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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암(省菴) 이지번(李之蕃)공과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우정/이문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전 독립기념관 관장)
    역사/한국사 2023. 3. 25. 23:35

    성암(省菴) 이지번(李之蕃)공과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우정이문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전 독립기념관 관장)

     

     

    Ⅰ. 도의(道義)의 교유(交遊) 성암(省菴) 이지번(李之蕃 1508~1575)공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선생보다 7 살 연하(年下)였는데, 퇴계선생이 교유하면서 도학(道學)을 권면하였다. 이 사실은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이지번의 졸기(卒記)에 보인다. 아들 산해(山海)는 어릴 적에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는데 윤원형(尹元衡)이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아주려 하자, 지번이 즉시 벼슬을 버리고 아우 지함(之菡)과 함께 단양(丹陽)의 구담(龜潭) 곁에 가서 살면서 열심히 학문을 닦고 담박한 생활을 하며 만족스럽게 스스로를 즐기니, 사람들이 그를 구선(龜仙)이라 불렀다. 이황(李滉)이 그와 벗하여 도학(道學)을 권면하였다. 금상 초년에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제수하여 옛날 은거하던 곳에서 가깝도록 하였는데, 이황이 강권하여 취임한 뒤 애쓰지 않고도 깨끗하게 잘 다스렸다. 떠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리었으며, 후인들은 모두 그의 풍절(風節)을 숭상하였다.1 성암공이 구담(龜潭) 곁에 살 때에 구선(龜仙)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퇴계선생이 그와 벗하여 도학(道學)을 권면하였고, 또 퇴계선생이 관직에 나가도록 강권하여 청풍군수(淸風郡守)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유의 구체적 상황은 성암공의 아들 아계 이산해공의 아계유고(鵝溪遺稿)의 연보(年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子山海幼稱神童, 尹元衡欲以女妻之, 之蕃卽棄官, 與弟之菡, 遁居丹陽 龜潭上, 攻苦食淡, 囂然自樂, 人稱爲龜仙. 李滉與之友, 勸勉以道學. 今上初年, 除淸風郡守, 使近舊隱, 李滉强之屑就, 臥理淸淨. 旣去而民思之, 紀石頌德, 後人皆尙其風節.(宣祖修正實錄 8년 을해(1575) 12월 1일(을축)) 4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2 성암공(省庵公)은 아들(이산해)의 명성이 너무 커지는 것을 염려하여 조용한 곳으로 거처를 옮겼더니 그 다음날 새벽에 찾아온 손님이 또 문에 가득하였다. 동작강(銅雀江) 의 정자에 나가서 지내곤 하였는데, 당시에 퇴도(退陶) 이선생(李先生)과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등 제공이 호당(湖堂)으로부터 배를 타고 찾아와서, “동호의 독서당은 도가의 봉래산이라.[東湖讀書堂道家蓬萊山]”라는 열 글자를 <이산해에게> 써 달라고 청하여 큰 병풍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획이 마치 동량(棟梁)과 같았다. 그 사실이 지금까지 호당의 고사로 전해온다. (퇴계 선생과 성암 선생은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당시에 성암공 및 토정공이 단양(丹陽)의 구담(龜潭)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퇴계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로 가는 길이면 반드시 찾아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담의 주인이 아마 쟁기를 지고 급히 찾아가려 할 것이다. 