19): 풍저창 20만석 중 10만석 만 먹을 수 있다
○ 이황(연보 69세 3월) : “남북에 모두 분쟁의 조짐이 있고, 백성들은 살기에 쪼들리며 나라의 창고는 텅 비었사오니, 나라가 나라 꼴이 못 되어, 갑자기 사변이라도 생기면 토담처럼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흩어질 형세가 없지 아니하오니---”
○ 김성일(선조수정실록 6-11-1) : 기강 해이로 10년 못가 위망의 화가 닥칠 것
○ 이이(율곡전서 및 실록) :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其國非其國)’,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밀가루 없이 국수를 만들 수 있겠느냐(無麵不托)?’
※ 현대의 연구결과(김성우, 2001년, ‘조선 중기 국가와 사족’ 72-78쪽 및 156쪽)
“연산군 초반까지 확보되어 있었던 군자곡 100만석과 사섬시 면포 20만동이 중종 25년 (1531)에는 50만 석으로, 명종 6년(1551)에는 10만석과 6만동으로 줄어 반세기 만에 예비 곡식과 면포는 90%와 70%씩 각각 급감”
2. 여러 가지 붕당론
○ 공자의 제자들: ‘서로 도와 비행을 숨겨주는 것을 당(黨)이라고 한다(相助匿非曰黨)’
○ 구양수: ‘소인들은 僞朋일 뿐이고 군자들에게만 眞朋이 있다’(君子唯黨論)
○ 주자: ‘임금도 군자당에 끌어들여야’(引君爲黨說)
○ 송나라 호종유: ‘진정한 군자에게는 붕당이 있을 수 없다’ (君子無黨論)
○ 대명륭 간당조: “ 붕당을 결성하여 정치를 문란케 하는 자는 모두 참(斬)하며, 처 자는 종으로 삼고 재산은 관(官)에 몰수한다”
○ 옹정제: ‘구양수가 내 앞에 있다면 바로 죽여 세상을 미혹시킨 죄를 바로잡겠다’
○ 단종 즉위교서: “붕당을 결성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죄 주고 용서하지 않겠다”
○ 서애 선생: 붕은 公, 당은 私, 군자의 만남은 玉, 소인의 만남은 모래(比玉聚沙)
○ 퇴계 제자 월천 조목: ‘당(黨)은 문자상으로 흑(黑)을 숭상(尙黑)하는 것’
○ 율곡 이이: (선조에게) ‘구양수와 주자의 붕당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읽어보세요’
3. 초기 당쟁의 발단과 전개 양상
가. 동인과 서인의 근본적인 차이점
(1) 연려실기술의 기록(괘일록 인용)
① 동인은 모두 나이가 젊어 총명하고 민첩하며, 대부분 학행이 있고 명예와 절개로 스스로를 다듬는 사람들이 많았다.
② 서인은 비록 어진 사대부도 있었으나 이익을 탐내는 무리들이 그 가운데 섞여 있었으며, 그중에 박순ㆍ김계휘ㆍ홍성민ㆍ이해수ㆍ윤두수ㆍ윤근수ㆍ이산보 등 몇몇 사람은 나랏일을 같이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③ 동인은 예전을 본보기로 삼아 외척은 결코 등용해서는 안 된다 여겼고, 서인은, 심의겸이 공로가 많고 또한 선비인데 어찌 앞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여 버티고 따르지 않았다.
(2) 주요 서인들의 훈척 잔재
청송심씨 가문의 심의겸은 조선 개국공신 좌의정 심덕부의 7대손, 세종의 장인 심온의 6대손, 세종의 처남 영의정 심회의 5대손이다. 심의겸의 조부인 심연원도 명종 시기에 영의정에 올랐으나, 윤원형 등 악인들에게 휘말리지 않고 정도를 지켰고, 아버지 심강 또한 명종의 국구로서 처신에 흠이 없었다. 다만 심의겸의 경우는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지 5년이 못되어 당상관에 승진하여 외척이라는 신분의 혜택을 톡톡히 본 것이 문제였다.
심의겸이 축출한 그의 외삼촌 이량의 경우, 명종의 특별한 승진 배려가 있었지만, 급제 후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6년이 걸렸었다(친상 기간 2년 포함시 8년). 특히 심의겸과 동방급제한 정철의 경우는 처음부터 6품을 부여받는 장원을 했어도 심의겸이 1566년(명종21) 정3품 우부승지가 되었을 때, 정5품에 병조정랑에 머물렀으며, 김효원의 경우도 1565년(명종20) 장원급제했으나, 1574년(선조 7) 정5품 이조정랑에 오르기까지 9년이나 걸렸다. 따라서 심의겸의 이러한 특혜는 비난과 질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심의겸은 선조 즉위 후에도 대사간‧ 이조참의‧ 대사헌‧ 형조참판을 제수받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심의겸의 누이 인순왕후가 생존해 있는 점이 반영된 인사였겠지만 반발이 없지 않았다. 1573년(선조6) 8월 심의겸을 대사헌으로 제수하자 사간원 정언 정희적이 “외척에게 특지를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직언하였다가 선조가 “그 사람의 현능 여부에 달렸을 뿐이니 외척이 무슨 문제인가”라며 노여움을 나타냈다. 이에 정희적은 심의겸을 찾아가 “감히 영공(令公)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을 쓰는 사체를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사과했을 정도로 심의겸은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정희적은 이 일로 비루하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으며, 후일 서인들에 의해 좌천되는 불이익을 받고는 서인 공격에 앞장서게 되었다.
이이의 5대조 지돈녕부사 이명신은 심의겸의 6대조 심온의 동생인 심종의 사위였다. 심종은 태조의 2녀 경선공주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 하나만 두었으므로 덕수이씨들이 외손봉사하였다. 그래서 심씨들은 이이의 가문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였다. 이이의 재종조부인 이행과 이기는 이명신의 증손으로, 각각 중종과 명종 때에 정승에 오른 권세가였으며 특히 이기는 명종 시대에 악행으로 유명했다. 요절한 조부를 제외하고는 이이의 선대 대부분이 크고 작은 벼슬을 이어왔다.이에 따라 이이는 자신의 가문을 ‘대대로 국록을 먹어 온 집안’이라는 뜻의 ‘세록지가(世祿之家)’로 자처했다. 한편 이이의 할머니 남양 홍씨는 심의겸의 종조부인 심봉원과 이종사촌이었다. 이러한 가문간의 인연을 바탕으로 이이는 어려서부터 심봉원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심씨 집안사람들과 사귀었다. 심봉원이 죽자 묘지명을 지어주었으며, 심의겸의 아버지 심강의 제문을 짓기도 했다. 이이가 금강산 사찰에 입산수도한 경력 때문에 과거 응시 자격이 정지될 위기에 처하자 심의겸이 구해주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며, 이러한 도움으로 생원시에 합격하고도 성균관 문묘 참배가 유생들에 의해 가로막혔을 때에, 심의겸의 종조부 심통원이 참배가 가능하도록 풀어주었다.
이이의 집안은 뒤에 동서 당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심의겸의 집안과도 연고가 있었다.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의 할아버지는 심연원(沈連源, 1491-1558)이었고, 심연원에게는 심봉원(沈逢源, 1497-1574)·심통원(沈通源, 1499-?)의 두 아우가 있었는데, 이 중 심봉원은 이이의 할머니인 남양 홍씨의 종모제(從母弟)였다. 이 인연으로 이이는 어려서부터 심봉원의 집을 드나들면서 심씨 집안사람들과 사귀었다. 이이는 심봉원의 서재에 부친 「우송당기」(友松堂記)를 지어 주기도 했고, 그가 죽자 그의 묘지명을 짓기도 했다. 또, 심의겸의 아버지 심강(沈鋼, 1514-1567)의 제문을 짓기도 했다 이이는 동서의 당쟁이 문제 된 이후까지도 심의겸과 친교를 유지했는데, 이 때문에 이이는 동인들에 의해 심의겸을 편드는 사람으로 공격받기도 했다. 이이와 심의겸의 관계를 비난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송응개의 상소에 의하면, 이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도 예전에 승려 생활을 했었다는 이유로 성균관의 공자 사당에 참배할 수 없게 되자, 심통원이 주선하여 무마한 적이 있으며, 과거 급제 후에는 심의겸의 천거로 청요직에 발탁되었다고 한다.
서인의 최고 연장자인 박순도 심의겸의 가문에게 구명 받은 빚이 있는 경우이다. 그는 허엽과 함께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다. 1561년(명종16) 을사사화의 주역이자 위사공신 1등인 임백령의 시호 제정을 논의하는 회의에 홍문관 응교자격으로 참석, 임백령의 시호에 충성 ‘충(忠)’자를 사용하지 않아 곤경에 처하였다. 이는 '위사공신'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류(善類)를 해친 대가로 받은 가짜 훈공이라는 양심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으나, 임백령의 유족들이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을 찾아가 불만을 터트림으로써 문정왕후와 명종에게까지 ‘충(忠)’자를 사용하지 않은 사실이 알려져 박순은 극형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나 명종의 장인이자 심의겸의 아버지인 심강이 파직에 그치도록 건의하여 살아남았다. 이 때 홍문관 부응교 박근원도 박순과 같은 죄목의 위기에 처했으나, 박근원은 나중에 동인으로 자리 잡아 서인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는 서울 정릉동 자택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조‧ 성종 시대를 살았던 공신이자 좌의정인 김국광의 현손이다. 김계휘의 7대조 김구용의 질녀는 태종의 후궁 명빈(明嬪) 이었고, 고조부 김국광의 동생 김겸광의 증손자가 중종의 부마였다. 조부 김극뉴는 세종의 3남 의창군의 사위인 신우정의 사위였다. 이렇듯이 훈척 가문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김계휘는,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홍문관 참하관으로 근무할 당시에 윤원형이 그의 첩 정난정의 자식에게 벼슬길을 터주려는 목적으로 서얼허통을 주장하자 '불가하다'는 차자를 올려 허통을 막는가 하면,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기묘사화를 일으킨 심정의 간악한 사실들을 극론하여 회복된 관직을 다시 삭탈토록 하는 등 사림으로서의 면모를 나타냈다. 그런데 심의겸보다 9살 연장이었지만 집이 서로 붙어 있어 매우 정분이 두터웠다.그리고 장남 김장생을 13세 때에 구봉 송익필에게 데려가 입문도록 하고, 20세 때에는 율곡 이이에게 보내 배우도록 한 것으로 보아 이이‧ 송익필과도 일찌기 교분이 두터웠다. 정철과는 사돈관계였다.
