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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소재 노수신의 한시​
    한국한시 2023. 4. 1. 07:44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일시 ▪ 2022년 4월 2일(토) 13:30-18:00

    장소 ▪ 고려대학교 서관 315호 / 온라인 회의실(Zoom) 주최 ▪ 소재노수신선생학술문화진흥회⋅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개회 (13:30-13:40) 사회: 조지선(충남대)

    개회사 이동환(소재노수신선생학술문화진흥회 이사장)

    축 사 김용재(한국양명학회 회장)

    발표 (13:40-15:10) 사회: 조지선(충남대)

    제1발표 (13:40-14:10) 이종묵(서울대)

    소재 노수신 한시의 아름다움 1

    제2발표 (14:10-14:40) 최재목(영남대)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

    ―‘소재학(穌齋學)’ 규명을 위한 한 ‘방법’으로서― 13

    제3발표 (14:40-15:10) 신향림(고려대)

    穌齋 詩文에 나타난 奇의 미감에 대하여 35

    휴식 (15:10-15:30)

    발표 (15:30-16:30) 사회: 김기엽(고려대)

    제4발표 (15:30-16:00) 이남면(고려대)

    소재 오언율시의 표현 수법 49

    제5발표 (16:00-16:30) 노요한(고려대)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 63

    휴식 (16:30-16:40)

    종합토론 (16:40-17:50)

    한형조(한국학중앙연구원), 이상하(한국고전번역원), 김세정(충남대), 김용재(성신여대), 이국진(강원대)

    폐회 (17:50-18:00) 사회: 김기엽(고려대)

    폐회사 김세정(충남대 유학연구소 소장)

    발표

    ▪ 이종묵(서울대 국문학과) 소재 노수신 한시의 아름다움

    ▪ 최재목(영남대 철학과)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

    ▪ 신향림(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소재 시문에 나타난 奇의 미감에 대하여

    ▪ 이남면(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소재 오언율시 연구

    ▪ 노요한(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1

    【제1발표】

    소재 노수신 한시의 아름다움

    이종묵(서울대 국문학과)

    1.

    소재 노수신 한시의 미학이 무엇인가? 다음 한 편의 작품으로 웬만큼 설명이 될 것 같다. 무인년 범띠 해 봄이 완전히 저무는데 土虎春全暮

    오나라 소는 헐떡거림을 멈추지 않네. 吳牛喘未蘇

    막 우의정을 사직하고 初辭右議政

    바로 판중추에 나아갔네. 便就判中樞

    영예로운 은택 바다처럼 깊은데 睿澤深如海

    자애로운 은혜는 연유처럼 빛나네. 慈恩潤似酥

    탁주를 피하면 청주를 즐기지만 避賢仍樂聖

    노수신을 몇 년이나 머물게 할까? 能住幾年盧

    「우상에서 체직되어(遞右相)」(『소재집』 권6)

    노수신의 한시를 새롭다. ‘土虎’는 戊寅年(1578)인데 시어로 쓰인 용례는 전무하다. 黃虎와 같은 뜻인데 노수신

    의 시에서 “黃虎中商盡上旬”(「西郊道中」 권5)라 하였지만 다른 사람이 이런 시어를 사용한 예는 희소하다. ‘中商’도

    마찬가지다. 商은 계절로 가을이니 中商은 8월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무인년 8월 10일이라는 말이다. 또 “土虎春

    2 ∥ 소재 노수신 한시의 아름다움ᆞ이종묵

    全暮”는 무인년 3월 그믐이라는 뜻이다. 『선조실록』에 1578년 3월 24일에 우의정에서 체직된 기사가 보인다. 이

    처럼 잘 쓰이지 않는 낯선 시어를 쓰는 것이 노수신 시의 특징이거니와 동시에 시를 지어면서도 일기를 적 듯 정

    확한 날짜를 표기하는 것도 노수신 시를 낯설게 한다. 그리고 ‘吳牛’는 오 땅의 소다. 오 지역에서 생장한 물소는 더위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달을 보고도 해로 착각하

    고는 미리 놀라 헐떡인다고 하는 고사가 있다. 진(晉)의 만분(滿奮)이 바람을 두려워하여 유리병을 빈틈으로 착각

    하고는 난색을 짓자, 무제(武帝)가 이를 보고 비웃자, 만분이 “저는 오나라 소가 달을 보고도 헐떡이는 것과 같습

    니다.”라 한 고사가 있다. 오 땅은 중원(中原)의 동남방에 있으니 조선으로 치면 경상도다. “吳牛喘未蘇”는 경상도

    사람이 한양에서 여름이 가까워지자 천식으로 고생한다는 뜻이다. 이 해 3월 10일 우의정 사직을 청한 글(<右議政

    辭免> 권8)에서 1768년 부친상을 치른 후 담천(痰喘)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밤이 되면 새벽까지 기침이 멎지 않는

    다고 하소연한 바 있다. 이 구절은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시에 담았다. 함련에서 우의정을 사직하고 판중추(判中樞)에 임명되었다고 하였는데 「연보」에 따르면 3월 아홉 번 상소를 올

    린 끝에 사직이 윤허되고 판중추에 임명되었으니 이 역시 정확한 사실이다. 판중추부사는 종일품의 고위직이지만

    실직이 아닌 청직으로 실무를 보지 않는 자리다. 그래서 경련에서 ‘睿澤’, 곧 성은이 바다 같이 깊다고 한 것이고, 우의정에서 물러남으로써 ‘慈恩’, 곧 모친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쉽게 쓴 구절처럼 보이지만

    당 한유(韓愈)가 “도성 거리 가랑비에 연유처럼 빛나네(天街小雨潤如酥)”(「早春呈水部張十八員外」)를 응용한 것이기

    도 하다. 이를 이어 미련의 상구에서 ‘賢’을 피하고 ‘聖’을 즐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술 좋아하는 위(魏)의 서막(徐邈)이 금

    주령에도 술을 마시고 “내가 성인에게 맞았다(中聖人)”다고 하자 선우보(鮮于輔)가 조조(曹操)에게 “평일에 취객들

    이 청주를 성인이라 하고 탁주를 현인이라 하는데, 서막은 성품이 신중한 사람인데, 우연히 취해서 한 말일 뿐입

    니다.”라 한 고사를 끌어들였다. 두보(杜甫)의 “좌상은 날마다 주흥으로 만전을 허비하여, 큰 고래가 온 시냇물을

    다 마시듯 하고, 술 마실 땐 청주만 즐기고 탁주는 피한다 하네(左相日興費萬錢 飮如長鯨吸百川 銜杯樂聖稱避賢)”

    (「飮中八仙歌)」)을 응용한 구절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탁주는 벼슬로 치면 우의정과 같은 실직이고 청주는 판중추

    와 같은 청직을 비유한 것이다. “避賢仍樂聖”은 탁주는 피하고 청주를 즐기게 되었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실직을 피

    하고 청직을 맡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 선조가 자신을 오래 쉬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을 말했는데, 그의 말대로 이 해 11월 좌의정을 맡게 된다. “能住幾年盧”라 하는 산문적인 표현도 시에서는 무척

    낯설거니와 자신이 성 ‘盧’를 시어로 활용하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이렇게 새로움을 구현하였다.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에서 보이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

    는 기법을 한시가 어떻게 구사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노수신의 시는 시어가 새롭다. 새로움의 첫 번째 원천

    은 조선의 지명과 관명 등 고유명사를 즐겨 구사했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노수신의 한시를 가장 ‘조선적’이다. 그의 시는 중국인에게 고평을 받기는 쉽지 않다. 이 시기 제법 문명을 날린 작가가 중국 시선집에 뽑혔는데 노수

    신의 시는 언급된 바 없다. ‘右議政’, ‘判中樞’, ‘盧’ 이런 시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3

    2.

    당대 최고의 비평가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버들 어둑한 청파의 저녁, 날이 화창한 백악의 봄

    날.(柳暗靑坡晩 天晴白嶽春)”과 “길은 평구역에서 다했는데, 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지네.(路盡平丘驛 江深判事亭)”

    를 들고 “특히 좋다. 이는 노추(爐錘)의 묘함에 달려 있을 뿐이라 점철성금(點鐵成金)에 무슨 방해가 되랴?”라 하였

    다. 당시 조선 시단은 조선의 지명을 사용하면 우아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노수신은 이 금기를

    어기면서도 오히려 좋은 표현을 만들어내었다고 한 것이다. 허균이 이른 ‘노추’는 화로와 도가니로 금속을 제련하

    는 데 쓰는 도구고 ‘점철성금’은 도가(道家)에서 철광석을 제련하여 황금을 만드는 것을 이르는데 송(宋)의 황정견

    (黃庭堅)이 이를 문학론으로 변형하였다. 「홍구보에게 답하는 편지(答洪駒父書)」에서 문장을 잘 하는 사람은 만물

    을 도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진부한 말이라 하더라도 연단을 거쳐 황금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황정견

    은 ‘이속위아(以俗爲雅)’와 ‘이고위신(以故爲新)’을 창작방법으로 내세웠다. “비속한 것을 이용하여 우아하게 하고

    옛 것을 사용하여 새롭게 하는 것은 손자(孫子)와 오기(吳起)의 병법처럼 백전백승(百戰百勝)이다.”(「再次韻楊明叔小

    序」)라 하였다. 노수신은 이 이론을 조선에서 가장 잘 실천했다고 할 만하다. 허균이 칭찬한 시는 다음 작품이다. 길이 평구역에서 끝나자 路盡平丘驛

    강이 판사정에 깊구나. 江深判事亭

    올라보니 만고에 탁 트였기에 登臨萬古豁

    잠자리에 들었더니 새벽이 맑다. 枕席五更淸

    이슬 물가에 물고기와 새가 번득이고 露渚翻魚鳥

    금빛 물결에 달과 별이 일렁이네. 金波動月星

    남쪽 고향 보고 두 줄기 눈물이 말라도 南鄕雙淚盡

    북녘 대궐 향한 일편단심은 밝다네. 北闕寸心明

    「신씨의 정자에서 아우 무회를 그리워하며(愼氏亭懷無悔甫弟)」(권5)

    광나루 동쪽에 평구역(平丘驛)이 있었고 인근 한강에 판사정(判事亭) 혹은 신씨정(愼江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

    데 그곳에서 고향의 아우를 그리워하면서 쓴 작품이다. 육로로 평구역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배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쉬려고 판사정에 올랐다. 판사정에 올라 바라보니 천고의 세월에 아랑곳하지 않고 풍광이 공활한데, 판사정

    에 딸린 방에 누워 한 숨 자고나니 더욱 시원하다. 새벽 풍경은 더욱 아름답다. 서리가 하얗게 내린 강가에는 물새

    가 날아다니고 물고기가 뛰놀고 있으며, 새벽달이 별빛과 어우러져 강물이 금빛으로 일렁인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니 더욱 고향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지만, 자신을 알아준 임금을 저버릴 수 없어 벼슬길을 떠난다. 노수신의 시는 두보에 연원을 둔 것이 많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보는 「악양루에 올라(登岳陽樓)」에서 “전에 동정

    호에 대해 듣다가, 오늘에야 악양루에 올랐네. 오와 촉은 동남으로 터지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떠 있네. 친한

    벗은 소식 한 자 없는데, 늙고 병든 나는 외로운 배만 있네. 관산의 북쪽은 전마가 설쳐대니, 난간에 기대 눈물을

    쏟는다.(昔聞洞庭水 今上岳陽樓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戎馬關山北 憑軒涕泗流)”라 한 바 있

    다. 수련은 ‘동정수’과 ‘악양루’로 나란히 대를 맞춘 유수대(流水對)를 구사하여 상구와 하구가 하나의 문장으로 이

    4 ∥ 소재 노수신 한시의 아름다움ᆞ이종묵

    어지는 십자구(十字句)로 만들었다. 이어 함련에서 악양루에서 본 경(景)을 묘사한 다음, 이를 시인의 정(情)으로

    이어 벗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노쇠하고 외로운 신세를 한탄했다. 전란이 이어져 고향을 돌아가지 못하여 난간

    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는 시인의 모습이 작품 내부로 들어가 하나의 장면으로 종결하게 되어 있다. 두보의 동정호가 노수신의 시에서 판사정으로 거듭났다. 두보가 ‘오초’와 ‘건곤’ 같은 거대한 심상을 병치한 것

    과 달리 노수신은 ‘만고’와 ‘오경’이라는 시간을 병치하여 판사정의 ‘경’을 묘사하여 변화를 주되 시인의 호탕한 기

    세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함련에서 호탕한 ‘정’이 투영된 ‘경’을 경련에서 이어면서 환한 달빛에 물고기와

    새가 놀라 날아오르고 달빛이 비친 강물에 별이 흔들거리며 비치는 ‘경’을 미세하면서도 정치하게 묘사하였다. 이

    시는 모든 연이 다 대를 이루는 특이한 작품이지만 수련에서 십구자를 구사하여 변화를 주고 미련에서는 고향에

    계신 부모께 ‘효’를 다하지 못하여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대궐의 임금을 향한 ‘충’을 위해 길을 나선다고 대조

    의 구법을 구사하여 단조로움이 느껴지지 않게 하였다. 이 작품은 17세기 최고의 문장가 김창협(金昌協)은 “소재

    노인 시 중의 판사정을, 오늘 저녁 올라보니 마음이 아득하다.(盧老詩中判事亭 登臨此夕意冥冥)”(「同諸生登上江船至

    判事亭」

    『농암집』 권6)라 하였을 정도로 후세에 널리 알려졌다. 이 작품은 17세기 전후한 시기 활동한 시인 이춘영(李春英)의 「철령에서(鐵嶺)」(체소집 권상) “저녁에 은계역

    에서 자고, 아침에 철령에 올랐네. 어버이 생각에 양 귀밑머리 희어지고, 대궐이 그리워하여 작은 마음이 붉다네. 나그네 길은 세 물길로 이어지는데, 고향은 만 겹의 산에 막혀 있네. 충과 효의 뜻을 다하지 못하였는데, 길가에서

    이렇게 시들어가네.(暮宿銀溪驛 朝登鐵嶺關 思親雙鬢白 戀闕寸心丹 客路連三水 家鄕隔萬山 未應忠孝志 蕪沒半道間)”

    와 나란히 볼 만하다. 수련은 십자구에 ‘銀溪驛’과 ‘鐵嶺關’을 나란히 둔 것에서 노수신의 작품과 유사성이 있다. 더욱이 함련에서 효와 충을 병치한 것에서는 노수신의 시를 읽었음이 분명해진다. 송의 시인이요 비평가인 양만리(楊萬里)는 『성재시화(城齋詩話)』에서 ‘이속위아’를 두고 공문서에 사용하는 이문

    (吏文)을 시어로 구사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노수신은 조선의 고유명사를 잘 활용하여 새로움을 얻었다. 황정견이

    주장한 ‘이고위신’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르는 ‘혼성모방(pastiche)’과 흡사한 면모가 있다. 고전시학에서는 이

    를 ‘점화(點化)’라고 한다. 주로 기존의 시문을 자신의 작품 속에 끌어들여 개조하는 것으로 ‘점철성금’, 혹은 ‘환골

    탈태(換骨奪胎)’라는 도가의 용어를 빌린 것이다. 다만 무쇠를 황금으로 만들고 범인을 신선으로 탈바꿈하듯 새로

    움을 담지하여야 한다. 「우상에서 체직되어」에서 “避賢仍樂聖”가 두보의 “銜杯樂聖稱避賢”를 응용한 것이고, 「신씨

    의 정자에서 아우 무회를 그리워하며」의 수련이 두보의 「악양루에 올라」를 변형한 것임을 본 바 있다. 3.

    17세기 전후한 시기의 비평가 양경우(梁慶遇)는 『제호시화(霽湖詩話)』에서 “노소재의 오언율시는 두보의 시법과

    혹사하여, 한 글자 한 마디가 모두 두보에서 나왔다. 그의 ‘시와 서와 예는 배우지 못했으니, 사십구 년의 잘못이

    라(詩書禮學未 四十九年非)’라는 구절이 세상에 전송되는데 실로 두보의 시 「달을 노래하다(詠月)」 ‘나그네 시름 속

    에 보니, 스무네 번 달이 밝았네(羈栖愁裡見 二十四回明)’에서 나온 것이니 가히 모방한 것이 공교롭다 하겠다.”라

    한 바 있다. 이 구절의 전편은 다음과 같다.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5

    천지는 아스라이 먼 곳에 막혔는데 莽蕩乾坤阻

    목숨은 쓸쓸하게 가늘기만 하네. 蕭條性命微

    시와 서와 예는 배우지 못했으니 詩書禮學未

    삼십구 년 내 인생이 그릇되었네. 三十九年非

    이슬 젖은 국화에 궤안에 기대었다가 露菊憑烏几

    가을 풀벌레 소리에 대사립 닫아버렸네. 秋蟲掩竹扉

    이때 문생과 백생이 찾아왔다가 此時文白至

    세 밤 자고는 돌아간다 하는구나. 三宿乃言歸

    「백광훈과 문익세 두 서생과 작별하며(別白文二生)」(권4)

    노수신의 오언율시는 수련에서부터 대를 구사하는 것이 많은데 이 작품 역시 그러하다. 진도에 유배되어 있으니

    온 세상이 절연되어 있는데 목숨 줄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암담한 처지다. 아버지로부터 충분한 배우지 못하였

    기에 마흔이 가까운 세월 헛살았음을 깨닫는다. 가을을 맞아 국화가 피었으니 도연명(陶淵明)처럼 이슬 맞은 국화

    를 따서 술을 띄워 마시는 은일을 누려볼까 하지만 아직 유유자적하기에는 젊다. 가을 풀벌레 울음소리 들려 이렇

    게 또 한 해가 가니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문을 닫아버린다. 고립된 처지에 다행히 백광훈(白光勳)과 문익세(文

    益世) 두 제자가 찾아왔지만 아쉽게 사흘만 자고 돌아간다니 더욱 외롭다. 미련에서 담담하게 말을 하듯 시를 엮은

    것이 외로움을 배가하고 있다. 성을 시어로 쓴 것도 노수신이 좋아하는 작법이다. 이 시는 특히 함련의 대가 묘하다.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가 마당을 지날 때 공자가 시와 예를 배웠는지 묻자

    백어가 배우지 못했다고 하자 공자가 시를 배우지 못하면 남과 말을 할 수 없고 예를 배우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고 한 말이 『논어』에 보인다. 거백옥(蘧伯玉)이 나이 쉰이 되어서 49년 동안의 잘못을 알았다는 『회남

    자』의 고사를 끌어들여 여기에 짝을 맞추었다. 후대의 시선집이나 시화서에서 “三十九年非”가 “四十九年非”로 바꾼

    것은 이 고사를 좀 더 정밀하게 하고자 한 뜻이지만, 이 시가 39세 때 지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1547년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로 옮겨진 지 15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거백옥이 쉰에 잘못을 알았지만 자신은 아직 쉰이 되지

    않았지만 벌써 인생을 잘못 살았음을 알았다는 뜻이다. 전고를 잘못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맞게 변용

    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이 두 구절은 대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보의 시에 연원을 두고 있는 특이한

    방식이다. 노수신의 시에 이러한 대가 가끔 보이는 것이 두보의 시를 많이 읽고 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지니 도가 없어졌고 天頹道喪矣

    나무가 늙으니 사람이 돌아가네. 木老人歸哉

    짧은 햇살에 찬 바람소리 울리는데 短景鳴寒籟

    봄바람에 낡은 누대가 서 있네. 春風立古臺

    어버이는 어진 마을에 접해있고 有親仁里接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 하나 없네. 無友遠方來

    누가 알리오, 지금의 소무(蘇武)가 誰識今蘇武

    전신이 바로 노래자(老萊子)임을. 前身是老萊

    「용탄 선생의 시에 화답하다(和龍灘先生韻)」(『국조시산』 권4)

    6 ∥ 소재 노수신 한시의 아름다움ᆞ이종묵

    이 작품은 「용탄 선생의 운을 기억하여 화답해서 장극업에게 주다(記和龍灘先生韻贈張克業)」로 되어 있고 몇 곳

    표현이 다르게 되어 있지만 『국조시산』에 실린 것이 더 노수신 시의 특질을 더 잘 보여주기에 이것을 보인다. 1565년 기나긴 진도 유배에서 풀려나 괴산(槐山)에 이배되었을 때의 작품이다. 천하에 도가 상실하고 인생은 늙어

    가기에 인생의 비감만 더한다. 어버이는 괴산과 가까운 상주에 있는데 절친한 벗은 안부를 묻는 이 없다. 19년 흉

    노(匈奴)에서 구금 생활을 하던 소무(蘇武)처럼 자신도 진도에서 19년 유배를 살았다. 이제 늙어버린 몸이지만 일

    흔의 나이에 색동옷을 입고 부모 앞에 춤을 춘 노래자(老萊子)가 되겠노라 하였다. 네 연 모두 대구를 하였는데 노

    수신의 시에서 이러한 것이 드물지 않다.

    ‘이고위신’과 관련하여 이 작품은 먼저 수련에서 허자(虛字)의 사용이 주목된다. 허자를 통해 수련부터 대를 하

    였다. 한시에서 허자를 사용하는 문제는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나대경(羅大經)의 『학림옥로

    (鶴林玉露)』를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시에서 조사를 사용하는 것은 두보의 ‘고인은 가버렸다 하는데, 내 도는

    종언을 고했네.(古人稱逝矣 吾道卜終焉)’(「寄岳州賈司馬六丈巴州嚴八使君兩閣老五十韻」), 황정견이 이른 ‘또한 그렇

    게 시 지으면 그뿐, 터득하는 것은 스스로 안다네.(且然聊爾耳 得也自知之)’(「德孺五丈和之字詩韻難而愈工輒復和成可

    發一笑」)와 한구(韓駒)가 이른 ‘굽은 난간 이남에 푸른 봉우리 합쳐지고, 높은 당 그 위에는 흰 구름이 깊구나.(曲檻

    以南靑嶂合 高堂其上白雲深)’(「游定林寺」)와 같은 것은 모두 혼연히 잘 어울린다고 할 만하다.”라 하고, 이어 “내 생

    각에 이러한 구법을 후학이 본뜨면 고니를 새기려는 놀림을 받게 될까 우려되니 잘못이 이미 많다고 하겠다.”라

    비판한 바 있다. 이를 보면 노수신의 시 수련이 두보, 황정견, 한구 등의 시법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련도 『논어』를 이용한 ‘이고위신’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문자에서 경전의 용어

    를 사용하는 것도 또 하나의 병이다. 두보가 ‘먼 곳에 가고 싶지만 막힐까 겁나네(致遠宜恐泥)’라 하였는데 소동파

    가 이 시를 베끼다가 이 구절에 이르러 이 시는 법으로 삼기 부족하다고 하였다.”라는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인

    용한 바 있다. 두보의 시는 『논어』에서 “비록 작은 도라 하더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지만, 먼 곳에 가려다

    얽매여버릴까 걱정하여 군자가 하지 않는 것이다.”라 한 것을 이용한 것이다. 소동파(蘇東坡)와 주자(朱子) 모두 반

    대하여 경전의 말을 시어로 사용하는 것이 잘못이라 하였지만 노수신은 그런 말에 구애되지 않았다. 김득신(金得

    臣)의 『종남총지(終南叢志)』에 따르면 노수신은 두보의 시와 함께 『논어』를 2천 번 읽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논

    어』를 ‘이고위신’의 대상으로 삼았고, 또 두보의 시에서 그러한 전범을 찾았다. 노수신의 이 구절은 『논어』 “인을

    이웃하면 아름답다(里仁爲美)”, “벗이 먼 곳에서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 한 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고위신’을 이렇게 실천한 것이다. 4.

    「우상에서 체직되어」의 수련은 작품의 제작 시기를 정확하게 드러낸 점이 독특하다고 하였거니와, 이 점에서

    노수신의 시는 기실(紀實)의 시학이라 할 만하다. 해와 달이 나란히 진(辰)에 이른 때 歲月幷臨辰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7

    비조의 영정을 옮겨 봉안하게 되었네. 移安鼻祖眞

    단문복을 입는 친척 불러 모아서 招要袒免服

    열세 명이 차례를 따라 절을 한다. 序拜十三人

    버들 어둑한 청파의 저녁 柳暗靑坡晩

    날이 화창한 백악의 봄날. 天晴白嶽春

    뉘 알랴, 종족의 계모임이 誰知修禊事

    친척과의 우애를 권하는 뜻임을. 所以勸親親

    「모여서 의정공의 영정을 알현하고 집으로 옮기면서(會謁議政影幀 移安于家)」(권5)

    청파동에 있던 노수신의 8대조 상촌(桑村) 노숭(盧嵩)의 영정을 백악 기슭 자신의 집으로 옮기면서 쓴 작품이다. 수련에서 해와 달이 ‘진(辰)’이 나란하다고 한 것은 연간지와 월간지에 ‘진’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해가 무진년

    (戊辰年, 1568)이고 ‘진’이 들어가는 월간지는 3월이다. 무진년 3월 지었음을 시에서 분명히 밝힌 것이다. 18세기

    문인 정간(鄭榦)이 “음과 양이 막 결단하는 3월, 해와 달이 나란히 진을 아우르네(陰陽方受夬 歲月竝臨辰)”「李友又

    賦人字, 恨不踏草熏蘭, 乃反其意以慰之」, 『명고집』 권2)라 하였으니 노수신의 이 표현을 응용한 것이라 하겠다. 함련과 경련도 사실을 분명하게 적었다. ‘단문복(袒免服)’과 ‘십삼인(十三人)’의 대가 기이하다. 단문은 5대조의

    이상일 때 상복을 입지 않고 웃옷을 벗고 머리에 두건만 착용하는 것을 이른다. 또 영정을 옮겨 봉안할 때 참석한

    노숭의 직손이 13인이라 한 것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경련도 사실로 보인다. 청파동 같은 집안사람의 집에 영

    정을 봉안하였는데 이를 백악에 있는 노수신 자신의 집으로 옮겼다는 말이다. 미련에서는 이를 이어 『예기』에서

    이른 친친(親親)의 도리를 강조하는 것으로 시상을 종결하였다. “사람의 도는 친척을 친히 하는 것이니, 친척을 친

    히 하기 때문에 시조를 존중하고, 시조를 존중하기 때문에 종족을 공경하며, 종족을 공경하기 때문에 종족을 모아

    단결하고, 종족을 모아 단결하기 때문에 종묘가 장엄해진다.”는 구절을 압축한 것이다. 묘호에 심덕을 온전하게 표하고 廟表全心德

    능호에 백행의 근원을 더하였네. 陵加百行源

    의상은 뵈지 않은 것을 도모하고 衣裳圖不見

    사직은 말을 하지 않으려 하였네. 社稷欲無言

    하늘은 한 해 수명조차 아꼈으니 天靳逾年壽

    사람은 만고의 원한을 품게 되었네. 人含萬古冤

    세자시강원의 옛 관료들 중에서 春坊舊僚屬

    오직 우사서만 남아 있을 뿐이라. 唯有右司存

    「효릉의 단오제(孝陵端午祭)」(권6)

    수련은 인종의 묘호(廟號)와 능호(陵號)를 풀이한 것이다. “효와 공경은 인의 근본이다.(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라 한 『논어』를 바탕으로 하고 『근사록(近思錄)』에서 “인은 하늘의 이치가 공변된 것이요, 마음의 덕이 온전한 것

    이다(仁者天理之公, 心德之全也).”라 한 것을 연결하여 인종(仁宗)이 어진 임금임을 말하였다. 또 당 현종(玄宗)이

    8 ∥ 소재 노수신 한시의 아름다움ᆞ이종묵

    『효경(孝經)』에 붙인 서문에는 효를 ‘백행의 근원(百行之源)’이라 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인종의 능호 효릉(孝陵)에

    호응하도록 한 것이며 인종이 효심이 깊었음을 드러내었다. 인종의 평생 행적을 이 한 연에 담았다. 『인종실록』에

    붙어 있는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지은 장편의 지문(誌文)에 “요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뿐이다.”라 한 인종의 말

    을 들고 효심을 찬양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했다. 노수신은 사실의 핵심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데 능하였다. 이때 전고의 사용이 적확해야 한다. 수련은 노수신

    자신의 말이 아니라 경전에 나오는 말을 정확하게 문맥에 맞게 취한 것이다. 이어지는 함련도 그러하다.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 “황제(黃帝)와 요순(堯舜)은 의상(衣裳)을 드리우고 있는데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라는 전고

    를 취하였다. 의복의 제도로 표상되는 예(禮)만 지키고 통치에 어떤 작위적인 의도를 베풀지 않았는데도 잘 다스려

    졌다는 말이다. 신광한의 지문에 “비록 세상이 달라져 상중에도 왕명이 없을 수 없었지만 군국(軍國)의 일을 모두

    대신에게 위임하였고, 말씀할 때도 부드러우셨다.”고 한 대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하구의 ‘無言’도 『논어』에

    출처가 있다. 공자가 “나는 말을 하지 않고자 하노라(予欲無言)”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이 어떻게 전하겠습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공자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리오,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나니, 하늘이 무슨 말을 하리오?”라고 한 바 있다. 신광한의 지문에서 “왕은 일찍이 문안하고 찬선

    (饌膳)을 보살피는 외에는 오직 강학과 존성(存省)만을 알아서, 침착하고 고요하고 말이 적었고 공손하고 검약하여

    욕심이 없으셨다.”라 한 것처럼 인종은 과묵한 성품이었다. 이어지는 경련은 인종이 재위 한 해만에 세상을 떠나 백성들이 비탄에 잠겼다는 점을 말했다. 지문에서 “한양의

    선비와 서민들이 달려가 울부짖어 거리를 메우고 성균관의 유생들이 대궐 밖에 모여 곡하였으며 경기의 선비가

    와서 곡하는 자가 잇달았고 먼 지방의 외진 마을에서도 모두 울부짖고 사모하였다. 덕(德)이 유행한 것이 오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의 감화된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삼대(三代) 이후로는 듣지 못한 일이다.”라는 칭송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인종이 세자로 있던 1544년 봄 노수신은 세자시강원의 우사서(右司書)로 있었는데 미련에서 이른 ‘右司’는 곧

    우사서를 이른다. ‘春坊’과 ‘右司存’은 시어로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속위아’의 작법을 택한 것이라 할 만하거

    니와 자신의 정확한 경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노수신은 1545년 1월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정승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지만 권신들로부터 ‘간사한 자들의 우두머리(姦之魁)’(『인종실록』 1546년 윤1월 15일)로 찍혀

    있었다. 그리고 인종이 1545년 7월 1일 세상을 떠났고 9월 을사사화가 일어나 노수신은 이조좌랑에서 파직되었

    다. 그로부터 명종 재위 22년 동안 한양 땅을 밟지 못했다. 조식(曺植)에게 중종의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었

    던 것처럼 노수신도 명종의 ‘구름 낀 볕뉘’조차 쬔 적이 없었다.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노수신이 만년에 이 시

    를 지었다고 하고 ‘한 글자에 한 번의 눈물(一字一淚)’이라 할 만하다고 하였다. 노수신이 1544년 우사서로 있을

    때 시강원에는 정응두(丁應斗)가 우보덕(右輔德), 이황(李滉)이 좌필선(左弼善), 김난상(金鸞祥)이 좌서서(左司書)로

    있었다.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은 1572년이므로 문집에 이황의 만사와 조식의 만사 사이에 이 작품이 있으

    니 1572년 단오에 제작된 것으로 보면 되겠다. 노수신의 시는 사실을 정확하게 적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이런 추정

    이 가능한 것이다. 노수신은 노년에 만사를 많이 지었는데 만사에 이러한 작법이 잘 구사되어 있다.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9

    진도는 남해와 통해 있고 珍島通南海

    단양은 시안에 가까웠지. 丹陽近始安

    이십년 풍상을 겪다가 風霜廿載外

    두 임금께 은총을 입었네. 雨露兩朝間

    백발로 저무는 세월에 놀라면서 白首驚時晩

    청운에 올라서 절조를 지켰네. 靑雲保歲寒

    평생을 함께 한 장부의 눈물을 平生壯夫淚

    한번 교동의 무덤에 뿌리노라. 一灑在桐山

    「대사간 김난상을 애도하며(挽金大諫鸞祥)」(권6)

    김난상은 세자시강원에서 노수신과 함께 벼슬을 하였고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함께 오랜 유배생활을 하였다. 1547년 노수신은 진도에 유배되고 김난상은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각자 19년의 세월을 보내었다. 그리고 1565

    년 노수신은 시안(始安, 괴산의 옛 이름)으로, 김난상은 단양(丹陽)에 옮겨졌다. 수련에서부터 대를 하면서 10자 중

    8자가 조선의 지명이니 ‘이속위아’의 구사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음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수련은 윤원형(尹元衡) 등 권신에 반대하여 동지로서 함께 고통을 겪은 사실을 적실하게 적었다. 함련에서 20년

    ‘풍상(風霜)’이 이를 이른 것이다. 노수신과 김난상은 모두 중종 때 벼슬을 시작하였고 명종 때 고초를 겪다가 선조

    때 조정으로 복귀하여 나란히 벼슬을 하였다. 그래서 중종과 인종 두 임금의 은총을 받았다고 한 것이다. 김난상

    은 1570년 대사간에 올랐는데 이때 박점(朴漸)이라는 사람이 정언(正言)의 벼슬에 오르자 그의 행실이 바르지 못

    하다고 탄핵을 하려 하였으나 사간원의 다른 관리들이 반대하자 자신을 탄핵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얼마 지

    나지 않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래서 노수신은 백발이 되어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청운의 높은 관

    직에 있었지만 절개를 지킬 수 있었음을 높게 평가하였다. 김난상은 교동(喬桐)의 대우동(大牛洞)에 묻혔다. 노수신

    은 시를 종결하면서 평생을 고락을 함께 한 정을 들고 동산(桐山), 곧 강화도에 딸린 교동도에 묻힌 그의 영혼을

    위로한 것이다. 노수신의 시는 묘비에 새길 김난상의 행적과 자신과의 교분을 이렇게 40자에 모두 담았다. 만사는 죽은 이에

    대한 감정에 거짓이 있어서는 아니 되고, 또 죽은 이의 행적이 사실과 달라서도 아니 된다. 노수신의 이 만사를

    감정이 참되고 행적이 사실에 부합한다. 만사는 지나친 칭송하기 쉽지만, 죽은 이의 행적을 대표할 만한 사실을

    뽑아 이로서 그의 삶을 요약하였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선발하고 “감정이 극도로 슬프고

    시어가 극도로 간절하여, 이를 읊조리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눈물이 흐르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음

    만사도 비슷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정경 대부인에 대해서는 恭惟貞敬大夫人

    하늘 밖은 모르지만 세상에선 듣지 못한 일. 天外難知世未聞

    일덕으로 셋을 좇아 삼공의 벼슬 우뚝하고 一德從三上台峻

    백년에서 여섯 해 적으니 노인성이 높았네. 百年除六老星尊

    성은으로 부의를 더한 것 상례를 넘었고 恩加賵賻逾常典

    10 ∥ 소재 노수신 한시의 아름다움ᆞ이종묵

    효심을 최마로 낮추게 하니 고서를 덮겠네. 孝俯衰麻掩古文

    어떻게 하면 당대 대가의 솜씨를 얻어 安得當時大手筆

    조리 있게 기록하여 천지간에 빛낼 수 있을꼬 却將詮載照乾坤

    「홍 정승의 모부인에 대한 만사(洪政丞母夫人挽)」(권6)

    상소문에서나 쓰는 ‘恭惟’, 그리고 남편이 정1품에 오르면 그 아내에게 내리는 봉호 ‘貞敬大夫人’, 이런 낯선 시

    어를 스스럼없이 구사하였다. 정경대부인(貞敬大夫人)은 남편 홍언필(洪彦弼)이 영의정을 지냈기에 받은 봉호인데, 친정아버지 송질(宋軼), 아들 홍섬(洪暹)도 모두 영의정을 지냈기에 이 말로 시를 연 것이고 그래서 인간세상에서

    는 들어보지 못한 희귀한 일이라 한 것이다. 함련의 ‘三從’은 『예기』에서 “부인은 남을 따르는 자이니, 어려서는

    부형을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른다.”라고 한 이른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가리킨다. 시종일관 순일한 하나의 덕으로 삼종지도를 좇아 삼정승이 나온 영예를 얻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여기

    에다 94세에 이르는 장수를 누렸으니 천복을 갖춘 것이다. 수명을 주관하는 별이름이면서 삼정승을 상징하는 ‘三

    台’에 짝을 맞추어 이른 ‘老星’은 노인성(老人星)으로 장수를 상징한다. 지상의 정승과 천상의 장수성이 호응을 이

    루게 되는 정치한 조직도 볼 수 있다. 김육(金堉)이 “삼가 생각건대 정경대부인께서는, 여든의 고령에 두 해를 더

    했네(恭惟貞敬大夫人 八十遐齡又二春)”(「挽慶川大夫人」, 『잠곡유고』 권2)라 한 것이 바로 노수신의 이 시를 배운 것

    이기도 하다. 홍섬의 모친은 1580년 작고하였는데 이때 홍섬의 나이가 77세였다. 홍섬이 상중의 일을 기록한 「거우록(居憂

    錄)」(『인재집』 권4)에 따르면 홍섬의 모친이 세상을 떴다는 보고를 들은 선조는 전례에 따라 부의를 내리고 또 조회

    를 일시 중지하는 조치를 내리려다 그 전례가 없어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우승지를 보내어 조문하게 하였다. 또

    묘를 조성하는 일꾼 200명을 보내었다. 상구는 선조의 이러한 은전을 한 구에 담았다 또 『예기』에 따르면 상주가

    60세가 넘으면 몸을 손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아도 되고 70세가 넘으면 오직 최마복(衰麻服)만 입을 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서 집안에서 거처한다는 말이 나온다. 선조가 이를 근거로 하여 몸을 손상하지도 말고

    최마복만 입으라고 전교를 내렸다고 한다. 하구가 이를 말한 것이다. 거마(車馬)와 함께 재화(財貨)를 보내는 ‘賵賻’ 와 부모상에 입는 최의(衰衣)와 마질(麻绖)을 통칭하는 ‘衰麻’를 시어로 나란히 사용했는데 역시 ‘이속위아’의 작법

    이라 할 만하다. 그러면서 정경대부인 송씨의 삶과 죽음을 압축적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이 노수신 시의 특징이다. 5.