비록 나같이 늙고 병든 자일지라도 정말 공의 들에 가서 밭갈이하기를 원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구담에 은거하는 형제가 배를 타고 나와 영접을 하고 맛있는 술로 대작을 하니 높은 이상이 표표하여 노년에 벼슬길에 들어가는 걸음이 크나큰 다행이 아니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다만 은거하는 곳에 경작지가 없고 은거하는 사람이라고 부인과의 연정이 없을 수 없다. 만일 온 집안이 솔잎을 먹고 곡식을 끊을 수 없다면 가까운 군에다 땅을 사서 작은 집을 지어 놓고 가족은 그곳에 두고 자신은 이곳에 왕래하면서 생활한다면 오히려 족히 구담의 주인이 될 것이니 평소에 가졌던 초원한 뜻을 조금은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귀옹(龜翁)의 형제가 얼어붙은 산골에서 차가움을 무릅쓰고 생활하면서도 스스로 즐거움을 갖고 있으니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 줄 생각지 못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귀옹의 식구들이 모두 영지(靈芝)를 먹고 살겠다는 계획은 소원하지만 대단히 기이한 일이니 어찌 비방할 수 있겠는가. 만약 계획을 분명하게 하려 한다면 인간 세상에는 영원히 이런 기이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귀옹을 위하여 가슴 깊이 승복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한 번 나가서 7개월 만에 돌아왔는데, 부딪치는 일마다 자기 소신을 버리고 남 하는 대로만 따라 하는 것들뿐이었다. 유독 돌아오는 길에 구담을 지나다 귀옹을 만나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자연 경관의 아름다운 면을 자세히 토론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생각을 말끔히 씻어 버렸으니, 이 한 가지 일은 그래도 묵은 빚을 갚은 셈이다.” 하고, 이르기를, “그대가 《심경(心經)》을 줄곧 읽는다고 하니, 조용한 가운데 필시 깊은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 도학(道學)의 경사라 하겠다.” 하였다. 이것은 대개 황금계가 단양 군수가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2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5 독서당에 대한 글씨를 청할 때 많은 선비 중에 퇴계선생과 임형수가 성암공에게 찾아왔던 것에서 그들의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퇴계선생과 성암공은 도의(道義)로 사귀었고, 성암공이 구담(龜潭)에 은거할 적에 퇴계선생이 서울로 가는 길이면 반드시 찾아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퇴계선생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암이 농사를 짓는 그의 들에 가서 밭갈이하기를 원한다고 하였고, 구담에 은거하는 성암 형제가 있는 가까운 군에다 땅을 사서 작은 집을 지어 놓고 가족은 그곳에 두고 자신은 이곳에 왕래하면서 생활한다면 오히려 족히 구담의 주인이 되어 평소에 가졌던 초원한 뜻을 조금은 보상할 수 있겠다고 하였고, 성암 형제는 차가운 산중 생활에 스스로 즐거워하는데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 줄 생각지 못하였다고 하고, 성암의 식구들이 모두 영지(靈芝)를 먹고 살겠다는 기이한 일에 가슴 깊이 승복한다고 하고, 구담의 성암을 찾아가서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을 토론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생각을 말끔히 씻어 버리는 이러한 한 가지 일은 묵은 빚을 갚은 셈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을 토론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생각을 말끔히 씻어 버렸다’는 등 퇴계선생의 말은 한 마디로 도의의 교유를 한다는 표현이지, 속세의 이권 등과 관련된 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Ⅱ. 