정철의 경우, 고조부 정연이 고려 공양왕의 외손서이자 안평대군의 장인이었다. 정연의 묘소는 파주에 있다. 그리고 정철의 증조부 정자숙의 형인 정자제는 세종의 총애를 받은 이순몽의 사위이다. 정철의 큰 누나가 인종의 후궁(정귀인)이었고, 셋째 누나는 계림군 이유(월산대군의 손자)의 부인이었으며, 질녀는 선조의 후궁(정귀인)이 되었다. 이들 중 매부인 계림군 이유는 1545년 을사사화 당시 '대윤이 명종 대신 왕으로 옹립하려고 한 인물'이었다는 누명을 쓰고 소윤에 의해 참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 정유침은 7년간 유배생활을 했고, 맏형 정자는 유배 가던 도중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어린 정철은 누이들을 따라 궁궐에 자주 드나들며 왕자(후일의 명종)와 장난치며 친구가 되는 등 외척으로서의 호사를 누리다가, 일순간에 아버지와 함께 유배지에서 생활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1551년(명종 6) 유배가 풀리자 전라도 담양으로 이주했다. 이렇게 그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영화와 몰락의 비참함을 일찍 체득하였다.
1562년(명종17) 27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하자 명종은 매우 기뻐한 나머지 정철의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개가 급제하였다” 하고서 곧바로 술과 안주를 하사하여 잔치를 도왔다. 그러나 정철은 사헌부의 관원이 되었을 때, 명종의 청탁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강직함을 보여주었다. 당시에 명종의 종형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고자 서얼 처남을 죽이고 증거를 인멸하였다는 사건이 있었는데, 정철은 명종으로 부터 “우리 형이 장차 죽게 되었으니, 공은 너그러이 용서하기를 바란다”는 부탁을 받고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경양군 부자가 결국 옥중에서 죽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정철은 명종의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정철은 이이와 동갑이고 심의겸보다는 한 살 아래이다. 이이는 후일 선조에게 “정철은 충성과 청렴과 강직과 절개를 가지고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있으니, 비록 도량이 좁고 식견이 편협하여 고집스러운 병폐가 있긴 하지만 그 기개와 충절로 논하면 실로 '한 마리의 독수리'에 비할 수 있습니다"고 평했다. 이이는 정철의 누나 정귀인의 행장도 지어 주었다.
경상도 해평이 본관인 윤두수는 1558년(명종13)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후 홍문관 수찬과 정언 등을 거쳐 1563년(명종18)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이량이 자기의 아들 이정빈을 이조전랑으로 추천해 주도록 청탁하자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파직되었다가 이량이 심의겸 부자에 의해 제거되자 다시 기용됨으로써 심의겸과 더욱 가깝게 되었다. 이러한 친분관계는 동서분당 이후 4남 윤훤이 심의겸의 딸과 결혼하는 사돈관계로 발전했다. 윤두수의 부인 창원 황씨는 형조판서를 지낸 정백붕의 외손인데, 정백붕은 을사사화를 일으킨 정순붕의 형이다. 차남 윤양(윤흔으로 개명)은 월산대군의 현손인 양원도정(陽原都正, 정3품) 이혜의 딸과 결혼했다. 장남 윤방의 아들 윤신지는 후일 선조의 딸 정혜옹주와 결혼했다. 윤두수는 이황의 문인이었지만, 아들 넷은 모두 성혼 또는 이이의 문인이 되었다.
(3) 동인 주요 인사들의 특이한 혼맥
동인의 경우 좌장인 허엽의 손녀(허성의 딸)가 동서분당 이후 선조의 아들 의창군과 결혼한 이외에는 왕가와의 인척 관계가 눈에 띄지 않으나, 같은 동인들끼리의 혼맥은 일부이지만 보인다.
허엽은 우성전을 둘째 사위로 맞이하였다. 따라서 우성전은 허엽의 아들 3형제인 허성․ 허봉․ 허균의 매부이자 여류문인인 허난설헌의 형부가 된다. 우성전은 이황의 제자이자 류성룡의 친구였으며, 촉망받는 동인의 신예로 지목된 사람이다. 한편 허엽은 나중에 허균의 딸인 손녀가 이준경의 손자 이사성과 결혼함으로써 이준경과 사후 사돈관계가 되었다. 허균은 전처 안동김씨의 관계로 인해 이수광과 동서이다.
김효원은 동서분당 이후의 일이지만, 허엽의 막내아들 허균을 맏사위로, 허엽의 손녀(차남 허봉의 딸)를 맏며느리로 각각 맞이하여 허엽과 중혼(重婚) 관계였다.
이준경은 이순신을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중매하였다. 이발은 홍가신의 아들 홍절을 조카사위로 맞이하였고, 홍가신은 이순신과 사돈이 되었다. 박근원은 이발의 장인 박이의 조카이다.
(4) 지향점·연령·지역·학맥 등의 차이
동인과 서인들 공히 수양대군 이후 100년 이상 전개된 훈척시대를 청산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 그러나 심의겸을 사림으로 볼 것인지? 외척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온도차가 상당, 그리고 훈척의 잔재가 남은 서인들이 보다 권력 지향적이었다
주축 인물들의 연령적으로는 서인들이 동인들에 비해 6-10세 가량 선배이다.(이이는 서애 선생 보다 6살 위이다.)
지역적으로는 심의겸․ 성혼․ 이이․ 송익필과 한세대 위의 백인걸은 모두 파주가 고향이라는 지역적인 동질성을 갖고 있다. 이들 중 성혼․ 이이․ 송익필은 ‘파주 3걸’이라 했다. 심의겸은 파주에 농장을 갖고 있었으며 사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윤두수 또한 이량의 탄압으로 삭직된 후 동생 윤근수와 함께 파주에서 은거하였으며, 어머니는 파주의 임진강 건너편인 고향 장단에 살고 있었다. 정철의 경우 고향은 전라도 창평이지만 고조부의 묘소가 파주에 있고 먼저 죽은 아들 정기명을 고양에 와서 장사지냈으며, 본인의 초장지도 고양인 것으로 보아 파주와 고양에 연고가 있다. 요컨대 서인 핵심들은 파주 일대에 크고 작은 지역 기반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동인들은 특정 지역이나 학맥의 편중성이 없으며, 서인들의 경우 뚜렷한 스승이 있다기 보다는 독자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훈척시대의 청산이라는 시대적 명제를 놓고 여러 지역과 여러 학맥의 인사들이 구심체 없이 모인 집단이 동인들이며 다수파이다. 서인들은 처음에 이러한 동인들을 제외한 사람들 중에서 주로 심의겸과의 관계를 토대로 모여진 특이환 소수파에 불과하였다.동인과 서인을 동질적인 사림이라는 시각하에서 동서 당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합당하지 않다.
나. 심의겸과 김효원의 등장 및 갈등 배경
(1) 명종 말기, 심의겸이 초고속 승진과 권력 지향으로 동인들의 경계대상이 되다.
○ 심의겸, 마지막 외척간 대결인 외삼촌 이량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각광받다.(명종실록 21-1-21)
○ 심의겸, 등과 5년이 못 되어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외척 특혜라는 비난을 받다(명종실록 21-3-20, 21-10-9 22-1-5)
○ 심의겸, 외척이지만 대사헌이 되다.(선수실록 6-8-1,선조실록 7-2-28)
“정희적, 선조에게 외척에게 특지 내리는 것을 부당하다고 하다가 야단맞고 심의겸을 찾 아가 사과하다”(‘내가 영공을 비방한 것은 아닙니다’).
심의겸, 자파계 박점의 명천부사 발령에 반대하다가 선조로부터 면박
(2) 명종말-선조초, 김효원이 외척으로 인한 불이익 반복에 불만하다.
○ 김효원이 명종의 사돈 윤옥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다(명종실록 22-5-28)
○ 오건이 김효원을 후임 이조전랑으로 천거했다가 이조참의 심의겸의 반대로 불발(선조 5년 윤2월 경)---당시 심의겸은 38세, 김효원은 31세
김효원의 장인 정승계는 윤원형의 첩 정난정의 아버지인 정윤겸의 조카
심의겸, 오건의 김효원 이조전랑 보임 간청에 작심하고 수차 거부하다(율곡전서 11권, 書, 성호원에게 답함—1579, 선조 12)
“그 이야기는 소년 시절의 일이 아니오”(김계휘가 심의겸에게)
○ 김효원, 전임자 조정기의 천거로 마침내 이조전랑이 되다(선조 7)
다. 초기 당쟁의 시작과 전개 양상-사건 중심으로
(1) 선조 즉위 직후에 나타난 당쟁의 전조증상
○ 선조 2년, ‘을사삭훈’ 실패에 대한 이이의 불만(선조실록 즉위년-11-5, 2-9-25, 선수실록 3-11-1, 석담일기)
인순왕후, 명종 정권 부도덕성을 입증하는 을사삭훈에 반대 입장 표명하여 논의에 제동
홍문관 교리 이이 33세, 총 41회의 삭훈 상소로 논의 주도
영의정 이준경, “옳기는 하나 명종비가 살아 있어 시기 상조”
심의겸, 삭훈에 앞장서라는 요구에 “1천 명의 원종공신들이 동요하고 있다”며 거절
○ 선조 5년, 이준경의 ‘붕당 발생’ 경고와 이이 등의 과민반응(선수실록 2-6-1, 선조 실록 5-7-7, 선수실록 5-7-1, 연려실기술 제12권 ‘선조조 고사 본말, 이준경의 유차’, 동고유 고, 고산유고 5권 잡저)
이이, “이준경은 귀역, 구양수와 주자의 붕당론을 읽어보세요,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서애, “이준경의 주장이 틀리다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며, 처벌하자는 것은 부당”
상촌 신흠과 후일의 고산 윤선도 반응
(2) 선조 8년 부터 동서 분당의 시작과 서인들의 승리
○ 인순왕후의 사망으로 인한 권력 공백과 김효원의 심충겸 배척(1575년, 선조 8)
선조 8년(1575) 1월의 인순왕후 사망으로 권력 공백이 발생
김효원,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겨냥하여 이조전랑이 외척의 전유물이나?