    물론 노수신 한시의 아름다움은 이것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대개 그의 시는 머리로 쓰지만 가슴으로 쓴 것

    중에도 명편이 있다. 새벽달 아래 그림자 하나 데리고 가노라니 曉月空將一影行

    노란 국화 붉은 단풍이 정말 정을 품었네. 黃花赤葉政含情

    구름과 모래밭 눈길 끝까지 물어볼 이 없어 雲沙目斷無人問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11

    여덟아홉 정자의 기둥을 두루 기대고 있네. 倚遍津樓八九楹

    「13일에 벽파정에 이르러 사람을 기다리다(十三日到碧亭待人)」(권5)

    1565년 무렵 제작한 작품인 듯하다. 귀양길에 오른 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을 때다. 아우와 벗, 제자가 가

    끔 찾아왔지만 그 외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보다 몇 년 이른 시기, 진도로 귀양간지 13년 된

    해 아우 노극신(盧克愼)이 찾아왔다가 돌아갈 때 벽파정(碧波亭)까지 가서 전송하면서 “아, 우리 형제가 이 지경에

    이르렀나, 십삼 년 동안 겨우 다섯 번을 만났구나(嗟吾兄弟至於斯 一十三年五見之)”(「追送碧波亭」, 권4)라 한 바 있

    다. 정련된 시어가 없고 구어나 어조사 등을 산문처럼 늘어놓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새로움을 얻었고 또 강

    한 탄식을 느낄 수 있는 전형적인 송시(宋詩)다. 송시는 머리로 이해하고 당시는 가슴으로 공감한다. 위에 든 작품은 가슴으로 공감하게 하는 작품이다. 누군가

    찾아온다는 기별을 듣고 적소에서 앉아 기다리지 못하고 새벽에 벽파나루를 향하였다.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이밀

    (李密)의 「진정표(陳情表)」에서 “혈혈단신 외로운 처지라, 몸과 그림자만 서로 위로하네(焭焭孑立 形影相吊)”라 한

    대로, 그림자 하나만 데리고 나선 것이다. 송 진여의(陳與義) “천 리 먼 곳 부질없이 그림자 하나 데리고 오니, 허

    연 머리 어지러운 매미가 다시 붙어 재촉하네(千里空攜一影來 白頭更著亂蟬催)”(「鄧州西軒書事」)를 읽은 흔적이 있

    다. 일찍 나간다고 하여 빨리 올 것은 아닌 줄 뻔히 알지만 그럼에도 집에서 기다릴 수 없기에 ‘空’이라 한 것이다. 길을 나서니 국화가 노랗게 피었다. 만물은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 외로운 유배객의 눈에 들지 않던 국화가

    노랗게 꽃을 피운 것은 그 마음이 기쁘기 때문이다. 붉은 단풍도 설레는 그의 마음을 닮았기에 정을 품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벽파나루에 가니 아직 시간이 일러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오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배가 언제

    당도할지 묻겠지만 아무리 멀리 바라보아도 인적이 없다. 간절하게 사람을 기다려본 사람은 결구의 뜻이 절로 마

    음에 와닿을 것이다. 이쪽 기둥에 기대었다가 저쪽 기둥에 기대어 벽파나루로 오는 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가슴

    으로 공감하는 것도 노수신의 시를 읽는 즐거움이다.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13

    【제2발표】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

    ―‘소재학(穌齋學)’ 규명을 위한 한 ‘방법’으로서―

    최재목(영남대 철학과)

    1. 들어가는 말

    2. 穌齋 연구와 ‘소재학(穌齋學)’의 가능성

    3. 생명체의 ‘관-찰’, 나와 생명체 ‘사이’의 공명

    4. 고통에 대한 서사와 미학

    5.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이 논문은 조선의 주자학이 구축되고 심화되는 와중에 매우 두드러진 학술적 특징과 진지한 지적 번민을 드러

    내는 학자인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하 소재)의 시편1) 가운데 ‘두통’ 관련 시에 주목하고 고통

    의 서사(敍事)에 드러난 ‘미학’을 논해보고자 한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미학’이란 소재가 ‘삶(=인생)’과 ‘사물(=세계)’에 대해 드러낸 미적인 관심과 표현을 필자가

    체계화-이론화해본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은 한시(漢詩) 자체의 평측이나 운율 등의 운학(韻學) 같은 미학에서 벗

    어나 있다. 기록으로서의 소재 시에 내포된 삶과 사물에 대한 ‘표현적 묘사’(expressive portrayal)2)에 관심을 둘

    것이다. ‘표현적 묘사’란 소재의 사유에 의해 ‘문자를 매개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생기를 주는’ 일을 말한다. 시는 시인 혹은 사상가들의 사유가 대상(=삶과 사물)을 만나 불태운 미적 감수성의 불꽃(=진실)을 언어의 형식으

    로 붙들어 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간 시간의 시적 언어는 그 원초적 불꽃의 밝기와 온도를 잃어버리고―마치 “죽

    1) 이 논문에서는 시의 번역은 노수신, 『소재집』(1-6), 임정기 옮김, (한국고전번역원, 2013-2020)에서 인용한다. 아울러 노수신, 『소재집』

    은 한국문집총간ᆞ35집(민족문화추진회, 1989)을 저본으로 한다. 2) 버질 올드리치(V.C.Aldrich)는 ‘재현’(representation)과 ‘표현’(expression)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것을 지시하는 ‘기술적 묘사’(descriptive

    portrayal)와 자유롭게 대상을 미적으로 구체화하는 ‘표현적 묘사’(expressive portrayal)를 구분하고, 후자를 ‘대상에 생기를 주는’ 방식이라

    보고 있다.[버질 C. 올드리치 지음, 『예술철학』, 오병남 옮김, (서광사, 2004), 121-127쪽 및 조요한, 『예술철학』, (미술문화, 2015), 42쪽

    참조.

    14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은 자들이 그곳에서 살아 있으며,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무덤이나 납골당”3)처럼―시간과 공간의 소멸과 퇴락 속

    에 진실을 은폐하고 해석자의 해석적 복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는 존재가 ‘상실한 기원’ 그 휙 지나가 버린

    불꽃을 간직하고 있다. 그 속에 소재라는 사상가의 미적 지향 또한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미학(美學 Aesthetics)이란 18세기 유럽에서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이―감각 또는 감각적 지각을 가리키는 플라톤의 아이스테시스(aisthēsis)에 기초하여―만든 독일어

    단어 Ästhetica(에스테티카)를 일본에서 한어(漢語)로 옮긴 것이란 점은 잘 알려진 대로이다.4) 서양의 경우 미학, 예술철학은 철학의 하위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기예(서예나 산수화, 무술, 문학)의 위에

    다 ‘도’(道)를 내함(內含)한 독자적, 독립적인 미적 경계를 둔다. 이 경계는 운치 있고, 신묘하며 언어 그 너머이거

    나 근저(심층)를 가리킨다. 특히 유학자에게 있어 개진되는 ‘철리(哲理), 도학(道學), 성리학(性理學)’ 같은 필로소피

    는 문예로서의 ‘시(詩)’와 불가분의 관계로 있어왔다. 전통적인 ‘시서예악’(詩書禮樂)이라는 관용구나 근대 이후 정

    형화된 ‘문사철’(文史哲)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미적 요인을 지닌 ‘시와 문학’은 상소문, 서간문, 잡문보다도 앞

    서서 등장한다. 공자가 “시에서 일어나고, 예로 굳게 서며, 음악으로 완성한다”[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5)고

    했을 때, 시는 인간의 원초, 그리고 인간이 사물의 원초에 다가서는 심성이나 태도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에

    서 말하는 ‘시’(詩)는 ‘본원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라는 이중성이 있다. 먼저, 시(詩)는 인간에게서 “역사적인 처음

    ᆞ시작(=起源)의 글[文]”이다. 마음[心]이 감동ᆞ감흥하여 ‘지(志)=마음의 지향성(意ᆞ情)6)’을 ‘소리’[聲]로 발출7)한

    것으로서, ‘언어가 시작된 바로 그 언어’라는 의미―역사적으로는 ‘시작의 언어’―이다. 다음으로, 시가(詩歌) 일반

    에서 특정의 문학으로 역사화 되었다는 『시경』(詩經)의 의미, 즉 역사적인 ‘처음-기원-시작의 시집’이라는 의미이

    다. 이처럼 시(詩)는 1시작-처음-기원의 글[文] 2 시작-처음-기원의 시집(詩集)이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8) ‘시’

    (詩: 인간 본원적 의미)⟶‘시집’(詩集: 역사적 의미)으로의 이동과 진행의 예는 『시경』에서만이 아니라 『성서』의 ‘시

    편’, 베다문학 등에서도 그 범례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처음’의 언어에 당도했을 때, 그 눈은 ‘사물의 본

    질’에 닿아있다. 인간의 의지, 마음의 처음 움직임이 표출된 ‘첫 언어’=‘언어의 기원’은 무엇(=대상)에 ‘대해/향해

    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 순간의 ‘말’[言]을―‘손’[手]으로 물건을 딱 잡듯이―‘붙들어내는[止] 것’=‘워

    딩’(wording, 文)이 시인의 사명이다.9)

    소재의 많은 시 속에 펼쳐진 인간과 사물, 역사와 환경 등에 관련한 박물학적인 지식과 정보는, 시(詩)라는 규정

    3) 이 표현은,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예루살렘전기』, 유달승 옮김, (시공사, 2011), 13쪽의 예루살렘에 대한 것을 필자가 약간 다

    듬어서 인용한 것이다. 4) 일반적으로 이것을 ‘日本漢語’라 한다. 미학의 번역사정에 대해서는 최재목, 『노자』, (을유문화사, 2006), 130-3쪽을 참조. 5) 『論語』

    「泰伯」. 6) 억지로 의과 정―같은 마음에서 처음 생겨나는 움직임[指向]으로서―을 구별한다면, 志는 그 意志的ᆞ意識的ᆞ理知的인 면을, 情은 無意志

    的ᆞ無意識的ᆞ直(感)覚的인 면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 양자를 구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관점이 갈릴 수 있다[中島隆博, 『残響の中国哲学―言語と政治―』, (東京大学出版部, 2007), 238쪽 참조].

    7) 『書経』

    「舜典」에는 「詩는 뜻[志]을 말한 것이고, 歌는 말[言]을 길게 한 것이다(詩言志、歌永言)」라고 한다. 8) 中島隆博, 위의 책, 80~81쪽과 238쪽을 참고. 9) 이 부분은, 崔在穆, 「朝鮮時代の<儒敎>と<樂>について―思想史からの一試論―」, 『<禮樂>文化: 東アジアの敎養』, 小島康敬 編, (ぺりかん

    社, 2013), 108-9쪽 및 최재목, 「[작품론] 대승(大乘)의 시심(詩心): ‘자모음(字母音)의 화쟁(和諍)’에서 ‘생명의 마중물’로―고영섭 시인의

    시적(詩的) 희구(希求)에 대해」, 『고영섭 시집: 바람과 달빛 아래 흘러간 시(시로 쓰는 삼국유사)』, (연기사, 2010), 129-130쪽을 참조하

    였다.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15

    에 앞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기록물에 해당한다. 예컨대 역사 속에는 중요한 일기들이 많이 있어왔다. 18세기

    말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할로웰에 살았던 산파 마서 밸러드가 27년에 걸쳐 쓴 일기를 로렐 대처 울리히

    (LAUREL THATCHER ULRICH)가 재구성한 『산파일기』10)가 그렇다. 여기에는 18세기를 살았던 미국 민중들의

    이야기가 미시사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의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도 들 수 있다. 이 일기는 18

    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조선후기 선산 지역에 살았던 노상추(盧尙樞 1746-1829)가 68년간 중앙의 무관 생활 및

    시골 생활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일기들은 생활사, 문화사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사적 의미도 갖는

    다. 소재의 시편도 이런 일기와 마찬가지로 박물학적인 자료의 의미도 갖는다. 이 논문은 소재 노수신의 시와 ‘고통’의 서사 미학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소재학(穌齋學)’11)을 규명하는 한

    ‘방법’을 삼고자 한다. 여기서 일부러 소재학이라 해 둔 것은 기존의 분류 방식 즉 주자학이니 양명학이니 하는

    고정된 틀 속에 소재를 가두기보다 일단 좀 더 열어두고 전망해보려는 의도에서이다. 소재의 시를 읽어보면 문예

    적 요소도 풍부하지만 경험과 ‘관-찰’에 입각한 기록물이라는 측면이 짙다. 어쩌면 소재의 시는 ‘시의 형식을 빌

    은’ 일상생활의 생생한 기록이거나 ‘일기(日記)’라고 해도 좋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논의할 것이다. 먼저, <穌齋 연구와 ‘소재학(穌齋學)’의 가능성>을 서술하고, 이어서 <생

    명체의 ‘관-찰’, 나와 생명체 ‘사이’의 공명>을, 마지막으로 <고통에 대한 서사와 미학>을 각각 서술할 것이다. 2. 穌齋 연구와 ‘소재학(穌齋學)’의 가능성

    소재는 명종ᆞ선조기 퇴계와 병칭될 두드러진 학문적 특징을 가진 유학자이다. 연구자에 따라서 1‘주자학자’나

    그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또는 2‘최초의 양명학자’이거나 약명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아니면 3 주자학도

    그렇다고 양명학도 아닌 ‘이학(異學)’(正學을 벗어남=반주자학)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먼저, 주자학자로 보는 경우(1)이다. 정호훈12)과 한형조13), 최진덕14), 가와하라 히데끼(川原秀城)15) 등의 견해

    이다. 예컨대 정호훈은 소재의 학술활동에 대해 “주자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사상의 자장을 벗어나 존덕성’ 의 방법에 기초하여 새로운 학문적 방향을 모색하던 16세기 중ᆞ후반 조선 학계 일각의 움직임을 한층 풍부하게

    하고 또 견고하게 다진”16) 학자이거나 “주자학이 확산되는 와중에 주자학을 달리 사유할 수 있는 자료적 근거”의

    10) 원서명은 『A Midwife's Tale: the Life of Martha Ballard Based on Her Diary, 1785-1812』이다. 번역서는 로렐 대처 울리히

    지음, 『산파일기』, 윤길순 옮김, (동녘, 2008) 참조. 11) 여기서 말하는 ‘소재학’이란 소재 노수신이 구축한 철학사상과 학술과 문예 전체가 가진 지적인 논리체계를 가정하여 한 말이다. 12) 정호훈,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심학(心學)’으로 맺은 학문 세계」, 『영남학』 제71권, (경북대학교 영남

    문화연구원, 2019.12); 정호훈,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의 『대학집록(大學集錄)』의 지식 세계와 그 영향」, 『한국사상사학』 제51집, (한

    국사상사학회, 2015.12)을 참고. 13) 한형조는 기본적으로 소재를 주자학자로 보고 있다: 한형조, 『성학십도, 자기구원의 가이드맵』,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의 ‘숙

    흥야매잠도’ 부분(680-702쪽)을 참조. 14) 최진덕 또한 소재를 주자학자로 보고 있다: 최진덕, 「주자학 속에 숨은 양명학: 노수신의 주자학과 그의 인심도심 해석」, 『한국사상사

    학』 제51집, (한국사상사학회, 2015.12) 참조. 15) 다음 세 편의 논문을 참조 바람: 川原秀城, 「豐穰な知の世界―退溪學成立前夜の朱子學をめぐって―(1)」, 『中國思想史硏究』 第37號, (中國思

    想史硏究會, 2016.7)/「豐穰な知の世界―退溪學成立前夜の朱子學をめぐって―(2)」, 『中國思想史硏究』 第38號, (中國思想史硏究會, 2017.7)/

    「豐穰な知の世界―退溪學成立前夜の朱子學をめぐって―(3)」, 『中國思想史硏究』 第39號, (中國思想史硏究會, 2018.3).

    16) 정호훈,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심학(心學)’으로 맺은 학문 세계」, 『영남학』 제71권, (경북대학교 영남

    문화연구원, 2019.12) 참조.

    16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하나로서 보고 있다.17) 이어서 가와하라 히데끼는 비교적 명확하게 소재를 주자학자로 규정한다. 즉 그는 「풍양

    (豐穰)한 지(知)의 세계: 퇴계학 성립 전야의 주자학을 둘러싸고」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 “노수신은 명종선

    조기 이황과 견줄 유명한 주자학자이다. 그 학술은 정밀하고 해박하여 유림들의 촉망 받음이 이황보다 앞섰었다

    (『朝鮮王朝實錄』 卒記). 노수신의 대표적인 학술성과를 시대 순으로 들면,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1551)와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1559)과 『대학집록(大學集錄)』(1584)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숙흥야매잠해』는 이황

    이 경(敬)의 철학을 수립하여 『성학십도』에 「숙흥야매잠도」를 수록하는데 큰 시사를 주었다. 또 「인심도심변」은 조

    선주자학자의 인심도심논쟁의 선구가 된 하나의 중요한 사상좌표이며, 『대학집록』은 『대학장구』에 대한 text

    critic의 실례를 모은, 주자학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도전적인 자료집이라 할 수 있다. (중략) 노수신을 창조성이

    풍부한 비정통적인 주자학자라고 규정해야만 하나 도리어 노수신은 역사적으로 육옹학자라고 비난 받는 경우가

    많다. (중략) 육왕학자라는 노수신의 평가가 안정된 것은 본인이 세상을 떠난 1590년의 조금 앞선 무렵이다. 퇴계

    의 노수신 비판, 그리고 이것을 이어받은 『조선왕조실록』의 졸기(卒記), 그리고 좀 더 내려가서 택당 이식의 기록

    이 그렇다. 마침내 하겸진의 『동유학안(東儒學案)』에서도 조선주자학의 전통에 따라 학통상 주자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18) (중략) 조선조의 주자학자들은 번갈아가면서 노수신을 양명학자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게 정치적인 평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노수신이 주자의 정설(定說)과 다른 것[異]을 주창하

    고 비정통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흠순을 존중하고 그 학문의 영향을 입은 것을 근거로 노수신을 양명학자로

    단정짓는 것은 명백한 논리모순을 범하고 있다. 나흠순은 주자학자이며 틀림없이 정주(程朱)를 옹호하고 육왕(陸

    王)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노수신이 선학의 영향이 깊었기 때문에 양명학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논리상 옳지

    않다. 선학(禪學)의 존재가 없다면 양명학과 마찬가지로 주자학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19)

    이어서, 양명학자로 보는 경우(2)이다. 신향림 박사와 이동환 교수의 견해이다. 신향림 박사는 「노수신의 詩에

    나타난 사상연구」(2005, 박사학위논문)20)와 그것을 수정 보완한 『조선 朱子學 陽明學을 만나다』(2015)21) 등에서

    소재가 “최초의 양명학자”22)임을 밝히고자 노력해왔다. 즉 이렇게 말한다: “소재는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대에 『전습록』을 수용하여 새로운 심성론과 공부론을 제기하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양명학자이다”23); “소재는

    양명학을 지지하는 학문적 입장을 죽는 날까지 견지하였다”24); “양명학자인 소재 노수신...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17) 예컨대 정호훈은 소재의 『대학집록』에 대해서, “『대학집록』은 노수신 개인의 사상을 담고 있는 책이자 16세기 후반 조선 사상계의 성

    과와 과제를 담고 있는 자료”이다. “주자학이 널리 확산되고, 주희의 『대학장구』가 『대학』 이해의 중심 서적으로 자리 잡아 가는 상황에

    서 이 책은, 주자학을 달리 사유할 수 있는 자료적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중략) 『대학집록』에는 노수신의 사상과 학술의 磁場이 일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양명학이었다.”고 본다.[정호훈,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의 『대학집록(大學集錄)』의 지식 세계와 그 영향」, 『소재 노수신의 사상 정치의 새지평』, 소재노수신선생학술문화진흥회편, (학자원, 2016), 194-5쪽] 이에 대한 논의는 최재목, 「‘한국양

    명학의 시원’으로서 소재 노수신 평가에 대한 기초적 논의―한국양명학사 記述에서 노수신의 위상을 중심으로―」, 『퇴계학논총』 제33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19.6), 95-96쪽 참고. 18) 이 부분은 논지전개를 위해 약간 줄였음을 밝혀둔다. 19) 川原秀城, 「豐穰な知の世界―退溪學成立前夜の朱子學をめぐって―(3)」, 『中國思想史硏究』 第39號, (中國思想史硏究會, 2018.3), 27-28쪽. 20) 신향림,「盧守愼 詩에 나타난 思想 硏究 : 朱子學에서 陽明學으로의 轉換」,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05.

    21) 신향림, 『조선주자학 양명학을 만나다』, (심산, 2015).

    22) 신향림, 『조선주자학 양명학을 만나다』, (심산, 2015), 20쪽. 아울러 신향림, 「소재 노수신(盧守愼)의 미발설(未發說)과 양명학(陽明學)의

    수양론」, 『한국사상사학』 제51집, (한국사상사학회, 2015.12) 참조. 23) 신향림, 「양명학자 노수신의 사상과 문학」, 『소재집』 1, 임정기 옮김, (한국고전번역원, 2013), 27쪽. 24) 신향림, 「양명학자 노수신의 사상과 문학」, 『소재집』 1, 임정기 옮김, (한국고전번역원, 2013), 42쪽.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17

    정계에 복귀한 뒤에도 양명학을 지지하는 내용의 철리시(哲理詩)와 산문을 지속적으로 창작하였다”25); “소재의 인

    심도심설은 양명학의 심성론에 근접한 것이었다”26) 이동환 교수 또한 소재를 한국양명학의 ‘시원’의 인물로 규정

    하고 있다.27)

    마지막으로, ‘이학(異學)’에 속하는 경우(3)이다.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으 견해이다. 그는 『경성

    제국대학강의노트』28)에서 소재를 ‘이학(異學)’으로 규정하는데, 그 이후 이 관점은 보편화된다.29) 『식민지 조선인

    을 논하다(朝鮮人)』30)에서 ‘조선 철학은 주자학이 들어온 후 진보나 발전이 없이 화석화되었다’고 규정한 대로 ‘정

    학’은 주자학과 그 아류인 퇴계학이었고, 거기에 반하는 것은 ‘이학’이었다.31) 그래서 일단 다카하시가 말하는 이

    학은 이단과는 다르다. 그는 ‘이단’을 이도(異道)ᆞ이교(異教)로서 교조(教祖)와 인생관, 개인 및 국가사회에 대한

    이상을 달리하며 사상사에서 노장양묵(老莊楊墨)와 도가 같은 경우로 본다. 이에 대해 ‘이학’은 이도(異道)가 아닌

    주자학(조선에서는 그 계열의 주류인 퇴계학) 이외의 주장을 하는 학문을 말한다. 이학은 선왕선성(先王先聖)의 도, 공자의 교학 같은 유학에 기반하나 주자학 이외의 학파에 속하는 유학의 부류라 한다. 이것은 일본 도쿠가와 시대

    (徳川時代)의 이학 규정과 공통적이라 본다.32) 이런 지적의 이면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렇다: 다카하시는 한일

    합방의 정당화로서 일본의 ‘제국지’(帝國知)를 조선의 ‘식민지지’(植民地知)에 적용한다. 그 발상법의 연속선상에서

    조선 유학의 ‘정체성=비근대성=망국(패망)당연론’을 구축하여 조선의 정체된 운명이 스스로의 역사임을 자각케 한

    다. 조선유학사=주자학사의 조선유학자 자신에 의해 귀결된 ‘운명론’의 설명법이다[합병직후~경성제국대 정년

    전]. 그리하여 조선의 유학을 ‘대일본제국의 유학’(=皇道儒道)[경성제국대 정년 후]으로 귀결하도록 구상을 이어간

    다. 이런 조선유학사 구상과 해석의 설명에는 한일합병론과 황국조선(皇國朝鮮)의 내적 외적 필연성-당위성이 전

    제되어 있다. 따라서 다카하시가 조선유학 내에서 규정한 ‘이학’이란 표현의 이면에는 그 음각으로서 ‘망국당연론’ 이, 양각으로서 ‘황국조선론’(皇國朝鮮論)이 들어있는데, 그의 『경성제국대학강의노트』는 ‘황국조선론’ “직전”에 위

    치한33) ‘조선+유학사’ 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상의 관점과 그 논거를 참고로 하지만, 소재를 ‘주자학’이거나 ‘육왕학(陸王學) 혹은 양명학’의 틀

    로 규정하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소재의 학문을 ‘소재학’이라는 형식에서 새로 설정하는 ‘시론적(試論的)’ 입장에

    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론적’이란 관점의 전환과 새로운 시도를 말한다. 즉 본고에서는 소재

    에게서 감지되는 ‘추상과 논리라는 차가운 이성’(a)이 아닌 ‘따뜻한-살아 움직이는 구체적인 몸과 마음’(b)이다. 25) 신향림, 「양명학자 노수신의 사상과 문학」, 『소재집』 1, 임정기 옮김, (한국고전번역원, 2013), 17쪽. 26) 신향림, 「양명학자 노수신의 사상과 문학」, 『소재집』 1, 임정기 옮김, (한국고전번역원, 2013), 24쪽. 27) 이동환, 「16세기 조선 사상계의 동향과 노수신」, 『소재 노수신의 사상 정치의 새 지평』, 소재노수신선생학술문화진흥회 편, (학자원, 2016), 71쪽 외 참조. 28) 高橋亨, 『高橋亨京城帝國大學講義ノ-ト』(朝鮮儒學史編), 權純哲 編, (三人社, 2021)의 목차(11-13쪽) 참조. 29) 예컨대 유명종의 경우[유명종, 「퇴계(退溪)의 이학관(異學觀)과 그 영향(影響)」, 『경북대논문집』 4, (경북대학교,1969)]처럼, 양명학/육왕

    학을 ‘이학(異學)’이라 규정하기 시작한다. 30) 다카하시 도루,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 구인모 역,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31) 権純哲, 「〔増訂〕高橋亨の朝鮮儒学研究における「異学派」―京城帝大講義ノートを読む―」, 『埼玉大学紀要(教養学部)』 第50巻第1号, (埼玉大

    学敎養学部, 2014),

    32) 権純哲, 「〔増訂〕高橋亨の朝鮮儒学研究における「異学派」―京城帝大講義ノートを読む―」, 『埼玉大学紀要(教養学部)』 第50巻第1号, (埼玉大

    学敎養学部, 2014), 58쪽. 33) 이 부분은 権純哲, 「〔増訂〕高橋亨の朝鮮儒学研究における「異学派」―京城帝大講義ノートを読む―」, 『埼玉大学紀要(教養学部)』 第50巻第1

    号, (埼玉大学敎養学部, 2014), 1487-9쪽을 참고하여 기술한 것임을 밝혀둔다.

    18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이렇게 a에서 b로의 이동은 ‘이원적-이분법적 사유’에서 ‘일원론-일체론적 사유’로의 전환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배경은 무엇인가? 소재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 유행하던 명대의 학풍과 노장 및 불교가 서로 만나

    는, 이른바 ‘일체적 사유’의 흐름을 수용한 것이다. 즉, 1 나흠순의 ‘기(氣)를 떠난 이(理)는 없다’는 ‘이기일체론

    (理氣一體論)’의 사유, 2 주자학적인 ‘사사물물개유정리(事事物物皆有定理)’를 부정하고 오성자족(吾性自足)의 ‘심

    즉리(心卽理)’에서 출발하여 구축하는 ‘만물일체의 인(仁. 진성측달(眞誠惻怛)의 마음)’의 사유, 3 명대의 유불도

    ‘합일’의 사유(憨山德清 등)가 그것이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이원론-이분법을 넘어서는,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

    (一心二門)을 예로 든다면 ‘일심에서 이문으로’가 아니라 ‘이문에서 일심으로’라는 시대정신이다. ‘둘’이 아니라 ‘하

    나’라는 시대정신과의 접촉, 촉발을 통해 조선의 주자학 그 폐쇄구역 바깥 혹은 근저에 흐르는 새로운 조류에 공

    명한 것이다. 조선 유교 내에서 이런 흐름의 상징은, 송학(宋學)=주자학의 경건주의를 대표하는 『심경(心經)』(1232

    년 西山 陳德秀 편찬, 1234년 그의 제자 顔若愚 간행)에서 명학(明學)의 주륙화회(朱陸和會) 분위기를 대변하는 『심

    경부주(心經附註)』(1492년 篁墩 程敏政이 편찬, 간행)로의 전이(轉移)34)에서 잘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소

    재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1551),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1559), 『대학집록(大學集錄)』(1584)을 통해

    서도 분명하게 파악된다. 이것은 소재학에서 보이는 ‘육왕(陸王)+나흠순+노장+불교’의 일체ᆞ융합적 성향을 어떻

    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35)과 직결된다. 문제는 소재의 ‘일체ᆞ융합적 성향’이라는 방향일 것이다. 한형조는, 퇴계와 소재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해석을 두고 의견을 교환하는 장면을 풀이한 다음 이렇게

    언급하였다: “소재의 심학은 퇴계와 기풍이 매우 다르다. 퇴계는 책의 지침에 엄격한데 비해 소재는 대강의 취지

    를 끌어안고, 자신만의 체험을 토로하고 싶어한다. 후회라는 실존적 정서를 주해에 산입한 것을 보라. 그 개성적

    독자성은 주자학의 울타리를 저만큼 벗어나게 하기도 했다. 택당 이식은 그에게 선(禪)의 혐의를 씌웠고, 또 최근

    신향림 교수는 과감하게 그를 조선의 ‘양명학자’로 지목했다.”36) 퇴계가 ‘책의 지침’에 주목할 때 소재는 ‘자신만

    의 체험토로/실존적 정서’를 적극 내세운다는 것이다. 사물의 이치와 성현의 말씀이라는 ‘이(理)’를 퇴계는 드러내

    고자 하는 반면 소재는 체험적-실존적 ‘심(心)’과 스스로의 ‘기질[氣]’을 표출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해석을 두고

    서, 퇴계는 ‘이(理)’의 방향으로, 소재는 ‘기(氣)’의 방향으로 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자는 ‘정신과 삶의 이상’ 을, 후자는 ‘몸과 삶의 현실’에 주목할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방향성은 시(詩)에서도 드러난다. 일찍이 다카하시 도오루가 소재의 학설을, “사단(四端)ᆞ칠정(七情)을 도심(道心)ᆞ인심(人心)에 배당하고 본성에

    서 발(發)하는 것과 형기(形氣)에서 발하는 것으로 구별하는 퇴계의 근본사상에 대해서, 도심ᆞ인심을 실체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단지 인심(人心)의 동정(動靜)으로 본다.”고 하고, “소재의 일생의 법문(法門)은 심(心)의 허정(虛靜)

    을 구하는데 있다. 심의 허정을 구하는 공부는 무욕(無欲)과 정좌존심(靜坐存心) 외에는 없다.”37) “그의 공부에서

    최고로 중요한 것은 미발(未發)일 때의 존양수정(存養守靜)이다. 아마도 그의 수양은 전부 이것으로 다했다.”38)고

    34) 이런 경향은 퇴계 이황에게서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해서는 최재목, 「退溪의 陽明學觀에 대하여―退溪의 독자적 心學 형성 과정에 대한

    一試論―」, 『退溪學報』 제113집, (퇴계학연구원, 2003.6)을 참조. 35) 최재목, 「‘한국양명학의 시원’으로서 소재 노수신 평가에 대한 기초적 논의―한국양명학사 記述에서 노수신의 위상을 중심으로―」, 『퇴

    계학논총』 제33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19.6), 112쪽 참고

    36) 한형조, 『성학십도, 자기구원의 가이드맵』,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 693쪽. 37) 高橋亨, 『定本 高橋亨京城帝大講義ノート』(朝鮮儒學史編), 權純哲 編, (三人社, 2021), 1289쪽. 38) 高橋亨, 『定本 高橋亨京城帝大講義ノート』(朝鮮儒學史編), 權純哲 編, (三人社, 2021), 1085쪽.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19

    간결하게 정리한 바 있다. 아울러 그는, 소재가 지행론(知行論)에서 “양명에 가까운” 점이 있고, 학문적으로 “선학

    (禪學)의 영향”이 있음도 지적한다.39) 다만 다카하시는 소재의 학문이 ‘고요함에 치우쳤다’는 인상을 갖도록 만드

    는 점이 있으나, 실제 소재는 몸과 마음의 ‘쾌활’, 마음의 ‘형형(=반짝반짝 밝게 빛남)’, ‘활물(活物)’, ‘상활(常活)’을

    이야기 한다.