편지 왕래 퇴계선생과 성암공과의 관계를 나(퇴계)는 한산(韓山) 이이성(李而盛 이지번)과 오랜 교분이 얕지 않았다. 그 사람은 애초 단산(丹山)에 은거하였는데, 날로 나와 편지가 서로 이어졌다.3 라고 하여, 성암공과 오랜 교분으로 편지가 연이어 왕래되었다고 하였다. 2 省庵公慮其名太盛 … (退溪先生與省庵先生, 許以道義, 時省菴公曁土亭公, 隱居丹陽龜潭, 退溪先生承召命入京之路, 必歷訪款洽, 又與黃錦溪俊良書曰, “龜潭主人想負耜急投, 雖老病如滉者, 亦將躍躍然願耕其野矣.” 又曰, “龜潭棣隱, 棹舟出接, 對酌餉尊, 霞想飄飄, 老作入塵之行, 未必非大幸也. 但隱處無耕地, 隱君不能無眉案之戀, 若不能擧家爲飡松絶粒, 不如買地近郡爲小築, 置家於彼, 而身往來偃息於此, 猶足爲龜潭主, 而少償素志之超遠也.” 又曰, “龜翁兄弟, 凍臥於氷崖絶壑之中, 而有以自樂, 不意今世有此人也.” 又曰, …)(괄호는 夾註雙行小字임)(鵝溪遺稿 鵝溪李相國年譜) 3 僕與韓山李而盛, 舊契不淺. 其人初隱丹山, 日與我音問相續.(退溪先生續集 卷之五 書 與具景瑞) 6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2 다음으로 퇴계선생이 성암공에게 보낸 ‘도담의 이이성에게 부치다(寄島潭李而盛)’4 시를 소개한다. 憶昨君來過我門 이전에 그대가 우리 집에 찾아왔을 적을 추억하니 西風霞岫對雙尊 가을바람에 노을 진 산봉우리 둘이 술잔을 마주했지. 如今獨臥思君處 지금 홀로 누워 그대 거처를 생각하니 十月黃花滿一園 시월 국화가 후원에 가득하겠지. 形勝龜潭勝島潭 경치 좋은 구담이 도담보다 나아서 可能移就結茅庵 이사하여 암자를 지을 만도 하여라. 他年我亦尋君去 다른 해엔 나도 그대를 찾아가서 白石靑雲飽共叅 하얀 돌에 푸른 구름 자연을 함께 하리. 성암공이 퇴계를 가을에 방문했었고, 퇴계선생은 그 일을 추억하면서 동시에 성암의 거처에 국화가 만발하여 군자(君子)의 정취를 만끽하리라는 상상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담의 풍광이 좋아서 암자를 지을 만하다고 경치를 훌륭하게 묘사하고 뒷날 찾아가서 그 자연을 성암과 함께 즐기겠다는 것이다. 또 퇴계선생이 성암공에게 보낸 ‘이이성에게 부치다(寄李而盛)’5 시를 소개한다. 我曾爲吏隱丹丘 나도 일찍 관리 되어 단구에 은거할 때엔 幾挾飛仙夢裏遊 수도 없이 신선을 따라 꿈속에 놀았지. 聞說島潭今有主 듣자니 지금 도담에 주인이 있다는데 想應多我舊風流 아마도 내가 즐기던 옛 풍류보다 많으리. 성암공이 벼슬을 버리고서 도담에 은거한 소식을 퇴계선생이 듣고는 자신도 신선처럼 은거하면서 신선 꿈속에서 살았다고 하면서 도담에 사는 성암은 자신의 옛 풍류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하여 성암의 품격을 표현하여 주었다. 성암공의 편지는 아주세고(鵝洲世稿) 안의 성암선생유고(省菴先生遺稿)에 ‘퇴계 선생께 올린 편지(上退溪先生書)’ 등 여러 건(件)이 있어 교류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성암공은 퇴계를 4 寄島潭李而盛 : 退溪先生文集別集 卷之一 詩 5 寄李而盛 : 退溪先生文集卷之二 詩 시 제목의 주석에 “이지번이 이때에 사평(司評) 벼슬을 버리고 도담에 와서 은거하였다.(之蕃時以司評, 棄官來隱于島潭.)” 라고 하였다.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7 선생(先生)으로 우대하였고, 퇴계선생은 성암을 친구로 대했던 것이다.6 ‘퇴계 선생께 올린 편지(上退溪先生書)’에는 권군(權君)을 만나보고 그에 의해 선생의 건강이 편안하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또 도산(陶山)에 집을 짓는 것이 이미 완성되어 고상한 풍치로 보내시게 된 것을 알게 되니, 위로되고 위로됩니다. 저는 지난 봄 이래 우거하였는데 개천산(開天山) 아래 깊은 골짜기 중에 역시 큰 내와 넓은 들이 있어서 휴식할 만합니다. 장차 내를 막아 논을 만들고 겸하여 작은 배를 마련하여 단산(丹山)을 왕래할 계획입니다. 새로 지은 집이 만약 조금 완성되면 운령(雲嶺)을 넘어 찾아뵙고 울적함을 풀어볼까 합니다. 살펴 주십시오. 