○ 허엽, 대사간이 되어 사헌부와 함께 좌의정 박순 추고를 무리하게 추진하다(선수실록 8-7-1, 석담일기 하권 선조 8, 1575년)
재령에서 발생한 종이 주인을 죽인 사건 문제로 대신을 추고하자는 주장은 무리,
양사 관원 중 대사헌 김계휘와 사간원 정언 조원(정철의 사주)이 추고에 반대하여 갈등,
이에 따라 홍문관 부제학 이이는 김계휘와 조원을 제외한 양사 전원을 처치하려고 하였으 나,동인들의 반대로 조원만 남고 김계휘는 평안도 관찰사로 좌천(김계휘는 본의 아니게 불 이익 불이익을 받아 동인들에게 불만)
이이, 김계휘의 좌천이 이조참판 박근원과 이조전랑 허봉의 합작품인 것으로 보고, 박근원 의 사퇴와 공정한 이조전랑 충원, 김효원의 자발적인 외직 보임 등 3개항의 해결 방안을 신임 대사간 정지연에게 자문해 주었으며, 사간원의 논의는 이조 참판 이하를 모두 탄핵하 는 것으로 결론이 나, 김효원과 가까운 이성중과 허봉 등이 체직(정치보복 형태로 변질)
○ 박순 추고 논쟁 결과로 서인들이 승리하다
이이의 조정으로 심의겸은 개성유수, 김효원은 경원→부령→삼척부사
이이의 양사 처치와 함께 이 인사로 최초 결전에서 서인들이 승리하고 동인들은 불만,
서인 윤현과 조원이 이조전랑이 되어 인물을 멋대로 기용하고 동인들을 외직으로 축출
○ 선조 9년, 부친상을 마친 서애선생이 조정에 복귀하여 동인들을 쫓아낸 이조전랑을 체직시키고 잘못된 인사를 바로잡다(선수실록 9-3-1, 선조실록 9-3-3)
“류성룡을 헌납으로 삼았다. 전관(銓官)으로서 한쪽에 치우쳐 이론을 제기한 자를 논하여 외직으로 보임시켰다. 모두 탄핵하여 체직시킨 것이다(이때에 윤현‧ 조원 등이 전랑이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두 당(黨)이 원수처럼 서로 공격하였다. 당초 심의겸이 김효원을 비방하 자 김효원도 심의겸을 비난하여 각기 붕당이 나뉘었고 서로 알력하게 되었다. 김효원과 심 의겸이 모두 외직으로 나가 있었으나 심의겸 쪽이 김효원 쪽보다 나아서 김효원 쪽의 당하 (堂下) 문신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많이 배격되었다. 이성중은 김효원과의 교분 때문에 논핵을 받아 철산 군수에 제수되었고, 정희적ㆍ노준도 그렇게 되었다. 붕당이 나뉘어 서로 공격하는 것이 당나라 때의 우이(牛李)의 당과 같아서 사림의 조용하지 못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이 때 정언신도 외척 배제를 주장하다가 외직으로 쫓겨났다-필자)
○ 선조 10년, 김성일이 서장관으로 명나라 사행길에 율곡을 찾아가다(학봉연보, 선생 40세,선조 10)
○ 선조 11년, 이이가 선조에게 기묘사화와 같은 일이 없도록 경계하다(선수실록 11-5-1)
“ 기묘년 사이에 중종(中宗)께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매우 예리하시어 여러 어진 사람들이 떼를 지어 진출하였는데 그 속에 어찌 명예를 좋아하는 자가 없었겠습니까마는 대개는 나라를 위한 자가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참소하는 자들이 끝없는 무함으로 교묘하게 꾸며가지고 마침내 사류(士類)들을 일망타진하였습니다. 조광조는 죽음에 임하여 시를 짓기를 ‘임금 사랑하길 아버님 사랑하듯 저 하늘 저 태양은 이 마음 알리라’라고 하였는데 신이 이 시구를 욀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전하의 밝으심으로 반드시 간인들의 속임을 당하지 않으실 것이니 결코 기묘 사화같은 화는 없을 것입니다.
(3) 동인들의 서인 배제 움직임에 이이가 강력히 반발하다.
○ 선조 11년, ‘삼윤 뇌물수수 혐의 파직’으로 악화된 동서 당쟁(선수실록 11-10-1)
이이, (혐의를 제기한) “김성일은 ‘진실로 괴이한 귀신같은 무리”(석담일기)
대사간 김계휘, 휴가 중 급히 복귀하여 삼윤 무죄 주장하다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불만
○ 선조 12년, 이식·정희적 등, 선조에게 동서분당 시비 결과를 國是로 정하자고 하다(선수실 록 12-2-1,석담일기)---비슷한 시기 김우옹도 시비를 정하자고 건의
“상이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이에 사헌부가 상차하여 당시의 폐단을 논하였는데 동인 과 서인의 시비를 분변하여 비로소 심의겸을 소인이라 하고 정철과 김계휘를 사당(邪黨)이 라고 드러나게 배척하였다. 그러자 신진들의 논의가 다투어 일어났는데, 이식(대사헌) ㆍ홍혼(洪渾,집의)ㆍ정희적(鄭熙績,장령) 등이 대간이 되면서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여 국시 를 정해서 서인이 다시 조정에 들어오는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 이이, 동인 일각의 시비를 국시로 정하자는 주장에 반발하다(선수실록 12-5-1)
“을해년(1575년, 선조8)에는 서인이 진실로 잘못했으나 지금 동인의 잘못은 자못 을해년 보다도 더하니, 허물로 여기는 것을 본받는 것은 또한 너무나 심한 처사가 아닙니까?”
“연루의 형벌이 선류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 서애 선생, 선조에게 이이의 ‘수사연좌율’ 발언이 부적절하며 함양한 힘이 없다고 비판하다 (선조실록 12-06-08)
류성룡이 아뢰기를, “이이가 논한 것은 아주 옳지 않습니다. 대개 이이의 사람됨이 천품이
천품이 고매하고 글을 본 것 또한 많으니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함양한 힘이 없기 때문에 언론(言論)과 처사(處事)에 있어 경솔한 점이 많습니다. 지금 논한 것도 이 병 통으로 인연하여 망발한 것입니다.”
○ 이이, 백인걸의 상소를 대필해 주어 곤경에 처하다(선조실록 12-06-28)
○ 서애 선생, 이발과 함께 이이를 헐뜯는 대간들을 만류하다(‘석담일기’ 1579년,선조 12, 7월조)
○ 서애 선생, 김우옹에게 “이이가 분규 대처에 실수하였지만 여러 사람의 말을 들으면 고칠 것이며, 김효원은 외척에게 권세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니 큰 죄는 아니다”고 표명 (서애별집 3권 書 肅夫 김우옹에게 답함 1579, 선조 12)
(4) 동인들, 동료들의 연이은 불이익에 이이 및 정인홍에게 불만을 갖다
○ 선조 14년, 장령 정인홍이 대사간 이이와 협력하여 소문만으로 동인의 우성전과 이경중을 탄핵하다(선조실록 14-2-9, 14-2-1, 선수실록 14-3-1,14-7-1,)
“ 이이는 겸손한 마음으로 선을 좋아하여 (정인홍의) 소문을 듣고 그를 경모하다가 마침내 서로 가깝게 지내었는데, 그가 소인임을 몰랐다” (선수실록)
“ 이경중은 아름다운 선비 정여립을 배척했다”
“ 이경중은 성질이 탐닉하고 막힌 사람으로서 정인홍은 충성과 공론에 의해 그를 탄핵하였 으므로 이런 점을 이이가 류성룡에게 밝게 깨우쳐 주었다”(석담일기)
○ 이이, 특명으로 형조판서가 된 윤의중 배척으로 이발과 불화하다(선조실록 14-5-2)
윤의중에 대한 사관들의 평가
① “검토관 윤의중은 호남사람인데 마음가짐이 근공했고 몸가짐이 단정했다”
② (동부승지 임명시) “성품과 도량이 온아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
③ (대사간 임명시) “성품이 온순하고 단아하여 모든 사람이 사랑하였다”는 등
대사간이던 이이는 윤의중을 전체적으로 나쁜 인물로 평가하였다. 석담일기에서 “의중은 청반(淸班)에 오래 있어서 지위가 아경(亞卿 참판)까지 이르렀으나 자못 더럽게 탐하여 청 의(淸議)의 버림을 받았다”고 하면서 직접 탄핵에 나서려다, 성혼이 이이를 말리기 위해 ‘(자네는) 윤의중의 생질인 이발과 친하지 않느냐’고 환기시킨 데다, 대사헌 정지연이 이런 이이의 입장을 읽고 ‘내가 대신 앞장서겠다’고 하여 양사 합동 탄핵이 이루어 졌다.
○ 선조 15년, 이이가 이조판서가 되어 허봉에게 불이익을 주고, 인사 실권을 장악하려다 물 러나다(선수실록 15-1-1, 김장생 찬 ‘율곡가장’)
“이조판서가 ‘삼지(三旨)재상’이냐”--왕에게 나아가서는 “성지(聖旨)를 결정하소서.” 하고 왕이 가부를 결정하면 “성지를 알았습니다.” 하고, 물러나와서는 일을 품한 자에게 “이미 성지를 얻었다.”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삼지재상이라 하면서 비웃었다. 《송사》 왕규전 (王珪傳)
“허봉이 부친 문병가서 여색에 빠졌다는 이유로 직제학에 주의되는 것을 막다”
(5) 선조 16년, 이이 병조판서 임명을 계기로 서인들이 득세하고 동인들이 유배되다.
○ 여진족 침입에 대비하여 1월 22일 병조판서가 된 이이, 선조 독대 불발에 병조판서 사의를 표명하다(선조실록 16-윤02-15, 16-윤2-21)
○ 성혼이 병조판서 이이와 영의정 박순의 줄기찬 천거로 성혼이 이조참의에, 정철이 예조판 서에 각각 임명됨으로써 조정에 서인 진용이 갖추어졌다.
○ 선조, 성혼의 이이 구원 상소를 계기로 서인들을 확실히 지지하다.(선조실록 16-7-15,
선수실록 16-7-1)
선수실록, “성혼은 친구(송익필)의 편지 권유로 이 상소를 쓰게 되었으나, ‘당화에 빠지는 빌미’가 되었다”
○ 동강 김우옹은 중망있는 류성룡이 국론에 참여하지 못해 당쟁이 격화되었다고 하다.