    “모처럼 먼지 떨고 나니 한껏 쾌활하여라!”(試拂塵埃更快活)40)

    “형형함이 각기 전면에 있게 해야지”(炯炯各當前)41)

    “어찌하리오 살아있는 물건은(奈何活底物)/불이 없어도 절로 뜨거워짐을(不火有愈自熱)”42)

    “안과 밖을 검속하여 정채광명(精彩光明)을 불러일으킨다면 주재는 항상 살아있어서[主常活] 불타서 재가 된 나무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檢其內外, 以其發精采光明, 則主常活而不爲灰木]43)

    소재가 도심ᆞ인심을 실체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마음으로서 ‘인심(人心)’의 동정(動靜)에 주목하고, 더욱이 인심(人心)의 동정(動靜)에서 ‘무욕(無欲)과 정좌존심(靜坐存心)’을 지향하지만, 외물(外物)과의 공명을 통한

    ‘심신의 능동적 역동성’을 중시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재가 노장과 불교를 수용했다는 점을 ‘불

    타서 재가 된 나무’ 같은 ‘허무적멸’의 고요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생명체의 ‘관-찰’, 나와 생명체 ‘사이’의 공명

    1) 생명체를 보는 눈

    소재가 남긴 시에는 생물들에 대한 세심한 ‘관(觀)-찰(察)’이 들어 있다. 그리고 소재 자신과 생명체 ‘사이’에서, 그 소리를 ‘듣거나’ 저들의 생김새를 ‘바라보는’ 공명을 통해서, 스스로의 내면을 서사(敍事)해간다. 이 내면의 서사는 결국은 소재 자신의 ‘그 스스로의 소리에 가 닿는’ 일, 즉 ‘내가 내 글을 읽는’[我讀我書] 것이

    었다. 이 점은, 그가 쓴 시의 긴 제목 “세 칸 띠집을 짓고 그 한 칸을 서재로 삼아 ‘소(穌)’라고 편액을 붙였으니, 그것은 곧 주 부자(朱夫子)께서 이른바 “내가 내 글을 읽으니 병든 몸이 소생하는 것 같다”라고 한 말씀에 근본한

    것이다.”[營茅三間取一爲齋輒扁曰穌蓋本朱夫子所謂我讀我書如病得穌云爾]44)에 잘 요약되어 있다. 소재가 호를 주자

    에게서 힌트를 얻고 있는 것은 물론, 그는 “도는 공자 맹자 장자 정자 주자에 있고(道在尼輿關洛婺)/심법은 요순

    우탕 문무 주공으로 전해졌지(心傳堯舜夏周殷)”45)라고 하여, 도통이라는 면에서 역시 주자의 계보 위에서 사유하

    39) 高橋亨, 『定本 高橋亨京城帝大講義ノート』(朝鮮儒學史編), 權純哲 編, (三人社, 2021), 1084쪽. 40) 시 “소재를 말끔하게 소제하다[穌齋淨訖]”[노수신, 『소재집』 3,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6), 374쪽] 참조. 41) 시 ‘차운하여 학경(學敬)의 후의에 답하다’[노수신, 『소재집』 1,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3), 240쪽] 참조. 42) 이 부분은 ‘자점(瓷店)’[노수신, 『소재집』 1,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3), 246-7쪽]이라는 시에 나오는데, 추위에 견디는 몸의

    강인함을 이야기 하는 대목이다. 43) 노수신, 『穌齋集』(내집ᆞ상편), 「夙興夜寐箴解初本」, 354쪽. 44) 노수신, 『소재집』3,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6), 185쪽. 45) 시 ‘꿈에 동지와 더불어 전주를 강론하다가 깨자마자 단율로 그 사실을 기록하다’(夢與同志 講論傳註 覺輒記以單律)[노수신, 『소재집』 1,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3), 344쪽]에 있다.

    20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아울러 이 ‘소재’라는 한 칸의 공간은, 소재가 “소재를 말끔하게 소제하다[穌齋淨訖]”에서 알 수 있듯이,46) ‘정

    흘(淨訖: 말끔하게 소제함)’ 즉 ‘허명정일(虛明靜一)’의 마음이다.47) 이 점에서 소재 사상의 핵심이 ‘허명정일’로 보

    는 견해(앞의 다카하시 도오루)48)도 일단 타당한 지적이라고 본다. 다만 앞서 언급한 대로 그의 마음은 ‘불타서

    재가 된 나무’ 같은 ‘허무적멸’의 고요가 아니라 ‘쾌활’, ‘형형’, ‘활물(活物)’, ‘상활(常活)’이었다. 이것은 소재가 구

    체적인 생명체 혹은 외물(外物)을 접하면서 공감하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생쥐(鼷)’라는 시를 보자. 생쥐[鼷]49)

    머리를 쳐들고 등경(燈檠)50) 뒤 쪽을 냄새 맡다가 仰臭燈檠後51)

    멀리 밥상 가를 타고 다니곤 하네 遙緣食案邊

    요즘 들어 내가 잠을 잘 이룰 수 있어서 今能翫吾睡

    요놈이 구멍 뚫는 것을 거듭 살피지 못했더니만 不復顧其穿

    벼루를 지나다가 먹물을 적셔가지곤 歷硯沾涓滴

    책을 헤집고 다니며 성현의 문자를 더럽히기까지 하네 翻書汚聖賢

    무심하게 말없이 웃노니 翛然笑無語

    네 놈의 목숨 또한 하늘에 달려 있노라! 爾命亦由天

    한밤중의 깜깜한 시골집 천장과 방구석으로 으레 찾아들던 불청객을 경험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쥐는 자유

    분방하다. 인간들의 윤리나 룰 따위엔 아랑곳 않고 온 방을 헤집고 다닌다. 시 가운데서 벼루의 먹물을 몸에 묻혀

    성현의 문자가 적힌 책장에다, 왕희지가 처음 만들어 썼다는 ‘쥐 수염 붓’ 즉 ‘서수필(鼠鬚筆)’인양 이곳저곳에다

    찔끔찔끔 낙서를 해댄다. 이 장면을 소재는 시구로 잘 붙들었다. 이어서 ‘쥐가 있다[有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쥐가 있다[有鼠]’52)

    쥐가 있어 지붕을 뚫고 들어오지만 有鼠能穿屋

    46) 노수신, 『소재집』[한국문집총간ᆞ35집(민족문화추진회, 1989)] 3,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6), 374쪽.

    손수 등덩굴 가닥으로 좀 먹은 자리를 깁고 / 手拈藤理補蟫餘

    사방 벽을 종횡으로 차례차례 종이를 바르고 / 四壁縱橫次第糊

    모처럼 먼지를 떨고 나니 한껏 쾌활하여라 / 試拂塵埃更快活

    이제야 소재의 호칭이 헛된 것이 아님을 알겠네 / 方知不枉號穌齋

    * 次第가 다른 본에는 款款으로 되어있다. 47) 소재는 노수신, 『穌齋集』(내집ᆞ상편), 「夙興夜寐箴解初本」, 353쪽에서 ‘虛明淨一’을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효제부(孝悌賦)’에서 “하늘

    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 됨이여(乾而父兮坤而母)/ 심원하여 마지않음은 하늘의 밝은 명(明命)이라(穆不已兮明命)/ 순일하여 거짓이 없는

    것이 누구인고(孰純一而無僞)/ 내가 천명을 받아 본성[性]으로 삼은 것일세(予受之以爲性)”[노수신, 『소재집』 1,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

    원, 2013), 50쪽]라고 하여 마음의 ‘순일무위(純一無僞)’를 이야기한다. 48) 각주 35, 36을 참조. 49)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6), 218쪽. 번역을 일부 수정함. 50) 등잔 얹는 받침대를 말한다. 51) 다른 본에는 背로 되어 있음. 52) 노수신, 『소재집』 3,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6), 223쪽.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21

    곡식이 없거나 장리를 조사할 수 있으랴 無儲可按贓

    등잔 앞에서 떨어진 불똥이나 핥고 燈前舐墮燄

    남은 양식 단지 밖이나 빙빙 도누나 甁外遶餘糧

    고양이를 키워서 잡게 하지도 않거니와 不畜猫相厄

    어찌 게를 불태워 재앙을 만들 게 있으랴 那焚蟹作殃

    나는 야 쥐 잡을 꾀를 쓰지 않고 機關息吾巧

    제 놈들 바삐 배 채우러 다니도록 두노라 口腹任渠忙

    소재는 ‘관-찰’하며 “나는 야 쥐 잡을 꾀를 쓰지 않고/제 놈들 바삐 배 채우러 다니도록 두노라”며 ‘서로 함께

    있는’ 편을 택한다. 이렇게 ‘잡지 않고 두는’ 것은, 마치 장-뤽 낭시가 “무엇이 있음보다, 존재보다 더 공동적일 수

    있는가? 우리는 있다.”53) “우리는 공동 내에, 서로가 서로와 함께 있다.”54)고 하는 태도이다. 타 생명체를 소유하

    거나 혹은 나와 그것을 애써 분리하려 들지 않는다. 쥐만이 아니다. 소재는 ‘파리[蠅], 제비[燕], 까치[鵲], 까마귀[烏], 귀뚜라미[蛬], 매미[蟬], 반딧불이[螢], 개구리

    [蛙], 뱀[蛇], 개미[蟻]’라는 시도 남겼다. 파리[蠅]55)

    눈이 내리자 막 이상함을 기록하고 有雪方書異

    얼음 없음은 평범하여 안 기록하는데 無氷已削常

    너 나온 게 가장 좋은 때를 얻었어라 爾生爲最得

    하늘의 뜻이 한쪽만 번창하게 했구려 天意遣偏昌

    백흑은 제 스스로 변환시키거니와 白黑自變幻

    밤낮을 아는 건 그 누가 시킨 것일까 昏明誰主張

    분잡스레 만물이 변화하는 가운데 紛紛萬物化

    밤낮 하루 동안을 안석에 기대 있노라 隱几一陰陽

    제비[燕]56)

    뭇 새끼들도 저절로 시기를 아는데 衆雛自識機

    서로 데불고 어느 가지에서 자는고 却與宿何枝

    나그네 맘은 전혀 때를 생각 않는데 客57)興都無戀

    추사(秋社)일58)을 기다리며 잠시 머무는구나 遲留爲社期

    소재는 ‘파리[蠅]’에서 “백흑은 제 스스로 변환시키거니와/밤낮을 아는 건 그 누가 시킨 것일까”라며 자연스런

    ‘만물의 변화’를 말하고, ‘제비(燕)’에서도 “뭇 새끼들도 저절로 시기를 아는데...나그네 맘은 전혀 때를 생각 않는

    53) 장-뤽 낭시, 『무위無爲의 공동체』, 박준상 옮김, (인간사랑, 2010), 183쪽. 54) 장-뤽 낭시, 『무위無爲의 공동체』, 박준상 옮김, (인간사랑, 2010), 201쪽. 55)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6), 216-7쪽. 56)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5), 347쪽. 57) 다른 본에는 歸로 되어 있다. 58) 입추 이후 다섯 번째 무일(戊日). 제비가 따뜻한 남쪽을 찾아 날아가는 시기를 말한다.

    22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데”라며 제비들의 ‘저절로 시기를 아는[自識機]’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한다. ‘저절로 아는[自識]’ 것은

    체화된 시간 계산법 즉 생체시계를 통해 ‘스스로 아는[自知]’ 것으로 생명체들의 ‘양지(良知)’를 말한다. 아래의 ‘까치[鵲], 까마귀[烏], 귀뚜라미[蛬]’에서는 ‘지저귐-울음소리’에 주목하며 스스로의 청각에 반응하며 자

    신의 심경을 풀어낸다. 까치[鵲]59)

    천상엔 은하의 다리가 단절되 天上河橋斷

    인간엔 석인(石印)조차 없어졌는데 人間石印無

    때로 와서 마른자리서 지저귀어 時來噪乾位

    나그네 글 보는 걸 방해하누나 誤客60)看書圖

    까마귀[烏]61)

    아침엔 지붕 모서리 서쪽에서 울더니 朝啼屋角西

    저녁엔 지붕 모서리 동쪽에서 우는구나 暮啼屋角62)東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은 至今世上人

    너희들 암컷 수컷을 모른단다 不識爾雌雄

    귀뚜라미[蛬]63)

    가을바람에 희미한 달 비껴 있고 西風淡月斜

    더부룩한 숲에 이슬 한창 내릴 제 露墮暗叢裡

    한 울음소리는 낭군을 사모하는 듯 一聲思君子

    한 울음소리는 낭군을 원망하는 듯 一聲怨君子

    그리고 개구리(蛙)에서는 ‘툭 튀어나온 눈/우뚝 쳐든 머리’의 생김새에 주목하고, 스스로의 시각에 반응하며 심

    경을 풀어낸다. 개구리[蛙]64)

    툭 튀어나온 눈에 아무런 재주도 없건만 突眼無他技

    머리 우뚝 쳐들고 스스로 잘난 체하네 昂頭妄自尊

    고인65)이 모국(牡鞠)66)을 태워 너희들을 해쳤으니 古人焚牡鞠

    너희들에겐 실로 원통한 일이었으리 於汝實爲冤

    59)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5), 348쪽. 60) 다른 본에는 我로 되어 있다. 61)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5), 349쪽. 62) 옥각(屋角)이 다른 본에는 정수(庭樹)로 되어 있다. 63)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5), 350쪽. 64)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5), 353쪽. 65) 『周禮』

    「추관(秋官) 괵씨(蟈氏)」에 나오는 ‘괵씨(蟈氏)’를 말한다. 66) 씨가 열지 않는 숫 국화를 말한다.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23

    이어서 아래의 ‘반딧불이[螢], 매미[蟬]’에서는 만물의 변화에 순응하는 생명들의 섭리를 말한다. 반딧불이[螢]67)

    단지 반짝반짝 날아다니면서 只作皎皎行

    사람에게 가는 곳을 기억하게 할 뿐인데 使人記所向

    미세한 물체가 한밤중엔 왕성했다가 微質旺中宵

    한밤중을 지나면 빛을 잃어버리네 不然光已喪

    매미[蟬]68)

    다행히 썩은 나무가 변화한 것이니 幸因朽木化

    어찌 입과 배를 채울 욕심이 있으랴 寧有口腹慾

    높은 나무에 한평생 신세를 부쳤으니 高樹付行藏

    응당 바람 이슬 많은 것도 사양하리 應辭風露足

    그리고 ‘개미[蟻]’에서는 군신 사이의 의리[君臣有義]라는 상생과 서로 다툼[戰爭]이라는 상극을 동시에 이야기

    하고, ‘뱀[蛇]’에서는 ‘해독[毒]=피해[害] vs 치유[療]=이득[利]’/‘인(仁) vs 불인(不仁)’이라는 상반된 것의 공존을 이

    야기 한다. 하나의 생명체가 가진 양면성을 말하면서 인간의 양면성을 은유한다. 개미[蟻]69)

    본디 군신의 의리를 알고 있는데 固已識君臣

    어찌하여 전쟁을 일삼는고 如何事戰爭

    시끄러이 강약의 형세에 의지하여 紛紛强弱勢

    비린내 그리는 맘을 끊지 못하누나 不斷慕羶情

    뱀[蛇]70)

    네가 살아서는 사물에 해독을 끼치지만 爾生能毒物

    네가 죽어서는 사람 질병을 치유하누나 爾死能療人

    이해관계가 이미 이와 같으니 利害旣如此

    조물주는 인하고도 불인하구나 天公仁不仁

    위에서 보듯 소재는 시라는 언어를 통해서 나와 생명체 ‘사이’에 스스로를 안내한다. 소재는 그 ‘사이’에서 ‘파

    리[蠅], 제비[燕], 까치[鵲], 까마귀[烏], 귀뚜라미[蛬], 매미[蟬], 반딧불이[螢], 개구리[蛙], 뱀[蛇], 개미[蟻]’와 은유적

    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한다. 이처럼 시적언어는 논리적 언어와 다르다. 논리적 언어는 분절화적 규정을 통해 규정되지 않은 타자를 이물질화

    67)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5), 352쪽. 68)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5), 351쪽. 69)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5), 355쪽. 70) 노수신, 『소재집』 2,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5), 354쪽.

    24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해서 혐오-배제하며 나와[자]-남[타] 사이를 분리하여, 간극을 만든다. 그러나 시적 언어는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이른바 ‘타자를 우리들 속으로, 우리들을 타자 속으로’ 품는, 즉 서로 상대방 속으로 들어서서 뒤섞이는 ‘상호내

    속’(相互內屬. Ineinander)의 기능을 갖는다. 이것은 사람을 포함한 동물, 식물의 생명체만이 아니라 무생물(물질, 물건) 같은 것의 생멸변화에 직면할 때도 그렇다. 예컨대 짐승이 울부짖을 때, 아름다운 건물이 무너질 때, 산이나

    바위가 부서져 내릴 때 우리는 연민의 정, 고통,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런 심정들이 언어로 포착될 때 ‘상호내속’ 이 이루어진다. 소재의 시에서, 소재는 생명체(=타자)와 자신 ‘사이’의 몸으로 공명(共鳴)한다. 소재는 생명체들의 살아있는 소

    리, 몸짓의 율동을 관-찰하고 공명하며 자신을 비추어본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속

    에서, 소재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은 사물들의 공명에 진동하는 과정”71)임을 보여준다. 4. 고통에 대한 서사와 미학

    1) 고통의 기록의 예

    헨리 지거리스트는 『문명과 질병』72)에서 “인간의 질병은 사회와 문명이 만든다. 그리고 질병은 인간의 역사발

    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아울러 “질병은 저 혼자 있을 수 없고, 병에 걸린 인간과 더불어 존재한

    다.”73) 그래서 인간이 병으로 인해 겪는 고통은 문학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

    니나』 속 여주인공은 연인의 아기를 낳은 뒤 산욕열로 고생하는데 그녀의 발병이 이야기 전개의 정점이자 전환점

    을 이룬다.74)

    역사 속의 자료에서 볼 때, 고통의 기록이 극대화되는 것은 아마도 위대한 자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일

    것이다. 예컨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서서히 죽어가는 장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숨을 거두기까지

    의 장면, 붓다가 식중독에 걸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그것이다. 고통의 기록은 지극히 단순화시켜 말하면, ‘육체적 고통이 정신을 어떻게 동요시키는가?’의 대목에서, 그것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이성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이고 감성적인가?’인가에 주목할 수 있다. 서양 근대의 데카르트는 『정념론』(Les Passions de l’âme. Passions of the Soul, 1649년)에서, 육체와 정신

    이 대립하는 이원론적 입장에서 물체=신체가 정신에 작용하는 이른바 정신의 수동(受動)을 정념(情念. passion)이

    라 규정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경험적, 과학적 관찰을 통해 그 주된 것을 ‘경이, 사랑, 미움, 욕망, 기쁨, 슬픔’으

    로 요약하고, 여기서 파생되는 특수한 감정들(질투, 존경, 수치, 경멸 등)을 밝히고 있다.75) 데카르트는 ‘130항:

    눈에 통증을 생기게 하는 것은 어떻게 울음을 일으키는가’에서 보듯이 ‘고통→눈에서 나오는 증기→눈물’이라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기술한다.76) 나아가 ‘131항: 어떻게 슬픔으로 인해 우는가’, ‘132항: 눈물을 수반하는 신음에

    71) 알폰소 링기스, 『아무 것도/공유하지 않은/자들의/공동체』, 김성균 옮김, (바다출판사, 2013), 149쪽. 72) 헨리 지거리스트, 『문명과 질병』, 황상익 옮김, (한길사, 2008)

    73) 황상익, 「인류 역사는 곧 질병에 대한 역사이다」, 『문명과 질병』, (한길사, 2008), 14-15쪽. 74) 헨리 지거리스트, 『문명과 질병』, 황상익 옮김, (한길사, 2008), 296쪽 참조. 75) 르네 데카르트, 『정념론』, 김선영 옮김, (문예출판사, 2013)

    76) 르네 데카르트, 『정념론』, 김선영 옮김, (문예출판사, 2013), 120쪽 참조.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25

    대해’, ‘133항: 왜 아이와 노인은 쉽게 우는가’, ‘134항: 어떤 아이들은 왜 우는 대신에 창백해지는가’라는 식으로,

    ‘신체에서 정념으로’ 바뀌는 메카니즘을 냉정하게 분석하여 제시하고자 한다.77) 이렇게 데카르트는 고통의 발생을

    ‘육체 vs 정신’의 이원론자 답게 객관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데카르트의 정념론 보다 60여년 전에 기록된 이순신의 『난중일기』(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끝난 1598

    년까지의 일들을 간결, 명료하게 기록한 일기)에도 고통의 관찰이 보인다. 예컨대 갑오년(1594년) 3월 6일부터

    24일까지 18일간의 기록을 발췌해본다.78)

    7일: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8일: 병세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기운이 더욱 축이 나서 종일 고통스러웠다. 9일: 기운이 좀 나은 듯하므로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아프긴 해도 다른 증세는 없었다. 10일: 병세가 차츰 덜했지만 열기가 치올라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까 뿐이었다. 11일: 병세가 훨씬 덜하고 열도 내리니 참으로 다행이다. 12일: 몸이 매우 불편했다. 13일: 몸은 차츰 나아지는 것 같으나 기력이 매우 쇠하였다. 14일: 몸은 나은 듯하지만 머리가 무겁고 상쾌하지 못했다. ... 종일 몸이 불편했다. 15일: 종일 신음했다. 16일: 몸이 몹시 불편했다. 17일: 몸이 상쾌하게 회복되지 않았다. 18일: 몸이 몹시 불쾌했다. 19일: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20일: 몸이 불편하다. 21일: 몸이 불편하다. 22일: 몸이 약간 나아진 것 같다. 23일: 몸이 여전히 불편하였다. 24일: 몸이 약간 나아진 것 같다.

    『난중일기』에는 병으로 인한 몸의 고통이 치유되는 과정을 절제된 형식으로 냉정,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처럼 간명한 기록이 있는 반면 치밀하고도 감성적으로 한 인간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예도 있다. 즉

    1786년 시집을 갔다가 1791년 21세의 남편을 잃고서 1792년 자신의 삶과 남편의 발병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

    을 애절하고도 세밀하게 기록한 풍양 조씨의 『자기록』(‘나에 대해 쓰다’는 뜻)이 그렇다.79)

    물론 고통은 반드시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신적, 내면적인 고통도 있다. 일찍이 고타마 싯달타가 삼명육통

    (三明六通)의 과정을 겪고 대각(大覺)에 이르듯, 선사들의 경우에서 마장[魔]이니 ‘선병(禪病)’이니 하는 정신적 장

    애를 겪고 나서 비로소 깨달음과 평온에 이르는 과정도 살필 수 있다. 예컨대 명나라 승려 감산덕청(憨山德清:

    1546-1622)의 자전(自傳)에 적혀 있는, 그가 겪는 5일간의 정신변화 과정은 흥미롭다.80)

    77) 르네 데카르트, 『정념론』, 김선영 옮김, (문예출판사, 2013), 120-3쪽 참조. 78) 이순신,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민음사, 2010), 166-8쪽. 79) 풍양 조씨, 『자기록』, 김경미 역주, (나의 시간, 2014)

    26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근현대의 학자인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 1897-1966)은 4년간 이상 지속된 불면증의 고통과 그 치유 기록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참선하다가 상기(上氣)가 되면 물을 맞으라고 한다. 그러면 곧 물을 맞는 관(觀)을 한다. 눈을 감고 자기 머리 위에 폭포

    수가 쏴 하고 쏟아지는 것을 관(觀)하고 있으면 그 상기(上氣)가 내려와서 낫는다. 내가 체험한 바, 불면증에는 시계를 발

    밑에 두고서 눈을 감고 시계 소리만 들으면 잠이 온다. 내가 20여 세 때에 시간이 무엇이며 공간이 무엇인가, 유시유종(有始有終)인가 등의 문제로 만 4년 간 상기(上氣)로 불

    면증에 걸렸었다. 그때에는 쥐가 수백 마리 발밑으로 지나간다. 그리고 또 머리까지 올라간다. 눈만 감으면 그러하다. 25

    세 때에는 더욱 심하여졌다. 그러다가 구름이 가면 달이 가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을 깨달은 후 불면증이 없어졌다. 그리고

    50이 넘어 한 가지 체득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연단법(煉丹法)이다. 불면증을 근본적으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법은 연단

    (煉丹)에 있다는 것이다. 곧 생각을 제하(臍下) 단전(丹田)에 집중하고 있으면 모든 기분이 단전(丹田)에 귀일된다.81)

    이렇게 압축적으로 간략하게 기록한 것은 이지적, 철학적 사색에 따른 것이지만 만일 이것을 세세하고 길게 기

    술한다면 더 많은 내용이 추가될 것이다. 이런 대목은 다음에서 소재가 서사한 두통에 대한 시를 통해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80) 감산, 『감산자전』, 대성 옮김, (여시아문, 2002), 71-72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문자습기(文字習氣: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는 습)가 마장[魔]이로군!”

    (중략)

    “이것이 바로 법광 선사가 말하던 소위 선병(禪病)이라는 것이군. 내가 지금 그 경계에 걸렸으니 누가 나를 치유해 줄 것인가? 아무도

    없구나. 내 스스로 깊은 잠을 자서 이것을 소멸시켜야겠다.”

    그래서 나는 방문을 닫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처음에는 마음이 가라않지 않아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앉아 있었더니 마침내

    깊은 잠이 든 것과 같은 상태로 들어갔다. 동자(童子)가 와서 문을 똑똑 두드렸지만 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자 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러

    나 나는 응답이 없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이에게 물어 본 뒤에 창문을 뚫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보니 내가 승복으로 몸을 감싼 채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불러 보아도 내가 반응이 없고, 몸을 흔들어 보아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호공은 서재의 불공 탁자[불공안] 위에 놓여 있던 요령을 생각해 냈다. 호공은 그것을 집어들고 나에게 그것이 어디에 쓰는 물

    건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것이 인도에서 스님들이 삼매에 들었을 때, 깨워지지 않으면 그것을 흔들어서 깨우는 도구라고

    설명해 주었다.

    호공은 문득 그 기억이 나자, ‘아하, 스님이 삼매에 드셨구나’ 생각하고 급히 요령을 가져와서 내 귓가에다 그것을 수십 번 흔들어 댔

    다. 그러자 비로소 내가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눈을 떴을 때 내 몸이 어디 있는지 잘 몰랐다.

    공(公)이 말했다.

    “제가 와 보니 스님께서 방문을 잠그고 앉아 계시더군요. 그런지 벌써 5일이 지났습니다.”

    내가 말했다.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잠깐인 줄 알았는데.”

    말을 마치고 나서 나는 고요히 앉아서 찬찬히 관찰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어디서 내가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모두 꿈같이만 느껴졌다.

    나는 다시 산중으로 돌아갔고, 다시 한 번 행각에 나섰다. 그러나 내가 보고 듣는 것이 하나같이 꿈속의 일만 같이 보였다.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잡히지 않았고,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같이 보였다. 이때의 경계는 마치 비가 그치고 구름이 밀려간 뒤에 광활한 창공같

    이 깨끗했다. 일체가 고요하여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은 텅 비고, 경계는 고요했으며(心空境寂) 그 즐거움은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없었다. 81) 김정설, 『풍류정신』, 진교훈 교열ᆞ해설, (영남대출판부, 2009), 209쪽; 김범부, 『東方思想講座(抄)』, 李鍾益 整理, (東洋醫藥大學, 1963),

    122쪽.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27

    2) 몸의 고통에 대한 서사와 미학

    소재는 많은 시를 남겼다. 이 가운데서도 ‘두통에 대한 시 85운을 지어서 아픈 증상을 갖추 서술하여 스스로 마

    음을 풀다’(頭疼詩八十五韻備述疼狀以自遣)82)라는 시는 독특하다. 이 시는 그의 많은 시편 가운데서도 소재 사상의

    성격을 대변할만한 매우 돋보이는 서사와 미학을 보여준다. 서술 가운데는, 마치 『장자』

    「제물론」에서 땅의 음악

    소리 즉 ‘지뢰(地籟)’를 기술한 듯한 흥미로운 묘사를 만나기도 한다. 논지 전개를 위해, 한 편의 시를 임의적으로 abc...i로 나누고 내용에 따른 제목을 붙여서 살펴보기로 한다. a 두통(=편두통)의 시작

    ‘두통에 대한 시 85운을 지어서 아픈 증상을 갖추 서술하여 스스로 마음을 풀다’

    (頭疼詩八十五韻備述疼狀以自遣)

    가정 계축년이요 嘉靖癸丑歲

    월건으로 해월인 시월 십육 일에 旣望建亥月

    노자가 바야흐로 글을 읽는데 盧子方讀書

    편두통이 갑자기 발작하는구나 偏頭疼暴發

    어찌 이렇게 갑자기 발작한단 말인가 是何發之暴

    고질병이 그치는 때가 없구려 痼疾罔時歇

    거년에도 몹시 괴로워 끙끙 앓았는데 前年劇唸㕧

    금년에도 몹시 괴로워 정신이 멍해지네 今年更慌惚

    위 내용으로 보면 이 시는 가정 계축년 즉 1553(명종8)년 10월 16일로 진도 유배기에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이 두통은 전년(1552년)에도 있었다고 한다. 아래처럼, 소재는 두통의 상황과 고통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b 두통의 상황

    처음 막 발작할 때에는 當其初發時

    오직 속히 쓰러져 죽고만 싶다가 惟欲速僵蹶

    잠시 후에 통증이 진정되고 나서야 少焉及痛定

    바야흐로 내 머릿골이 있음을 깨닫겠네 方覺在我顝

    늙은 여종은 술을 찾아 데워 주고 老婢索酒煨

    늙은 노복은 급히 방구들에 불을 지펴 주어 長鬚亟煖堗

    이불 두껍게 덮고 눠 봐도 끝내 땀이 안 나서 厚被竟莫汗

    일어나서 다시 버선을 신고 앉았노라니 起而復帶襪

    오른쪽 뒤통수에 통증이 극심해져라 涔涔後頂右

    어찌 그리도 통증이 갑자기 심해진단 말인가 何其興也勃

    82) 노수신, 『소재집』 3,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6), 313-327쪽.

    28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두통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c 고통의 개괄적 묘사

    살점을 한점한점 툭툭 두드려 오는 듯 搯入切切肉

    모지라진 짧은 머리털을 낱낱이 뽑아내는 듯 鑷出種種髮

    살가죽을 조각조각 벗겨 내는 듯 剝片片皮

    도끼로 휙휙 뼛조각을 부서뜨리는 듯 砉碎碎骨

    아무 소리도 안 들려라 청관을 빼내 버린 듯 沈沈挺聽官

    고동치는 기세는 천돌에 은은히 울리누나 洶洶隱天突

    눈꺼풀을 뜨고 똑바로 살펴보기도 하고 矘矘瞳瞼督

    입 벌리고 치아를 딱딱 다지기도 해 보네 呯呯齻齞揭

    신정은 언뜻언뜻 번복을 해 대고 神庭倏飜覆

    백회는 때때로 뜨다 잠기다 하고 百會時浮沒

    지쳐서 흐른 진땀은 들들 볶여 말라 가고 勞液煎煎枯

    요동치는 맥혈은 술술 새어 고갈되누나 盪血滲滲竭

    정신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고 精神集若散

    수족은 더웠다가 이내 썰렁해지곤 하네 手脚熱乍瘚

    아이가 달려와 해골을 끌어안을 땐 兒奔抱髑髏

    지탱하는 소리가 불안하기만 하여라 枝撑聲窸窣

    두통에 대해 개괄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 d 고통에 대처ᆞ1

    혹은 솜 둔 옷을 껴입기도 하고 或重以縕袪

    혹은 곱고 윤택한 모직물로 바꿔도 입고는 或換以沃䋐

    머리로 병풍 받고 곧 베개에 엎드려 있노라면 觸屛旋伏枕

    우뚝한 흙덩이처럼 우매할 뿐이로다 怐愗堛崒屼

    진실로 온갖 병증을 다 갖추었으니 百證信具備

    수많은 증상에 어찌 하나인들 빠뜨렸으랴 萬狀詎一闕

    고통에 대해 옷을 껴입고 엎드리는 등 대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 고통의 정도와 양태에 대한 정밀 묘사

    혹 급히 찍어 대는 건 딱따구리 같기도 하고 或敲急若鴷

    혹 후려치는 건 송골매 같기도 하고 或搏戞若鶻

    혹은 어미를 쪼는 올빼미 같기도 하고 或若啄母梟

    혹은 두더지를 씹어 먹는 물수리 같기도 하고 或若噍鼴鷢

    혹은 그림자를 쏘아 대는 물여우 같기도 하고 或射影若蜮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29

    혹은 꼬리의 독침을 쏘아 대는 전갈 같기도 하고 或螫氣若蠍

    혹은 창자를 가르는 살무사 같기도 하고 或若拆腸蝮

    혹은 창으로 찌르는 방게 같기도 하고 或若鬪戟蚎

    혹은 경알이 물어뜯는 것 같기도 하고 或若獍猰噬

    혹은 들소나 놀란 말이 깨무는 것 같기도 하고 或若犦䮭齕

    혹은 성난 범이 발톱으로 할퀴는 것 같기도 하고 或若虤爪攫

    혹은 멧돼지 어금니로 찔러 대는 것 같기도 하고 或若狶牙揬

    혹 얕게는 까끄라기에 찔린 것 같기도 하고 或淺若受芒

    혹 깊게는 말뚝을 쳐 대는 것 같기도 하고 或深若椓橛

    혹 잘게는 자자형을 가하는 것 같기도 하고 或細若利黥

    혹 크게는 무서운 도끼로 찍는 것 같기도 하고 或鉅若威銊

    혹은 쇠북을 치듯이 때리기도 하고 或摐若鐘鏞

    혹은 공갈을 연주하듯 치기도 하고 或揳若椌楬

    혹은 천둥 벼락으로 때리는 것 같기도 하고 或撇若靂

    혹은 비갈에 명을 새기는 것 같기도 하고 或劂若銘碣

    혹은 탄환으로 과녁을 맞히는 것 같기도 하고 或彈若中的

    혹은 대포를 쏘아 방패를 내던진 것 같기도 하네 或奅若投瞂

    고통의 정도와 양태에 대한 정밀 묘사이다. 이 대목은 『장자』

    「제물론」의 ‘땅의 음악소리’=‘지뢰(地籟)’를 기술

    한 대목을 읽는 듯하다. f 고통의 자연ᆞ문화사적 이해

    이게 바로 공공이 성내어 莫是共工怒

    우뚝한 부주산을 들이받고 다친 게 아닐까 傷於不周矹

    그렇지 않다면 지백이 죽은 뒤에 不然智伯死

    그의 두골을 끊어 술그릇으로 만든 그것이겠지 斷爲飮器兀

    힘으로 산봉우리 뽑으니 산봉우리가 넘어진 듯 力拔山冢踣

    칼로 땅을 찌르매 샘물이 콸콸 흐르는 듯도 하네 劒刺泉水汨

    완악한 이양의 억센 주먹에 맞은 듯도 하고 老拳李陽頑

    우악스러운 주해의 철퇴를 맞은 듯도 하여라 神槌朱亥悖

    장주가 초나라에서 두드림을 받은 듯하고 如周捶於楚

    오자서가 월나라에서 눈을 뺀 것 같기도 하고 如胥眼於越

    화타의 금비로 눈을 잘못 긁어낸 듯도 하고 如佗篦謬刮

    영 땅의 도끼로 어지러이 찍어 대는 듯도 하구나 如郢斤亂捽

    혹은 마치 오장원에서 或如五丈原

    수많은 쟁기로 한때에 밭을 가는 듯도 하고 萬犁一時垡

    또는 공류의 창고에서 又如公劉倉

    수많은 절구에서 일시에 절구질을 하는 듯도 하네 萬杵一時䑔

    참혹하기는 마치 진도사에서 패전하여 慘如陳濤敗

    30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어지러이 짓밟혀 전차들이 절단 난 것 같기도 하고 蹂躪捩輗軏