(선조실록,16-7-19)
“경안 부령(慶安副令) 이요(李瑤)의 면대시의 말만 하더라도 그는 곧 류성룡(柳成龍) 등 4인 을 가리켜 전권(專權)을 한다고 하여 물리쳐 멀리하도록 하려 하였다는데, 성룡 등은 모두 청명(淸名)ㆍ아망(雅望)으로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로서 참으로 유악(帷幄) 의 보배로운 신하들입니다. 그런데 한번 요의 말이 나오자 사류들은 안절부절하고 성룡 등 은 모두 퇴축(退縮)하여 허물을 살피느라 감히 국론(國論)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이에 대한 사림들의 의혹은 더욱 깊어졌고 일 좋아하는 부조(浮躁)한 무리들은 이로 인해 함께 떠들고 일어나 비로소 공격할 뜻을 두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일 역시 어 찌 사류들의 본심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시작은 한둘 일 좋아하는 부조한 무리들에 의하 여 된 것인데 사류들이 모두 이이를 그르다고 여겼기 때문에 억제하지 못했던 것이며, 또 성룡 등이 이미 가고 없어 대각(臺閣)에 물론을 진정시킬 만한 중망(重望)의 인물이 없기 때문에 저들 멋대로 배격(排擊)하여 여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 정철의 주장으로 동인인 도승지 박근원·대사간 송응개·전한 허봉 등 3명이 유배되다(선조실 록 16-8-28)
○ 선조, 이이와 성혼의 당에 가입하고 싶다고 하다(선조실록 16-9-3)
“아아, 참으로 군자(君子)라면 당이 있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이 적을까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나도 주희(朱熹)의 말을 본받아 이이ㆍ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나를 이이ㆍ성혼의 당이라고 부르도록 하여라. 그래도 너희들은 다시 할 말이 있는가? 이이ㆍ성혼을 헐뜯는 자는 반드시 죄를 내리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이이,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정여립을 천거하다(선조실록 16-10-22)
“지금 인재가 적고 문사(文士) 중에는 쓸 만한 인물을 얻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정여립이 많이 배웠고 재주가 있는데 남을 업신여기는 병통이 비록 있기는 하지만 대현(大賢) 이하 로서야 전혀 병통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가 실로 쓸만한 인물인데 매번 의망(擬 望)을 하여도 낙점(落點)을 않으시니 혹시 무슨 참간(讒間)의 말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 선조 17년 1월 16일 이이의 병사를 계기로 서인들이 몰락하고, 5년간 이조판서 이산해 중 심의 동인들이 득세하다
* 선조의 이이 영의정 추숭 거부 및 교하 언송사건 매듭 지시
* 정여립의 이이 배신과 선조의 질책 후 낙향
* 심의겸 탄핵과 동서분당 시비의 확정으로 동인 승리
* 송일필 일가 환천
* 서익, 정여립의 말임을 빌려 서애 선생을 거간이라고 하다
○ 선조 22년 10월에 시작된 ‘기축옥사’로 서인 득세 후 금방 몰락하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 으로 갈라지다.
4. 초기 당쟁의 조정 실패와 악화 원인
가. 동서보합 역할을 자임한 이이의 한계(기본인식 차이,포용력, 리더십)
○ 이이, 동서 갈등 보합에 실패하고 낙향하다(선조실록 9-2-15, 석담일기)
선조, (박순에게) 그가 교격(矯激)스러운 것 같으니 인격이 성숙된 뒤에 쓰는 것도 해로울
것이 없겠다. 그리고 그가 나를 섬기려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의 뜻을 꺾을 수 있겠는가?”
이이, (김우옹에게) “김효원의 잘못이 먼저이다. 김효원이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국
사에 마음을 두었으며, 선배들을 배척하여 노성한 사람들이 모두 원한을 품게 했다. 그래서 내가 김효원을 억제하자고 주창한 것이다”
“류성룡·김우옹·이발이 요지에 모이게 되면 바로잡게 될 것이다.”
○ 이이·성혼, 심의겸과 분당 책임에 대한 견해차로 다투다.(율곡전서 제31권, 어록 上, 율곡 전서 제11권 書 성호원에게 답함 기묘년(1579, 선조12)
(이이가 제자 박여룡에게)
“당초의 발단에 대한 시비는 나(이이)와 같지 않다. 나는 동인을 그르다고 하고 우계(성혼) 는 서인을 그르다고 한다.”
“우계는 심의겸이 김효원의 청현(淸顯)을 억제한 것은 곧 사심(私心)이라고 여겼다---그러 나 우계로 하여금 동서 분당을 처리하게 한다면 반드시 나와 합치할 것이다”
(이이가 성혼에게)
“만약 불화를 맺은 한 가지 일로 말한다면 김효원에게 그른 것이 있습니다”
“심의겸은 김효원을 공격한 실상이 없으나, 김효원은 심의겸을 공격한 실상의 흔적이 있습니다”
“심의겸보다 못한 고관들이 많이 있음에도, 김효원은 그들 모두를 헐뜯지 않으면서 유독 심 의겸만 너무 심하게 공격하였습니다”
“형(성혼)은 이치를 정밀하게 살피지 못했습니다”
○ 이이, 의정에 추증된 이언적을 평가절하하다(석담일기 상권 1567년, 명종 22)
이언적(李彦迪)은 박학하며 글을 잘했고,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성리학서(性理 學書)를 즐겨 보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몸가짐을 장중히 하고 입에서는 못 쓸 말이 없었다. 저술을 많이 하였으며 깊이 정미한 경지에까지 나아갔으니 역시 도학군자(道學君 子)로 추존하였다. 다만 경세제민의 큰 재질과 입조(立朝)의 큰 절개는 없었다. 을사사화 때에 언적은 이면(裏面)으로 선비들을 구하기 위해 주선하고자 했다. 그러나 직언(直言)으 로 광구(匡救)하지 못하고 권간(權奸)들의 협박으로 추관(推官)이 되어 올바른 사람들을 신 문하여 공신이 되었다.
(후일 서애 선생의 반박---서애집 18권, 恭書答太學諸生疏御札後)
세상 사람들은 당시 권 충정공(權忠定公)이 죄망(罪網)에 걸려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논의를 폈는데도 회재가 말하지 않았던 것만을 보고서 회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태도가 부 족했던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충정공은 충정공이고 회재는 회재인데 어찌 꼭 같아야만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비간(比干)은 간하다가 죽었으므로 인자(仁者)가 되고, 미친 척했 던 기자(箕子)와 나라를 떠났던 미자(微子)는 인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인가?성인(聖人)이 이미 사어(史魚)의 화살처럼 곧은 점을 취했다고 해서 거백옥(蘧伯玉)의 군자다움을 버릴 수 있었겠는가? 현인군자는 마음가짐은 같아도 행적은 동일하지 않은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인을 추구할 뿐이니, 어찌 꼭 같아야 하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 회 재는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니, 지금에 와서 보면 충정이 말한 바는 작고 회재가 말한 바는 컸다고 하겠다.---예전에 이숙헌(李叔獻)이 일찍이 회재에 대해서 논한 말 중에 불만 스러워하는 뜻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나는 개인적으로 탄식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아무 일 도 벌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옛사람의 잘잘못을 따지기를 매우 쉽게 하는데, 자기에게 일이 닥치면 어찌 옛사람의 발꿈치에라도 미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정자(程子)는 문인들 이 앞 시대 사람들의 과실을 논하기 좋아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너희들은 우선 그의 장점 을 배우도록 하라.”라고 하였고, 또 “다른 사람에게 허물이 있을지라도 허물이 없는 쪽을 보려 해야지, 허물이 없는데 허물을 찾아내려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 이이, 석담일기에서 남명 조식을 평가 절하하다(석담일기 1572년 선조 5 석담일기의 성격 에 대해서는 최영성의 논문 참조)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니, 진실로 일대(一代)의 일민(逸 民 산림처사)이다. 다만 그의 논저(論著)를 보면 학문에 실제로 체득한 주견이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역시 경세제민의 방책은 못 되었다. 이로 보아 비록 그가 세상에 나와 일을 했다 하더라도 능히 치도(治道)를 성취시켰으리라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문인들 이 그를 추앙하여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까지 하는 것은 진실로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
○ 허엽, 이이와의 설전에서 연패하다(선수실록 7-2-1,석담일기 상권, 선조 8년)
“교민보더 양민이 먼저, 서경덕의 학문은 장횡거에서 나왔다”(이이)
향약의 전국 반포는 서애 선생이 예조판서일 때에 가서야 이루어져
○ 허엽의 아들 허봉, 사행길에 율곡으로 이이를 찾아가 친해지려 하다(하곡집 ‘조천기’ 상, 1574년 선조7, 5월 13일)
○ 이이, 허엽의 죽음과 관련한 추문을 석담일기에 남기다(1580년 선조 13, 2월조)
“경상도 감사로 있을 때 영천 군수(榮川郡守) 정인홍(鄭仁弘)이 정치를 밝게 다스렸으나 바치는 것이 풍성하지 못하다 하여, 허엽이 노하여 정인홍을 불러들여 《대전(大典)》을 강 (講)하게 하여 모욕을 주니, 정인홍이 벼슬을 버리고 갔다. 또 진주(晉州) 유생(儒生) 유종 지(柳宗智) 등이 수령의 잘잘못을 거론하기를 좋아한다 하여, 군사를 보내어 잡아다 가두 고 죄를 다스리니, 유종지 등은 착한 선비라 온 도가 놀라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뜻을 헤 아리지 못하였다. 전에 이이와 서로 두텁게 지내더니 동ㆍ서로 이의(異議)가 생긴 뒤에는 허엽이 동인의 종주(宗主)가 되어 의논이 괴벽하고 선비들을 시켜 이이를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사람들이 허엽을 묘지(卯地)라 하니, 묘지는 정동(正東)이니 동인의 종주가 된 것 을 조롱한 것이다. 평소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하더니 영남에 있으면서 음창(淫娼) 을 몹시 사랑하여 말하는대로 다 들어주니 열읍(列邑)의 뇌물이 창가(娼家)로 폭주하였고, 노상에서 기생과 가마를 같이 타고 가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가리켜 웃었다. 색으로 병을 얻어 체직된 뒤에 미처 상경하지 못하고 상주(尙州)에서 죽었다.”
나. 정철과 이발의 불화 및 정인홍의 과격성
○ 정철, 동인 배격 강경책을 견지하다(선수실록 9-2-1, 사계전서 9권 ‘송강행록’)
이이에게 “저들의 기세가 커진 것은 모두 숙헌이 두둔해서이다”
○ 정철, 심의겸과 함께 탄핵의 대상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다.(석담일기 1580년,
선조 13 8월조, 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동인의 용사)
“첨지중추부사 정철(鄭澈)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철은 시배들이 장세량(張世良)의 옥사(獄事)를 일으키자 마음으로 항상 불평하여 여러번 사색(辭色)에 나타내었고 또 술 마 시기를 좋아하여 취한 뒤에는 시배들의 단점을 많이 말하자, 시배들은 더욱 의심하였다. 하루는 이발(李潑)과 취중에 서로 꾸짖어 교분이 끊어졌다가 이에 이르러 시배들이 철(澈) 을 배척하니 귀향하게 된 것이다”
“두어 개 긴 수염 그대가 뽑아가니 / 數箇長髥君拉去
늙은이의 풍채가 문득 소조(蕭條)해졌네 / 老夫風彩便蕭條”
이에 정철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벧고 절교하다.