    맹렬하기는 마치 적벽의 화공전에서 烈如赤壁火

    수많은 전함들이 찢겨 흩어진 것과도 같아라 蕩析殘艦橃

    처음에는 쥐가 담장을 뚫는 것처럼 느껴지더니 初如鼠穿墉

    끝내는 토끼가 굴속에 숨은 것처럼 느껴지네 終如兎藏窟

    혹 잔인하기는 구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或忍若灸砭

    혹 바싹 켕기는 건 재갈을 먹인 것 같기도 하고 或緊若箝钀

    혹 음암한 느낌은 짐독 같기도 하고 或暗若鴆蠱

    혹 꽉 죄는 느낌은 족쇄를 채운 것 같기도 하고 或拘若桎桲

    혹 움츠러듦은 추위에 움츠린 거북과도 같고 或縮若凍龜

    혹 움직일 땐 놀라 달아나는 짐승과도 같고 或動若驚狘

    혹 위태로운 느낌은 얼음을 밟는 것과도 같고 或危若履氷

    혹 멍해진 느낌은 바다에 둥둥 뜬 것과도 같고 或怳若漂渤

    혹은 송의 익새가 바람에 밀려 후퇴하는 것과도 같고 或宋鷁退風

    혹은 오나라 소가 달을 보고 헐떡이는 것과도 같고 或吳牛喘月

    혹 눈 흐림은 안개 속의 꽃을 보는 것과도 같고 或徒見霧花

    혹 코로는 악취를 흠뻑 맡는 것 같기도 하고 或多聞臭馞

    혹 담은 뭉쳐 아교처럼 딱딱하기도 하고 或痰聚爲膠

    혹 살에는 때가 끼어 먼지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或膩凝爲

    혹 살가죽은 쭈글쭈글 말려 까칠하고 或卷臠而澁

    혹 정신은 흩어져 혼란스럽기도 하여라 或渙散而滑

    원기는 경각 사이에 착란을 일으키고 元氣亂頃刻

    객사는 창졸간에 변동을 거듭하누나 客邪變倉卒

    두꺼비가 점차 달을 먹어 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侵侵蝕蝦蟆

    홀연히 살별이 나타나는 느낌이 들기도 하네 忽忽見彗孛

    고통을 자연물, 문화적 차원에서 묘사하여 다양하게 이해하고 있다. g 고통에 대처ᆞ2

    저주와 부적은 생각할 방법도 없거니와 詛符計無施

    의약과 복서의 방술도 본디 무디었으니 醫卜術已鈯

    죽을 때까지 자신을 책망할 뿐이거니와 引分死後已

    혹 때로는 돌돌을 허공에 쓰기도 하노라 或時書咄咄

    고통에 대해 부적, 의약, 복서, 방술이 무용지물이며 ‘죽을 때까지 자신을 책망할’ 방법 밖에 없고, ‘괴이하게 여

    겨서 놀라는 모양’인 ‘돌돌’이라는 글자를 허공에다 써보기도 한다. h 고통의 연원에 대한 진단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31

    오일이 지나서는 더욱더 심해져서 越五日滋甚

    어눌함을 체인한 듯 묵묵히 앉아 있다가 泯默如認訥

    우연히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니 偶然入華胥

    두 아이가 와서 나를 알현하고 有二豎子謁

    말하기를 질병은 성인이 삼가는 바인데 謂疾聖所愼

    당신은 실로 자신을 스스로 친 것이요 而子實自伐

    스스로 친 것 또한 사리상 타당키도 하니 伐却理亦宜

    감히 자초지종이나 듣기를 청합니다 하네 敢請聞始卒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슬퍼하다가 予愕然以戚

    얼굴을 찡그리며 그들에게 고하기를 蹙頞而告曰

    옛날 우리 중종대왕께서 昔在吾中宗

    병세가 매우 위독해졌을 때 大漸勢臲卼

    마침 나는 분수 밖의 관직에 임명됐는지라 時予謬通籍

    마냥 허둥지둥 고달프게 지내면서 長遑遑矻矻

    수십 일 동안 먹고 자는 것도 폐하고 寢食廢數旬

    눈서리 크고 작은 바람까지 무릅쓰고 지냈는데 冒霜雪䫻䬄

    중종 인종 두 국상을 연거푸 치르고 나서는 大卹疊遘遇

    상한에다 더위까지 먹어 기력을 잃은 터에 傷寒復中暍

    갑자기 순천에 유배됐다가 이어 진도로 이배돼서는 俄遷順移珍

    독한 장기가 신궐에 전염되었지 瘴癘染神闕

    그 후로는 셋집에서 덥고 서늘함을 갖추 겪으면서 僦備嘗炎凉

    보리 싸라기 죽만 먹기도 몹시 싫증이 났고 餬厭苦糠麧

    혹 술잔은 만나는 대로 들이마시고 나서 杯觴或逢場

    취하면 항상 나무 그늘에 눕곤 하였으니 醉臥常依樾

    형세가 비록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雖其勢然耳

    끝내 내 스스로 병을 만든 것임을 아노라 하였네 畢竟自貽厥

    두 아이는 내 강퍅한 성질을 흉잡아 豎也短我愎

    상제께 아뢰어 나를 꽤나 헐뜯었지만 上訴頗相訐

    상제께서는 나의 마음을 환히 살피시고 上帝鑑我心

    나의 넋이 흩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憐我魂隕越

    급히 무양을 인간 세계에 내려보내서 急遣巫陽下

    초혼을 해 주고 벌을 주지 않게 하면서 以招不以罰

    그 사람에게 밝게 말해 주어 可明語其人

    맘을 조금 놓아서 너무 동요하지 않게 하라 하시고 少寬無太扤

    이미 두 아이를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두시어 已囚豎莫逃

    제멋대로 포학을 부리지 못하게 하시었다 使莫肆暴猝

    여기서는 편두통이 연원=원인이 “자신을 스스로 친 것”임을 기술한다. 그 내용을 소재는 자술한다. “순천에 유

    배됐다가 이어 진도로 이배돼서는/독한 장기가 신궐에 전염되었지/그 후로는 셋집에서 덥고 서늘함을 갖추 겪으

    32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면서/보리 싸라기 죽만 먹기도 몹시 싫증이 났고/혹 술잔은 만나는 대로 들이마시고 나서/취하면 항상 나무 그늘

    에 눕곤 하였으니/형세가 비록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끝내 내 스스로 병을 만든 것임을 아노라.” 결국 이

    병은 ‘스스로 만든 병’임을 알고 있다. i 고통의 치유법과 위로

    또 내게 이르길 네 뜻을 내가 관대히 동정하노니 爾意予自恕

    나의 명을 너는 경홀히 여기지 말거라 予命爾罔忽

    요절한 자도 꼭 수척하지만은 않는 것이요 夭者未必瘦

    장수한 자도 꼭 살찌지만은 않는 것이거니와 壽者未必腯

    상처와 고통이 많은 자가 혹 오래 살기도 하고 瘡痍或久生

    건강한 자가 혹 먼저 죽기도 하는 거란다 康强或先歿

    한신 팽월은 후왕으로서 삼족이 전멸당했고 韓彭醢侯王

    백이ᆞ숙제는 고사리만 캐 먹다가 굶어 죽었지 夷齊餓薇蕨

    어찌 송조의 미모를 쓰겠느냐 何用宋朝美

    변화의 발꿈치 베인 것도 해로울 것 없느니라 無傷卞和刖

    위의 두 가지 경우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二者無奈何

    네가 정도를 지키다가 죽는다면 爾得正而

    비록 죽는다 해도 다행하고 편안하리니 雖幸而安

    약 안 쓰고 기쁨으로 병을 다스릴 수 있으리라 勿藥喜可伐

    어부는 참으로 과격한 말을 하여 漁父誠激言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라 했지만 波揚以泥淈

    공자는 이르기를 자신을 속이지 않고 魯叟不欺汝

    충신하면 오랑캐 땅에서 죽어도 좋다 하였지 忠信死蠻羯

    너는 또 도깨비의 재해를 막고 있는 처지거니 且禦海魑魅

    오직 두려워할 건 초나라 《도올》일 뿐이니라 可懼楚檮杌

    질병은 혹 부모님께 걱정을 끼칠 수 있을지라도 疾或憂父母

    행실로 어찌 문벌을 더럽혀서 되느냐고 했다 하였네 行豈玷門閥

    상제의 명을 전해 준 무양에게 재배하여 사례하고 再拜謝子陽

    삼가 이 말씀을 내 홀에 기록하노라 謹以書諸笏

    자고 일어나 머리를 곧게 세우고 있노라니 睡起頭容直

    동방이 점차 밝아오는구나 杲杲東方昢

    여기서는 고통의 치유법과 위로를 말하고 있다. 먼저 위로 하는 내용은 “요절한 자도 꼭 수척하지만은 않는 것

    이요/장수한 자도 꼭 살찌지만은 않는 것이거니와/상처와 고통이 많은 자가 혹 오래 살기도 하고/건강한 자가 혹

    먼저 죽기도 하는 거란다.”고 하며, 그 실례를 든다: “한신 팽월은 후왕으로서 삼족이 전멸당했고/백이ᆞ숙제는 고

    사리만 캐 먹다가 굶어 죽었지/어찌 송조의 미모를 쓰겠느냐/변화의 발꿈치 베인 것도 해로울 것 없느니라.”

    그러나 “위의 두 가지 경우는 어찌할 수 없는 일”임을 알고 “네가 정도를 지키다가 죽는다면/비록 죽는다 해도

    다행하고 편안하리니/약 안 쓰고 기쁨으로 병을 다스릴 수 있으리라.”며, ‘정도를 지키며 살다 죽는’ 것이 ‘약 안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33

    쓰고 기쁨으로 병을 다스리는’ 법임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소재는 두통의 묘사를 비롯하여, 두통의 연원, 치유방법에 대해서 하나의 시편을 통해 연속하여 제시하

    고 있다. 결국 “두통은 스스로 만든 것이고, 정도(正道)로 살다 죽는 것이 최고의 약이자 위로”임을 언급하고 있다. 버질 올드리치(V.C.Aldrich)는 ‘재현’(representation)과 ‘표현’(expression)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것을 지시

    하는 ‘기술적 묘사’(descriptive portrayal)와 자유롭게 대상을 미적으로 구체화하는 ‘표현적 묘사’(expressive

    portrayal)를 구분하고, 후자를 ‘대상에 생기를 주는’ 방식이라 보고 있다.83) 무언가를 보고, 그리는 일(=그림 그

    리기) 언어로 표현하는 일(=시 쓰기)은 ‘주관화된 세계’로서, 사실=현실을 색채나 언어 속에다 괄호 묶고서 아름답

    고도 생기 있게 표현하고 묘사한다. 소재의 많은 시 가운데에는 ‘두통’에 대한 시 또한 그의 ‘주관에 의해 재구성

    된 표현’84)이다. 따라서 단순히 소재의 시적 묘사 능력만을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정신세계 나아가 고통이

    갖는 서사의 미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5. 나오는 말

    지금까지 1 소재(穌齋) 연구와 ‘소재학(穌齋學)’의 가능성, 2 생명체의 ‘관-찰’, 나와 생명체 ‘사이’의 공명, 3

    고통에 대한 서사와 미학을 논의하였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소재학(穌齋學)’ 규명을 위한 한 ‘방법’이었다. 첫째, 소재(穌齋) 연구와 ‘소재학(穌齋學)’의 가능성에서는 소재를 1 ‘주자학자’나 그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또

    는 2‘최초의 양명학자’이거나 약명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아니면 3 주자학도 그렇다고 양명학도 아닌 ‘이학

    (異學)’(正學을 벗어남=반주자학)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필자는 이런 흐름들을 참고하면서도 소재

    를 주자학이니 양명학이니 하는 틀에 고정시키지 않고 보류하면서, 소재학에서 보이는 ‘육왕(陸王)+나흠순+노장+

    불교’의 일체ᆞ융합적 성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주목하였다. 소재의 학술은 ‘일체ᆞ융합적 성향’이라는 방향

    일 것이다. 이것은, 소재가 도심ᆞ인심을 실체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마음으로서 ‘인심(人心)’의 동정

    (動靜)에 주목하고 더욱이 인심(人心)의 동정(動靜)에서 ‘무욕(無欲)과 정좌존심(靜坐存心)’을 지향하나, 외물(外物)과

    의 공명을 통한 ‘주체(=심신)의 능동적 역동성’을 중시하고 있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둘째, 소재가 남긴 시에는 생물들에 대한 세심한 ‘관(觀)-찰(察)’이 들어 있으며, 소재는 자신과 생명체 ‘사이’에

    서, 그 소리를 ‘듣거나’ 저들의 생김새를 ‘바라보는’ 공명을 통해서, 스스로의 내면을 서사해간다고 보았다. 결국

    소재 내면의 서사라는 것은 ‘그 스스로의 소리에 가 닿는’ 일=‘내가 내 글을 읽는’[我讀我書] 것임을 논하였다. 소

    재가 호를 주자의 “내가 내 글을 읽으니 병든 몸이 소생하는 것 같다”(我讀我書如病得穌)는 내용에 깊이 공감한 데

    집약되었다고 본다. 이 ‘소재’라는 한 칸의 공간은 ‘정흘(淨訖: 말끔하게 소제함)’ 즉 ‘허명정일(虛明靜一)’의 마음이

    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마음은 ‘불타서 재가 된 나무’ 같은 ‘허무적멸’의 고요가 아니라 ‘쾌활’, ‘형형’, ‘활물’, ‘상

    활(常活)’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셋째, 소재의 ‘고통에 대한 서사와 미학’에 대해서이다. 먼저 동서양의 고통에 대한 몇 가지 기록에 주목하고, 이어서 소재는 많은 시 가운데 ‘두통에 대한 시 85운을 지어서 아픈 증상을 갖추 서술하여 스스로 마음을 풀다’(頭

    83) 조요한, 『예술철학』, (미술문화, 2015), 42쪽 참조. 84) 조요한, 『예술철학』, (미술문화, 2015), 40-41쪽 참조.

    34 ∥ 소재 노수신의 詩와 ‘고통’의 서사 미학ᆞ최재목

    疼詩八十五韻備述疼狀以自遣)를 중심으로 고통에 대한 서사와 미학을 논의하였다. 이 작품은 소재 사상의 성격을

    대변할만한 매우 돋보이는 서사와 미학을 보여준다고 본다. 소재는, 두통의 묘사를 비롯하여, 두통의 연원, 치유방

    법에 대해서 제시하며, 결국 두통은 ‘스스로 만든 것이고, 정도(正道)로 살다 죽는 것이 최고의 약이자 위로”임을

    언급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이 “위대한 작가들에게 있어 완성된 작품은 평생 작업해오고 있는 단장(斷章)들보다는 덜 무게를 지

    닌다.”85)고 한 것처럼, 소재가 지향한 진정한 세계는 그의 논리적ᆞ체계적 저작에서보다 시구(詩句) 같은 단편적

    아포리즘 속에 더 진정한 것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소재의 두통에 대한 시는, 그가 피와 눈물로

    글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많은 시 가운데 특히 19년간의 진도 유배기에 산출된 것은 더더욱 그렇다. 여기에

    는 술 마심과 눈물,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충만하다. 이것은 그의 몸의 감각에서 살아나온 언어로서 머

    리로 억지로 만들어낸 언어가 아니었다. 예컨대 니체(F. W. Nietzsche, 1844-1900)는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에서 ‘피로 써라!’고 말한 바 있다. 즉 그는 “일체의 글 가운데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을 피워가며 책을 뒤적거리는 자들을 미워한다.”86)고 했다. 아울러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수필가ᆞ비평

    가인 에밀 시오랑(Emil M. Cioran. 1911-1995)은 「진리, 터무니 없는 낱말」에서 ‘신경과 살과 피로 고통스러워

    하는 신체적 진실’을 중시한다. 그는 “진실을 외면하고, 신경과 살과 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인간들이 말하는

    지혜를 혐오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생명의 진실, 우리의 불안에서 나오는 신체적 진실이다.”87)라고 하였다. 이처럼 소재의 시는 인생의 불안에서 나온 ‘생명의 진실, 신체적 진실’을 적은 글이었다. 적어도 소재의 시는 그

    자신의 피와 눈물을 언어화한 것이라 본다면, 소재의 시는 그가 지향했던 논리적 글쓰기 즉 「숙흥야매잠해」(夙興

    夜寐箴解),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과 같은 글보다도 그의 생활세계의 최전선을 살아있는 말로 워딩한 것이라

    할만하다. 논리는 이성적 냉정함-차가움으로 살아있는 따스한 감각적 언어들을 죽인다. 이처럼 논리에 의한 ‘감각

    적 언어의 죽음’이 휩쓸고 간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이 바로 ‘시’이다. 시는 생활세계의 ‘표현적 묘사’를 통해 언어

    적으로 살아있는 세계 즉 생명세계를 탄생시켰다. 조르주 바타유가 말하는 ‘에로티시즘’처럼, 소재가 두통을 “스스

    로 만든 것이고, 정도(正道)로 살다 죽는 것이 최고의 약이자 위로”임을 언급할 때 “생명의 탄생에, 죽음의 자리를

    메워주는 생식에 연결된”88) 것 같은 ‘사이’의 발견이 있다. 그것은 소재 자신과 생명체의 ‘사이’이며, 그곳에서 그

    는 바깥 사물들의 소리를 ‘듣거나’ 저들의 생김새를 ‘바라보는’ 공명하고 있었다. 소재는 ‘두통’을 통해 생명체의 살아있는 ‘소리’, 몸짓의 ‘율동’을 스스로 ‘관-찰’하고, 그 소리를 자연-생활 세

    계의 소리 속으로 환류(還流)시키며 공명하고 있었다. 그곳은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로서, 그런

    ‘사이’에서 그는 시라는 형식으로 ‘타자를 자신 속으로 자신을 타자 속으로 품고 뒤섞는’ 이른바 ‘인심(人心)의 동

    정(動靜)’이라는 일원적, 역동적 마음의 능선이라 할 수 있다. 거기서 소재는 ‘쾌활’, ‘형형’, ‘활물’, ‘상활(常活)’의

    새로운 ‘심(心)’의 사상세계를 번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85) 발터 벤야민, 「표준시계」, 『일방통행로』,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5), 21쪽. 86) 프리드리하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동호 옮김, (책세상, 2012), 63쪽. 87)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김정숙 옮김, (챕터하우스, 2013), 157-8쪽. 88) 조르주 바타유, 『에로스의 눈문』, 윤진 옮김, (민음사, 2020), 25쪽.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35

    【제3발표】

    穌齋 詩文에 나타난 奇의 미감에 대하여

    신향림(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1. 서론

    2. 소재 시의 파격적인 형식

    3. 소재 산문의 기이한 형식

    4. 시문의 奇와 소재의 학문

    5. 마무리

    1. 서론

    소재 노수신은 조선의 문인들이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늘 대가로 칭송되었던 걸출한 시인이다.1) 소재가 활동하

    던 선조 대는 송시, 특히 강서시풍의 영향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송시의 사변성에 반발하여 唐詩를 배워

    시의 음악성ᆞ회화성을 회복하려는 지향이 李達, 白光勳, 崔慶昌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 시기 당풍의

    학습은 模擬 踏襲을 일삼는 천편일률적인 시들과 綺麗하고 纖弱한 풍격의 시들이 유행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소재는 이러한 때에 생경한 시어와 험벽한 고사를 치밀하게 배치하여 난해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남성적 풍격의 시

    들을 주로 창작하였다. 소재의 문학을 논한 다수의 연구자는 시문과 사상의 관련성을 해명하고자 하였다.2) 초기 연구자들은 소재의 사

    1) 申靖夏, 恕菴集 권16 “農巖之所取於吾東者唯三家, 翠軒ᆞ訥齋ᆞ蘇齋而已. 餘無取焉.” ; 梁慶遇, 霽湖集, 권9, 「蘇齋見稱大家手」, “昔在己

    酉詔使之遊漢江也, 一時名於詩者, 皆以製述官隨之, 乘船在後, 相與評論古今詩, 滿船喧然. 語及蘇齋, 一口言曰, ‘大家手也, 安敢輕議?’ ; 김창

    협, 농암집 권34, 「雜識」, “盧穌齋詩, 在宣廟初, 最爲傑然. 其沈鬱老健, 莽宕悲壯, 深得老杜格力, 後來學杜者莫能及. 蓋其功力深至, 得於憂

    患者爲多.” ; 홍대용, 국역 담헌서 외집 1권 「항전척독(杭傳尺牘)ᆞ추루에게 준 편지[與秋書]」, “本朝 이래로는 挹翠軒 朴誾과 蘇齋 盧

    守愼을 세상에서 동방의 이백과 두보라고 칭합니다.” ; 趙龜命, 「題白下書帖」, “我朝名筆, 當推三大家, 安平精神超詣, 石峰氣力雄渾. 白下故

    當以法與變態敵爾. 詩有挹翠ᆞ穌齋ᆞ三淵, 文有簡易ᆞ谿谷ᆞ農巖. 三藝俱成鼎足, 殆亦有符於東方木三數” 2) 金光淳, 「蘇齋 盧守愼 硏究」, 한국의 철학 17집,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1989 ; 채용복, 「穌齋 盧守愼 詩의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1992 ; 신태영, 「盧蘇齋의 詩 硏究」, 성균관대 석사논문, 1997 ; 정종대, 「노수신의 시와 성령도야」, 선청어문 38권, 서울대 국어교육

    과, 2010 ; 졸저, 조선주자학 양명학을 만나다, 심산, 2015.

    36 ∥ 蘇齋 詩文에 나타난 奇의 미감에 대하여ᆞ신향림

    상을, 明儒 羅欽順의 영향을 받은 氣一元論과 欲望 긍정론으로 요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소재의

    시는 破格, 사실주의적 경향,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을 중시하는 唐詩적인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였다.3) 근래

    에는 소재를 양명학자로 논하고 소재 시의 파격적인 형식을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의 전변이 일어나던 시기의 정

    신적 방황과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가 제출되었다.4) 소재의 문학을 사상과 연계하여 이해하려 한 위의 연구와는

    별도로 형식과 미감에만 집중하여 소재 시를 논한 연구들도 있었다.5) 이 연구들에서는 강서시파와 두보의 시를

    계승한 소재 시의 형식적 특징을 정밀하게 기술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소재의 시문이 드러내는 독특한 형식과 미감을 그의 사상과 관련하여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소재 시문의 형식적인 특징과 소재의 시문에 대한 선인들의 평을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이어서 소재의 시문이 드러내는 형식적인 특징과 미감이 그의 사상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논해보고자 한다. 2. 소재 시의 파격적인 형식

    이덕무는 소재를 우리나라에서 시에 있어 별도의 문호를 수립한 시인으로 규정하였다. 이덕무는 소재 시의 독창

    적인 측면으로 산문에 주로 쓰이는 허사를 적극적으로 시어로 구사한 점을 들었다.6) 이덕무의 지적대로 소재의

    시는 독특한 자법으로 유명하다. 소재는 산문에 쓰이는 허사뿐만 아니라 시에 잘 쓰이지 않는 우리나라의 地名과

    官名, 人名, 干支 등을 빈번하게 시어로 활용하였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세모에 장난삼아 짓다[歲暮戲題]>

    천지의 동쪽 나라의 남쪽 天地之東國以南

    옥주성 밖 두어 칸의 암자 沃州城外數間庵

    용서받기 어려운 죄와 고치기 어려운 병 지녔으니 有難赦罪難醫病

    불충한 신하이자 불효한 아들이로다 是不忠臣不孝男

    귀양살이 한 삼천사백일은 요행이었고 客日三千四百幸

    을해년에서 병진년까지의 향년은 부끄럽기만 行年乙亥丙辰慙

    너 노수신은 취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汝盧守愼將無醉

    공사의 일에 보임되어도 무슨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7) 補得公私底事堪

    유배지 진도에서 쓴 시이다. 이 시에서 소재는 산문에 쓰이는 허사 ‘之’ᆞ‘以’, 우리나라의 옛지명 ‘옥주’, 간지

    ‘乙亥’ᆞ‘丙辰’, 자신의 이름 盧守愼 등 시에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낯선 시어를 대거 사용하였다. 이 시는 시어

    가 생경할 뿐만 아니라 구법 또한 특이하다. 칠언시는 보통 4/3으로 끊어지는 구법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시의 함련

    과 경련에서는 1/6(有/難赦罪難醫病, 是/不忠臣不孝男), 6/1(客日三千四百/幸, 行年乙亥丙辰/慙)로 끊어지는 특이한

    3) 金光淳, 「蘇齋 盧守愼 硏究」, 한국의 철학 17집,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1989 ; 채용복, 「穌齋 盧守愼 詩의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1992 ; 신태영, 「盧蘇齋의 詩 硏究」, 성균관대 석사논문, 1997.

    4) 졸저, 조선주자학 양명학을 만나다, 심산, 2015.

    5) 이종묵,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이종묵, 「湖穌芝 율시의 문예미」, 한국한시연구 23집, 한국한시학회, 2015 ; 강지희, 「허

    균이 본 소재 노수신의 미적 특질」, 대동한문학 66집, 대동한문학회, 2001.

    6) 李德懋, 靑莊館全書 권5, 「瑣雅」, “盧蘇齋我東別立門戶者. 其詩全用之於而以字, 似非詩家本色, 然於其中化焉者也.”

    7) 盧守愼, 소재집 권4. 이하 인용하는 소재의 시는 고전번역원에서 출간한 국역 소재집(임정기 역)을 참고하였다.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37

    구법을 구사하였다. 경련에서 ‘三千四百’과 ‘乙亥丙辰’로 대를 이룬 것도 기묘하다. 이 시의 함련과 경련은 율시의

    일반적인 자법과 구법을 완전히 헝클어버렸는데 이러한 파격적인 형식은 정상적인 삶의 길에서 일탈하여 방황하

    고 있던 소재의 불안정한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위의 시 미련의 ‘將無’는 ‘莫非’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 시에 쓰인 ‘將無’는 낯선 의미를 담고 있는

    데, 이런 시어는 특히 소재의 철리시에 자주 등장한다. 人心道心을 노래한 소재의 유명한 철리시에 “원래 도와 기

    는 이웃으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니, 인심을 외진이라 할 수 있겠는가[元來道與器非隣, 可認人心是外塵]”8)라는 구

    절이 있다. 시어 ‘非隣’은 <歲暮戲題>에 보이는 ‘將無’와 마찬가지로 낯선 의미로 쓰였다. ‘非隣’은 일반적으로는

    ‘가깝지 않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정반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로 쓰였

    다. 퇴계는 이 구절에 대해 “寡悔가 이미 理와 氣를 一物로 여겼으니, 의당 道와 器도 一物로 여겼을 듯합니다. 그

    런데 그의 시에서 ‘원래 도와 기는 이웃이 아니다[元來道與器非隣]’라고 하였으니, 이는 도리어 도와 기를 갈라 둘

    로 만들어 아무런 관련이 없게 한 것입니다. 이 병폐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수가 없습니

    다.”라고 하였다.9) ‘非隣’이라는 시어가 너무 생경한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이 시가 처음 사류들 사이에 유포되었

    을 때 퇴계 또한 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후배 시인 鄭斗卿은 이 생경한 시어를 차용하여 “도는 자기에게 있고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니 다시 누구에게 물을까, 잘못하여 동해에서 안기생을 찾게 하였네. 길

    가에도 삼주수 있거늘, 다만 행인들은 스스로 알지 못하누나.[在己非隣更問誰, 錯敎東海覓安期. 路傍亦有三珠樹, 只

    是行人自不知.]”라는 시를 지었다.10)

    소재의 <歲暮戲題>에 대해 芝峯 李睟光은 “노소재가 진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쓴 시인데 한 시대에 칭송되어 사

    람들 사이에 회자될 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법과 자법이 俳優體를 면하지 못했으니, 시를 쉽게 말할 수 있겠는

    가”라고 하였다.11) 唐詩를 시의 전범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이수광은 정통적인 구법과 자법을 준수하지 않은 이 시

    를 광대의 노래로 혹평하였다. 그러나 윤선도는 이 시에 보이는 파격적인 형식을 ‘盧穌齋體’로 명명하고 이를 모방

    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계묘년 세모에 감회에 있어 노소재체를 본떠서 짓다〔癸卯歲暮有感, 效盧穌齋體〕>

    압록강의 원류가 산 너머 휘도는 곳 鴨綠源流山外廻

    자작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달팽집 산모퉁이에 있네 樺泥蝸室傍山隈

    죄인은 죽어 마땅한데 전하께서 헤아려 주셨고 罪人稱殺荃猶揆

    언론은 충직했는데 세상 사람들 모두 비웃네 言自爲忠世共咍

    귀양살이 일천 오백 일이 이미 지났고 謫日一千半已往

    향년은 일흔여덟 살에 장차 이르려 하네 行年七十八將來

    부용동 안으로 어느 때나 돌아가서 芙蓉洞裏何時去

    남창에 오만하게 기대 술잔을 대할거나 寄傲南窓對酒杯

    8) 소재집 권4, 「次韻奉呈鄭僉使廻軒復題一篇憑達一齋侍者」. 9) 李滉, 퇴계집 권17, 「重答奇明彦」, “寡悔旣以理氣爲一物, 則似亦當以道器爲一物矣. 而其詩曰‘元來道與器非隣云云’, 是又判道器爲二致, 不相

    干涉, 此病所從來處, 思之不得.”

    10) 鄭斗卿, 東溟集 권3, 「讀道書」. 11) 이수광, 芝峯類說 권13, 「文章部六ᆞ東詩」,“盧蘇齋謫珍島時, 有詩曰: ‘天地之東國以南, 沃州城外數間庵. 有難赦罪難醫病, 爲不忠臣不孝男. 客日三千四百幸, 生年乙亥丙辰慚. 汝盧守愼將無醉, 補得公私底事堪.’ 一時稱誦, 不啻膾炙, 而句語未免優體, 詩可易言哉!”

    38 ∥ 蘇齋 詩文에 나타난 奇의 미감에 대하여ᆞ신향림

    이 시를 창작할 당시 윤선도는 慈懿大妃의 服制를 논한 소장이 문제가 되어 함경도 북서쪽 압록강 지류에 있던

    三水에 유배되어 있었다. 삼수는 춥고 척박한 오지라서 예전부터 重罪人을 귀양 보내는 지역이었다. 윤선도는 74

    세의 고령에 이곳에 유배되어 77세 되던 해 세모까지 4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만년에 극지에 유

    배된 윤선도는 무의미하게 생을 소진하고 있다는 초초감에 휩싸여 유배되어 보낸 날짜와 태어나서 살아온 해를 거

    듭거듭 헤아리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통해 장난처럼 보이는 소재의 시구에 깊은 비

    애가 함축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홍 정승의 모친에 대한 만사〔洪政丞母夫人挽〕>

    삼가 생각건대 정경대부인은 恭惟貞敬大夫人

    하늘 밖은 모르겠지만 세상에선 못 들어 본 분일세 天外難知世未聞

    순일한 덕으로 삼종하니 영의정의 지위 우뚝하고 一德從三上台峻

    백 년에서 육 년이 빠지니 노인성이 높다랗네 百年除六老星尊

    은총 더해진 부의 물품 평상의 은전 뛰어넘었고 恩加賵賻逾常典

    효성 굽힌 최마복은 옛 예문을 따랐네 孝俯衰麻掩古文

    어떻게 하면 당대 제일의 문장가를 얻어서 安得當時大手筆

    사적 기록하여 천지간에 빛나게 할 수 있을까12) 却將詮載照乾坤

    많은 시화집에 소재의 대표작으로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洪暹의 모친 송씨 부인을 위해 쓴 만시이다. 정조는

    1797년 洪暹의 묘에 승지를 보내 致祭하게 하는 전교에서 “홍섬의 나이가 칠순이 넘었는데도 그의 모친이 그때까

    지 건강하였기에, 이 일이 시인의 노래에 들어가서 오늘날까지도 傳誦되고 있다.”라고 하고 소재의 이 시를 인용하

    였다. 소재가 위의 시를 창작한 때가 1581년이니,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던 시임을 알

    수 있다. 소재는 만사의 첫머리에 “恭惟貞敬大夫人”이라고 썼다. 그리고 이어서 이 정경대부인이 신선 세계에서는 혹 모

    르겠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분이라고 하였다. ‘貞敬大夫人’은 우리나라에서 정승의 모친에게 내리는

    봉작이니, 제목에 보이는 ‘홍 정승의 모친[洪政丞母夫人]’을 이어받은 것이다. ‘貞敬大夫人’은 소재가 이 시를 쓰기

    전에는 碑碣이나 行狀 등에만 가끔 보이고 시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어휘였다. ‘恭惟’ 또한 산문에 주로 쓰이고 시

    에는 잘 쓰이지 않는다. 이 두 어휘가 합쳐진 “恭惟貞敬大夫人”은 완전 산문투로 소재 이전 문인들의 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시구이다. 소재는 송 부인이 인간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분임을 말하기 위해 이전 시에서 찾

    아볼 수 없는 기이한 구절을 만들어낸 것이다.13)

    함련에서는 송 부인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함련 상구에서는 송 부인이 영의정인 부친과 남편과 아들

    을 따랐다고 하고 하구에서는 송 부인의 향년이 94세임을 말하여, 정경대부인은 신선 세계에서나 볼 수 있고 인간

    12) 소재집 권6.

    13) 기존 연구에서도 이 시구가 시에 적합하지 않은 구절임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洪政丞賜几杖宴席」의 “三從不出相門闈, 此事如今始有之.”

    을 분석하면서 “홍섬의 어머니의 기이한 행적을 시로 적기 위해 독특한 구법과 표현을 만들어 낸 것이다.”라고 하고, 許筠이 국조시산 에서 이 시에 대해 “기이한 일과 기이한 시어가 잘 어울린다.[奇事奇語相稱]”이라고 평한 것을 인용한 바 있다. 이종묵, 「湖穌芝 율시의

    문예미」, 한국한시연구 23집, 한국한시학회, 2015, 124면.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39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분이라고 한 수련의 뜻을 부연하였다. 경련에서는 송 부인의 아들인 홍섬의 일을 말하여

    시상을 전환하였다. 경련 상구에서 임금이 상을 당한 홍섬에게 전례에 없는 은전을 내려 발인에 타고 갈 말을 하사

    한 일을 말하였다.14) 하구에서는 홍섬이 70이 넘은 고령이어서 古禮에 의거하여 최마복만 입고 고기를 먹게 된

    일을 말하였다.15) 이 두 구를 통해 송 부인의 아들 홍 정승이 70이 넘은 나이에 모친상을 치르면서 임금으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입은 일이 드러난다. 송 부인도 아들 홍섬도 이 세상에 다시 없는 기이한 복을 누린 사람들인 것이다. 이 시를 쓸 무렵 소재는 67세의 나이로 좌의정의 벼슬에 있었고 85세의 모친을 봉양하고 있었다. 홍섬의 모친

    이 하세한 일은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소재에게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소재는 송씨 부인을

    위해 쓴 만사를 “恭惟貞敬大夫人”이라는 기이한 시구로 시작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소재의 이 시가 나

    온 이후 많은 시인들은 이 시구를 모방하여 남의 부인이나 모친에 대한 만사를 지었다.

    <慶川의 모친에 대한 만사[挽慶川大夫人]>

    삼가 생각건대 정경 대부인께선 恭惟貞敬大夫人

    팔십에다 이 년을 더한 장수를 누리셨네 八十遐齡又二春

    승학교 다리 앞에서 진진의 약속 맺었으니 昇鶴橋前秦晉約

    우산에서 어찌 하필 눈물로 수건 적시리오16) 牛山何必淚沾巾

    <약천 선생 부인에 대한 만사[藥泉先生夫人挽]>

    삼가 생각건대 정경부인은 恭惟貞敬夫人

    명가 덕문 출신이로다17) 出自名家德門

    <장계곡 부인에 대한 만사[張谿谷夫人挽]>

    삼가 생각건대 정경부부인은 恭惟貞敬府夫人

    이른 나이에 재상 가문에서 시집 왔네18) 早歲衿鞶出相門

    <송 부인에 대한 만사[姜夫人輓詞]>

    삼가 생각건대 정경대부인은 恭惟貞敬大夫人

    팔십의 고령에 다시 팔 세를 더하였네19) 八袠高齡又八春

    윤선도가 소재의 시체를 ‘盧穌齋體’로 명명하였던 것과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소재의 만사를 모방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소재의 시들은 후대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崔岦, 車天輅, 柳夢寅, 趙纘韓 등 소재와 유사한

    14) 선조실록 14년 1월 23일 기사에 선조가 상을 당한 홍섬을 위해 발인 때 말을 하사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문하니 승정원에서 전례

    에 없는 은전이라 주지 않아도 무방할 듯하고 답했는데, 선조가 결국 말을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15) 禮記, 「曲禮上」, “거상하는 예는 60세인 사람은 지나치게 애훼하지 않고, 70세인 사람은 다만 최마복을 입을 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집안에서 거처한다.[居喪之禮, 六十不毁, 七十唯衰麻在身, 飮酒食肉, 處於內.]” 선조실록 14년 1월 22일 기사에 선조가 예문을 근

    거로 모친상을 당한 홍섬에게 고기를 권하라고 전교하였고 홍섬이 눈물을 흘리며 마지 못해 임금의 명을 따랐다는 내용이 보인다. 16) 金堉, 潛谷遺稿 권2.

    17) 崔錫鼎, 明谷集 권6.

    18) 曺漢英, 晦谷集 권7.

    19) 宋奎濂, 四友堂集 권5.

    40 ∥ 蘇齋 詩文에 나타난 奇의 미감에 대하여ᆞ신향림

    경향의 시를 쓰는 문인들이 소재가 활동한 직후에 다수 출현한 것도 소재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특히

    최립이나 차천로의 아우 車雲輅는 소재를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했던 후배들이다.20) 이수광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을 중시하던 문인들은 소재를 우아하지 못한 잡된 시를 쓴 시인으로 혹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

    의 논자들은 시인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나긋나긋한 말을 버리고 힘이 있는 시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경동시켰던 대가로 소재를 칭송하였다.21)

    3. 소재 산문의 기이한 형식

    소재는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서도 난해하고 생경한 어휘를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다음의 글은 영조 때의 문신

    金柱臣이 소재의 이러한 산문 작법을 비판한 것이다. 예전에 盧穌齋의 문집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柳觀察仲郢墓碣」에서는 “庚戌年에 惟新의 감사가 되었다.”라고 하였

    고, 「許草堂曄碑文」에서는 “癸亥年에 直州로 관직을 나아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惟新’과 ‘直州’는 아마도 그 州縣의

    별칭일 것이다. 碑碣은 사실을 고증하는 글인데, 새롭고 기이하게[新奇] 만들려고 본래 고을 이름을 쓰지 않는다면 먼 후

    대에 어떤 마을을 거쳐 갔는지 무엇으로 알 수가 있겠는가. 나이가 40이 넘으면 ‘겨우 不惑을 넘었다.’고 하였고, 서른에

    죽은 자를 ‘겨우 而立에 죽었다.’고 하였다. 다음 해 1월을 ‘改歲正月’22)이라 하고, 부모님의 喪을 당하면 모두 ‘宅恤’이라

    했는데, ‘택휼’이라는 글자는 신하가 쓰기에는 온당치 않다. 이런 사례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개 그

    가 문장을 엮을 때 범속어를 피해 사람들에게 새롭게 보이려는 데에만 뜻을 두어 문장의 잘못 가운데 이보다 심한 게 없음

    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는 진실로 이른바 공교롭게 하려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된다는 경우이다. 근대 문풍의 폐

    단은 기이함을 숭상하는[尙奇] 것을 주로 하여 대체로 모두 이런 투식을 인습하는데, 글 쓰는 선비는 경계해야 마땅하고

    몰라서는 안 된다.23)

    이 글에서 김주신은 당대에 잘 쓰이지 않는 옛 지명이나 생경한 경전의 문구를 빈번하게 사용하여 글을 기이하

    게 만든 소재의 작문 태도를 비판하였다. 김주신이 생경한 옛 지명의 예로 든 ‘惟新’은 柳仲郢을 위해 쓴 비갈문에

    서 “경술년에 惟新의 현감이 되었는데 몇 개월 뒤에 은혜와 위엄이 크게 행해졌다.”24)라고 한 데 보인다. 충주는

    1549년부터 1567년까지 維新縣으로 강등되었기에 소재가 이 글에서 ‘유신’이라는 고호를 쓴 것은 특이할 게 없

    다. 다만 ‘惟新’은 충주의 고호이면서, 書經 「胤征」의 “옛날에 물든 나쁜 풍습을 모두 더불어 새롭게 하겠다.[舊

    20) 趙絅, 소재집, 「穌齋先生文集敍」, “簡易崔立之,滄洲車雲輅恒言, ‘我朝三百年操觚之士, 無一及穌齋者.’ 噫! 奚待後世之子雲哉?” ; 梁慶遇, 霽湖集, 권9, 「蘇齋見稱大家手」, “昔在己酉詔使之遊漢江也, 一時名於詩者, 皆以製述官隨之, 乘船在後, 相與評論古今詩, 滿舡喧然. 語及蘇齋, 一口言曰: ‘大家手也. 安敢輕議?’ 座有二三人獨曰: ‘短律雖佳, 長律則麤厲, 不足取.’ 車典籍(雲輅)攘臂大呼曰: ‘小家之作, 雖一篇一句可詠, 綴拾

    纖碎, 索無氣力, 至如蘇齋之作, 有萬鈞之勢, 安敢與之爭衡也, 無異草間蟋蟀遇洪鐘而止.”

    21) 이익, 성호사설, 「蘇齋詩」, “國朝文章, 必數盧蘇齋. 蘇齋之詩, 多雜俚語, 人嫌其不雅. 然斤兩甚重, 如挽十石弓, 自始鉤弦至彀率, 毫髪不可

    怠其力, 所謂‘橫空盤硬語, 妥帖力排奡’也. 其十九年遷謫所養歟.”

    22) 詩經, 「豳風ᆞ七月」에 “아, 우리 처자들아, 해가 바뀌게 되었으니 이 집에 들어와 거처할지어다.[曰爲改歲, 入此室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3) 金柱臣, 『壽谷集』 권11, 「散言下篇」, “嘗偶閱盧穌齋文集, 「柳觀察仲郢墓碣」曰‘庚戌, 監惟新’, 「許草堂曄碑文」曰‘癸亥, 叙拜直州’, 惟新直州, 似是州縣別號也. 碑碣, 考實之文, 而欲其新奇, 不書本邑名, 代遠之後, 何由知其歷踐某郡乎! 年踰四十則曰‘才踰不惑’, 三十而死者曰‘僅而立而

    死’. 明年正月謂之‘改歲正月’, 丁內外艱, 皆曰‘宅恤’, 而‘宅恤’字, 不當用於人臣也. 此類不可殫記. 盖其綴文, 意在避凡俗, 新人耳目, 而自不覺文

    之紕繆莫此爲甚, 是眞所謂欲巧而反拙也. 近代文弊, 以尙奇爲主, 而循襲此套者居多, 操觚之士, 可以爲戒, 不可不知也. 24) 穌齋集 권10, 「有明朝鮮國通政大夫, 守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柳公墓碣銘」에 “庚戌, 監惟新, 居數月, 恩威大行.”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41

    染汙俗, 咸與惟新.]”에서 나온 말이니, 유중영이 지방관으로서 고을을 잘 다스려 충주가 새롭게 교화된 것을 드러

    내기 위해 ‘유신’이라는 지명을 의도적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直州’라는 지명은 김주신이 비판했던 대로 생경

    한 어휘이다. 소재는 허엽이 1562년 대사성이 되어 夜對에서 趙光祖의 伸寃을 주장하고 具壽聃을 賜死한 잘못을

    논하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삼척 부사로 좌천된 일을 기록하면서 “계해년 6월에 直州에 배수되었다.”라고 하였

    다.25) ‘직주’는 東史綱目에서 “三陟은 예전에 悉直國이었다. 신라 때 悉直州라 칭했고, 고려 시대에 고쳐서 삼척

    이라 칭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삼척의 고호임을 알 수 있다. ‘直州’는 고려 이후로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독자에게는 무척 생경한 단어였을 것이다. 김주신은 소재가 글을 쓰면서 남들 눈에 새롭고 기이하게 보이

    려고 일부러 난해한 어휘를 교묘하게 사용하였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소재는 허엽이 임금에게 直言을 하다가 모함

    을 받아 좌천되었던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直州’라는 고호를 고심해서 선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柳成

    龍의 아버지 柳仲郢과 許筠의 아버지 許曄은 소재와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 죽을 때까지 친밀하게 교유한 지기였

    다. 소재는 이들의 삶을 진실하게 기록하고자 고심하여 글자를 단련한 것이다. 김주신이 또 문제 삼은 ‘而立’이라는 단어는 康惟善을 위해 쓴 비갈에 보인다. 강유선은 소재의 동서이자 스승

    李延慶 밑에서 같이 공부한 知己였다. 강유선은 1549년(명종4)에 李若氷의 아들 李洪南이 그의 아우 李洪胤을 모

    함하여 일으킨 충주 獄事에 연루되어 장살 당하였다. 이 옥사로 인하여 충주 지역의 많은 사류들이 무고하게 도륙

    되었는데, 강유선은 스승인 李延慶과 역모를 꾀했다는 무고로 인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소재는 이 사건

    으로 인한 충격으로 한동안 자살 충동에 휩싸이는 등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소재는 강유선의 죽음을 기록

    하면서 “청수하고 정명한 자질을 타고난 군이 조금 더 살 수 있었다면 훗날에 한없는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 텐데

    겨우 而立의 나이에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다.[以君淸粹明正, 能少假之年, 異日所造, 豈可涯涘, 而僅而立而死非

    命.]”라고 하였다.26) 소재는 ‘而’ 자를 세 번 연용하여 촉급한 호흡의 기이한 구절을 만들어내어 강유선이 너무나

    도 일찍 비명에 세상을 떠난 사실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강유선을 위해 쓴 <康上舍碣銘>은 소재 산문의 기이한 면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다. 글의 형식을 살피기 위해

    원문 그대로 전문을 게재하면 다음과 같다. 嗚呼! 東國上舍生信川康元叔, 幼而才氣超拔, 宇量沈毅, 作止語默, 若合規度, 識者咸指爲神兒. 八歲, 始讀書, 已通文義. 比

    十餘歲, 能屬文, 操紙立就. 丁酉, 選司馬. 戊戌, 甥于灘叟先生門, 先生見而器之, 循循提誨, 得聞儒者向方, 不專爲擧子業. 辛

    丑, 服斬廬開寧, 葬祭以禮, 泣血柴立, 人稱善居喪. 自是行益修, 學益進, 朋遊益附, 華問播一時. 時圭庵宋子爲祭酒, 每講罷, 邊

    君及一二聞人, 評論義理. 君之取重諸老蓋如此, 而禍亦始此云. 嗚呼! 當仁廟在位, 多士拭目, 以爲至治可期. 於是大學生上章

    請復靜庵官爵, 明士趨, 皆君筆也. 忠憤激切, 上動天心, 批曰: “汝等居首善之地, 好古而論時, 疏章三上, 辭懇義直所學之正, 何

    以加此? 我先王敎育之澤, 於此亦可見矣. 雖然言是非, 則可矣, 期於定是非, 則自有朝廷, 非諸生事也. 汝等姑退而更思之.” 未

    幾, 上賓而國空虛矣. 君乃奉母南歸, 庶自肆于山水間, 以送餘齡. 學正黃俊良受權臣旨, 言君嘗在泮, 好爲詭論, 將文致焉, 賴有

    25) 穌齋集 권10, 「有明朝鮮國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許公神道碑銘」, “壬戌秋, 入近侍夜對, 言: ‘國家所賴以維持者人才也. 人才不作, 由人心不

    正, 人心不正, 實原于聖道不明. 臣此忝掌成均, 無敢信者, 良以其來有自也. 中廟銳意致治, 趙光祖特蒙殊眷, 感激圖報, 庶幾堯舜君民, 不幸讒口

    惎之, 橫罹淫禍. 自是人心大壞, 不可救. 亟賜申雪, 使風采立變, 則人心正而國家安矣.’ 上曰: ‘事在先朝, 安敢輕議?’ 公復反覆極陳, 且曰: ‘如近

    世許磁主選, 不用關節, 積謗遠貶, 具壽聃不顧其身, 以至賜死. 夫斷重辟, 必覆奏, 獨于大臣不然, 臣未知其故也.’ 又曰: ‘人有臧獲一投內司, 仰天

    太息, 無路可辨, 此亦不可不知.’ 群小競怒, 駁褫職. 癸亥六月, 敍拜直州.”

    26) 소재집 권10, 「康上舍碣銘」, “以君淸粹明正, 能少假之年, 異日所造, 豈可涯涘, 而僅而立而死非命.”

    42 ∥ 蘇齋 詩文에 나타난 奇의 미감에 대하여ᆞ신향림

    人力救得免, 猶停赴擧. 是冬, 爲公西之志旣盡誠信矣, 仍擬築室, 則爲親故止之而止. 嗚呼! 己酉, 李洪男在配, 上其弟不軌以謀

    進, 乃大殺中原人, 遂及君. 蓋以彼輩心行悖妄, 相避成隙. 至是洪胤自首, 且誣君草檄, 訊之極其慘毒, 而言貌如平日, 但曰: “白

    日在上, 寧有是哉!” 推官憮然變色. 竟以書訣兄弟曰: “平生忠孝自許, 反負不忠名, 泉下之目, 殆不瞑矣. 伏願兄及弟篤信好學, 其不變不亂.” 有如是者, 豈非天得學力有以致之? 嗚呼! 君之立志遠矣, 制行高矣, 旣孝旣友, 人無間然矣. 顧性方嚴, 疾惡如讐, 不直視, 非其人, 未嘗借以辭色, 故雖爲君子所敬, 而人之忌之者亦衆. 喜古訓, 不一日去手, 見忠臣義士不得其死者, 輒嗚咽流

    涕, 掩卷而起. 爲文章, 務出於奇, 淸新發越, 無世俗氣. 嗚呼! 以君淸粹明正, 能少假之年, 異日所造, 豈可涯涘, 而僅而立而死

    非命. 嗚呼慟哉! 康氏于麗, 族大而繁, 簪組相望, 國朝有諱允釐, 守咸陽, 是君五世祖. 高祖諱居禮, 令盈德. 曾祖諱惕, 彰信校

    尉. 祖諱仲珍, 承文院判校, 從舅佔畢齋學, 大有令名. 考諱顗, 以武發身, 爲昌原都護府使. 聘東萊鄭氏獻納士傑女, 正德庚辰生

    君. 君諱惟善, 於倫爲第二. 有二子, 其一復誠, 倜儻嗜學, 中己卯進士. 錄冤死人子, 除禧陵參奉, 謝恩便去, 累除終不就. 生男

    女幼. 其一, 適忠義衛李用中, 栗峯察訪, 生男希天, 業儒, 女二幼. 嗚呼! 天將以是爲施耶? 守愼, 同門婭也. 常欲籲天而無從, 按

    復誠狀, 爲之略加點綴, 而繼之銘, 以洩吾哀曰:

    奚日之怪, 而肆猘呀? 影有奚異, 乃中以沙? 嗚呼叔也! 遭世罔極, 其悲柰何? 天欲其死, 何始生之耶? 天欲其生, 何遽死之

    耶? 愛之篤也何意? 惡之酷也何理? 松柏之毅瑚璉之貴, 學問之事經濟之志, 天錫之天㧻之, 吾其問諸何地? 每一念至, 但仰而

    搥胸, 復使後人搥之, 至于百搥千搥萬搥而無已也. 인용한 전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康上舍碣銘」은 거의 통곡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소재는 감탄사인 ‘嗚呼’ 로 글을 시작하였고, 글이 전환하는 전철처에 모두 ‘嗚呼’를 두었다. 이 글의 가장 큰 전철처이자 강유선의 죽음을

    기록한 구절은 시작 부분에 ‘嗚呼’를 한 번 더 쓰고 끝부분에는 ‘嗚呼痛哉’를 두어 돌올하게 강조하였다. ‘嗚呼’라는

    감탄사는 애도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을 주로 하는 제문에 흔히 쓰인다. 죽은 이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

    을 정체로 하는 비갈문의 序에 ‘嗚呼’라는 감탄사가 이처럼 많이 사용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강유선의 비극적인

    삶을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 제문과 묘갈문이 뒤섞인 기이한 형식을 창출해낸 것이다. 銘文은 더욱 기이하다. 해가 무엇이 괴이하다고 미친개가 멋대로 주둥이를 벌렸는가? 그림자에 무슨 이상한 점이 있다고 모래를 쏘아 맞혔는

    가? 아아, 아우여! 망극한 세상을 만났으니 그 슬픔을 어이해야 하는가? 하늘이 죽이려 했으면 어찌하여 처음에 낳았는

    가? 하늘이 살리려 했으면 어찌하여 갑자기 죽였는가? 깊이 사랑한 것은 무슨 뜻인가? 가혹하게 미워한 것은 무슨 이유인

    가? 솔과 측백의 강인함과 호련의 귀함, 학문의 일과 經濟의 뜻을 하늘이 주고 하늘이 깨부수었으니, 나는 어디에 대고 따

    져 물어야 하나? 매번 이런 생각이 들면 다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을 칠 뿐이니, 다시 후인들이 가슴을 쳐서 백 번 치고

    천 번 치고 만 번을 치고도 그칠 수 없게 하리라.27)

    명문은 강유선의 목숨을 가혹하게 앗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하늘에 대고 힐문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의문문

    을 연속적으로 배열하여 가슴에 맺혔던 한을 일시에 토해내는 듯한 격한 어조를 만들어내었다. ‘미친개에게 물렸

    다’는 표현은 屈原의 賦에서 “고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는 것은 괴이한 것을 보고 짖는 것이다.[邑犬群吠, 吠所怪

    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28) 소재는 굴원의 부에 보이는 ‘개[犬]’를 韓愈가 쓴 「祭馬總僕射文」의 “동쪽에 미친개

    27) 소재집 권10, 「康上舍碣銘」, “奚日之怪, 而肆猘呀? 影有奚異, 乃中以沙? 嗚呼叔也! 遭世罔極, 其悲柰何? 天欲其死, 何始生之耶? 天欲其

    生, 何遽死之耶? 愛之篤也何意? 惡之酷也何理? 松柏之毅瑚璉之貴, 學問之事經濟之志, 天錫之天㧻之, 吾其問諸何地? 每一念至, 但仰而搥胸, 復

    使後人搥之, 至于百搥千搥萬搥而無已也.”

    28) 유종원, 柳河東集 권34, 「答韋中立書」, “屈子賦曰: ‘邑犬群吠, 吠所怪也.’ 僕往聞庸蜀之南, 恒雨少日, 日出則犬吠.” 임정기 역, 국역 소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43

    가 있고[惟東有猘] 서쪽에 도마뱀이 있어 벗들을 전복시키니 나에게 남은 이 몇 명인가.”29)에 보이는 ‘미친개[猘]’

    로 바꾸었다. 이 과격한 표현에는 강유선을 음해한 소인에 대한 증오가 절절하게 배어 있다. 명문의 끝에 보이는 “가슴을 쳐서 백 번 치고 천 번 치고 만 번을 치고도 그만둘 수 없다.[至于百搥千搥萬搥而無已也]”라는 표현 또한

    기이하다. 明齋 尹拯은 仁顯王后 폐위를 반대한 일로 참혹한 고문을 받고 유배가던 도중에 죽은 朴泰輔의 묘표를

    쓰면서 “盧蘇齋가 康舟川을 위해 쓴 墓文에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쳐서 천 번 치고 만 번 친다.[仰天搥胸, 千椎萬

    椎]’라는 말이 있는데, 그 글을 읽을 때마다 예에 맞지 않는 거친 표현이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것이 지극한 슬픔에서 저도 모르게 나온 것임을 알겠다.”라고 하였다.30) 소재의 「康上舍碣銘」이 나온 이후 문인

    들은 이 기이한 구절을 모방하여 고인을 애도하는 글을 짓곤 하였다.31)

    4. 시문의 奇와 소재의 학문

    조선 시대 문인들은 소재의 시문을 ‘奇健하다’, ‘奇崛하다’고 평하였다.32) 소재의 시문은 선인들에 의해 대체로

    奇의 미감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소재가 知己 康惟善의 행적을 기록한 글에서 “문장을 지을 때는 奇에서 나오

    는 데 힘써서[務出於奇] 淸新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속된 기미가 없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소재 스스로도 ‘奇’의

    미감을 지닌 시문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33)

    ‘奇’라는 글자는 ‘특수하다’, ‘세상에서 잘 볼 수 없다’, ‘보통 사람의 예측을 뛰어넘는다’, ‘괴이하다’, ‘독창적이

    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許愼은 ‘다르다[異]’로 풀이하였다. 예술 작품을 품평할 때 奇는 正이나 雅와 상대되고34)

    深이나 高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35) 澤堂 李植은 常調를 끊어버리고 死語를 쓰지 않아서, 세상에서 답습하

    는 문학가의 蹊徑을 멀리 뛰어넘어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보기 어려운 시문을 ‘奇峭’로 품

    평하였다.36) 정통이나 상투를 벗어나서 특이하고 생경하고 난해한 문학이 기의 미감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37)

    奇는 강서시파 시인들을 품평할 때 주로 쓰인 것으로 논의되지만, 학문이나 사상이 특이한 문인들을 품평할 때도

    재집 제2권, 「증공이 서산 선생에게 부친 시와 회암 선생을 추모한 만사 두 시에 추화하다[追和曾公寄西山先生, 挽晦庵先生二詩]」의 주석

    에서 재인용. 29) 韓愈, 五百家注昌黎文集 권23, 「祭馬總僕射文」, “惟東有猘, 惟西有虺, 顚覆朋鄰, 我餘有幾.”

    30) 尹拯, 명재유고 권35, 「朴士元墓表」, “昔盧蘇齋於康舟川墓文, 有仰天搥胸千椎萬椎之語, 讀之每嫌其近於野, 以今觀之, 知其出於至痛之極, 而不自覺也.”

    31) 任希聖, 在澗集 권3, 「姊兄沈元緖墓誌銘」, “百搥千搥, 穌翁之哭舟川者其非耶.” ; 金如萬, 秋潭集, 권4, 「祭亡子夏鎭文」, “察訪之夭, 正

    是吾家匈變之伊始, 驚慘特甚, 孤山兄所謂百搥千搥萬搥萬萬搥者是也.” ; 黃磻老, 白下集, 권7, 「祭仲兄正齋公文」, “一槌十槌百槌千槌萬槌而

    不已者, 豈但四十年兄弟之情而已哉.”

    32) 申欽, 象村稿 권52, 晴窓軟談, “盧相國守愼字寡悔, 號蘇齋, 乙巳名流也.......爲文章奇健, 爲一時領袖, 其在海島所作詩多警絶, 膾炙人口.”

    ; 李埈, 蒼石集 권18, 「穌齋盧先生行狀」, 文章奇健, 不事沿襲. 其格力甚高, 如殷卣周彝藻餙漫滅而古意獨存, 其聲律淸越, 如希音大呂金石相

    宣而一洗哇咬. ; 沈魯崇, 「書楓皐悼驢詩」, “于鱗之沉菀而有縛杜之譏, 國朝蘇齋之奇崛而有死杜之誚.”

    33) 소재집 권10, 「康上舍碣銘」, “爲文章, 務出於奇, 淸新發越, 無世俗氣.”

    34) 김창협, 農巖集 권17, 「答任大仲」, “蓋雅者, 正也; 奇者, 奇也, 奇與正, 正相反. 今目以精雅而屬之奇格, 無乃有矛盾者耶?”

    35) 蘇軾, 東坡全集 권75, 「謝歐陽内翰書」, “求深者或至於迂, 務奇者怪僻而不可讀.”

    36) 이식, 택당집 권9, 「五峯李相國遺稿後題」, “其詩絶去常調, 尤忌死語, 奇峭挺拔, 得老杜夔峽之音, 而夐出筆墨蹊逕之外. 宜乎世之取靑媲白

    以爲工者之見之也, 或不省爲何等語也.”

    37) 비평용어 奇의 의미에 대해서는 임준철, 「조선중기 한시에서의 ‘奇’」(어문연구 36집, 2008)와 김경, 「조선후기산문에서의 奇」(민족

    문화연구 58집,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2013) 참조.

    44 ∥ 蘇齋 詩文에 나타난 奇의 미감에 대하여ᆞ신향림

    많이 쓰였다. 불교에 깊이 침잠했던 金守溫의 시문은 奇古하다는 평을 받았다.38) 서거정은 “列子와 莊子가 道를 안

    것이 정밀하고 세상에 분격한 것이 깊어서 괴이한 설과 奇崛한 문장을 만들어내었다.”고 했다.39) 이황은 徐敬德의

    문인인 朴枝華가 지은 「遊山錄」에 대해 글이 奇를 숭상하는 기미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황은 기이함을 추구하다

    보면 마음이 방탕한 데로 빠지고 학문이 이단으로 흘러들어 갈 우려가 있다고 하였다.40) 조선 후기에도 奇는 주자

    학과 이질적인 사유를 받아들인 문인들의 새로운 문학을 품평할 때 자주 등장한다. 공안파의 영향을 받은 李德懋의

    시나, 陽明學을 받아들인 李用休, 李彦瑱의 시문이 기이한 미감을 지닌 문학으로 논의되었다. 선인들은 형식적으로

    특이할 뿐만 아니라 낯설고 기이한 사유를 드러내는 작품을 奇의 미감을 지닌 것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소재의 시문이 드러내는 奇의 미감 또한 소재의 독특한 정신지향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시는 허

    균이 국조시산에서 “한 편이 奇峭渾融하다”고 평했던 작품이다.

    <길에서 읊다〔路中吟〕>

    새벽에 황산의 후미진 곳을 지나서 曉過黃山僻

    황혼에 흑석의 깊은 골짜기로 돌아왔네 曛歸黑石幽

    눈이 한 길이나 쌓여 길에서 헤맸고 徑迷雪一丈

    천년의 구름 떠도는 곳에 바위는 늙어 있네 巖老雲千秋

    세월 속에 부질없이 넓적다리 살만 말랐고 日月空消髀

    천지에는 근심이 사라지지 않네 乾坤未解憂

    객창에 한밤중 달도 없는데 僑窓夜無月

    푹 숙인 머리 위로 만사가 몰려드누나 萬事集垂頭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무렵 여행 중에 지은 작품이다. 수련에서는 제목의 뜻을 풀어서 황산을 떠나서 흑석

    에 당도한 노정을 서술하였다. ‘황산’은 소재의 고향 尙州 化寧縣에 있던 지명이고, ‘흑석’은 충주 근방의 지명이

    다. ‘黃山’과 ‘黑石’은 소재가 실제 경유하고 있는 지명으로 대를 맞춘 것인데, ‘黃’과 ‘黑’, ‘山’과 ‘石’이 글자 상으

    로도 교묘하게 대를 이루고 있다. 지명 ‘黑石’은 함련에 보이는 바위, 미련에 보이는 컴컴한 방에 고개를 푹 숙이

    고 앉아 있는 시인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수련을 통해 소재가 새벽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황혼 무렵

    충주 근방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함련은 길에서 바라본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소재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여정을 눈이 한 길이나 쌓인

    길에서 헤매고 있는 상태로 묘사하였다. 여기에서 이 여정이 인생에 대한 우의임을 유추할 수 있다. 함련 하구에

    서는 ‘黑石’에 당도하여 바라본 검은 바위를 묘사하였다.41) 소재는 검은 바위 위에 흰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바라보

    38) 權鼈, 海東雜錄, 「金守溫」, “永山人, 字文良, 號乖崖.......人以佞佛譏之, 文章雄深奇古, 有集行于世.”

    39) 徐居正, 四佳集 권4, 「滑稽傳序」, “昔列御寇莊周, 見道精憤世深, 作爲詭激之說奇崛之文.”

    40) 이황, 퇴계집 권35, 「與金舜擧」, “朴君遊山錄, 來此非不久, 病未謄寫, 今被索還, 惘然如失. 余觀是錄, 文思瀵涌, 議論縱橫, 其於千峯萬瀑

    競秀爭流之體勢脈絡, 高下遠近, 面背往復, 無不包羅囊括, 縷析毫分. 自非胸呑海嶽, 識通化妙者, 何以形容得此? 可謂傑然之作, 難得之寶矣. 所

    可疑者, 其文亹亹乎似有好奇尙異之意. 故談山, 必及於域外荒茫無當之說, 以爲始以爲終, 論學, 必涉於事外遼闊不貼之證, 以言此以言彼. 是以總

    其全篇而取其好處, 則能使人鼓舞踊躍之不暇, 就其中而細考之, 往往不免使人聽瑩而滋惑, 詰屈而難讀也. 夫遊名山者, 其說固主於奇. 然其奇也各

    有分劑, 其言也各有攸當. 若每喜於詭論, 而或爲之强說, 則其勢必至於心蕩而不返, 學流而爲異, 如莊ᆞ釋之倫是也.”

    41) 소재가 젊은 날 흑석을 지나며 지은 시에서 “흑석은 넘을 수 없는 곳이로다, 돌은 검고 골짝은 깊고도 좁아라.[黑石不可度, 石黑深更狹]”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고장에 실제로 검은 바위가 있었다. 소재집 권1, 「黑石」.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45

    며 이 바위가 천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검게 퇴색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검은 바위는 세월 속에 무상하게 허물어

    져 가는 사물을 상징한다. 경련에서 ‘넓적다리가 말랐다’고 한 것은 蜀漢의 劉備가 노년에 더는 말을 타지 않아 자기 넓적다리에 살이 찐

    것을 보고 몸은 점점 노쇠해지는데 공업은 이루지 못했음을 슬퍼했던 데서 온 말이다.42) 소재는 유비와 다르게

    말을 타고 분주하게 오가느라 넓적다리에 살이 빠진 것을 슬퍼하고 있다. 소재는 공업을 이루지 못하고 늙어가는

    삶을 한탄한 게 아니라, 공업을 이루려고 말을 타고 동분서주하는 게 결국 허무한 일임을 말하고자 한 듯하다. 따

    라서 경련은 공업을 이루려는 인간의 노력은 허망한 것이고 천지에는 근심이 사라질 날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

    다고 할 수 있다. 미련에는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여관 창가에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노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 노 시

    인의 형상은 헤아나기 어려운 근심에 푹 짓눌려 있는 소재의 무거운 마음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시에 보

    이는 沈鬱은 소재 만년기 시의 주된 정조이다. 소재는 유배지에서 돌아와 정승으로서 임금을 보좌하고 장수를 누

    리는 어머님 곁에서 효성을 다하면서도 끊임없이 인생의 비애를 시로 읊고 있었다. 이 시에 따르면 소재의 비애는

    공업을 이루려는 인간의 노력이 결국 허무한 것이고 천지에는 근심이 사라질 날이 없다는 도저한 인식에서 오는

    것이다. 다음의 시에는 소재의 특이한 사유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김희의 시에 차운하다〔次韻金禧〕>

    많고 많은 세상일 본래 미리 정해져 있으니 悠悠世事本前期

    높디높은 성상의 은혜로 내지로 이배되었네 蕩蕩皇恩許內移

    물고기 밥이 되는 신세 면했으니 죽어도 한이 없고 免葬江魚死無恨

    오솔길 국화 남아 있으니 기뻐할 뿐 무얼 의심하랴 猶存逕菊樂何疑

    황왕과 제패는 포단의 늙은이고 皇王帝伯蒲團老

    예악과 문장은 꿈속의 지식일 뿐 禮樂文章枕夢知

    취중의 건곤과 고금 醉裏乾坤與今古

    우연히 뜻을 말해 희지에게 주노라 偶然言志與禧之

    19년간 이어진 진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근처 괴산으로 이배되었을 때 지은 작품이다. 수련과 함련에서는 굴

    원처럼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지 않고 섬에서 풀려난 사실과 도연명이나 장후처럼 마음이 맞는 붕우들과 내왕하면

    서 살게 된 기쁨을 말하였다. 이 시의 경련은 기이하고도 난해하다. “皇王制伯”에서 皇과 王은 王道로 다스리던 고

    대의 제왕들을 말하고, 帝와 伯는 皇王 이후 霸道로 다스리던 시대의 제왕들을 말한다. “蒲團”은 스님들이 참선할

    때 깔고 앉는 부들로 만든 자리이다. “蒲團老”는 송나라 范成大의 시에 “선판에 기대고 포단에 앉은 늙고 병든 스

    님[禪版蒲團老病僧]”이라고 하였고 우리나라 丁範祖의 시에 “부서진 집 포단에 앉은 한 늙은 호걸[破屋蒲團一老豪]”

    이라 한 것을 참고하면, “포단의 늙은 스님”, 또는 “포단의 늙은이”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43) 하구의 “枕

    42) 임정기, 국역 소재집 제6권, 「길에서 읊다[路中吟]」의 주석. 43) 范成大, 石湖詩集 권25, 「元夕」 ; 丁範祖, 海左集 권12, 「戱寄申戚參議堯臣」.

    46 ∥ 蘇齋 詩文에 나타난 奇의 미감에 대하여ᆞ신향림

    夢知”는 “蒲團老”와 대를 이루고 있으니 꿈속의 지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경련은 역사 속에서 위대한 공업

    을 남긴 역대 제왕들도 결국은 포단의 노승과 마찬가지로 죽어서 허무하게 사라졌고, 인간이 이룩한 예악과 문물

    또한 모두 꿈속에서 얻은 지식처럼 허망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주자학자도 역대 제왕들도 모두 죽어 사라졌다고 하거나 나라의 흥망성쇠가 무상하다고 말하는 시를 쓸 수 있

    다. 그러나 적어도 주자학자라면 周公이 만들고 孔子가 계승한 예악과 문물을 꿈속에서 얻은 지식처럼 허망한 것

    이라고 말하는 시를 쓰기 어려울 듯하다. 소재는 미련에서 “우연히 뜻을 말하여[言志] 희지에게 준다”고 하여 이

    생각이 마음이 맞는 친구인 김희에게만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속내임을 드러내었다. 위의 시를 통해 소재의 사유가 당대의 일반적인 주자학자들과는 달랐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로 전혀 어울리

    지 않는 皇王帝伯와 포단의 노승, 예악문장과 꿈속의 지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소재의 시구는 당대의 주자학

    자들에게 기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경은 소재집의 서문에서 소재의 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혹자는 선생의 글이 너무 높아서[高] 송나라 유자의 글과 유사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이에 나는 “그대는 유독 박학

    하면서도 전아한 왕세정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이치를 담론하는 문장도 품격이 제 각각이니, 周茂叔은 간결하면

    서 빼어나며[簡俊], 二程은 명확하면서 온당하며[明當], 子厚(張載)는 침착하면서 심오하다[沈深]고 하였습니다.44) 선생의

    글은 「西銘」과 나란히 행해질 수 있으니, 제가 ‘소재와 陶山은 횡거와 두 정자의 관계와 같다.’고 한 것은 이런 뜻에서입니

    다. 濂洛과 閩粤 여러 선생의 글은 체재가 반드시 같지는 않지만 도를 수호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선생의 문체가 송

    나라 유자들과 다른 것은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라고 말한다.45)

    조경은 당대 사람들 가운데 소재의 글이 너무 높아서[高] 송나라 유자들의 글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

    었다고 했다. 조경은 소재의 글이 송유의 글과 다른 듯하지만 이는 정주의 理學과 다른 장재의 氣學이 드러내는

    차이와 같은 경우라고 하고 소재의 학문이나 글이 결코 성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난 게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正祖 또한 소재의 시가 일반적인 유자의 시와 다른 미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논평한 적이 있다. 소재는 19년간 귀양살이하면서 老莊 서적을 많이 읽어서 자못 돈오한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운이 심원하고

    격이 웅혼하니, 고인이 “황야가 천 리에 펼쳐진 형세”라고 한 것은 참으로 잘된 평이라 하겠다. 그러나 대체로는 본래 濂洛

    의 氣味를 잃지 않았으니, 평생 한 학문의 힘은 역시 속일 수 없다.46)

    정조는 소재가 귀양살이하면서 노장의 서적을 깊이 읽고 돈오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가 운이 심원하고

    격이 웅혼하다고 하였다. 정조는 조경과 마찬가지로 소재의 학문이 결코 성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강

    조하기는 했지만 시에 드러난 미감이 특이한 것을 감지하였고 이것을 노장의 영향으로 설명하였다. 조경의 기록과

    44) 왕세정, 弇州四部稿 권147, “談理亦有優劣焉, 茂叔之簡俊, 子厚之沈深, 二程之明當, 紫陽其稍冗矣.”

    45) 趙絅, 「穌齋先生文集敍」 “或謂, ‘先生之文, 無乃太高, 不類宋儒之文?’ 余應之曰, ‘獨不見博雅王鳳洲之言乎? 談理之文, 亦有品別, 茂叔簡俊, 二程明當, 子厚沈深. 先生之文, 可以顔行「西銘」, 則吾所謂若橫渠之於兩程者此也. 濂洛閩粤之文, 體裁不必同, 而衛道則一也. 先生之於文之體, 異於宋儒亦猶是也.’”