다. 선조의 태생적인 약한 위상과 동서 갈등 역이용 전략
○ 심의겸 가문에 의해 방계승통한 선조(초명이 李鈞이었으나 ‘날日’변의 순회세자 李暊(이부) 를 따라 李昖(이연)으로 개명, 결혼도 심의겸이 주선)
○ 당쟁을 타파하기보다는 시류에 따라 특정 당파에 편승하거나 견제하려는 전략을 구사하다 가 그것이 발전하여 조선 최대의 참살인 기축옥사를 초래, 선조의 변덕과 잔인성을 감지했 던 서애 선생의 우려가 현실화
라. 서애 선생과 후대의 당쟁 평가 기록들
서애 선생의 ‘운암잡록’
명종 말년에 이르러 권력 부리던 간신들이 제거되니 자못 정치를 새롭게 하려 하였다. 이에 산림에 숨어있던 선비들을 불러들여 조정에 벼슬하는 이가 많게 되니, 사림들이 즐거워하여 태평성대를 기대할 수 있다 하였다.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이 즉위하게 되어서는 더욱더 인재의 등용에 유념하게 되니, 그 당시 건의하는 자들은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겨서 초야에 버려진 현사가 없게 하는 아름다운 일로써 임금에게 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등용된 사람들은 대체로 말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는 이가 많으며, 그중에는 혹 선비라는 이름을 가탁하여 시속의 좋아하는 것만 따르는 자가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공도(公道)를 저버리고 당파를 위해서 죽는 폐습이 점차로 이루어지고, 직분을 지키고 임금을 받드는 의리는 점점 쇠퇴해져서 서로서로 부추기고 추천하여 당(黨)이 성한 자는 중요한 지위에 오르고 형세가 고립된 자는 낮은 벼슬에 억눌려 있게 되었다.
고(故) 상공 이준경(李浚慶)이 이것을 근심하여 고치고자 하였는데, 당시 사류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떼 지어 일어나 공격하여 착한 이를 미워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준경은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죽었다.
이때부터 조정은 둘로 나뉘어 당파의 화가 비로소 일어나더니, 이이(李珥)와 정철(鄭澈) 등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더욱 분열되었다. 사대부들이 나와서는 조정에서 논의하고, 들어가서는 집에서 꾀하는 짓이 오직 피차간에 이기고 지는 것, 같은 당파끼리는 두둔하고 다른 당파는 공격하는 것으로 일삼아 번갈아 승부가 갈리더니, 계미년(1583, 선조 16)ㆍ기축년(1589, 선조 22)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했다.
시험 삼아 여기에서 논평한다면, 명종 때에는 권신이 정권을 잡았으므로 폐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에 있었고, 금상 때에는 조신(朝臣)들이 당파를 만들었기 때문에 폐단이 권력의 분산에 있었다.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정사에 옳고 그름을 논하지 못하되 그래도 한군데로 귀착되는 것이 있지만, 분산되게 되면 시끄럽고 어지러워서 모양도 이룰 수가 없다. 그 밖에 또 틈을 타서 부정한 방법을 통하고, 어두운 곳을 의지하여 몰래 자기의 사욕을 이루는 무리가 세월이 갈수록 불어나 기강과 풍속이 크게 무너지게 된 것이다.
桐巢漫錄, 남하정이 분당의 일을 기록하다
당론은 심의겸 김효원에게서 처음 일어났는데, 그 처음에는 물이 졸졸 흘러 한 움큼의 흙으로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이 성혼에 의해 파도가 밀려왔고 정철 이산해에 의해 파도가 흘러 넘쳤으며---
구한말 사학자 안확(1886-1946년)의 ‘조선문명사’
“율곡 이이는 당시의 정세를 우려한 나머지 화합을 알선하는데 그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파의 세력은 도리어 율곡으로 인하여 강성해지게 되었으니 율곡은 조정한 게 아니라 당파를 더욱 발전시켰다고 하겠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율곡이 당을 당으로 인식하고 조정에 나서지 않고 시비를 시비로 인식하지 않고 타협을 모색하지 않음으로써 그 주선의 방책을 양당 이상의 세력이 있는 왕에게 중개하여 수단을 발휘한 까닭에, 심과 김 두 수령을 축출하고 外任에 제수하였다.”
5. 서애 선생의 행보와 이이와의 관계
가. 중립 표방보다는 대결을 피하고 고비마다 낙향하는 행보 선택
○ 서애 선생, 6월에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7월 부친상으로 낙향하다(선조 7년)
○ 서애 선생, 동향인 권춘란에게 동서 당쟁 조제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다(서애별집 권3, ‘권 언회에게 답함’, 언회는 권춘란의 자, 권춘란은 구봉령․ 이황의 문인, 1539-1617, 중종 34-광해군 9)
“만약 (동서 갈등을) 조제할 마음이 있다면 승부나 이해에 대한 집념을 먼저 버리고 성의를 다해 공도(公道)를 펴 조금의 사사로움도 없어진 다음에야 자연스럽게 인정이 감 동하여 화해 협력이 이루어질 가망이 있다.”
○ 경안령 이요, 선조에게 서애 선생과 김효원·이발·김응남 등을 ‘동변의 괴수’라고 비난하였 으며, 서애 선생은 조정에 있기 싫어 낙향하다.(선조실록 16-4-17,)
“류성룡ㆍ이발ㆍ김효원ㆍ김응남 등은 동변(東邊)의 괴수들로서 저희들 멋대로 하는 일들이 많으니 재억(裁抑)을 가하기 바랍니다”
양사, ”이요가 근거없는 말로 속여서 일망타진의 불씨를 만들려 하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선조, “이요가 아뢴 내용도 자못 일리가 있는 말들이었다. 하등의 죄를 내릴 이유가 없다”
○ 1584년(선조 17) 이이 사후 동인들이 득세한 시기에도 약 3년간 낙향(같은 기간 중 의주목 사 서익과 조헌 등 서인들이 ‘巨奸’이라고 하는 등 선생을 모함)
나. 동서 분당의 발단과 시비에 대한 상반된 인식
○ 이이는 ‘김효원의 잘못이 크나 분당 원인과 결과에 대한 서로 간의 시비는 가리지 말자’는 입장, 서애 선생은 ‘김효원이 외척에게 권세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논한 것에 불과하므로 심의겸의 잘못이 크며, 사사로움 없이 시비는 가리되 지나치게 대립하거나 결과에 대해 불 이익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
○ 실례로 선조 12년 서애 선생은 김우옹에게 “이이가 분규 대처에 실수하였지만 여러 사람 의 말을 들으면 고칠 것이며, 김효원은 외척에게 권세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니 큰 죄는 아니다”고 표명(서애별집 3권 書 肅夫 김우옹에게 답함 1579, 선조 12)
근래에 다투는 바는 본래 크게 다른 것은 없고, 그 사이에 완급에 대한 의견이 서로 합치 되지 않는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대개 숙헌(叔獻) 이이(李珥))의 처리한 것이 실수가 없지 않은 데에서 연유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무개(김계휘?)가 이치에 어긋나서 미워할 만하지만, 숙헌의 의논도 모두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이는 이치의 형세로 보아 저절로 그 렇게 되어서이지 어찌 배척하는 데 마음을 두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이제 사리를 공평하 게 보아 중도에 적합하게 하고 서로 참작하여 피차의 의견을 다 듣지 않고 도리어 일체를 붕당의 사사로움에 붙여 정당한 공론을 배격한다면, 본래 이런 마음이 없던 사람들이 자신 의 죄로 받아들여 아무 말이 없겠습니까. 나는 인심이 불안하고 의논이 서로 대립된다면 얼마 되지 않는 동지 가운데서도 형색이 저마다 달라서 가만히 앉아 남에게 어부지리를 줄까 염려됩니다. 이것은 바로 국가의 치란과 안위의 기틀로서 그 일이 매우 중요하니,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자다가도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나의 생각으로, 숙헌은 마 음이 본래 편벽되고 메마르지 않아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스스로 번연(翻然)히 고 칠 것이니, 어찌 남이 자기를 부족하다 한다고 격분하여 미혹한 고집으로 일을 그르칠 이 치가 있겠습니까. 이는 숙헌을 대우하는 방법이 못 됩니다. 하물며 아무개(김계휘?)는 이 미 지방관으로 제수되어 나갔으니 조정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응당 정론이 있었을 터인데, 지금에 와서 어찌 논의의 같고 다름을 추구하고 마음속의 피차를 따져 더욱 소요스럽게 만들겠습니까. 대개 수년간 이른 바 동서의 설(說)로 매우 안정되지 못했으나 그 시비는 분간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당초에 인백(仁伯 김효원)이 비록 지나친 점은 있었으나, 한 사람의 외척에게 권세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논한 데 불과하였으니, 큰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심의겸)는 이 때문에 원수를 맺었으니, 이는 좋지 못한 일입니다. 게다가, 여 러분들이 또 형적 없는 말을 믿고 서로 힘을 다하여 배척해서 사류(士類)에까지 파급시켜 국가의 원기를 상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다. 개혁은 공감하나 독단과 급진적 추진 방식에는 반대
(1) 급진개혁에 대한 선조의 거부감 확인
○ 선조, 성혼의 ‘혁폐도감’ 설치 주장에 역정을 내다(선수실록 14-4-1)
“온 나라의 제도를 모두 변경시키려 하니 참으로 지나치다. 한 선비를 불러오자마자 어쩌면 이토록 말이 많은가”
○ 서애 선생, 이이의 여러 주장 중 공안 개정에 동조하다.(선조실록 14-5-24일)
선조, “옛 법을 경솔히 변경하기 어렵다”
正供都監이 正貢都監이 아닌 이유?
○ 선조, 이이의 ‘경제사’ 설치 주장을 물리치다(선조실록 14-10-16)
“경제사를 설치하면 나중에 반드시 큰일이 생길 것이다. 정공도감도 실패하지 않았느냐?”