    46) 정조, 弘齋全書 권161, 「日得錄ᆞ文學」, “蘇齋居謫十九年, 多讀老莊書, 頗有頓悟處, 故其韻遠, 其格雄. 古人所謂荒野千里之勢, 眞善評矣. 然其大體則自不失濂洛氣味, 平生學力, 亦不可誣也.”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47

    정조의 논평을 통해 소재의 시문이 정주학들의 시문과는 다른 미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소재의 시문에는 당대의 주류 사상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지지하는 내용이 흔히 보인다. “周公 이전에

    는 經傳이 없었으니, 대학 책을 평생 외울 필요는 없다.”라고 하거나,47)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니 닦아서 도에

    들이는 게 아니다.”라고 하거나,48) “마음은 본래 먼지가 침입할 수 없으니 닦을 수 없다.”라고 하거나,49) “주희 식

    의 격물 공부를 통해서는 인간 세상의 독서인밖에 될 수 없다.”라고 한 것50)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주장

    은 당대의 주자학자들에게는 매우 생경하고 기괴한 주장이었을 것이다. 소재가 활동하던 시대에 대부분의 지식인

    은 주자학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주자학과 이질적인 학문을 수용하거나 주자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

    을 금기시하였다. 소재는 이런 금기를 깨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고 당대의 주류 학자들에 맞서서 자신이 진리

    라고 생각하는 것을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다시 시를 부쳐서 퇴계에게 답하다[復寄答退溪]>

    공안은 중천에 뜬 해 公案中天日

    사문은 만고의 언덕 斯文萬古墟

    정미한 이치는 회암과 정암이 극진히 궁구하였거니와 精微盡晦整

    인심과 도심은 요임금과 순임금이 처음 말씀하셨네 人道發唐虞

    대충 보고는 異說이라고 하니 汎認爲他說

    누가 장차 한 글을 써서 분변할 수 있을까 誰將辦一書

    차라리 새장에 갇히는 앵무새가 될지언정 寧如隴鸚縶

    물 건너다 꼬리 적시는 여우는 되지 않겠네 不作渡狐濡

    자신의 인심도심설을 異說로 비판하고 있던 퇴계의 견해를 반박하는 내용을 담아 퇴계에게 보낸 시이다. 소재는

    이 시의 함련에서 주희와 羅欽順이 정미한 이치를 극진하게 탐구하였다고 하여, 나흠순을 주희와 동등한 반열에

    세웠다. 그리고 학문을 궁구한 주희 나흠순에 인심도심을 말한 요임금 순임금으로 대를 맞추어, 현인의 학문과 성

    인의 가르침은 격이 같은 게 아니라는 생각을 드러내었다. 소재는 다른 시에서도 “주자와 육상산이 서로 다름을

    일찍이 들었고, 나흠순과 왕양명이 차이가 있음을 다시 보네. 마음을 보존함은 모두 성인의 영역이지만, 학문을 논

    한 현인의 학술은 각기 다르네[朱陸曾聞異, 羅王更見差. 存心皆聖域, 論學各賢科.]”라고 하였다. 이러한 구절들은 주

    희를 孟子 이후의 亞聖으로 추앙하고 주희의 학설을 진리로 인식하고 있던 당대 일반적인 학자들이 받아들이기 어

    려운 기이한 견해를 담고 있다. 미련 上句의 ‘새장에 갇힌 앵무새’는 晉나라 張華의 「鷦鷯賦」에 “푸른 매는 사납기 때문에 묶이게 되고, 앵무새는

    총명하기 때문에 새장에 갇히게 된다.[蒼鷹鷙而受緤, 鸚鵡惠而入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51) 文選 주에 따르면

    47) 소재집 권4, 「題大學書後, 贈蘇生澳」, “爲學規模盡此書, 且寬期限緊工夫. 不應把作終身誦, 認取周公以上無.”

    48) 소재집 권6, 「贈柳修撰成龍」, “欲者人之性, 人皆不可無. 何修以入道? 吾老竟歸愚.”

    49) 소재집 권5, 「洗心臺」, “有物本無形, 垢埃靡所撲. 將何以洗之, 得見眞面目?”

    50) 소재집 권5, 「法岑卷裏, 次龜巖龜谿韻」, “山河大地法王身, 已近誰能辨亂眞. 辨得眞時方洞豁, 人間終是讀書人.”

    51) 임정기 역, 국역 소재집 제5권, 주석. 전고에 대한 풀이는 임정기 선생님과 차이가 있다. 임정기 선생님은 이 구절에 대해 “새장에

    갇힌 앵무새처럼 아무런 재능도 발휘하지 않고 말을 삼가겠다는 뜻이다.”라고 풀이하였다.

    48 ∥ 蘇齋 詩文에 나타난 奇의 미감에 대하여ᆞ신향림

    ‘惠’는 말을 할 줄 아는 앵무새의 능력을 의미한다.52) 下句의 ‘꼬리 적신 여우’는 周易 「未濟卦」에서 “어린 여우가

    거의 다 물을 건너가다가 꼬리를 적시니 이로운 바가 없다.[小狐汔濟, 濡其尾, 无攸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53)

    ‘程傳에서 “여우는 물을 건너갈 수 있으나 꼬리를 적시면 건너가지 못한다.[狐能度水, 濡尾則不能濟.]”라고 하였다. 미련에서 소재는 총명해서 말을 할 줄 알기에 새장에 갇히는 앵무새가 될지언정 물을 건너다가 꼬리를 적셔서 결국

    물을 건너지 못하는 어설픈 여우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진리로 여기는 학설을 주장하다가 세인들의

    비판을 받게 되더라도 새로운 학설을 탐구하는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이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대

    부분 퇴계를 존경하고 따랐고 소재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재는 자신의 학설을 이설로 비판하는 퇴계를 향해 “당신의 견해는 틀렸고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학설을 계속 주장하겠소.”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소재는 일반적인 유자들과는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었고, 眞情과 眞理를 표현하기 위해서 글의 격식도 형식도

    과감하게 탈피했던 사람이었다. 당대의 문인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감히 발설하지 않는 내용을 말하려고 했기에 당

    대 문인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어휘와 형식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소재 시문이 기이한 미

    감을 지니게 된 것은 그가 강서시파나 두보를 배운 것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그의 사상과 학문이 당대 주류 사상

    과 달랐던 게 좀더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동하지 않았을까 한다. 5. 마무리

    소재의 시문에는 파격적인 형식과 생경한 어휘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조선의 논자들은 이러한 소재의 문학을 奇

    의 미감을 지닌 것으로 평하였다. 비평용어로서 奇는 익숙한 규범이나 정통에서 벗어나서 특이하고 낯설고 난해한

    문학을 품평할 때 주로 쓰인다. 소재의 시문이 기이한 미감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소재가 당대 일반적인

    지식인들과는 사상이나 정신지향이 달랐고 이 독특한 사상과 정신지향을 드러내기 위해 기존의 문인들이 사용하

    던 어휘와 형식을 혁신했던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필자는 소재의 사상이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문인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

    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또 고전을 모방하거나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고 독창적이

    고 개성적인 문학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학 경향은 전후칠자의 복고 문학에 반대했던 공안파의 문학론에

    잘 드러나 있다. 소재는 우리나라에서 전후칠자나 공안파의 문학이 유행하기 이전에 활동한 문인이다. 겉으로 보

    기에 소재의 난해한 시문들은 손이 가는 대로 평이하게 써 내려간 한 공안파의 시문과는 다르고 오히려 언어의

    조탁에 치중한 전후칠자의 시문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소재가 전범을 추수하는 千篇一律적인 문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형식과 표현을 창출하여 어떤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진리로 여기는 것을 당당하게 드러내었던 면은

    양명학을 받아들인 문인들의 지향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52) 文選註 권13, 「鷦鷯賦」, “王逸楚辭注曰: ‘緤, 繫也.’ 鸚鵡賦曰: ‘性辯恵而能言.’ 又曰: ‘閉以雕籠.’”

    53) 임정기, 국역 소재집. 임정기 선생님은 程傳에 근거하여 주역의 「미제괘」를 해석하였지만 필자는 本義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것이

    소재가 이 시를 지은 의도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49

    【제4발표】

    소재 오언율시의 표현 수법

    이남면(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1. 서론

    2. 두시의 인용과 변용

    3. 정교하고 기발한 표현 수법

    4. 결론

    1. 서론

    본고는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의 오언율시를 표현 수법의 측면에서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노수신은 16세기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이다. 노수신은 1543년 문과

    (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다. 그러나 을사사화 때 파직되어 1547년 순천으로 귀양 갔다가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진도로 이배된 뒤 19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1565년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 선조가 등극하

    자 풀려났다. 21년의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낸 그는 벼슬길에 복귀한 이후 승승장구하여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처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속에서 노수신은 평생 학문과 시작(詩作) 활동에 주력하였다. 시인 노수신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호소지(湖蘇芝)로 병칭되며, 허봉(許

    篈)에 의해 당대의 대가(大家)로 평가 받았다.1) 그는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시인들

    과 교류하며 자신의 시적 성취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당대 위상이 높았던 만큼 노수신 시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시 전반을 다룬 학위논문들을 비롯하여 시를 사상과 연결하여 논한 연구, 작법과 미학적

    측면을 다룬 연구, 유배기의 시를 다룬 연구 등 다양하다.2)

    1) 惺所覆瓿藁 26卷, 「鶴山樵談」, “仲氏評近來詩人, 蘇齋相公爲大家, 高霽峯敬命次之.”

    2) 서수용, 「蘇齋 盧守愼 詩 硏究: 流配期의 詩作을 中心으로」, 성균관대 석사논문, 1984.; 이승화, 「蘇齋 盧守愼의 漢詩硏究」, 단국대 석사논

    문, 1993.; 채용복, 소재 노수신 시의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1992.; 이종묵,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신태영 「노소재의

    시 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1997.; 신향림, 「盧守愼 詩에 나타난 思想 硏究 : 朱子學에서 陽明學으로의 轉變」, 고려대 박사논문, 2005.; 조희창, 「蘇齋 盧守愼의 詩文學 硏究」, 성신여대 박사논문, 2010.; 신향림,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만년기 시에 대한 고찰」,

    50 ∥ 소재 오언율시의 표현 수법 연구ᆞ이남면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노수신의 오언율시를 살피고자 한다. 노수신은 다양한 형식의 시를

    지었지만 그가 가장 공력을 들인 시형은 다름 아닌 오언율시였다. 그 스스로도 “경서 하나만 가지고 늙을 작정이

    요, 오언시를 짓는 건 이름을 탐해서가 아니라네[一經渾得老, 五字不貪名.]”3)라고 하여 오언시에 공력을 들였음을

    인정하였거니와, 허균의 성수시화(惺叟詩話)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노소재(盧蘇齋)ᆞ황지천(黃芝川)은 근대의 대가로서 둘 다 근체시에 솜씨가 뛰어나다. 노수신의 오언율시와 황정욱의

    칠언율시는 모두 1천년 이래의 절조이다. 그러나 장편시는 이만 못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4)

    노수신과 황정욱이 당대에 각각 오언과 칠언의 율시로 높은 성취를 이루었으며 장편시는 율시의 성취만 못하다

    고 하였다. 노수신이 오언율시로 탁월한 성취를 보였음은 양경우(梁慶遇)의 제호시화(霽湖詩話)와 이의현(李宜顯)

    의 운양만록(雲陽漫錄)에도 잘 나타나 있다.5)

    오언율시에 탁월한 성과를 보였던 노수신은 그의 문집에 약 770수 가량의 오언율시를 남겼다. 이는 그의 전체

    작품수인 1,499수 대비 약 51%로서 단일 시 형식으로는 가장 많은 분량에 해당한다. 그 창작 또한 특정 시기에

    편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고루 분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노수신의 오언율시가 높은 성취를 인정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본고에서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표현

    수법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노수신의 시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표현하는 수법이 성취를 확인하는데

    중요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노수신의 오언율시는 두보의 시 작법과 유사하여 글자 하나 말 한마디가 모두 두

    보에서 나왔다고 한 양경우의 말6)처럼 우선 두시(杜詩)와의 관련성을 논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노수신이 두

    시를 인용한 양상이 비교적 뚜렷한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노수신의 시는 율시의 대장 격식

    을 정교하게 갖추면서도 기발한 표현들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는데, 이를 작품 분석을 통해 확인해볼 것이다. 2. 두시의 인용과 변용

    노수신은 두시를 무려 2천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7) 그가 두시를 좋아했던 이유가 본인의 시 창작에 적용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특히 오랜 유배 생활을 경험하면서 안사의 난 이후 평생 외지를 방랑해야 했

    던 두보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객지에서 가족 생각이 나거나 서울이 그리울 때, 가족 친지와 이

    별할 때, 피란 생활을 해야 했을 때 등 두보와 유사한 상황이 생길 때면 여지없이 두보의 생각과 행동, 모습 등을

    고전문학연구 42집, 한국고전문학회, 2012.; 박병익, 「蘇齋 盧守愼의 「避寇錄」 硏究」, 한국시가문화연구 29집, 한국시가문화학회, 2012.; 조희창, 「湖蘇芝의 詩文學 硏究-唐詩風을 中心으로-」, 한문고전연구 26호, 한국한문고전학회, 2013.06.; 이종묵, 「호소지 율시

    의 문예미」, 한국한시연구 23집, 한국한시학회, 2015.; 강지희,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의 포은 시 비평과 그 의미」, 포은학연구 26호, 포은학회, 2020.; 강지희, 「許筠이 본 蘇齋 盧守愼 詩의 美的 특질-『國朝詩刪』의 批評을 중심으로-」, 대동한문학 66호, 대동한

    문학회, 2021.

    3) 蘇齋集 권4, 「次韻房白二生各一篇」

    4) 惺所覆瓿藁 25卷, 「惺叟詩話」, “盧蘇齋ᆞ黃芝川, 近代大家, 俱工近體. 盧之五律, 黃之七律, 俱千年以來絶調. 然大篇不及此, 未知其故也.”

    5) 霽湖集 9권, 「詩話」, “康府尹嘗從蘇齋學詩, 蘇齋曰, ‘我與湖陰詩名相埒, 世不能辨其優劣. 僕之長律, 不及湖陰, 湖陰短律, 不及於僕, 各有長

    處耳.’”; 陶谷集 27卷, 「雲陽漫錄」, “後來湖陰七言律ᆞ蘇齋五言律, 俱膾炙一世.”

    6) 霽湖集 9권, 「詩話」, “盧蘇齋五言律, 酷纇杜法, 一字一語, 皆從杜出.”

    7) 김득신, 終南叢志, “盧穌齋讀論語杜詩二千回.”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51

    떠올렸다. 노수신의 시에 두보의 시구가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노수신이 두보의 언행과 생각

    에 전적으로 공감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두보의 생각을 뒤집기도 하고 두보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한탄

    하거나 위로 받기도 하였다. 본 절에서는 이처럼 노수신이 두보에 공감한 경우, 두보의 생각을 뒤집은 경우, 두보

    와 처지를 비교한 경우로 구분하여 두시의 인용과 변용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두보에게 공감한 경우 그 인용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두보시의 한두 구절을 그대로 인

    용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두보 시 구절의 일부 글자를 바꾸어 현재 상황에 맞춘 경우이다. 먼저 두보시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예를 보자.

    「함평에서 현감에게 율시 두 수를 주고 작별하다 咸平贈別縣監二律」 제2수

    성주께서는 당초부터 걱정하고 계시거니 聖主初愁思

    장군이 어찌 웃음을 띨 수가 있겠는가 將軍豈破顔

    교화는 응당 의용을 힘쓰도록 하거니와 敎應敦義勇

    정사는 엄함과 관대함을 다 갖추었구려 政得備嚴寬

    잠 못 이루고 군대의 경보 소리를 듣고 不寐聞刁斗

    풍편을 인하여 해산을 상상도 해 보네 因風想海山

    닭이 울자 고인의 시구를 외노라니 鷄鳴誦古句

    세상이 어지러운데 감히 편안하길 구하랴8) 世亂敢求安

    이 시의 미련에서 ‘고인’은 두보를 가리킨다. 두보가 만년에 거처를 옮기면서 지은 오언율시 〈공안의 산 속 역관

    으로 거처를 옮기다[移居公安山館]〉의 미련에 “닭이 울자 앞길의 역관을 물어 가노니, 세상이 어지러운데 감히 편

    안하길 구하랴.[鷄鳴問前館, 世亂敢求安?]”라고 하였는데9), 노수신 역시 미련에 이 구절을 끌어들였다. 1555년 5

    월에 왜구가 해남 지역을 침범하여 노수신은 부득이 피난을 가야 했다. 5월 말에 함평에 도착하자 옛 벗인 함평

    현감 유응두(柳應斗)가 맞이하며 숙소를 정해주었다. 그러나 군왕도 걱정이 많고 장군도 웃음을 보일 수 없을 정도

    로 형세가 위태로운데 벗에게 오래도록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수신은 6월 6일 저녁 비를 맞으며 함평

    을 출발하여 새 거처를 찾아 나서는데 그날 새벽에 이미 두보가 거처를 옮기며 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두보의

    시를 읊조리며 본인 시의 시상 전개에 그대로 활용한 것은 두보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두보의 말에 공감할 때 두보의 시구를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부 글자나 어휘에 변화를 주어 현

    상황에 맞춘 경우도 있다. 다음을 보자. 가) 「벽파정의 기둥에 제하다 題碧波亭楹」

    고을은 부서졌어도 관량은 그대로이고 邑破關梁在

    8) 蘇齋集 권4. 본고에서 노수신 시의 번역은 임정기 선생이 번역한 소재집(총6권, 한국고전번역원)을 참고하되 필자가 필요에 따라 일

    부 수정하였다. 또한 두보시의 창작 시기와 배경 등은 仇兆鰲 注, 杜詩詳註, 中華書局, 1999와 이영주ᆞ강성위ᆞ홍상훈 역해, 완역 두

    보율시, 명문당, 2006을 참고하였다. 9) 杜詩詳註 권22.

    52 ∥ 소재 오언율시의 표현 수법 연구ᆞ이남면

    기운이 혼미하니 해와 달도 침침하네10) 氛迷日月冥 <경련>

    나) 「또 운을 부르면서 심하게 재촉하다 又呼韻苛徵」

    애간장은 시호의 굴 때문에 녹고 魂銷豺虎窟

    눈물은 교활한 왜놈 하늘에 흘렸노라11) 淚入猾奴天 <수련>

    다) 「제석 除夕」

    나그네 생활 그칠 때가 없건만 爲客無時了

    슬픈 이 해는 저녁으로 끝난다오 悲年向夕終

    기주의 시는 한 글자만 바꾸었는데 夔詩一字化

    괴산의 술은 작은 술통이 텅 비었네12) 槐酒小樽空 <수련과 함련>

    가)에서 상구는 두보의 오언율시 <춘망(春望)>의 첫 구절인 ‘나라는 부서져도 산하는 그대로 있고[國破山河在]’에

    서 ‘國’을 ‘邑’으로, ‘山河’를 ‘關梁’으로 각각 변용한 것이다.13) 두보가 나라와 국토 전체를 걱정 대상으로 한 것과

    달리 노수신은 진도로 국한하여 읊었다. 진도가 노수신이 유배된 곳이기도 하거니와 당시 왜구의 침략 범위가 전

    라도 남쪽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하구 역시 두보의 오언율시 〈영주 이판관을 전송하다[送靈州李判官]〉의 함련에 “피 흘려 싸워 하늘과 땅이 벌겋고, 기운이 혼미하니 해와 달도 누렇네.[血戰乾坤赤, 氛迷日月黃.]”라고 하였는데, 그 하구를 취한 것이다.14) ‘黃’을 ‘冥’으로 바꾼 것은 운자의 평측을 고려했기 때문이다.15) 이를 통해 전란이 휩쓸

    고 간 진도 지역의 처량한 정경을 표현하였다. 나)는 두보의 오언율시 〈거울을 보다가 백중승에게 드리다[覽鏡呈柏中丞]〉의 함련에 나오는 “간담은 승냥이와 호

    랑이 굴 때문에 녹고, 눈물은 개와 양의 하늘에 흘린다오.[膽銷豺虎窟, 淚入犬羊天.]”를 인용한 것이다. ‘豺虎’와 ‘犬

    羊’은 모두 악한 세력을 의미하는데, 두보시에서는 ‘토번’을 가리켜서 한 말이다. 노수신은 두보의 이 구절을 인용

    하면서 제1구의 ‘膽’을 ‘魂’으로 바꾸고 제2구의 ‘犬羊’을 ‘猾奴’로 바꾸었다. 글자와 시어의 변경이 의미에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다만 노수신이 제2구의 시어를 바꾼 것은 강조하고자 한 의도로 보인다. 두보처럼 ‘豺虎’에

    ‘犬羊’으로 대를 한 것이 모두 짐승 이름으로서 더 적절한 대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수신은 공대

    (工對)를 포기하고 관대(寬對)를 선택할지언정 왜구의 교활함을 강조하고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의 경우, 시인은 함련 상구에서 두보가 기주에 있을 때 지은 시를 인용하였다고 직접 밝혔다. 두보가 대력(大

    曆) 2년 9월 30일에 지은 오언율시의 수련을 본인의 시 수련에 적용하였는데, 단지 글자 하나만 바꾸었다는 것이

    다. 두보의 시가 “나그네 생활 그칠 때가 없건만, 슬픈 이 가을은 저녁으로 끝난다오.[爲客無時了, 悲秋向夕終.]”16)

    10) 蘇齋集 권4.

    11) 蘇齋集 권4.

    12) 蘇齋集 권5.

    13) 杜詩詳註 권4.

    14) 杜詩詳註 권5.

    15) ‘황’은 하평성 陽에 해당하기 때문에 하평성 ‘庚’에 해당하는 ‘冥’자로 변경한 것이다. 16) 杜詩詳註 권18.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53

    라고 하였으니, ‘秋’자를 ‘年’으로 변경한 것이다. 두보가 가을이 끝나는 마지막 날 시를 쓴 데 비해 노수신은 한

    해가 끝나는 시점에 시를 지었으므로 글자 변경은 당연하다. 글자 하나만 바꾸고 나머지는 그대로 인용했으므로

    작시에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이 아닌데도 마시고 있던 술통이 어느덧 텅 비었다고 하여 시 짓기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해학적으로 그렸다. 둘째 두보의 언행이나 생각을 뒤집는 경우이다. 이때 부정사나 의문사, 부사어 등을 활용하여 어세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거미를 보고 蜘蛛」

    낡은 그물을 저물녘에 얽어 대더니 獘罟昏仍緝

    새 거미줄은 새벽까지 걷지 않았네 新絲曉不收

    윙윙대는 파리는 본래 서로 어지러이 날고 營蠅本交亂

    춤추는 나비는 절로 가벼이 까분다오 舞蝶自輕浮

    거미는 단지 뱃속을 채우려는 것이요 只爲充腸業

    천물을 버리자는 것은 아니라오 非關殄物謀

    자연의 기미는 인간사와 다른 법인데 天機異人事

    두자는 부질없이 걱정도 많았구려17) 杜子謾多憂

    이 작품은 두보의 오언율시 〈독립(獨立)〉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이다. 두보는 매가 허공 밖에서 노려보는 줄도 모

    르고 경솔히 오가는 갈매기를 읊었다. 더구나 풀잎의 이슬에도 축축이 젖었고 거미줄도 걷히지 않은 상황이라 갈

    매기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점점 강조한다. 두보는 미련에서 “자연의 기미는 사람 일과 가까워, 홀로 서서 오

    만 가지로 시름한다오.”라고 함으로써 자연의 이치와 인간사를 동일시한다.18) 즉 자연 현상처럼 인간 세상에도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수신은 두보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윙윙대며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파리와 사뿐히 팔랑대며 날

    아다니는 나비는 자신들의 본성대로 움직이는 것뿐이며, 거미도 그저 배를 채우려는 본능에 충실할 뿐 파리와 나

    비를 얽어매려는 악한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결국 자연의 이치는 인간 세상의 그것과는 다른데도 두보

    는 두 가지를 동일시하여 괜한 감정이입을 하며 시름했다는 것이다. ‘거미’를 보고 두보 시를 떠올리면서도 두보와

    견해가 다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모습은 노수신이 대자연의 이치에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려는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다음 시

    역시 두보와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무가대한식’을 첫 구로 하여 다섯 수를 지으면서 ‘유루여금파’를 운으로 삼다

    無家對寒食五首以有淚如金波爲韻」 제2수

    집 없이 한식을 맞이하니 無家對寒食

    17) 蘇齋集 권1.

    18) 杜詩詳註 권6, “空外一鷙鳥, 河間雙白鷗. 飄颻搏擊便, 容易往來游. 草露亦多濕, 蛛絲仍未收. 天機近人事, 獨立萬端憂.”

    54 ∥ 소재 오언율시의 표현 수법 연구ᆞ이남면

    그간 인간사를 얼마나 겪었던가 幾閱人間事

    돌아가는 새에 마음 놀라지 않고 歸鳥不驚心

    조는 꽃에 눈물도 뿌리지 않으련다 睡花休濺淚

    어버이 계신 곳은 천리나 멀고 庭闈千里遙

    대궐은 구중궁궐 깊기만 한데 閶闔九重邃

    절서는 저절로 바삐바삐 흘러서 節序自悤悤

    금년 내 나이 삼십사 세가 되었네19) 今年三十四

    두보가 아내와 헤어지고 3개월 여 지났을 때 오언율시 〈105일이 지난 한식날 밤에 달을 맞이하다[一百五日夜對

    月]〉를 지었는데, 그 수련에 “집 없이 한식날을 맞으니, 눈물 있어 금물결 같도다.[無家對寒食, 有淚如金波.]”20)라고

    하였다. 이 시는 두보 시 수련의 상구를 첫 구로 삼았고, 하구의 각 글자를 각 시의 운자로 사용하여 지은 시의

    둘째 수이다. 경련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두보가 아내를 생각하며 시를 지은 것과 달리 노수신은 부모님을 생각하고 있다. 이

    시는 함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보의 오언율시 <춘망(春望)>의 함련 “시절을 감탄하니 꽃도 눈물을 뿌리고, 이

    별을 한하니 새도 마음을 놀라누나.[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를 원용한 것이기 때문이다.21) 두보는 안녹산의 난

    으로 인해 장안에 억류된 채 나라와 가족을 걱정하면서 꽃과 새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켰다. 여기에서 눈물을 뿌

    리고 마음이 놀라는 주체는 다름 아닌 두보 자신이다. 그러나 노수신은 새를 봐도 마음 놀라지 않고 꽃을 봐도 눈

    물을 흘리지 않겠노라고 말한다. 여러 해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내성이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자연의

    모습에 흔들리지 않고 초연해지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두보의 시에 ‘不’과 ‘休’자를 첨가하여 자연물을 보

    며 심리적으로 흔들렸던 두보와 차별화하고 있는 것이다.

    「전괘령의 협정에서 차운하여 외삼촌을 전송하다 錢掛嶺莢亭次韻送舅氏」

    산해 간에는 쑥처럼 늘어진 두 귀밑이요 山海雙蓬鬢

    천지 간에는 협정 하나뿐이로다 乾坤一莢亭

    식은 재 같은 마음은 아직 그대로이건만 灰心猶有素

    눈물 젖은 눈은 기쁜 기색 띤 적이 없다네 淚眼不曾靑

    노인을 다습게 하는 건 연옥이 아니거니와 煖老非燕玉

    굶주림을 채우는 건 어찌 초나라 평실이랴 充飢豈楚萍

    덧없는 인생은 참으로 천지간에 부쳐 삶이라 浮生眞寄寓

    끝내는 모두 저승으로 가고 마는 거지22) 畢竟盡幽冥

    이 시는 수련과 경련에서 두보 시를 인용하였다. 수련이 두보의 처지와 상황에 공감한 경우라면 경련은 두보의

    견해를 반박한 곳이다. 먼저 수련을 보자. 두보의 오언율시 <늦봄에 양서에서 새로 임대한 초옥에 쓰다[暮春題瀼西

    19) 蘇齋集 권2.

    20) 杜詩詳註 권4.

    21) 杜詩詳註 권4.

    22) 蘇齋集 권4.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55

    新賃草屋]> 함련에 “신세는 쑥처럼 늘어뜨린 두 귀밑이요, 천지간에는 초정 하나뿐이로다.[身世雙蓬鬢, 乾坤一草

    亭.]”23)라고 한 것을 끌어들였다. 두보는 ‘건곤’, ‘천지’, ‘우주’와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시어를 자주 사용하는 경

    향이 있다. 이를 통해 장중하고 웅혼한 기세를 드러내곤 하는데,24) 노수신이 두보의 이런 경향을 수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노수신은 두보 시의 ‘身世’를 ‘山海’로 바꾸었는데, 이는 ‘乾坤’과의 대우를 더 적실히 하는 효과를 보

    이면서도 상구에서부터 공간과 자신을 대비시키는 수법으로 전용하였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진도에서 초라하

    게 지내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대비되고 있다. 하구는 두보 시와 마찬가지로 천지라는 큰 공간과 풀로 엮은 작은

    정자 하나를 대비시켜 천지간에 기댈 곳이라곤 이 작은 정자 하나 밖에 없음을 표현한 것이다. 수련이 두보의 말에 공감하여 인용한 경우라면 경련은 두보의 견해를 반박한 경우이다. 두보의 오언율시 〈홀로

    앉아서 짓다[獨坐]〉 경련에 “늙은 몸 다습게 하자니 연옥이 생각나고, 주린 배 채우려니 초나라 평실이 생각나네.

    [煖老思燕玉, 充饑憶楚萍.]”25)라고 하였는데, ‘연옥’은 옥과 같이 아름다운 연땅의 미녀를 가리키고, ‘초평’은 초나

    라 왕이 얻었다고 하는 길상(吉祥)의 과일이다. 두보는 만년에 기주에서 홀로 지내며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

    었지만, 노수신은 두보의 말을 떠올리면서도 ‘非’, ‘豈’와 같은 부정사, 의문사를 각각 사용하여 두보처럼 외적인

    유혹에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셋째 두보의 처지와 비교하는 경우이다. 이때 두보와 서로 같고 다른 점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통

    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반대로 위로하기도 한다. 가) 「인종대왕의 담제일에 짓다 仁宗大王禫日」

    상락주야 어찌 내 분수에 맞으랴 桑落豈吾分

    국화 또한 제 절로 향기로울 뿐이네26) 菊花徒自馨

    나) 「어머니의 서신을 얻고 울면서 쓰다 得堂書泣書」

    능히 나의 백골을 수습할 수 있으리니 便能收白骨

    누가 나에게 아우가 없다고 말하겠는가27) 誰謂我爲無

    다) 「시약청에서 읊다 侍藥廳」

    원숭이가 서리 밖에서 자는 것은 아니지만 異猿霜外宿

    새가 한밤중에 나는 풍경은 똑같구려28) 如鳥夜深飛

    23) 杜詩詳註 권18.

    24) 于年湖, 杜詩言語藝術硏究, 齊魯書社, 2007, 146쪽.; 이영주 외, 두보의 삶과 문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193쪽(이 책의

    제2장 1절 「두보의 율시와 절구」에서 집필자인 김준연은 두보가 오언율시에 ‘天地’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사용 의도가 불분

    명함을 지적하였다.)

    25) 杜詩詳註 권20.

    26) 蘇齋集 권2.

    27) 蘇齋集 권4.

    28) 蘇齋集 권5.

    56 ∥ 소재 오언율시의 표현 수법 연구ᆞ이남면

    가)는 인종대왕의 담제일에 지은 시의 경련으로, 담제일이 마침 중양절이기 때문에 중양절과 관련한 두보 시 내

    용을 끌어들인 것이다. 두보의 오언율시 〈중야절에 봉선현의 양현령이 백수현의 최명부를 만나다[九日楊奉先會白

    水崔明府]〉의 함련에 “앉아서 상락주를 열고, 오면서 국화 가지를 손에 쥐었네.[坐開桑落酒, 來把菊花枝.]”29)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은 중양절에 주인과 손님이 한 행동을 각각 읊은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연회에 함께 참석했던 두

    보 역시 마시고 즐긴 대상이기도 하다. 노수신은 중양절을 맞이했지만 두보처럼 미주(美酒)와 국화주를 즐기지 못

    함을 한탄하고 있다. 나)는 두보의 <건원 연간에 동곡현에서 우거하면서 지은 시 7수> 중 제3수에 “아우야 아우야 먼 곳에 있구나. 세 명 모두 수척하니 누가 튼튼하랴?......아 세 번째 노래함이여 세 번 부르니, 너희들이 어디로 돌아가 형의 뼈를

    수습할거나?[有弟有弟在遠方, 三人各瘦何人强......嗚呼三歌兮歌三發, 汝歸何處收兄骨]”라고 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30) 당시 노수신의 아우 노극신(盧克愼)이 형을 찾아왔었는데, 두보가 안사의 난 이후 아우들과 만나지 못했

    을 때와 비교하면서 자신은 외지에서 죽더라도 두보와 달리 자신의 시신을 묻어줄 동생이 있다고 한 것이다. 두보

    와의 비교를 통해 자위(自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는 노수신이 해배된 이후 조정의 시약청에 있을 때 지은 시이다. 노수신은 늦은 밤이 되자 두보가 기주에 있

    을 때 지은 오언율시 〈야(夜)〉를 떠올린다. 그 함련에 “산 원숭이는 서리 밖에서 자고, 강가의 새는 한밤중에 날아

    가네.[嶺猿霜外宿, 江鳥夜深飛.]”31)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은 두보가 집 밖의 밤 풍경을 읊은 것이다. 그러나 노수

    신은 두보처럼 산수 간을 떠도는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산[嶺]과 강(江)은 시어로 사용할 수가 없다. 따라서 두 글자

    를 없애고 대신 ‘異’자와 ‘如’자를 넣어 두보가 본 풍광과 같고 다른 차이점을 묘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두보 시의

    2-3구법이 1-4의 특수 구법으로 전용되었다. 이 구절은 밤늦게까지 시약청에서 인성왕후의 병환을 돌보고 있는

    자신의 주변 정황을 말하고자 한 것인데 굳이 처지가 같지 않은 두보 시의 경물 묘사를 끌어들인 데에서 노수신이

    작시할 때 두보 시를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3. 정교하고 기발한 표현 수법

    노수신은 오언율시를 창작하면서 대장을 정교하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였다. 율시는 함련과 경련에 대를 이루어

    야 하는데, 노수신은 수련 혹은 미련에도 대장을 갖춘 시를 많이 지었으며, 심지어 모든 연에 대장을 맞춘 전대격

    의 시 또한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대장 격식을 정교하게 갖추려면 유사한 사성(詞性)의 시어를 병치시켜야 하고

    구법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형식적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제약을 준수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해나갈 때 율시는 나름의 성취를 얻을 수 있다. 노수신은 대장 격식을 정교하게 갖추면서도 기발한 방식을 다

    양하게 구사하여 시상을 전개하였는데, 다음 시를 통해 이를 확인해보기로 한다.

    「신씨정에서 무회 아우를 생각하다 愼氏亭懷無悔甫弟」

    29) 杜詩詳註 권4

    30) 杜詩詳註 권8

    31) 杜詩詳註 권20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57

    길은 평구역에서 다하였고 路盡平丘驛

    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졌네 江深判事亭

    정자에 오르니 만고강산 확 트이고 登臨萬古豁

    잠자리는 오경 밤에 맑기도 해라 枕席五更淸

    이슬 어린 물가엔 고기와 새 번득이고 露渚翻魚鳥

    금빛 물결엔 달과 별이 움직이누나 金波動月星

    남쪽 고향 생각에 눈물 죄다 쏟지만 南鄕雙淚盡

    대궐을 향한 마음은 밝기만 하다오32) 北闕寸心明

    이 시는 모든 연에 대우를 맞춘 작품이다. 노수신은 지명이나 관직명 같은 속어(俗語)를 시어로 적극 사용하

    였는데, 이 시의 수련은 이를 잘 보여준다. 율시의 수련은 파제(破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신씨의 정자를

    수련에 포함하기 위해 신씨의 정자가 위치해 있는 장소인 평구역을 상구에서 먼저 알리고 하구에서 신씨의 정자를

    ‘판사정’으로 명명하였다. 정자의 주인인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이 1,500년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임

    명된 바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표현한 것인데 관직명에 ‘亭’자를 합하여 조어한 명칭을 사용한 것이 기발하고 참

    신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역명과 정자명을 사용하면서도 1-1-3의 구법 속에 대우를 정확히 맞추었다. 허균은 “우

    리나라 지명은 중국만 못하여 시 지을 때 지명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다.”고 한 최경창의 말을 전하고서 이 시의

    수련은 “상하구가 모두 속어를 썼지만 구법이 온당하니, 대가의 솜씨는 절로 여타의 사람들과 다름을 알겠다.”라

    고 논평하였다.33)

    수련이 장소를 표현했다면 함련은 시간을 나타내고 있다. ‘登臨’, ‘枕席’과 같은 시어는 시인이 판사정에서 한 활

    동을 말해주는데, 상구가 낮의 활동이라면 하구는 밤의 움직임이다. 시인이 낮부터 밤까지 판사정에 있었음을 보

    여준다. 여기에서는 ‘萬’과 ‘五’의 숫자가 대를 이루어 공교함을 더하였다. 경련은 또 함련을 이어 맑은 밤 시간에 일어나는 판사정 주변의 풍광을 읊었다. 물가에 고기와 새가 번득이는

    상구의 모습이 지상의 풍경이라면 달과 별이 움직이는 모습은 하늘의 풍광이다. 다만 하늘의 풍광을 직접 하늘을

    보고서 확인한 것이 아니라 강물에 비친 모습을 통해 확인했다는 것이 의표를 찌른다. 판사정 주변의 밤은 겉보기

    에 맑고 고요하지만 우주 만물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정중동의 분위기를 자아낸 것도 경련의

    묘미이다. 미련은 시인의 내면을 읊은 것이다. 남쪽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면서도 대궐의

    군왕을 향한 일편단심이 확고함을 드러내었다. 상구와 하구는 각각 부모님 생각과 군왕 생각이 ‘南’과 ‘北’의 방향

    으로 대비되고 있다. 아울러 부모를 생각하며 이는 여린 마음과 군왕을 생각하며 이는 강한 마음이 대비를 이루어

    비장(悲壯)한 정조를 불러일으킨다. 이상과 같이 이 시는 수련에서부터 속어 사용의 생소함을 보여주었고 함련에서 미련까지 낮과 밤, 땅과 하늘, 남과 북처럼 시간, 공간, 방향 면에서 의미상의 대칭을 정확히 맞추었으며, 판사정 주변의 정중동한 모습과 시인의

    비장한 감회까지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면모가 시 전편의 정교한 대장과 구법 안에

    32) 蘇齋集 권5.

    33) 惺所覆瓿藁 26卷, 「鶴山樵談」.

    58 ∥ 소재 오언율시의 표현 수법 연구ᆞ이남면

    서 나타나고 있는데, 시인의 기발한 창작 역량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위의 시에서 보았듯이 철저한 대장 격식 안에 여러 상반된 의경을 치밀하게 배치하는 것은 노수신 오언율시의

    특징이다. 다음 시를 한 편 더 보자.

    「연경에 가는 박희정을 보내다 送朴希正赴燕」 제1수

    예전에는 서로 즐기기를 다했는데 伊昔交歡罄

    지금은 세상일로 마음을 졸인다오 如今世故煎

    눈앞에는 우리 모두 노쇠했거니와 眼中俱老矣

    마음속은 나 홀로 망연자실하네 心下獨茫然

    영교 밖으론 나그네 넋이 늘 가는데 嶺嶠覊魂逝

    연경으론 이별의 한이 이어지겠구나 幽燕別恨綿

    예로부터 만나고 헤어진 곳에서는 由來聚散地

    죽고 삶을 하늘에 묻지 않았다오34) 不問死生天

    박희정(朴希正)은 박민헌(朴民獻, 1516~1586)으로, 1572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다녀온 바 있는데, 이때

    노수신이 송별하며 지어준 시이다. 이 시 역시 전대격이다. 수련은 ‘伊昔’과 ‘如今’을 동일한 위치에 병치시켜 과거

    와 현재를 대비시켰으며, 두 사람의 관계와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내며 함

    께 즐기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일마다 가슴 졸이는 신세가 되었다. 걱정 없이 함께 즐기던 과거와 세상일로 가슴

    졸여야 하는 현재가 선명히 대비를 이룬다. 함련은 수련의 ‘如今’을 이어 나이 든 현재의 모습과 상황을 읊었다. 상구는 ‘俱’를 통해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

    하는 공통점을 읊었고, 하구는 ‘獨’자로 시인 본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을 표현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노쇠한 것은

    공통되지만 마음이 망연자실한 것은 본인만 해당한다고 하였는데, 함련 역시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도록 하였다. 경련은 함련 끝에서 말한 ‘茫然’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상구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그리는 마음

    을, 하구는 벗과 이별하는 슬픔을 드러내었다. 여기에서 ‘嶺嶠’와 ‘幽燕’을 병치시켰는데, 각각 남쪽과 북쪽의 지역

    으로서 시인의 내면이 향하는 방향이다. 남쪽의 한 방향으로만 향하던 마음이 정반대의 북쪽으로도 향하게 될 것

    이라는 뜻을 담았다. 미련은 경련의 ‘別恨’을 이어 받아 이별의 상황에 초연해지려는 시인의 심정을 읊었다. 이 과정에서 만남과 헤어

    짐이 일어나는 지상과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하늘을 서로 대비시켜 상반된 구도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聚散’,

    ‘死生’와 같이 하나의 단어에 상반된 두 의미가 담긴 말을 각각 병치시켜 대우의 공고함을 더하였다. 이처럼 이 시는 수련에서 미련까지 각각 과거와 현재,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 남과 북의 방향, 지상과 하늘

    이라는 상반된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수련 하구의 ‘如今’이 함련으로 이어지고, 함련의 ‘茫然’이

    경련으로 이어지며, 경련의 ‘別恨’이 미련으로 이어지고 있다. 상반된 의경의 배치와 내적 구조의 연결성이 치밀하

    34) 蘇齋集 권6.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59

    게 어우러진 작품이라고 하겠다. 한편 노수신은 구법 면에서도 평범함을 벗어난 방식을 사용하였다. 오언시의 구법은 2-3을 기본으로 하여

    2-2-1이나 2-1-2로 분절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노수신 역시 2-3의 구법을 자주 사용했으나 때로는 특수 구법

    으로 분류되는 4-1의 구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다음을 보자.

    「백광훈(白光勳), 문익세(文益世) 두 서생과 작별하다 別白文二生」

    아득하여라 천지간은 깊고도 멀고 莽蕩乾坤阻

    쓸쓸하여라 생명은 미세하기만 한데 蕭條性命微

    시 서 예의 배움은 이루지 못했으니 詩書禮學未

    서른아홉 해가 그릇 되었다오 三十九年非

    이슬 젖은 국화주를 오궤에 기대 마시고 露菊憑烏几

    가을벌레 소리에 대사립을 닫았다오 秋蟲掩竹扉

    이때에 문생 백생이 찾아와서는 此時文白至

    사흘 밤을 자고 돌아가는구나35) 三宿乃言歸

    수련은 상구의 끝없이 광활한 천지와 하구의 쓸쓸하고 미세한 존재가 대비를 이루어 천지간에서 힘겹게 살아가

    는 왜소하고 고독한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함련은 그 왜소한 존재의 현재 상황을 말하였다. 시서예를 배우지

    못했다는 것은 공자와 아들 리(鯉)의 일화를 용사한 것이다. 리가 뜰 앞을 지나갈 때 공자가 아들에게 ‘시를 배우

    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다[不學詩, 無以言.]’라고 하자 리가 물러가서 시를 배웠고, 공자가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不學禮, 無以立.]’라고 하자 리가 물러가서 예를 배웠다는 논어(論語) 「계씨(季氏)」의 내용을 활용

    한 것이다. 함련은 시서예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삶이 송두리째 잘못되었다고 한탄하고 있는 내용이

    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부친과 함께 있지 못하는 슬픔이 담겨 있다. 리는 공자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부친으로부

    터 시와 예를 배울 수 있었지만 시인은 유배된 처지라 부친과 함께 있지 못하여 부친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련은 특히 4-1의 구법을 활용한 것이 주목된다. 4-1은 특수 구법으로 분류되는데, 네 글자에 길게

    담긴 내용의 주어가 끝의 술어 한 글자로 정리되기 때문에 제5자에서 내용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는

    제5자를 ‘未’, ‘非’의 부정어로 병치하여 독특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부모 곁에서 학문을 이루지 못해 인생이 뒤틀

    려버렸다는 그의 한탄을 고려해볼 때 그의 암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글자라고 생각된다. 이런 특수

    구법의 구사는 두보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양경우는 이 시의 함련이 두보 시 〈영월(詠月)〉에서 “나그

    네 수심 결에 보니, 스물 네 번이나 밝았네[羈棲愁裏見, 二十四回明.]”36)라고 한 것을 모방했다고 하였다.37) 경련

    은 수련에서 말한 ‘쓸쓸함[蕭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가을날 혼자 방구석에 앉아 국화주를 마시고 있

    을 뿐 외부 세계와 소통할 의지가 전혀 없다. 벌레 울음소리조차 듣기 싫어 사립문을 닫는 데에서 그의 폐쇄적 생

    활상을 엿볼 수 있다. 경련까지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로 이어지던 시상이 미련에서 전환을 이룬다. 상구의 ‘此時’ 35) 蘇齋集 권4.

    36) 杜詩詳註 권18. 본래 제목은 <月 三首>이며 그 중 위의 시는 둘째 수이다. 37) 霽湖集 권9 「詩話」.

    60 ∥ 소재 오언율시의 표현 수법 연구ᆞ이남면

    는 경련까지의 침울한 분위기를 이어 받으면서 밝은 분위기로의 전환을 이끈다. ‘文白至’ 세 글자를 통해 시인이

    고독감과 암울함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벗들은 사흘 만에 떠나고 만

    다. 벗들이 떠나고 나면 다시 고독감과 암울함이 반복될 것이다. 따라서 ‘文白至’의 짧은 세 글자는 시인의 기쁨이

    일시적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 시는 무엇보다 4-1의 특수 구법을 사용하고 부정어를 제5자로 선택하여 낯선 변화감을 준 것이 기발하다고

    할 수 있다. 노수신은 이러한 구법을 오언율시에서 여러 차례 구사하였는데, 다음을 더 보자. 가) 「대곡 처사에게 주다 贈大谷處士」

    원우의 완인은 이제 늙어 버렸고 元祐完人老

    주남의 체객은 그대로 남아 있다오38) 周南滯客餘

    나)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하여 새벽에 쓰다 復次前韻曉書」

    한 잔 술에 귀가 더워짐은 양운이고 杯酒熱耳惲

    시서로 배가 똥똥해진 건 변소라오39) 詩書便腹韶

    가)는 노수신이 진도에서 괴산으로 이배된 이후에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의 집을 방문하여 지은

    시이다. 상구의 ‘元祐’는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인데, 연호를 시어로 사용한 것도 생소한 느낌을 준다. ‘完人’은 덕

    행이 완미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송 철종 때의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킨다. 유안세는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고

    사마광(司馬光)을 따랐다가 간신 장돈(章惇) 등에 의해 유배되었으나 끝내 목숨을 보전하였다. 이후 권력을 잡은

    양사성(梁師成)이 그를 등용하려고 하자 유안세가 거절하면서 “나는 원우의 완인이 되어 지하에 가서 스승 사마광

    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吾欲爲元祐全人, 見司馬光于地下.]”라고 하였다.40) 여기에서는 원우의 완인을 대곡 성운에

    빗댄 것이다. 성운은 형 성우(成遇)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보은의 속리산에 은거하였

    다. 이후 명종과 선조가 그를 여러 차례 불렀음에도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열중하였다. 이렇게 볼 때 유안세와 성운은 본래 관직에 나아간 이력은 있으나 관직을 그만둔 이후로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음으로써 지조와 목숨을 모두 잃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따라서 ‘원우의 완인’이라는 표현은 성

    운의 지조와 행적을 칭송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1의 구법 상 강조가 되는 술어로 ‘老’자를 사용함으로

    써 지조를 지키고 올바른 행실을 이어온 성운도 세월 속에 늙은 신세가 되었음을 아쉬워하였다. 상구가 성운을 가

    리켜 한 말이라면 하구는 시인 본인을 읊은 것이다. ‘周南’은 낙양(洛陽) 이남 지역을 가리킨다. 사마천(司馬遷)의

    부친인 사마담(司馬談)이 주남에서 오랜 기간 체류하느라 한 무제(漢武帝)가 봉선(封禪)하는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

    여 매우 안타깝게 여긴 일화가 전하는데,41) 오랜 기간 타지에서 유배객 신세로 지내며 군왕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

    38) 蘇齋集 권4.

    39) 蘇齋集 권4.

    40)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41)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61

    는 노수신의 처지와 정확히 겹친다. 제5자로 ‘餘’자를 사용하여 아무런 변화 없이 여전히 ‘滯客’ 신세로 남아 있는

    초라한 신세를 한탄하였다. 나)는 노수신이 새벽까지 잠 못 이루며 여러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지은 시의 경련으로, 자신의 처지를 역사적

    인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상구에서 양운(楊惲)은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으로, 언사(言事)로 인해 폐서인이 되

    었을 때 빈객을 모아 즐겼는데, 친구 손회종(孫會宗)이 자중하라는 편지를 보내니 양운이 회신하여 “술을 마신 뒤

    에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면 하늘을 우러러보고 질장구를 두드리며 ‘오오’ 하고 소리칩니다.[酒後耳熱, 仰天撫缶, 而

    呼嗚嗚.]”라고 하였다. 양운의 글에는 폐서인이 된 것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었으므로 이 편지가 발각되어 양운은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만다. 노수신은 유배된 자신의 처지를 폐서인이 된 양운에 비겨 그저 술로 행락이나 즐기며

    살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하구에서 변소(邊韶)는 후한(後漢) 사람으로, 문학으로 이름이 나서 많은 학생들을 가

    르쳤다. 하루는 낮잠을 자고 있는데 한 제자가 조롱하기를 “변효선(변소의 자)은 배가 똥똥하여 글 읽기는 싫어하

    고 잠만 자려고 한다.[邊孝先, 腹便便. 懶讀書, 但欲眠.]”라고 하니 변소가 곧바로 “똥똥한 내 배는 오경의 상자이고, 잠만 자려는 것은 경을 생각하기 위함이다.[腹便便, 五經笥, 但欲眠, 思經事.]”라고 응답하였다.42) 유배지에서 학생

    들을 가르치며 글공부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해학적으로 그린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는 보통 동사나 형용사로

    배치하는 제5자에 명사형의 인명을 사용하여 술어로 전용한 것이 참신하고 기발하다. 이와 같이 위의 두 사례는 4-1의 특수 구법 속에 전고를 사용하면서도 대우를 정확히 맞추어 두 가지를 병렬로

    나열하였고, 인명을 술어로 선택하거나 연호를 시어로 사용하는 등 낯선 작법을 보여주었다. 4. 결론

    본고는 노수신 오언율시의 표현 방식을 논한 글이다. 노수신의 오언율시가 두보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

    과 아울러 정교한 구성에 기발한 표현들이 담겨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를 작품을 통해 각각 확인해보고자

    하였다. 두보시의 영향 관계는 시어, 구법, 장법, 대장, 풍격 등 다양한 방면으로 논할 수 있겠지만 본고에서는 노수신이

    두보시를 자신의 시에 인용한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노수신은 두보의 말과 생각에 공감한 경우 두

    보 시의 한 두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는가 하면 두보 시 구절의 일부 글자를 바꾸어 현재 상황에 맞추기도 하였다. 두보의 언행이나 생각을 뒤집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에는 부정사나 의문사, 부사어 등을 활용하여 강렬한 어세로

    표현하였다. 두보의 처지와 비교하는 경우에는 두보의 시를 인용하면서도 서로 같고 다른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방

    식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반대로 위로하였다. 노수신은 오언율시를 창작할 때 대장 격식을 중시하였으며 단순히 글자나 시어의 대칭뿐 아니라 의미상의 대칭

    역시 치밀하게 구성하였다. 특히 철저한 대장 격식 안에 상반된 의경을 치밀하게 배치하여 정교함을 극대화하면서

    도 속어, 연호 등을 사용하거나 4-1의 특수 구법을 활용하는 등 생경한 방식을 통해 기발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상의 논의는 노수신 오언율시의 표현방식에 대해 극히 일부를 살핀 것이다. 조선의 오언율시 대가가 오언율시

    를 지으며 두시를 어떻게 수용했는지,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하며 시어와 구법을 어떻게 구사했는지 그 작

    42) 後漢書 卷80, 「文苑列傳 邊韶」.

    62 ∥ 소재 오언율시의 표현 수법 연구ᆞ이남면

    법의 일부를 살펴본 것은 의의가 있겠으나, 노수신 오언율시의 성취를 다방면으로 제대로 파악하려면 더 많은 작

    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63

    【제5발표】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

    노요한(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1. 들어가며

    2. 순천 유배기: 매화를 노래하고 도리를 궁구함

    3. 진도로의 이배: 굴원과 가의를 회상함

    4. 내면의 술회: 장편시의 서술

    5. 도연명의 삶을 노래함

    1. 들어가며

    穌齋 盧守愼은 명종-선조 연간에 활약한 정치가이자 학자ᆞ시인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노수신은 중종 38년

    (1543)의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이후 성균관 典籍ᆞ修撰을 거쳐, 이듬해 시강원사서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명종 즉위 후 윤원형과 이기가 일으킨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명종 2년

    (1547) 순천으로 유배되고 같은 해 9월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진도로 이배되었다. 이 진도에서 노수

    신은 19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본고는 유배 초기기에 작성된 노수신 한시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노수신 유배 초기의 한시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유배 초기의 불안한 심리가 한시에는 어떻게 반영되어 있을까. 유배 초기 시인의

    복잡한 심리 변화를 한시는 어떻게 담아내고 있을까. 유배 초기의 한시에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이

    있을까. 자주 사용된 시체가 있을가. 어떤 사람들과 수창을 하였으며 대체로 어떤 내용을 지니고 있을까. 잘 알려

    진 「자만시」의 작성에는 어떠한 심리적 배경이 작용했던 것일까. 이하 본고는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노수

    신 유배 초기의 한시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64 ∥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ᆞ노요한

    2. 순천 유배기: 매화를 노래하고 도리를 궁구함

    을사사화 직후 노수신의 시에는 꽃이 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지적된 바 있다.1) 이때 꽃은 대부분의 경우 비에

    떨어지고 바람에 꺾이는 위태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일례를 「晩雨」 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2)

    취하여 지팡이 짚고 매화를 찾아가니 醉扶藜杖過寒梅

    가만히 바라볼 제 황혼에 가랑비 내리누나 脈脈黃昏小雨來

    텅 빈 서재에 돌아와 귀 가리고 누우니 便向空齋掩耳臥

    등잔불은 꺼져 가고 창은 반쯤 열려 있네 殘燈無熖半牕開

    이 시는 을사사화가 일어난 이듬해 명종 1년(1546) 3월 순천으로 유배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지은 것으

    로 보인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저물녘 노수신은 술에 취해 문득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는 매화를 찾아

    나선다. 추위를 이기고 빗속에 피어 있는 매화. 노수신은 매화를 가만히 응시한다. 매화는 추위를 이기고서 꽃을 피워 寒梅라고 부르기도 한다. 寒梅는 氷玉같은 자태가 군자의 志節을 연상케 하

    여 전통시대 문인들에게 사랑받았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말 이후 성리학이 전래하여 발전하면서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서 청정한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노수신은 비슷한 시기 매화를 소재로 12수 연작시를 짓기도 하였다.3) 노수신은 제1수에서 시인들이 매화를 좋

    아해 가까이하면서 고운 여자로 보지 않으면 여윈 신선으로 노래한 사실[詩人相愛多相褻, 不作姸妃卽瘦仙], 제2수

    에서 매화가 본래 유독 충군애국의 마음에서 피어나는 꽃이라는 사실[自是偏從忠愛發, 箇中遺了一團和], 제3수에서

    매화를 유독 사랑한 북송 林逋와 三逕에 소나무, 국화, 대나무만을 심어 매화를 애호하지 않은 도연명의 일[歲暮黃

    昏能幾度, 只拚三逕了淵明]을 환기하고는 제4수, 제5수, 제6수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맑은 향기 여윈 그림자 본래 기특하니 淸香瘦影本來奇

    하늘이 그 맑은 정신을 이때에 보내었구나 天遣精神在此時

    눈 속의 매화시는 좋은 경관을 더하는지라 得雪有詩增勝槪

    시인의 도움에 기대한 게 있음을 깨닫겠네 覺將期待着人爲

    제4수에서 노수신은 매화의 맑은 향기와 수척한 그림자를 노래하고 있다. 매화는 하늘로부터 품부 받은 맑은 정

    신을 가지고서 추위를 이기고서 피어난다. 이때 이러한 매화의 고매한 정신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는 것은 차갑고

    하얀 눈이고, 이러한 고매함을 적절한 언어로 노래해 줄 시인이다. 시인의 언어는 비록 ‘人爲’이지만 이러한 매화의

    마음을 알아줄 이는 시인이기에, 매화 역시도 시인이 자신의 고매함을 알고서 이를 시로 노래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알겠다고 하였다. 이는 추위를 이기고 피어난 매화의 마음을 시인이 알아주기를 기대하였듯이, 시인 역시

    이러한 매화를 노래함으로써 매화와 같은 자신의 고매한 마음을 알아줄 이가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신향림, 조선 주자학 양명학을 만나다, 심산, 2015, 65~73면. 2) 소재집 권1 詩. 시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임정기 선생님의 번역을 따르되 약간 수정하였다. 이하 이와 같다. 3) 소재집 권1 詩, 「詠梅十二絶」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65

    굳은 절조 차가운 맘이 매화의 본색이라 苦節寒心是自家

    天機가 움직이는 곳에 고운 꽃 피우는데 天機動處有英華

    울타리 밖 수많은 과객들을 혐의치 말라 莫嫌籬外紛紛過

    꽃구경한 이가 꼭 꽃을 아는 건 아니란다 未必看花便識花

    제5수에서 노수신은 苦節과 寒心이 매화의 본모습임을 상찬하고는 매화가 天機의 움직임에 감응하여 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매화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매화의 절조와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울타리 바

    깥을 무심히 지나다니지만 이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꽃을 본다고 해서 모두 꽃은 안다고 할 수는 없기 때

    문이다. 노수신은 자신이야말로 매화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를 시로 노래해 줄 지음임을 자부하고 있다. 심의를 단정히 입은 채 말을 않고 싶어라 深衣整肅欲無言

    평화스런 옥색 꽃이 점점 친할 만하구려 玉色平和稍可親

    섬돌 아래 눈 속에서 온종일 서 있노라니4) 階下雪中終日立

    사람들이 나를 일러 넋 나간 사람이라네 里閭爭指喪魂人

    제6수에서 노수신은 이제 深衣를 여미어 입고서 매화를 마주하고 단정히 않아 그저 말 없이 매화를 바라보고

    있다. 옥빛으로 피어난 매화는 그저 평온하기만 하여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듯하다. 눈은 내리는데 계단 아래

    에서 매화를 바라보며 온종일 가만히 서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를 가리켜 넋 나간 사람이라고 한다. 눈 쌓은 섬돌 아래 온종일 서 있었다는 구절은 저 유명한 游酢과 楊時의 ‘程門立雪’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송나

    라 때의 游酢과 楊時가 처음 程頤를 찾아갔을 때 마침 정이가 눈을 감고 앉아 있으므로 두 사람은 인기척을 내지

    않고 서서 기다렸는데, 정이가 눈을 떴을 때는 문밖에 내린 눈이 한 자나 쌓여 있었다고 한다.5) 여기서는 노수신

    이 그와 마찬가지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매화를 대하고 있음을 말한다. 술동이 앞에서 천진스레 소리 높이 읊조리니 尊前高詠發天眞

    이제 막 매화와 더불어 똑같은 봄이 되었네 方與梅花一樣春

    취중에는 자세히 보이지 않아 더욱 좋은데 更好醉中看不細

    바람에 날린 꽃 잎 한 점에 마음 슬퍼지누나 風飄一點轉愁人

    제7수에서 노수신은 술에 취해 天眞을 發하여 매화와 함께 찾아온 봄의 즐거움을 소리 높여 노래하고 있다. 술

    과 천진은 도연명 시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으로, 도연명은 「連雨獨飮」 시에서 “한번 마셔 보니 온갖 생각 멀어지

    고, 잔을 거듭하니 홀연 하늘도 잊게 된다. 하늘이 어찌 여기서 떠나 있으리, 천진에 내맡겨 이보다 앞선 것 없어

    라[試酌百情遠, 重觴忽忘天. 天豈去此哉, 任眞無所先.]”라고 하였다. 술에 취해 하늘을 잊었다는 것은 하늘이 정말로

    자신에게서 떠나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과 혼연일체가 되어 하늘이 내가 되고 내가 하늘이 된 경지를 말한

    다.6) 곧, 술에 취함으로써 “잔을 거듭하여 홀연 하늘도 잊게 되는” 경지, 천지자연과 동화된 인간 내면의 가장 본

    4) 原註: 다른 본에는 ‘終日’이 ‘良久’로 되어 있다.[終日一作良久.]

    5) 宋史 卷428 「道學ᆞ楊時」. 6) 원행패, 박종혁 등 9인 공역, 도연명연구, 학고방, 2007, 「도연명의 철학 사고」.

    66 ∥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ᆞ노요한

    래적인 모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7)

    취중에는 자세히 보이지 않아 더욱 좋다는 구절은 두보가 「九日藍田崔氏莊」 시에서 “명년의 이 모임 때까지 과

    연 누가 건강할는지, 취하여 수유를 손에 쥐고 자세히 보노라.[明年此會知誰健, 醉把茱萸仔細看]”라고 한 것을 뒤집

    어 쓴 것이다. 노수신은 봄기운에 취하고 술에 취하여 천진스럽게 매화를 읊조리면서 매화를 마주한 봄의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에 집중함으로써 유한한 삶이라고 하는 인생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바람에 날린 매화

    꽃잎 한 점에 되레 마음이 슬퍼졌다. 바람에 떨어진 이 꽃잎 한 점에서 적소에 홀로 버려진 자신의 모습을 홀연

    보았기 때문이다. 조급한 맘에 처마를 돌아 친구와 마주하여 耿耿巡簷對舊知

    일생에 처음으로 나의 회포를 활짝 열었네 百年開破我心期

    애당초 꽃이 대답하리라곤 생각 안 했지만 本來不擬花能答

    꽃 앞에서 말하지 않고 다시 누구와 말하랴 不語花前更語誰

    노수신은 제11수에서 매화를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 마주하는 벗으로 그리고 있다. 꽃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꽃이 대답을 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곳 적소에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벗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매화 밖

    에는 없다. 고매한 매화에 자신의 마음을 부쳐보는 것이다. 노수신은 제10수에서는 “여기 또 괴로이 읊는 병 많은

    나그네 있어, 일생의 회포가 우연히 너와 서로 똑같구나[還有苦吟多病客, 一生懷抱偶然同.]”라고 하며 매화와 자신

    을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노수신은 순천으로 유배되고 한 달이 지난 4월 어느 날 지은 「懷人」 시에서 적소에서의 회포를 다음과 같이 술

    회하였다.8)

    풍토병 이루는 장기가 몹시 후덥해 瘴癘昏炎極

    고질병을 밤낮으로 재촉하누나 沈綿日夜催

    헛된 명성은 나와 함께 얻었지만 虛名惟我共

    어리석은 회포는 누구에게 토로할까 愚抱向誰開

    죽고 삶은 원래 천명에 달렸거니와 天命元生死

    복과 재앙은 어찌 사람이 할 수 있나 人爲豈福災

    그대는 능히 선뜻 세상을 떠나서 君能輕去土

    모친이 애통해 함을 아니 볼 수 있단 말인가 不見北堂哀

    노수신이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은 노수신의 먼저 죽은 친구인 듯하나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노수신은 이 시에

    서 죽고 없는 친구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 보았다. 자신은 폄적되어 후덥지근한 장기가 밤낮으로 고

    7) 福永光司에 의하면 도연명에게 있어 ‘진’이란 1천지자연의 세계의 존재양상을 일컫는 말, 2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전원의 은일 생활을

    일컫는 말, 3이 세상의 일상적인 생활에 즉하여, 눈 앞의 일들에 즉하여 느끼는 순수한 悅樂의 심경을 일컫는 말, 4술 속에서 체인되는

    일종의 忘我無心의 경지를 일컫는 말, 5천지자연의 운행에 자신을 無化시기는 것 ― 無心 ― 의 경지를 일컫는 말, 등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福永光司, 「陶淵明の‘眞’について」, 魏晉思想史硏究, 岩波書店, 2005.

    8) 소재집 권1 詩.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67

    질병을 재촉하는 남쪽 변방에 거처하고 있다. 그대는 조정에서 나와 함께 일하며 헛된 명성은 함께 얻었거늘, 지

    금의 이 절망적인 마음을 들어 줄 그대는 어디에 있는지. 여기에서 노수신은 삶과 죽음, 행복과 재앙에 대해 생각

    해 보았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원래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닥치는 행복과

    재앙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힘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명을 다하여 먼저 돌아가고 나는 재앙을

    만나 이곳에 있으니, 이는 하늘이 내린 것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의 모친은 나의 불우함을 만나

    애통해 하고 있건만 그대는 어찌 먼저 세상을 떠나 모친의 애통함을 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노수신의 순천 유배 시절 시에는 이처럼 부모에 대한 불효의 마음을 토로한 시가 적지 않다. 같은 해 3월 20일

    에 지은 「道中別舍弟」 시에서 “이미 군왕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부모의 심정마저 비통케 하였네[已誤乾坤愛, 難爲

    父母情.]”라고 한 것, 또 위의 「회인」 시를 짓기 얼마 전 「自吟」에서는 “춘삼월 다해 가는 남쪽 바닷가 정미년이라, 이해에 비로소 죽음의 길로 들어가누나. 슬퍼라 부모여 몹시 고생하며 기르셨거니, 차마 서로 부둥키고 순천을 말

    할 수 있으랴[春盡南涯丁未年, 是年聊復入重泉. 哀哀父母劬勞極, 可忍相持說順天.]”라고 한 것, 「口號」 시에서 “죽든

    살든 똑같은 죄벌로 논하자면, 부모 봉양을 영원히 못하게 됨일세[幽明若同罰, 永失奉昏晨.]”라고 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노수신은 이러한 자신의 곤경을 독서를 통한 이치의 궁구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쓴 「讀書」

    시는 다음과 같다.9)

    공자는 광 사람에게 경계심 가졌고 仲尼畏匡人

    문왕은 유리옥에 갇혔었는데 文王囚羑里

    생사의 갈림이 눈앞에 닥쳤음에도 死生在前了

    여기에 편안히 대처하였도다 處之恬然耳

    이것을 알았던 이가 그 누구던고 識此爲何人

    천년 뒤에 주자 한 분이었네 千載子朱子

    필경에 한마디 말을 게시했으니 畢竟揭一言

    도리를 분명하게 보라는 것이었네 分明見道理

    공자는 일찍이 광 땅을 지나갈 적에 광 땅 사람들이 공자를 陽虎로 잘못 알고 공자를 해치려 했었고 문왕은 紂

    가 九侯와 鄂侯를 이유 없이 죽인 것을 탄식했다는 이유로 羑里獄에 갇혔으나, 두 성인은 이러한 곤경에 처해서도

    태연히 거처하였다. 천년 뒤에는 주자가 나와 이러한 환란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도리를 분명히 보아야 한다고 하

    였다. 노수신은 心經 「正心章」의 주해에 나오는 주희와 제생간의 문답을 가지고 이 시를 지었다. 곧 제생이 “분치

    호요는 나에게 있는 일이니 애써 하지 않을 수 있겠거니와, 우환 공구 같은 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니 자신에게 말

    미암지 않겠군요.[忿懥好樂, 在我之事, 可以勉强不做, 如憂患恐懼, 是外面來底, 不由自家.]”라고 하자, 주희가 “모두

    그렇지 않다. 바깥에서 오는 것이라도 모름지기 자신에게 道理가 있어서 제대로 처치하면 恐懼와 憂患도 다만 空然

    한 것일 뿐이다. 공자는 광 땅 사람들에 경계심을 가졌고 문왕은 羑里에 갇혀 있었는데, 죽고 사는 것이 눈앞에

    9) 소재집 권1 詩.