○ 서애선생, ‘무빙차자’에서 군사의 부족과 방납의 폐단 등을 적시, 내용이 아름다워 널리 전 송되다(선수실록 14-12-1, 서애별집 2권)
“군인의 수효는 날마다 줄어들어 隣保에 대한 위독이 (軍額日縮而隣保之毒) 물과 불보다 도 심하고 방납하는 무리들이 호랑이와 같다. 지금에 와서 변통되지 않는다면, 벌판이 타 들어가는 불꽃처럼 무서운 형세가 날로 심해져 나라의 근본이 쓰러질 것이다”
(2) 두 분의 갈등이 표출된 두 가지 사건
○ 서애 선생, 우찬성 이이의 개혁 추진에 돌발 변수를 경계하여 중지시키다.(선수실록 15-9-1
만전당집 ‘약서 류이현행적’)
“공이 옥당(홍문관)에 있어서 또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조종의 법이 비록 일시의 폐단이 있어도 경솔히 변할 수 없습니다”하여 말이 심히 과격하고 정당하였다.(홍가신)
“경장하는 것은 진실로 옳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재주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할까 염려될 뿐이다.” “법을 변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러나 이 일을 숙헌과 함께 할 수는 없노라”(서애)
“대개 숙헌은 성질이 소탈하여 말을 쉽게 하는데 사류들이 추허(推許)함이 지나침으로 공 은 다음 날에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 것을 미리 걱정했기 때문에 이 탄식을 발한 것 이었다”(홍가신)
○ 이이, 도승지이던 서애 선생의 의전 실수에 야유하다.(조헌의 주장)
황태자 탄생 축하조서 반포 황홍헌 왕경민, 선조가 어문 통과못하고 협문 통과 선조는 오 히려 서애 선생에게 금포를 벗어서 하사
라. 이이의 기질과 역량에 대한 평가 기록들
퇴계집 14권 서2, 이숙헌에게 답하다
다만 남보다 뛰어나게 앞선 자질이 강해(講解,논하고 풀이함)하기에 용이하다 보니 언론(言論)으로 드러난 것에 깊은 고민과 노력에서 말미암지 않는 것이 있고, 미루어 실행하는 데 나타나는 것에 간절하고 독실한 점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퇴계선생속집 제3권 서, 이숙헌에게 답함 1564, 명종19
“끝으로 다만 자중하며 날로 진보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연려실기술 12권 선조조 고사본말, 을사년의 원통함을 풀고 을사년의 위훈을 삭제하다
백인걸(白仁傑)이 매양 이준경을 보고 이이가 현인(賢人)이요, 또 재주는 쓸 만하다고 칭찬하였더니, 이때에 이이가 두 번이나 이준경의 말을 꺾으니, 이준경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백인걸에게 말하기를, “자네의 이이가 어찌 그리 경솔하게 말하는가.” 하였다.
선조 16년 7월 18일, 우의정 정지연이 이이의 탄핵으로 인한 조정의 의논을 조정하는 상소를 올리다
이이의 사람됨을 말하자면 뜻이 크고 재주가 민첩합니다. 그의 마음 또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려는 것이었지만 성품이 소탈하고 거친 데다 편견과 아집이 이미 드러났고 게다가 변경(變更)하기를 좋아하여 혼자에게 맡겨둔다면 일을 그르칠 염려가 없지 않기에 식자 사이에서는 그 점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연려실기술 제13권 선조조 고사본말 동인의 用事
상이 대사헌 구봉령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삼신이 이이를 거간(巨奸)이라 하였는데, 이가 과연 간특한가? 바른 대로 말하라.” 하였다. 대답하기를, “이이가 비록 간인(奸人)은 아니지만, 진실로 경솔한 사람입니다.스스로 자기 의견만을 옳다고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았으니 본심은 비록 나라를 그르치려 하지 않겠지만 나랏일을 맡아 하게 한다면 끝내는 그르치는 데 이르렀을 것입니다. 다만 문장에는 능합니다.” 하였으며 노수신은, “이이는 남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며, 다만 문장에 있어서는 힘을 들이지 않고 대책문에서 속담을 섞어가며 줄줄 나와서 막힘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자해필담(紫海筆談)》
선조실록 16년 7월 15일 성혼이 이이가 공박 받자 이이를 해명하는 상소를 올리다
그러나 그의 성취된 기질(氣質)이 그러하기 때문에 병통 또한 없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소통(疏通)했기 때문에 소탈한 병통이 있어 침착하고 치밀한 기풍이 적습니다. 그리고 그 성품이 결백하며 정직하고 오활한 만큼 진실하기 때문에 겉모양을 꾸민다거나 남의 뜻을 맞추려고 하는 태도는 전혀 없고, 뜻이 큰 만큼 미세한 일에는 소략하며, 스스로를 믿어 시속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자는 매우 적고 비웃는 자가 많으며, 그를 걱정하는 자는 적고 미워하는 자는 많습니다. 게다가 시론(時論)과도 맞지 아니하여 누차에 걸친 소장(疏章)으로 시폐(時弊)를 깊이 있게 논한 것이 현실과는 저촉되기 때문에 더욱 당시 사람들의 꺼리는 바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정철(鄭澈)을 쓸 만한 사람이라고 논천(論薦)했던 것이 더욱 중정(衆情)과 맞지 않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선조실록 16년 7월 18일 ‘사간 성낙 등이 이이를 탄핵한 이유를 아뢰며 대간의 출사를 청하다’
이이의 사람됨이 소통(疏通)한 듯하면서도 주견(主見)이 편협하고 고집스러워 시끄러움을 일으키기에는 과감하나 지중(持重)은 잘못하므로 모든 설시(設施)에 있어서 하는 일마다 물정(物情)과는 괴리되었습니다. 그 자신은 천하의 일이 담소(談笑) 사이에서 다 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에게 있는 역량이 이 세상을 담당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른 소치입니다. 그가 국사를 맡은 지 얼마 안 되어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모두 평소에 가지고 있던 마음을 상실하고 말았는데 오늘날의 이러한 논의가 있게 된 것도 모두 이이가 자취(自取)한 것입니다. 성혼은 그와 가장 친하기 때문에 그를 좋아만 하고 과실이 있음은 알지 못하여 글월을 올려 분소(分疏)하기에 이르렀고, 또 여러 모로 영구(營救)하여 조정을 안정되지 못하게 하고 사림을 스스로 위태롭게 만들었으며, 온 나라가 모두 인정하는 공론을 가지고 원한을 품었다거나 기관(機關)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돌렸습니다.
선조실록 16년 7월 19일 ‘대사성 김우옹이 대간의 이이 비판과 성혼의 상소를 논하면서 조정하는 상소를 올리다’
삼가 보건대 이이는 명민한 학문과 해박한 지식으로 밝은 시대를 만나 전하께서 마음 깊이 그를 의임(倚任)하여 그와 함께 난국을 타개해 보려 하였고, 이이 역시 스스로 세도(世道)를 책임져서 어수(魚水)의 사이같이 한 조당에 앉아 계책을 내면 실현되고 말만 하면 다 들어주시는 참으로 천년을 두고도 만나기 어려운 지우였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는 뜻만 컸지 재주가 소략하고, 도량이 얕고 소견이 편협하여 자기에게 후한 사람에게 가리우고, 또 자기 소견에만 얽매여서 일국의 공론을 모아 천하를 위한 일을 해내지 못하고, 다만 자기 개인의 견해를 내세워 온 나라의 인정을 거슬렸고 선비들에게 인심을 잃은 지 오래인데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빈번히 장주(章奏)를 올려 강변(强辨)으로 상대를 이기려고 하였으며, 하는 일들도 경솔하고 조급한 데가 있어 거의 인망(人望)에 부응하지 못하였으므로 선비들 마음이 비로소 이이에 대하여 실망을 느끼게 되었으니, 그것은 역시 어느 개인의 사론(私論)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이의 본심이야 무슨 딴 것이 있었겠습니까. 요컨대 조정을 안정시켜 시사(時事)를 목적대로 달성해 보려는 것이었지만 그의 의견에 편협된 바가 있어서 그 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사류(士類)들도 이이의 본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그의 의견의 편협함을 걱정한 나머지 서로의 가부(可否)를 맞추어 결국 화일(和一)된 곳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었을 뿐, 당초부터 그를 공격하는데 뜻을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하정의 ‘동소만록’, ‘율곡의 행적비판’(원재린 역주 ‘국역 동소만록’ 56쪽)
“율곡이 주장했던 자들은 훈척․ 세도 가문이었고, 심복과 이목으로 삼은 자는 우계(성혼)와 송강(정철) 등 약간의 무리였으며, 끌어들인 자는 정여립과 송익필의 무리뿐이었다. 이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정치를 하게 했다면 때에 맞는 정치를 펼쳐 후세에 해를 끼치지 않고, 넘어지고 뒤집혀져서 낭패 볼 지경에 이르지 않기를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석담일기의 특징과 한계(최영성의 ‘석담일기의 필법과 율곡의 경세사상’)
남계 박세채는 “율곡이 조남명을 너무 추허하고 기고봉을 너무 폄하한 점, 그리고 동고 이준경을 너무 공격한 점 이 세가지는 그것이 어떠한지를 잘모르겠다”고 한 바 있다. 율곡의 인물평 가운데 특히 기대승에 관해서는 시종 비판적이었다.보기에 따라서는 그 정도가 지나칠 정도였다.---기대승에 대한 비판의 화살은 기대승의 학문을 인정했던 퇴계에게까지 미쳤다. 율곡은 기대승의 성리학에 대한 조예마저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論心性情’이라는 글에서 “내가 깅릉에 있을 때 기명언이 퇴계와 사단칠정에 대해 논한 서한을 보았는데, 명언(기대승)의 말은 나의 의견과 꼭 합치된다”고 하여, 견해가 相符함을 우연으로 돌리고, 자신의 성리설이 기대승과 직접 관계가 있지 않음을 우연으로 돌리고자 했다. 더욱이 ‘答성호원서’에서는 “퇴계가 기명언과 사단칠정을 논한 것이 무려 만여 언이지만, 명언의 논리는 분명하고직절(直截)하여 그 형세가 대통을 쪼개는 것 같고, 퇴계는 변설이 비록 상세하나 이치가 밝지 않아, 반복 음미하여도 끝내 확실한 맛이 없다. 명언의 학식이 어찌 퇴계를 따를까마는, 다만 재주가 있어 우연히 이점에 대해 알게 되었을 뿐이다.”고 하여, ‘우연히’란 표현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기대승을 그저 ‘문학지사’ 정도로만 인정하고, 그의 성리학적 조예를 짐짓 과소평가 하려는 태도로 이해될 법하다. 선조시기 목릉성세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일세의 명유들에 대한 가혹할 정도의 비판은 실로 그 후손들이 보기에 민망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후세에 감계를 드리우고 시비를 단정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박하다는 지적이 나올 수 없다고 본다. 율곡 자신에 대해서는 관후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석담일기’에서 자기반성과 자아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기에 따라서는 율곡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모두 옳고 남은 부족하거나 그르다는 인식의 단서들이 적지 않게 포착된다. 이런 까닭에 포폄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이 나오게 되고, 남을 비방할 목적으로 저술한 謗書라는 비평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는 私情을 두지 않고 평했던 율곡이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했다는 것은 그의 史德을 의심케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동방의 춘추’라는 평에 손색이 있음은 후학들에게 아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율곡은 변통과 경장을 외치면서 淸流와 濁流, 淸議와 流俗을 엄히 가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붕당을 타파하고 사류들의 보합을 외쳤다. 이에 대해 “군자와 소인을 한 그릇에 담고는 조하를 꾀하려 한다”는 측근의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청류지사를 자처하였으며, 청의를 중시하였다. 여기서 淸名,청명을 숭상하는 선비란 곧 군자를 말한다. 군자와 소인을 엄히 분변하는 전통이 조선조 당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생각할 때, 청류와 탁류, 군자와 소인을 峻別하는 태도에서 독선적, 자존적 기풍이 묻어난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時運 탓으로 돌린데서도 엿볼 수 있다. 개혁은 노선이 같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반대파를 끌어안지 못하고 도리어 전선을 형성한 것은 전략상의 한계로 지적할 만하다. ---
비교적 호흡이 잘 맞았던 김우옹 같은 이도 율곡이 사업상(경세)의 말이 많고 심학상의 말이 적다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대저 이이의 생각은 적극적으로 일 벌이는데 급하여 무릇 건의를 함에 모름지기 실제의 일에 나아가서만 아뢰고, 임금이 修己하는데 나아가 친절하게 말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동강집 권 11 ‘경연일기’)
“이이는 재기가 고매하고 견해 또한 높다. 그러나 성품이 경솔하고 疏放(데면데면하고 방자함)하여, 책을 보고 뜻을 강론할 때 단지 대략 간과하여 문득 훑어보고는 다 알았다 하고, 다시금 침잠하고 사색함으로써 병통을 바로잡아 고치는 공부는 없었다. 그리고 자처함이 너무 높아 비록 선현일지라도 정자와 주자 이하는 모두 자기 아래에 두었으니, 비록 남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절차탁마하여 서로 깨우쳐 주는 유익함은 없다. 이러한 바탕을 세상에 나가서 쓰임에 경솔한 병통이 많았으니, 비록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관련되어 있는 것도 다만 한 때의 의견으로 정해버렸고,또 제도를 고치기에 과감하여 단지 천하 국가가 폐습이 누적되어 진작하지 못하기에 이른 것만 알았을 뿐이고, 제도를 고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멀리 염려하여 그 시종을 헤아린 뒤에야 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동강집, 권 14 경연강의)
그 사관을 보면 목적의식의 측면에서 도덕사관이고 경세사관이다. 성격상으로는 垂訓사관 도는 감계사관이라 할 수 있다. 포폄의 원칙에 따라 자료를 취사하여 사실을 기록하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도덕과 경세’에 관한 사실들을 모아 ‘속사비사(屬辭比事)’ 했다는 점에서 춘추사관을 기본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객관성을 유지하고 독자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사실을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자 하였다. 기록의 상세함은 석담일기의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60여개의 ‘근안(謹按)’이라는 사료를 통해 자신의 주관을 두드러지게 드러낸 것은 석담일기의 특징이자 한계이다. 더욱이 자신과 관계된 내용이 주를 이룬다는 것은 춘추필법과는 다른 점이다. 자신과 관계된 사실을 기록하면서 해명이나 변명을 하는 장으로 활용했다든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내렸다든지 하는 예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서, 후학들에게 의문시되기에 족하였다. 율곡의 적전으로서 율곡의 옹위에 앞장섰던 송시열 같은 이도 이에 대해 한 마디 해명을 하지 못한 것은, 율곡의 사필이 유가의 述史 전통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담일기에 보이는 율곡의 여러 언행들을 보면 손지원학(遜志願學)하는 기미가 적고, 자신을 높이고 남을 경시하는 측면이 엿보인다(정시한 우담집, 권4 여허태휴김사중).이러한 습성은 뒷날 율곡의 적전으로 일컬어지는 송시열 일파로 이어진다. 송시열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世道自任하는 율곡의 성격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6. 이이의 양병 관련 주장과 논의의 전말
○ 선조 12년,이이가 선조에게 양병의 계책이 있다고 상소하다.(선수실록 12-5-1)
요사이 사헌부의 상소는 감히 노골적인 배척을 시작하여 서인을 사당(邪黨)이라 하고 심의 겸을 소인이라 하니, 의논의 과격함이 여기에서 극도에 달하였습니다아,--- 오늘날 말해야 할 것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습니까. 군사를 양성하고 백성을 쉬게 하여 뜻하지 않은 환란 을 미리 대비하는 계책과 같은 일에 있어서는 신이 비록 초야에 있으면서 나라를 위하여 깊이 생각하여 어리석은 견해가 있기는 합니다마는 시용(時用)에 맞지 않는 오활하고 소루 한 계책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번독스럽게 진달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상소의 사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이이를 체직하라 명하였다.
○ 선조 16년, 여진족 침입 경보가 있자, 이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하면서 기발한 양병 계획을 수립토록 선조가 지시하다(선조실록 16-1-22),
○ 선조, 發兵하여 여진족 토벌하는 계획을 세우도록 하다(선조실록 16-2-10)
“이렇게 되면 비록 멀리 있는 오랑캐라 할지라도 의당 발병하여 토벌함으로써 일노(一怒) 의 위엄을 보여야 할 것인데, 더구나 이 성 밑의 울타리를 자처하는 적들이겠는가. 이제 만약 그들의 죄를 다스려 징계하지 않는다면 뒤에는 반드시 더욱더 그 흉악함을 드러낼 것이며, 다른 여러 번호들도 반드시 국위를 우습게 보아 무서워할 것이 없다고 여겨 모두 은혜를 배반하고 덤벼들 마음을 품을 것이니 앞날의 근심이 지금보다도 더할 것이다.”
○ 선조, 여진족 침입에 대처하는 계획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다(선조실록 16-2-14)
○ 병조판서 이이, 선조의 양병책 수립 요구에 ‘무면불탁(無麵不托)’이니 ‘선양민 후양병’이라 고 복명하다(선조실록 16-1-22, 16-2-14, 16-2-15,16-2-23)
“ 더구나 지금 경원의 적으로 말하면 1~2년만에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만약 병위를 한번 떨쳐 그들의 소굴을 소탕해 버리지 않는다면 육진은 평온을 누릴 기회가 영원 히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서둘러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길러 후일의 대책을 세우 지 아니하 고, 그때그때 미봉책만 쓰려 든다면 어찌 한 모퉁이에 있는 적만이 걱정거리이겠습니까.”
“첫째 현능(賢能)을 임용할 것, 둘째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셋째 재용(財用)을 풍족하게 만들 것, 냇째 번병(藩屛)을 튼튼하게 할 것, 다섯째 전마(戰馬)를 갖출 것, 여섯째 교화(敎 化)를 밝힐 것”
○ 선조, 승지에게 이이의 복명 내용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다(선조실록 16-2-23)
○ 서애 선생, 왕명으로 휴가 중 상경하여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는 ‘북변헌책의’를 밀봉하여 올리다.(서애연보 2월 조, 국역 서애집 ‘잡저’ 174쪽 )
“국경 방비 계획을 발표하지 않고 모두가 숨기니 외정의 신하로는 무슨 일이 이미 시행되 고 무슨 계책이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오랑캐는 짐승처럼 모였다가 새처럼 흩어지기 때문에 이들을 공격하는 것은 마치 그림자 를 치는 것과 같다”
○ 이이, 선조와 독대하여 공안의 개정과 군적의 정리 및 감사의 구임 등을 요청하다(선조실 록 16-윤02-24)
이이를 인견했을 때 아뢴 일이 무엇이었는지 정원(政院)이 취품(取稟)하니, 답하였다.
“ 공안(貢案) 태거 논의와 설국(設局)의 개정 건은 정2품 이상이 헌의(獻議)하여 결정할 것, 군적(軍籍)의 고헐(苦歇)을 균등하게 정하는 일을 기관을 설치하고 전임하여 처리하도록 할 것, 승전을 받들어 군현(郡縣)을 합병(合倂)할 것 등이었는데, 가볍게 처리할 것들이 아니어서 내가 다시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 이이, 선조와 독대하여 ‘억동부서’가 자신에 대한 동인들의 오해라고 주장한 다음, 공안 개 정이 불허되어 양병 계획을 포기하겠다고 피력하다.(선수실록 16-4-1, 선조실록 16-4-14)
선조, “이이의 요구사항 중 군적 개정은 이미 실시하기로 하였고, 공안 개정을 제외한 감 사의 구임과 주현의 통합 등은 시범적으로 실시토록 윤허하겠다.”
이이, “신의 당초 의도는, 군졸의 설치 목적이 어디까지나 방어에 있는 만큼 군졸이 공물 을 진상하는 역(役)을 감소시켜 전결(田結)에 이전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여유를 갖고 힘을 기르며 훈련에만 전념하여 위급함에 대비케 하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안을 고 치지 말도록 명하셨으니, 군적을 고치더라도 양병(養兵)하는 계책은 반드시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조정에서 상의하여 결정하면 되는 일일 뿐인데 안타깝습니다”
○ 김계휘의 아들 김장생, 정유재란 피난지에서 ‘율곡 가장’을 지으면서 ‘십만양병설’ 을 杜撰 하다
* 借重과 사건화 및 褒貶 기법 활용
* 위작을 세우고 진본은 축소·은폐하는 立假蔽眞, 定本 불가능과 단계적 진화 등 모순들
7. 요약 및 맺음말
‘슬픈 조선’을 초래케 한 훈척의 시대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사림들의 열망은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1565년(명종 20)에 사망한 것을 기점으로 표면화 되었지만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국면은 선배와 후배 간의 대결 양상으로 전개되어, 기대승과 이이는 이준경을 미워하고 이이는 기대승을 미워하였으며, 후배 동인들은 훈척적 요소가 남아있는 심의겸과 정철 및 이이 등 선배들을 불신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외척 심의겸에 대한 인식 차이로 더욱 틈이 벌어져 인순왕후가 죽은 1575년(선조 8)에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자 동서 분당으로 현실화되었다.
이에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이가 붕당 타파론을 전개하며 화해에 부심한 것은 당연하면서도 훌륭한 시도였다. 하지만 그는 심의겸 가문의 도움으로 발신하고 불가에 귀의했던 악조건을 가지고 있어 후배들을 설득하는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특히 이이는 당쟁의 단초인 김효원과 심의겸에 대한 시비 분별을 피하려 하였고, 동인과 서인간에 내재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간과한 나머지 ‘우리 모두가 같은 사림’이라고 자신의 논리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였지만, ‘위장 중립’ 또는 ‘억동부서(抑東扶西)’라는 냉소 속에 중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논쟁은 ‘시시비비’에서 ‘군자 소인’ 또는 ‘정의 사악’간의 대결로 악화되어 갔다.