    68 ∥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ᆞ노요한

    있었으나 聖人이 태연히 대처하셨다. 다만 이것을 보면 곧 그러하니, 요컨대 도리를 봄이 분명하면 자연 이러한

    근심이 없을 것이다[都不得. 便是外面來底, 須是自家有箇道理, 處置得下, 恐懼憂患, 只是徒然. 孔子畏匡人, 文王囚羑

    里, 死生在前了, 聖人處之恬然. 只看此便是, 要見得道理分明, 自然無此患.]”라고 한 구절을 취한 것이다. 곧 공자와

    문왕은 마음 속에 이러한 도리가 있었으므로 이러한 곤경에 태연히 대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노수신은 이치에 대해 궁구함으로써 공자와 문왕과 같이 자신에게 닥친이 恐懼와 憂患을 극복해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멀어졌다가도 문득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위의 「독서」 시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쓴 「芍藥花」 시는 이러한 불안한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浮生이 작약꽃만 못하다고 애석해 말아야지 莫惜浮生不似他

    귀신의 소식이 때가 있음에 어찌할쏜가 鬼神消息奈時何

    하루아침에 지고 나면 끝내 없는 것이니 一朝飄落終無有

    내년에 다시 피는 건 이게 바로 딴 꽃이라오 來歲重開是別花

    꽃은 내년에 다시 피지만 뜬구름 같은 인생은 한번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 이는 천지의 조화인 귀신이

    消長하고 增減하는 것은 때가 있는 것이라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꽃만 못한 것이

    아니다. 어느 아침 꽃잎이 바람에 떨어지면 이 꽃은 끝내 없어지는 것이니, 내년에 피는 꽃은 이와 다른 새로운

    꽃이다. 한번 떨어지면 다시는 소생하지 못하는 저 꽃잎과 같이 자신도 언젠가는 천지조화의 운행에 따라 꽃잎처

    럼 져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짙은 두려움이 담겨 있다. 노수신은 6월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에 자신의 회포를 써내려 간 시10)에서는 “내가 들으니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고인은 인을 행함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서, 거기에 편안해 안 두려워했다는데, 대저 나는 유독

    어찌 그리 두려운가.[吾聞一息存, 古人以爲任. 安之不憂懼, 夫我獨何甚.]”라고 하고, 7월에는 두보의 운에 차운한

    시11)에서는 “깨었다가는 늘 다시 술에 취하고, 경색을 읊노라면 점차 시가 나오네. 이 뜻은 내가 먼저 깨달았는

    데, 사생존망은 기약할 수가 없구나[醒惺常被酒, 吟色轉生詩. 此意吾先獲, 存亡不可期.]”라고 하고, 8월에는 “저승이

    본디 내가 있을 곳이니, 인간 세상에서 잠시 탄식할 뿐이네.[泉原本吾宅, 人世暫相嗟.]”12)라고 하는 등 등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연신 토로하였다. 3. 진도로의 이배: 굴원과 가의를 회상함

    노수신은 유배지 순천에서 처음 맞이한 단오절에 兪氏ᆞ張氏ᆞ朱氏가 술을 가지고 와서 자신을 위로해 주자 함

    께 술을 마시고 5언으로 율시 2수를 남겼다.13) 제2수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길이 굶주리며 경도를 노래하고 長饑歌競渡

    10) 소재집 권1 詩, 「苦雨書懷, 韻盡乃罷」. 11) 소재집 권1 詩, 「次古人韻, 幷和其意」. 12) 소재집 권1 詩, 「和古人韻【八月】」. 13) 소재집 권1 詩, 「端午日兪張朱携酒來慰」.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69

    痛飮하고 「이소」를 읽으니 痛飮讀離騷

    술에 취하여 정신은 어지럽지만 潦倒神先瞀

    마음 방탕해 기개는 높기만 하네 狂疎氣莫高

    競渡는 배를 저어 빨리 건너는 경기를 말한다. 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굴원이 5월 5일 단오일에 멱라수에 빠져

    죽자, 사람들이 그가 죽은 곳을 마음 아프게 여겨 그를 구하는 동작을 아울러 행하도록 한다고 한다.14) 노수신은

    자신을 찾아온 세 사람과 술을 잔뜩 마신 후 「이소」를 읽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초사는 고려말에 주희의 楚辭集注ᆞ楚辭辯證ᆞ楚辭後語가 수입되고 조선초에 同書가 경자자로 간행되

    면서 조선의 문인들에게 널리 읽혔다. 주희는 楚辭集注의 서문에서 굴원의 志行이 간혹 중용에서 지나쳐 법으로

    삼을 수 없으나 모두 ‘忠君愛國의 誠心’에서 나왔고 그 글은 그 辭旨가 비록 ‘跌宕怪神’하고 ‘怨慰激發’한 데로 흘러

    가르침으로 삼을 수 없으나 모두 ‘간곡[繾綣]하고 애틋한[惻怛] 至意’에서 나왔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굴원이 주

    공과 공자의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세상의 추방된 신하와 쫓겨난 자식, 원망스런 아내와 버려진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무고함을 노래하고 다행히 하늘이 이를 들으면, 天性과 民彝의 선함이 서로 發하는 바가 있어 三綱五典의

    중함을 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평가하였다.15) 주희는 초사후어의 自序에서는 “대개 굴자는 곤궁하여 하늘에

    울부짖고 고통스러워 부모를 울부짖는 노래이다. 그러므로 이제 취하여 계승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幽憂하고 窮

    蹙며, 怨慕하고 凄涼한 뜻에서 나와서 이에 시경의 餘韻을 얻었으며, 宏衍鉅麗한 관점과 懽愉快適한 語辭는 여기

    에 참여하지 못한다.”16)라고 하고 있다. 요컨대 초사는 辭旨나 음조가 중용에서 지나친 점이 없지 않지만 모두

    ‘忠君愛國의 誠心’과 ‘繾綣惻怛의 至意’에서 나와 시경의 餘韻을 얻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초사에 대한 주희의

    위와 같은 평가는 두시의 여러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에서 초사집주를 간행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초

    사의 辭旨가 모두 간곡[繾綣]하고 애틋한[惻怛] 지극한 뜻에서 나왔다고 한 주희의 평가는 조선의 조정과 문인들

    로 하여금 두시와 함께 초사집주를 시문의 기본적인 학습서로서 독서하도록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초사는 과거시험 대비를 위한 수험생의 기본서로 독서되기도 하였다. 노수신은 다른 사람의 시에 화운하거나 자신을 스스로 술회하면서 유배온 자신의 모습을 굴원에 비유하곤 했다. 굴원은 잘 알려져 있듯이 처음에 초나라 懷王의 신임을 받아 삼려대부가 되었으나 제나라와 동맹하여 秦나라에 대

    항해야 한다는 합종책을 주장하다가 연횡책을 주장한 상관대부의 참언으로 면직되고, 회왕의 아들 頃襄王이 즉위

    한 뒤 다시 참소를 받고 長沙로 옮겨지자 멱라수에 빠져 자결한 바 있다. 노수신이 시에서 자신을 굴원으로 형상화한 것은 유배 첫해의 5월에 쓴 「酬友【陶谷】」 시17)에서 “호령의 밖은

    하늘 남쪽 끝이요, 내 형용은 늪가의 몰골이라네[湖嶺天南極, 形容澤畔餘.]”라고 한 것에 처음 나타나, 6월에 쓴 「有

    14) 宗懍, 荊楚歲時記. “按五月五日競渡, 俗爲屈原投汨羅日, 傷其死所, 故並命舟楫以拯之.”

    15) 右楚詞集註八卷, 今所校定, 其第錄如上. 蓋自屈原賦離騷而南國宗之, 名章繼作, 通號楚辭, 大抵皆祖原意而離騷深遠矣. 竊嘗論之, 原之

    爲人, 其志行雖或過於中庸而不可以爲法, 然皆出於忠君愛國之誠心. 原之爲書, 其辭旨雖或流於跌宕怪神.怨慰激發而不可以爲訓, 然皆生於繾綣惻

    怛, 不能自己之至意. 雖其不知學於北方, 以求周公.仲尼之道, 而獨馳騁於變風.變雅之末流, 以故醇儒莊士或羞稱之, 然使世之放臣屏子.怨妻去婦抆

    淚誣吟於下, 而所天者幸而聽之, 則於彼此之間, 天性民彝之善, 豈不足以交有所發, 而增夫三綱五典之重? 此予之所以每有味於其言, 而不敢直以詞

    人之賦視之也. 16) 朱熹, 「楚辭後語自序」. “蓋屈子者, 窮而呼天疾痛, 而呼父母之詞也. 故今所欲取而使繼之者, 必其出於幽憂窮蹙.怨慕凄涼之意, 乃爲得其餘韻, 而

    宏衍鉅麗.懽愉快適之語, 宜不得而與焉.”

    17) 소재집 권1 詩.

    70 ∥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ᆞ노요한

    人請詠其亭供韻, 亂草卽滅」18)에서는 “이부처럼 취하는 건 싫지 않거니와, 대부처럼 깨어 있긴 차마 못하겠네.[無嫌

    吏部醉, 不忍大夫醒.]”라고 하고, 8월에 지은 「和古人韻」19)에서는 “깨진 못했지만 아직도 초택이거니, 복조가 장사

    의 집에 들거나 말거나.[不醒猶楚澤, 有鵩任長沙.]”라고 하고 있다. 또 같은 해 8월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和沈豆韻」

    에서는 “나는야 「哀江南賦」는 짓지 않고, 공연히 늪가의 시름만 읊노라.[不作江南賦, 空吟澤畔愁.]”라고 하고 있다. 이부는 晉代의 문신으로 吏部郞을 지낸 인물로서 술을 몹시 즐겨 酒豪로 이름이 높았던 畢卓을 말한다.20) 대부

    는 말할 것도 없이 삼려대부를 지낸 굴원을 말한다. 다만 노수신은 굴원과 마찬가지로 조정에서 추방되어 남쪽의

    무더운 澤畔에서 머무르고 있지만 굴원이 “온 세상이 다 탁하거늘 나 홀로 맑고, 뭇사람이 다 취했거늘 나 홀로

    깨었는지라, 이 때문에 내가 추방되었노라.[擧世皆濁, 我獨淸, 擧世皆醉, 我獨醒, 是以見放.]”라고 했던 것과 같이 홀

    로 맑고 홀로 깨어 있지는 못하다고 하였다. 또한 「애강남부」를 지어 고국 양나라에 대한 우국의 마음을 서술한

    庾信과 같이 시로서 우국충정의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그저 홀로 瘴氣 가득한 남쪽 지역에 외떨어져 술에 취

    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같은 8월에 쓴 「醉時率意放筆排悶」 시에서는 “나는 죽어도 상자는 아니거니와, 가부가 지금 내 나이에 죽

    었었지.[吾死亦非殤, 賈傅今年亡.]”라고 하여 자신이 요절한 아이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한나라 文帝 때 長沙王과 梁

    懷王의 太傅를 지낸 賈誼가 자신과 같은 33세에 죽은 일을 떠올렸다. 그런가 하면 노수신은 마찬가지로 유배된 첫해 단오절을 앞둔 때 지은 「愁坐對客, 呼韻輙書」에서는 “다만 지금

    은 송옥의 「초혼부」가 없으니, 끝내 떠도는 이 넋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只今宋玉無招賦, 終遣離魂底處臻.]”라고

    하고, 같은 해 8월에 지은 「寄柳君十韻」에서는 “만리 밖의 소식이 이리도 감감하니, 삼위의 죄인은 마음이 졸아드

    는구려. 외로운 넋이 흩어진 지 오래인데, 누가 소객의 넋을 불러 주려 하랴.[萬里音書靜, 三危肺膈勞. 孤魂久離散, 誰肯擬招騷.]”라고 하여 자신이 유배지에서 대역죄인으로 죽게 된다면 「招魂」을 지어 굴원의 정신을 회복시켜 그

    수명을 연장시켜 주었던 송옥처럼21) 자신을 위해 「招魂」을 지어 자신의 정신을 회복시키고 그 수명을 연장시켜

    줄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술회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불안감은 9월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진도로 이배될 때 沈豆에게 준 시에서 극에 달한다. 심

    두는 앞서 8월에도 노수신과 시를 수창했던 인물로 노수신이 순천의 유배지에서 만나 교유했던 인물이다. 6개월

    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노수신은 이 심두와 자주 왕래하며 교분을 쌓은 듯 진도로 들어가는 길 위에서 심두와

    시를 수창하고 헤어졌다. 시는 다음과 같다.22)

    단란히 얘기만 나누었을 뿐인데 只作團欒語

    공연히 철석간장이 꺾어지누나 空摧鐵石腸

    이생의 일은 끝내 헤아릴 수 없으니 此生終未卜

    18) 소재집 권1 詩. 19) 소재집 권1 詩. 20) 畢卓은 술을 혹호하여 사람들에게 “술을 수백 곡의 배에 가득 싣고, 사철의 맛 좋은 음식들을 배의 양쪽 머리에 쌓아 두고, 오른손으로

    는 술잔을 들고, 왼손에는 게의 집게다리를 들고서 술 실은 배에 둥둥 떠서 노닌다면 일생을 마치기에 넉넉할 것이다.[得酒滿數百斛船, 四時甘味置兩頭, 右手持酒杯, 左手持蟹螯, 拍浮酒船中, 便足了一生矣.]”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晉書 卷49 「畢卓列傳」. 21) 「招魂」에 대한 王逸의 題解. “宋玉憐哀屈原, 忠而斥棄, 愁懣山澤, 魂魄放佚, 厥命將落. 故作招魂, 欲以復其精神, 延其年壽.”

    22) 소재집 권2 詩, 「道上和沈豆韻酬別【按是時入島】」.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71

    남해의 바닷물만 아득하구려 南海水洋洋

    이곳 순천에서 자주 교유하던 심두와 그저 마주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동안 철석같이 먹었던 굳

    은 마음이 공연히 꺾여져 온다. 이제 여기서 헤어져 저 해도로 들어가면 그 이후의 일은 알 수 없으니, 이런 나의

    무거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해의 바닷물은 아득하기만 하다. 노수신은 순천으로 처음 유배되어 매화를 벗하면서 자신의 고매함을 알아줄 이가 있으리라 기대했고, 독서를 통

    해 유학의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곤경과 두려움을 극복해 보고자도 하였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

    움은 멀어졌다가도 어느새 문득 들이닥쳐, 노수신은 자신과 같은 33세에 죽은 가의를 떠올리는가 하면 남쪽으로

    추방되어 굴원과 같은 처지가 된 자신이 굴원처럼 죽게 되더라도 자신을 위해 「초혼」을 지어 줄 송옥 같은 이가

    없음을 스스로 애처롭게 여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저 해도로 들어가면 이런 글들도 이제 그저 넋두리 아닌 넋두리

    가 될 뿐, 이제 노수신은 자신을 핍박해 오는 죽음을 향해 자신의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죽음에 직면한 자신의 실

    존을 마주해야 했다. 해도는 한없는 어둠이고 죽음이었다. 이런 생각이 노수신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노수신은 진도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해남의 碧波亭에서 冲庵 金淨(1486~1521), 圭庵 宋麟壽(1499~1547)의 벽

    파정 시에 화운하였다. 김정은 기묘사화 때 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로 이배되고, 다시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사

    사되었다. 송인수는 윤원형, 이기 등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 관찰사로 폄관되었다가 을사사화 때 사사되었다. 김정

    은 노수신과 마찬가지로 진도로 이배되던 도중에 시를 지었고, 송인수는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벽파정을 들러

    김정의 시에 화운하였으며, 노수신은 여기에 다시 화운하였다.23)

    두 공은 하늘 위에 계시고 二公天上在

    외로운 나그네는 바다에 떠 있는데 孤客海中浮

    다행히 오늘 죽는 건 늦추어졌으나 幸緩今朝死

    앞길이 아직도 멀기만 하구나 前途尙自悠

    노수신은 진도로 이배되면서 다행히 오늘 아침 죽을 일은 늦춰졌으나 앞으로 갈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고 하였다. 진도로 이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보가 자신의 아우를 그리며 쓴 「憶弟」 시에 화운하여 “비바람은 몰아쳐 캄

    캄하기만 하고, 연기 안개는 걷힐 줄을 모르는데, 바다 가운데 동기는 떨어져 있고, 저승길로 외로운 넋은 돌아가

    리라.[風雨長如晦, 煙嵐未解圍. 海天同氣斷, 泉路散魂歸.]”24)라고 하여 아우 노극신에게 유언 같은 시를 남긴 노수신

    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만사를 쓰기에 이른다.25)

    티끌 세상 분분하게 고금을 이루니 塵世紛紛成古今

    李杜와 명성 나란히 함도 뛰어난 남아고말고 齊名李杜亦奇男

    그 관이 날 더럽힐까 뒤도 안 돌아보고 가고 其冠浼我望望去

    일삼는 바를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담론하네 所事逢人歷歷談

    23) 소재집 권2 詩, 「和碧波亭韻抆淚書之先錄二詩」. 24) 소재집 권2 詩, 「追和草堂憶弟韻錄留示無悔甫弟」. 25) 소재집 권2 詩, 「自挽」

    72 ∥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ᆞ노요한

    바다 가운데 누웠으매 신이 스스로 지키고 一臥海中神自守

    머나먼 곳을 다니매 그림자에도 안 부끄럽네 獨行天外影無慙

    가의 통곡했지만 나는 웃을 수 있어라 賈生能哭吾能笑

    둘 다 똑같이 서른셋 나이를 누리나 보구려 俱享行年三十三

    李杜는 後漢 때의 高士 李膺과 杜密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후한의 范滂이 桓帝 때 黨錮의 화에 연좌되자 그의 모

    친이 “네가 지금 이응, 두밀과 명성을 나란히 하게 되었으니,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汝今得與李ᆞ杜齊名, 死亦何恨?]”라고 하였는데, 범방은 모친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이응ᆞ두밀과 같은

    명성이 있다면 또한 뛰어난 남아라 할 수 있음을 말하며, 자신 역시 범방과 같이 악인들에 내몰려 추방되었지만

    자신의 이름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음을 내비친 말이라 생각된다. 그 관이 날 더럽힐까 뒤도 안 돌아보고 간다는 것은 맹자 「公孫丑上」에 맹자가 백이를 두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무례한 향인과 더불어 서 있을 때에 그의 관이 반듯하지 못하거든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려서, 마치 자기까지 더럽힐 것처럼 여겼다.[推惡惡之心, 思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행적에 있어 아무 부끄러움이 없음을 말한다. 神이 스스로 지킨다는 것은, 주희가 학자들에게 “마음에 주재하는 것이 있으면 맘속이 허명하여 신이 그 성곽을

    지킨다.[有主則虛, 神守其郛.]”26)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마음이 외물(外物)에 동요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가의가 통곡했다는 것은 가의가 문제에게 올린 治安策에서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지금의 사세가 통곡할 만한

    일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두 가지요, 길이 한숨을 쉴 만한 일이 여섯 가지입니다.[臣竊惟事勢可爲痛

    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고 한 것을 말한다. 둘 다 똑같이 서른셋 나이를 누린다는 것은 가의가

    폄적된 후 서른 셋에 요절한 것가 같이 자신 역시도 폄적되어 유배지 진도에서 가의와 같은 서른 셋에 죽게 될

    것을 예감한다는 말이다. 티끌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여러 복잡하고 시끄러운 일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응ᆞ두밀과 같이 청렴함과 충직함

    을 지킬 수 있다면 빼어난 남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미루어 무례한 자들과 있을 때는

    저들이 내 관을 더럽힐까 곧장 떠났고,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일삼는 바 올바른 학문과 충군애국의 성심에 대해

    말해 왔다. 또한 나는 내 마음에 주재하는 바가 있기에 바다 한가운데 누웠어도 정신이 내 스스로를 지켜주고, 절해

    고도에 유배되어 오직 내 그림자를 짝해 있지만 내 그림자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 가의는 통곡했지만 나는 웃을

    수 있으니, 나는 지금까지 올바른 학문으로 마음의 의로움을 지켜 나 스스로에게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27)

    4. 내면의 술회: 장편시의 서술

    노수신은 순천으로 유배된 이후부터 종종 장편시를 지어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였다. 「苦雨書懷 韻盡乃罷」(22

    운), 「醉時率意放筆排悶」(28운), 「昇平百韻」(100운), 「淸晨櫛盥靜坐書懷錄留示無悔甫弟臨絶耿耿言不妄發亦人窮反本

    26) 心經附註 「正心章」. 27) 노수신의 「自挽」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신향림, 조선 주자학 양명학을 만나다, 심산, 2015, 81~82면; 임준철, 「自挽詩의 詩的 系

    譜와 조선전기의 自挽詩」, 고전문학연구 31, 고전문학회, 2007.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73

    之驗也詩凡二十韻」(20운), 「對燈謾興【二十四韻】」(24운), 「謝朴贇鶴錄示三十韻」(30운), 「三竹」(28운), 「奉寄舟川子昔

    年嘗贈三百字輒復拾其餘韻三十爲寫相思」(30운), 「祖考祥日書懷」(58운), 「沃州二千言」(100운) 등이 그 예이다. 이 장

    편시들은 짧은 시로는 다 풀어내지 못하는 시인의 깊은 속내를 긴 호흡으로 풀어내어 서술한 시로, 노수신이 유배

    지에서 겪은 심회와 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먼저 「苦雨書懷 韻盡乃罷」는 순천에 유배되고 석 달여가 지난 6월 장마철의 어느 날에 쓴 시이다. 유배 초기의

    죄인으로서 불안하고 어두운 시인의 심리를 어두운 장맛비와 함께 그려내고 있다. 유월 한 달 내내 장맛비가 내리니 六月盡淫雨

    남방의 장기가 병석에 넘쳐흐르네 楚氣流伏枕

    버려둔 서책은 덕지덕지 녹슬고 廢帙澁綠銅

    머리털은 물에 감은 듯 축축하건만 頭髮沐如沁

    어찌 사람 몸뚱이를 지닌 채로 豈得有軀殼

    맘속의 질병에 향을 쬘 수 있으랴 熏爇心下癊

    좌우로 마주칠 것들을 조심하여 左右愼所觸

    밤낮으로 셋집에 붙여 지내면서 日夜寄僦賃

    지게문 밀쳐 열었다 다시 닫고는 推戶復掩戶

    두려워 끝내 머리도 내밀지 못하네 瞿瞿終莫闖

    도중에 주옥을 내려보내 기원하면 道中降珠玉

    먼 바다까지 요악한 기운 사라지련만 海遠息氛祲

    낮은 땅 벼이삭들은 탈이 없겠지만 無恙下畦苗

    언덕배기 밭곡식은 저장할 게 뭐 있으랴 逼岸存幾窨

    이 죄인이 어찌 이를 즉시 알았으랴 孤囚詎卽知

    알고 나선 속이 끓어 입을 다물었지 腸熱口先噤

    이젠 사람들이 진창을 괴로워하길 東西苦泥濘

    마치 참소를 받은 것처럼 여기고 有如受間譖

    먼 뱃길엔 거센 파도가 몰아쳐 대니 萬里多風濤

    길손에겐 여행 금지령이 내린 격일세 行旅眞設禁

    당 뒤에는 원추리가 번성할 게고 堂後萱草繁

    다락 앞에는 푸른 대가 무성하련만 樓前綠竹蔭

    온 가족 단란한 삶은 꾀할 수 없고 愉怡不可謀

    두터운 임금 은혜만 입었을 뿐인데 優渥有餘廕

    백 일 동안이나 소식이 없는지라 百日消息無

    눈물이 다하여 피가 흐를 지경일세 涕盡血欲滲

    시는 있지만 누구와 함께 읊조리며 有詩誰與吟

    술은 없으니 내 어떻게 마시리오 無酒我曷飮

    구차히 살자니 참으로 생각 많아라 苟生諒多慮

    그 누가 나를 짐살해 줄 수 있을꼬 誰能爲我鴆

    어찌 구독의 신의를 가벼이 여기며 豈輕溝瀆諒

    74 ∥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ᆞ노요한

    어찌 은택을 흠뻑 입기를 요구하랴 豈干恩澤浸

    슬프고 슬프도다 우리 두 부모님은 哀哀我二人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수고하시었는데 劬勞彌月妊

    밤마다 건성으로 시봉만 했을 뿐 夜夜浪隨侍

    어찌 일찍이 몽조를 믿은 적 있던가 曾何信夢讖

    아우와 누이는 각자 쓸쓸히 지내는지라 弟妹各蕭條

    심회가 헝클어진 실보다 산란하구려 心緖亂於紝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보며 天地且俯仰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무노라 欲語還生噤

    내가 들으니 목숨이 붙어 있는 한 吾聞一息存

    고인은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서 古人以爲任

    거기에 편안해 안 두려워했다는데 安之不憂懼

    대저 나는 유독 어찌 그리 두려운고 夫我獨何甚

    이 시는 순천에 유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겪었던 유배지에서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6월 장마철이라 장

    맛비가 연일 추적추적 내리니 남방에는 장기가 넘쳐흘러 침상에까지 습복한다. 습기에 서책들은 눅눅하게 녹슬고

    머리털은 목욕한 듯이 축축하건만, 어떻게 하면 사람의 몸을 가지고서 신체의 껍질 속 마음의 병에 뜸을 뜰 수 있

    을까. 좌우로 마주치는 것을 조심하며 밤낮으로 셋집에 부쳐 살면서, 지게문 밀어 열었다가 이내 다시 닫고는 두

    려워 끝내 머리도 내밀지 못한다. 낮은 땅의 벼이삭은 탈이 없겠지만 언덕배기 밭곡식은 저장할 게 없으리라. 마을 동서의 사람들이 모두 진창을

    괴로워해 마치 참소를 받은 것처럼 여기고, 먼 뱃길에는 파도가 거칠어 뱃길로 오가는 여행이 금지되었지. 집 뒤

    에는 원추리가 번성하고 누대 앞에는 무성한 푸른 대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 홀로 유배지에 외떨어져 가

    족의 단란함을 도모할 수는 없지만 임금의 두터운 은혜에 적소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건만, 백 일 동안 외부로

    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는지라 눈물이 다하여 피가 흘러나올 지경이다. 시는 있지만 누구와 함께 읊조리고 술이 없

    으니 어찌 마실 수 있는가. 구차히 살려니 참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니 누가 나를 위해 나를 鴆殺해 줄 수

    있을지. 어찌 필부필부들이 작은 신의를 지키려 죽는 것을 가볍게 여길 것이며, 또 어찌 임금의 은택에 흠뻑 젖기

    어 목숨을 구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슬프고 슬퍼라 우리 부모님은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수고하셨거늘, 나는 밤마다 건성으로 곁에서 모셨을 뿐 어

    찌 일찍이 몽조를 믿은 적 있었나. 아우와 누이는 각자 쓸쓸히 지내고 있어 마음이 어지럽기가 실보다 더하여, 하

    늘을 올려다보고 또 땅을 굽어보고는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어라. 내가 듣기에 한 번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옛사람은 인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삼아 조금도 해이하지 않아서, 거기에 편안해 하며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는데

    대저 나는 어찌 이리도 두려움이 심한 것인지. 진도로의 이배되기 한달 전에 지은 「醉時率意放筆排悶」에서 노수신은 “내 한번 죽는 건 아까울 바 아니나 불효

    의 죄를 더할까가 두렵구려[吾非惜一死, 恐重不孝累.]”라고 하여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을 자책하면서도

    농부들 및 촌 늙은이들과 어울려 田夫及野老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75

    친압 방탕한 아주 산만한 모습으로 狎蕩盡潦倒

    질문이 있으면 대답 안 한 게 없거니 有問無不答

    초대가 있으면 어찌 가기를 사양하랴 有邀肯辭造

    라고 하여 유배지에서 이웃과 어울리는 삶을 긍정하기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아, 너 노과회야 吁汝盧寡悔

    어찌 지난 일이 부끄럽지 않느냐 豈不媿疇昔

    가사 네가 일찍 깨달을 줄 알았다면 使爾早知悟

    재주 명성으로 그릇되지 않았겠지 不被才名誤

    과회는 머리 숙이고 앉아서 寡悔俛首坐

    자책은 하나 누구에게 하소연할꼬 自訟向誰愬

    한참 뒤엔 갑자기 크게 웃노니 良久忽大笑

    이렇게 실패한 걸 어찌 회한할쏜가 顚沛終何懊

    죽고 삶은 이미 하늘에 달렸으니 死生旣在天

    못 구할진댄 내 좋아하는 거나 따르리 不求從吾好

    라고 하여 자신의 과오에 대해 자책하다가 홀연 크게 웃으며 자신의 거꾸러짐을 끝내 괴로워할 것 없으니,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기에 삶과 죽음을 내 스스로 구하지 못할진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며 살리라 다짐

    하였다. 또한 마찬가지로 8월에 지은 「昇平百韻」에서는 유배지 순천의 풍광에서 시작된 서술이 자신에게로 미쳐, 자신

    이 부모에게서 청수한 기를 받고 태어나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일, 장성하여 이연경의 사위가 되어 성현의

    학문을 전수받은 일, 성균관에서 훌륭한 동료들과 학문을 연마한 일, 헛되이 명성을 좇아 벼슬에 나아가 세자시강

    원 司書로 일하고 특별히 은총을 입어 병조 좌랑, 홍문관 수찬, 이조 좌랑으로 일한 일, 새 왕이 즉위하여 인정을

    베풀었기에 신하로서 성심을 다하고자 했던 일, 파직된 후 고향에 머무르고자 했으나 순천으로 유배된 일 등을 서

    술하고는 이어서 순천 유배지에서의 일상적인 생활을 서술하였다. 노수신은 이제 “집에서 鵩鳥를 만난 건 의심할 것 없거니와, 물고기 배 속에 장사 지냄도 꺼리지 않노라.[休疑對

    舍鵩, 未憚葬江魚.]”라고 하며, 가의가 長沙王 太傅로 폄척된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올빼미[鵩鳥]가 집에 날아들자

    장차 죽으리라 점치고, 굴원이 조정에서 추방되어 늪가에서 읊조리다가 멱라수에 빠져 죽은 것처럼, 자신 또한 죽

    음에 대해 전혀 의심하거나 거리끼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시의 마지막에서 노수신은

    죽고 삶은 오직 운명에 달렸으니 死生惟命數

    가거나 못 가는 건 막히거나 말거나 行止任塡淤

    길에서는 수부처럼 대학을 강독하고 途講秀夫學

    옥중에선 황패처럼 서경을 수업하노라 獄聞黃霸書

    무함을 굳이 내려오게 할 것 없어라 巫咸不須降

    오랜 객지 생활에 초서가 없으니 말일세 久客欠椒糈

    76 ∥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ᆞ노요한

    라고 노래하였다. 죽고 사는 일은 오직 운명에 달려 있으니 나의 삶이 가고 멈추는 것은 진흙에 내맡기자. 길세

    서는 南宋 때 陸秀夫가 元軍에게 쫓겨 피난 다닐 때도 날마다 대학을 써서 강독하기를 권면했듯이 하고 옥중에

    서는 前漢 때 黃霸가 夏侯勝의 일에 연좌되어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하후승으로부터 상서를 수업했듯이 하자. 굴

    원은 「이소」에서 “무함이 장차 저녁에 내려올 터이니, 산초와 정미를 품고 가서 맞이하여 점치게 하리라.[巫咸將夕

    降兮, 懷椒糈而要之.]”라고 했지만 무함을 내려오게 할 것 없어라. 이곳 유배지에는 초서가 없기에. 노수신은 이제 유배지에서의 삶을 차차 긍정하기 시작하여, 더는 자신의 운명을 점칠 필요가 없다고 명언하고

    있다. 이 시를 짓고 얼마 후 노수신은 진도로 이배되게 된다. 진도 이배 후 아우 노극신에게 유언 같은 시를 남기

    고 자기 스스로를 위한 만사를 쓰기에 이르렀던 노수신은 10월 어느 날 밤 등잔을 마주하고는 다음과 같이 자신

    의 소회를 내키는 대로 써내려 간다.28)

    밝은 태양을 끝내 누가 머물게 하랴 白日終誰駐

    맑고 고요한 밤도 또한 절로 좋구나 淸宵亦自佳

    홰에 닭 들어 셋집의 문은 닫았고 塒雞掩僦戶

    성각이 울리고 길거리는 고요해 城角靜官街

    우선 외로운 등잔 찾아 불을 켜고 且覓孤燈盞

    두 짝 짚신은 한쪽에 치워 놓았네 長收兩草鞋

    성정은 시를 읊는 것으로 수양하고 性情吟作冶

    성경 두 글자는 써서 패로 삼았는데 誠敬寫爲牌

    노련함은 바퀴 깎던 편에서 증험했지만 老驗攻輪扁

    공력은 돌 달군 여와씨에게 부끄럽네 功慙鍊石媧

    천지간에 기생한 몸 칩복은 감수하거니와 寓形甘閉蟄

    무릎 놀릴 만한 달팽이 같은 집도 좋아라 容膝好藏蝸

    주린 복조는 집에 날아 앉아 울어 대고 集舍啼飢鵩

    병든 말은 마구간에 매인 채 울어 대네 羈槽呌病騧

    문중의 거북을 유독 꺼리거니와 獨嫌文仲蔡

    자양의 개구리를 본받으려 할쏜가 肯效子陽蛙

    따뜻할 땐 이집 저집에서 술 얻어먹고 煖乞家家酒

    추우면 곳곳에서 땔나무를 구해 오네 寒徵處處柴

    어머니는 명주실로 옷을 지어 주시고 慈應縫繭線

    아내는 금비녀 팔아 노자를 주었지 婦爲賣金釵

    남편 공대함은 그대의 부부 도리지만 儐爾端須造

    친함은 나에겐 본래 차등이 있고말고 親吾本有差

    그런데 어이해 먼 땅의 나그네가 되어 胡爲遠遊客

    생애를 스스로 소중히 하지 못하는고 不自重生涯

    요절 장수는 사람이 어찌 관여할 바이랴 夭壽人何與

    영고성쇠는 다 이치에 달린 것이니 榮枯理所皆

    28) 소재집 권2 詩, 「對燈謾興【二十四韻】」.

    2022년 소재 노수신 학술대회 : 소재 노수신의 한시 ∥ 77

    오직 학업이 진취하기만을 볼 뿐이요 唯看學業進

    부부 해로하여 죽는 건 물을 것 없네 莫問死亡偕

    더구나 부부 함께 긴 베개 베길 생각하고 況念同長枕

    끝내 내가 주인 노릇할 줄로 알았음에랴 終知攝阼階

    집에 들어가 효도를 하리라 여겼더니 有能爲入孝

    이제는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네 今可不心諧

    돌아갈 땐 혼백만 떠나면 되려니와 歸去從魂魄

    해골이야 나뒹굴어 떠내려 가든 말든 漂浮任骨骸

    완둔한 자질은 바로잡기 어렵거니와 頑姿難矯揉

    정명을 감히 맘대로 안배할 수 있으랴 正命敢安排

    성인을 업신여기면 악인이 될 뿐이고 侮聖還成蠹

    시속만 붙좇는 건 광대와 같은 것인데 趨時實類俳

    이 이치 깨달으니 스스로 부끄러워라 覺來徒自赧

    행하는 일마다 서로 어긋날 뿐이로다 行處輒相乖

    지난날 조용한 상념에 빠진 적 있어 伊昔嬰閑想

    이때부터 좋은 회포가 발현되었으니 從玆發好懷

    큰 나무를 뽑는 것도 걱정 않거니와 無憂拔大樹

    홰나무 받고 죽는 건 어찌 기뻐하랴 何喜觸庭槐

    모진 풍랑도 그 근원은 맑거니와 風浪源猶淨

    뿌연 먼지도 거울은 못 가린다오 塵埃鏡未埋

    오래도록 자지 않고 또렷이 깨어서 惺然久不睡

    조용히 홀로 재계하듯 앉아 있노라 幽獨坐如齋

    “밝은 태양을 끝내 누가 머물게 하랴, 맑고 고요한 밤도 또한 절로 좋구나”라고 하는 이 시의 첫머리는 이전의

    시에서 감추려 해도 감추어지지 않던 운명에 대한 짙은 두려움을 이미 떨쳐내 버리고 있다. 시인은 이제 마음 속

    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지워버리고 삶의 일상으로 되돌아와, 홰에 닭이 잘 들었는지 문은 잘 닫았는지 살펴보고 방

    안에 들어와 앉았다. 조용한 밤거리에 성각 소리가 들려온다. 시인은 등잔을 찾아 불을 켜고는 짚신은 한쪽으로

    치워 둔다. 이 사소한 것들은 마을의 평범한 주민이라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해오던, 하지만 시인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일상의 모습들이다. 시인은 이제 이러한 일상의 모습을 흥겹게 시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천지간에 부쳐 사는 몸이라 칩복은 감수하거니와 도연명이 「귀거래사」에서 “남쪽 창가에 기대어 오만한 마음

    부치니, 무릎을 들여놓을 만한 방의 편안함을 알겠네.[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라고 한 것처럼 무릎 들일 만한

    달팽이 같은 집도 좋아라. 가의가 보고서 죽음을 점쳤던 복조가 굶주린 채 날아와 울어대고, 병든 말은 마구간에

    매인 채 쉼 없이 울어 대어도 그저 좋기만 하여라. 따뜻할 땐 이집 저집에서 술 얻어먹고 추우면 곳곳에서 땔나무

    를 구해 온다. 요절과 장수는 사람이 관여할 바 아니고 영고성쇠는 모두 이치에 달린 것이기에, 오직 학업이 진취

    하기만을 볼 뿐이요 부부 해로하여 죽는 건 묻지 말자. 성인을 업신여기면 악인이 될 뿐이고 시속만 뒤좇으면 광대와 같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에 이 이치 깨달으니

    스스로 부끄럽다만, 하는 일마다 그와 서로 어긋날 뿐이다. 하지만 지난날 조용한 상념에 빠진 적 있어 이때부터

    78 ∥ 소재 유배 초기의 한시ᆞ노요한

    좋은 회포가 발현되었으니, 환태가 큰 나무를 뽑아 위협했지만 아무런 걱정이 없던 공자와 같이 걱정이 없거니와, 어찌 趙盾을 죽이려던 鉏麑가 되레 홰나무 받고 죽은 것을 기뻐하리오. 풍랑도 그 근원은 오히려 고요하거니와 먼지

    도 끝내 거울은 가지리 못하니, 또렷이 깨어서 오래도록 잠들지 않고서 조용히 홀로 재계하듯 앉아 있노라. 폄적되었지만 매화를 벗하며 자신의 고매함을 알아줄 이가 있으리라 다짐했던, 독서를 통해 유학의 이치를 궁구

    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곤경과 두려움을 극복해 보고자 했었던, 굴원과 마찬가지로 남쪽으로 추방되었지만 굴원처

    럼 홀로 깨어 있지 못한 채 술에 취해 있었던, 그 관이 자신을 더럽힐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듯이 자신의 고결함

    을 지키려 했었던, 그리고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핍박해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한없이 불안해

    했던 예전의 시인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지난날 조용한 상념에 빠진 적 있어, 이때부터 좋은 회포가 발현

    되었다”고 했던 것처럼 노수신은 이 시를 기점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긍정적인 태도로 바꾸었으며, 이 시는 시종

    일관 일상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무엇이 노수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심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도록 했을까. 그 동기는 도연명과의 만남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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