게다가 참지 못하는 성격의 이이와 정인홍이 넘치는 정의감 또는 판단 착오를 바탕으로 의기투합한 끝에, 성급하게 타인들의 허물을 들추거나 불이익을 수차례 가해 후배들에게 독선적인 인상을 주고 피해의식을 갖도록 하였으며, 결국 적대 세력이 형성(허봉, 박근원, 송응개, 이성중, 이경중, 정희적, 우성전, 이발 등) 되는 등 조정의 인화(人和)가 파괴됨으로써 보합은커녕 국정개혁의 추동력 확보도 곤란한 지경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정철이 동인에 대해 강경책을 견지하는 가운데, 이이와 사이가 좋던 이발과 감정적으로 대립하여 불화하고, 이이가 선조에게 항상 정철을 ‘기개와 충절로 논하자면 한 마리의 독수리’라고 두둔하는 등 끼고돈 점도 악재로 작용하였다.
선조의 경우,
잠저에 있다가 16세에 뜻밖에 즉위한 직후에는 나이가 어린 데다 ‘방계승통’의 취약점이 있었고, 특히 자신을 즉위시키고 결혼까지 주선한 인순왕후와 심의겸 등 청송심씨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간들이 있었으며, 여색도 밝히느라 민감한 현안에 대해 우물쭈물하거나 관망하였다.
그리고 외삼촌 심의겸을 내쳐야 하는 부담 때문에 초기 당쟁의 시비를 가려주거나 ‘간당조’를 동원하여 엄벌하는 등의 타이밍을 놓쳤으며, 그 대신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심판자’ 역할을 함으로써 충성심 경쟁을 유발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이이와 같은 똑똑한 사류들에 대해서는 ‘과격하다’며 불편해 했으나, 이이가 정인홍 주도의 심의겸 탄핵에 동의한 이후에는 내심 고마워하면서 중용하였다가, 이이의 사후에는 영의정 추증 요구를 외면하고 그의 치부라 할 수 있는 ‘교하 언송사건’을 들추어내는 등 등을 돌려버렸다. 선조는 냉혹함을 감추었던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운 군주였다. 이러한 그의 본성은 수년 후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입는 기축옥사와 옥사에 이용한 정철 등 서인들을 곧 유배 보내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임란으로 그렇게 혼이 나고도 전시에 서애 선생이 취했던 개혁조치들을 원점으로 회귀시킨 사실 또한 그의 수구적 본성을 증명하고 있다.
서애 선생의 경우,
최초의 분당 시기에는 부친상으로 낙향해 있어 하등의 책임이 없고, 상경 후 중립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이이의 진정성을 믿고 어느 정도는 기대하였으며 경제정책 분야인 공안의 개정 주장에도 원론적 차원에서 동조하였다.
그러나 분당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에다, 공론을 주도한 이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과 경솔한 언행, 그리고 이경중과 우성전 및 윤의중의 연이은 탄핵 등을 지켜보면서 이이의 거침없는 직선적 행보를 불신·우려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변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혁 의지가 박약한 것으로 확인된 청년의 선조를 대상으로, 패거리를 지은 신하들이 치밀한 준비도 없이 당위론만으로 무장하여 여러 분야의 국가 개조를 한꺼번에 추진하는 것은, 기묘사화의 전례로 보아 머지않아 큰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판단하에, ‘이이에게는 함양한 힘이 없다’는 표현과 함께 국왕과 동료에게 신중한 대처를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인들로부터 ‘동인의 괴수’ 또는 ‘巨奸’이라는 참소를 당했지만, 대응하지 않고 낙향하는 것으로 거취를 정하였으며, 이러한 온건한 처신이 신임을 얻게 되어 다시 중용되고 급기야 임진왜란 극복의 중임을 걸머지게 되었다. 서애 선생의 행보는 강하거나 화려하지 않았고 목소리도 낮았으며, 때로는 겁쟁이처럼 우회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험한 당쟁의 와류에서 살아남아 나라를 지키게 된 것이다. ‘史記’에서 “참으로 곧은 길이란 굽어 보이는 법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서애 선생의 행보는 얼핏 굽어 보였지만, 그것은 바른 곳에 도착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붙임> 당쟁 초기 주요 인물 기본정보(연령 순)
성명생몰연도당색본관학맥 관작 및 기타서경덕1489-1546성종20-명종1당성독자적인 氣일원론 완성, 주기론의 선구자, 송도삼절백인걸1497-1579연산3-선조12수원조광조에게 직접 사사 ,공조참의,병조참판율곡과 동향인 파주 출신이준경1499-1572연산5-선조5광주병조판서,영의정유차를 통해 당쟁발생 예언‧경고이황1501-1570연산7-선조3진보이기이원론 주창 , 동방 유종단양군수,풍기군수,대사성,대제학조식1501-1572연산7-선조5창녕주기론,남명학파의 시조,이준경과 친교, 상서원판관홍섬1504-1585연산10-선조18남양영의정 홍언필의 아들,이조판서 대제학 영의정, 기자헌의 처조부홍담1509-1576중종4-선조9남양영의정 홍언필의 조카, 홍섬과 4촌 병조판서,오억령의 장인, 정철 등과 대립허엽1517-1580중종12-선조13동양천동부승지, 삼척부사, 부제학, 대사간동인의 좌장,허성‧허봉‧허균‧허난설헌의 부김귀영1520-1593중종15-선조26동상주을묘왜변 당시 이준경의 종사관,병조판서 좌의정,임해군 순화군 포로 인책 삭탈관직박순1523-1589중종18-선조22서충주서경덕의 문인, 영의정(15년간)서인의 원로, 정개청 입신 후원박근원1525-1584중종20-선조17동밀양대사헌(8회),도승지, 이이 탄핵으로 강계에 유배(계미삼찬), 동인의 원로김계휘1526-1582중종21-선조15서광산대사간,평안도 관찰사,예조참판김장생의 부, 정철과 사돈기대승1527-1572중종22-선조5행주주기론자 ,대사성,대사간,공조참의이황과 사단칠정 논쟁, 이이에게 영향최영경1529-1590중종24-선조23동화순조식의 문인,司畜, 기축옥사 당시 유령인물 길삼봉으로 무고되어 옥사신응시1532-1588서영월백인걸의 문인, 성혼 이이와 친분,예조참의 병조참지윤두수1533-1601중종28-선조34서해평이중호‧이황의 문인, 좌의정, 윤근수의 형, 윤방의 부, 심의겸과 사돈(4남 윤훤이 심의겸의 딸과 결혼)송익필1534-1599중종29-선조32서여산노비 출신 송사련의 아들, 이이 성혼의 친구,김장생의 스승, 서인의 모주성혼1535-1598중종30-선조31서창녕백인걸에게 사사,이조참판, 이이 송익필과 친구, 안방준의 스승심의겸1535-1587중종30-선조20서청송동서분당 원인제공자,명종비의 동생 대사간 이조참의 전주부윤, 윤두수와 사돈정인홍1535-1623중종30-인조1동서산조식의 수제자, 영의정,북인의 영수서애선생 탄핵 배후, 광해군 폐정 책임자이이1536-1584중종31-선조17서덕수서인(노론)의 종사, 이조판서 병조판서, 성혼 송익필의 친구, 국정개혁 주장정철1536-1593중종31-선조26서연일이이 성혼과 교유,좌의정, 기축옥사의主된 위관, 김계휘와 사돈이해수1536-1599서전의영의정 이탁의 아들, 정철과 친분으로 종성에 유배, 대사간 병조참의홍성민1536-1594서남양정철과의 친분으로 부령에 유배,예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송응개1536-1588중종31-선조21동은진송기수의 아들,홍문관 응교 대사간,이이 탄핵으로 회령에 유배(계미삼찬)김성일1538-1593중종33-선조26동의성이황의 제자,나주목사,홍문관 부제학,일본 통신사(부사),경상도 초유사이산해1539-1609중종34-광해1동한산동인의 영수→북인,이지함(토정)의 조카, 이덕형의 장인, 대사간, 영의정이성중1539-1593중종34-선조26동전주이중호․ 이황의 문인, 이경중의 형대사헌 호조판서송응형1539-1592중종34-선조25동은진송응개의 동생,사간원 정언 당시 ‘백인걸 상소 대필사건’ 관련 이이를 탄핵하다 파직김우옹1540-1603중종35-선조36동의성조식의 제자 겸 외손서,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동인이나 이이와도 친분,선조의 신임 돈독홍가신1541-1615중종36-광해7동남양민순(서경덕계)의 문인,형조판서,류성룡의 친구, 이몽학의 난 진압류성룡1542-1607중종37-선조40동풍산이황의 문인, 영의정, 임란극복 명재상, 청백리, 징비록 저자, 조선 후기 남인의 정치적 지주이경중1542-1584중종37-선조17동전주이항의 문인, 이성중의 동생, 정여립 배척으로 정인홍의 탄핵을 받아 파직이조좌랑 정언 수찬 교리김효원1542-1590중종37-선조23동선산조식 이황의 문인,심의겸과 대립한 동서분당의 주역,이조전랑 삼척부사우성전1542-1593중종37-선조26동단양이황 문인,수원현감 대사성,의병장, 류성룡의 친구, 허엽의 사위,남인거두이발1544-1589중종39-선조22동광산민순(서경덕계)의 문인, 이중호의 아들,이조정랑 부제학 대사간, 기축옥사 피화조헌1544-1592중종39-선조25서배천이이 성혼의 문인,공조좌랑 보은현감, 의병장, 서인의 돌격장정여립1546-1589명종1-선조22동동래서인→동인, 예조좌랑 수찬,이발과 친교, 대동계, 천하공물설, 모반의 주역김응남1546-1598명종1-선조31동원주병조판서(서애선생의 천거) 대사헌 좌의정,이산해의 매부,이길의 장인이원익1547-1634명종2-인조12동전주태종의 5세손, 영의정, 계미삼찬 때 승지로 있다가 파직, 서애선생 변호, 남인김장생1548-1631명종3-인조9서광산김계휘의 아들, 이이 송익필의 제자,이이의 사후 사돈, 율곡가장 찬술, 서인 재건의 주역허봉1551-1588명종6-선조21동양천허엽의 아들, 유희춘의 문인,이조좌랑 창원부사 전한,율곡 탄핵 유배(계미삼찬)선조 이균1552-1608명종7-선조41전주중종의 손자, 하성군→조선 14대 왕이항복1556-1618명종11-광해10서경주권율의 사위, 이덕형의 친구, 영의정, 자형 민선(기축옥사 때 대간)이 이이의 친구, 서인으로 분류되나 당색은 약한 편이덕형1561-1613명종16-광해5동광주이산해의 사위, 이준경과 10촌, 이항복의 친구, 병조판서 영의정, 서애선생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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