삼가 절하고 올립니다.7 라고 하여, 성암공은 퇴계선생이 도산(陶山)에 집을 지은 소식을 듣고 고상한 풍치로 보내게 되었다고 치하하였다. 그리고 성암공 자신은 개천산(開天山) 아래에서 휴식하면서 내를 막아 논을 만들고 겸하여 작은 배를 마련하여 단산(丹山)을 왕래할 계획이라고 하고, 짓는 집이 완성되면 운령(雲嶺)을 넘어 찾아뵙겠다고 전하였다. 안부와 아울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리고 방문할 계획이라고 전한 것이다. ‘또 다시 퇴계께 답한 편지(又答退溪書)’에는 … 저는 겨우 이전대로 탈이 없습니다. 산골짜기에는 가을바람이 한 번 지나가자 나무 잎이 모두 떨어지고 남은 것은 구담봉(龜潭峰)ㆍ옥순봉(玉筍峰) 뿐입니다. 앞강에는 늘 두꺼운 얼음을 보고 사방 산 또한 모두 눈인데 날마다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잠이 깨어 무료할 적에 예전에 얻은 중거(仲擧)가 준 한 권의 책을 자리에 놓고 마주 앉으니, 비로소 날을 보내는 데에 소일(消日)할 자료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소득은 다만 눈 병이 든 사람이 물색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여쭐 것이 있겠습니까! 6 퇴계는 성암을 친구로 대했던 것이다 : 李滉與之友, 勸勉以道學.(宣祖修正實錄 8년 을해(1575) 12월 1일(을축)) 7 上退溪先生書 見權君, 憑想令履平安, 又審陶山新卜已成, 足遣雅致, 仰慰仰慰. 某去春來寓, 惟新開天山下深谷中, 亦有巨川曠野, 可以休息, 方欲防川作水田, 兼治小艇, 往來丹山, 是計也. 新營家舍, 若少完準, 擬踰雲嶺, 奉敍鬱積耳. 伏惟令照, 謹拜上白. 8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2 지난 가을에 이이(李珥)가 서울에서 와서 닷새 동안 머물고 돌아갔습니다. 그 일 때문에 안부를 드리러 가지 못했는데 오는 봄에 다시 와서 고개를 넘어가 영공을 뵙는 소원을 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지가 이미 굳어서 그 뜻이 한번 영공을 뵙고 물러감에 있지 않았습니다. 나이 적은 사람이 이와 같은 것은 아름다워 하고 기뻐할 만합니다. …8 라고 하여, 성암공이 단양(丹陽)의 겨울 풍경 속에 구담봉(龜潭峰)ㆍ옥순봉(玉筍峰)과 앞강의 얼음을 바라보며 깊은 눈 속에서 중거(仲擧, 黃俊良)가 주었던 책을 읽으면서 소일하는 상황을 전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가을에 이이(李珥 율곡(栗谷) 1536~1584)가 서울에서 와서 5일 동안 머물고 돌아갔는데 오는 봄에 다시 와서 고개를 넘어가 퇴계를 찾아뵙겠다고 하였다고 하고, 나이 적은 사람이 이와 같은 것은 아름다워 하고 기뻐할 만하다고 하였다. 율곡의 퇴계선생 방문은 한국 유학계(儒學界)에 특기된 일이다. 율곡은 퇴계선생에 앞서 성암공에게 먼저 들렸고, 퇴계선생을 방문하겠다는 뜻을 성암공에게 말했는데, 성암공은 이를 편지로 퇴계선생에게 미리 전달했고, 그것이 이후에 실현되었던 것이다. Ⅲ. 퇴계선생의 출사 권유 성암공은 관직을 역임하다가 을사사화(1545) 이후로 세속 일에 뜻을 두지 아니하여 49세인 1556년에 벼슬을 버리고 단양(丹陽) 구담봉(龜潭峰) 밑에 은거하면서 퇴계(退溪) 이선생(李先生)과 도의(道義)의 교제를 맺었다. 1567년에 사직령(社稷令)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61세인 1568년에 청풍군수(淸風郡守)에 임명되는데, 본시 성암공은 취임하려 하지 않았으나 퇴계선생 강권(强勸)하여 취임했던 것이다. 퇴계선생은 성암공이 청풍군수로 부임할 때 ‘이이성이 청풍군수로 부임함을 전송하며(送李而盛赴淸風郡任)’9라는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8 又答退溪書 … 某僅依昔無恙, 峽中秋風一過, 木葉盡凋, 所餘龜峰玉骨而已. 前江常見堅氷, 四山亦雪, 日閉門獨坐, 睡罷無聊, 前得仲擧所贈一部書, 到坐對坐, 始知度日有資. 其中所得, 但如病眼人不見物色耳, 何須有問. 去秋李珥來自洛城, 留半旬而還. 緣其事, 故未得造候, 欲於明年, 更欲委來, 以遂踰嶺之願, 向方已牢, 其意不在一面而退, 年少輩有如是者, 此則可嘉可喜. … 9 送李而盛赴淸風郡任 : 退溪先生文集 卷之五 續內集 詩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9 好去淸風守 잘 가시오 청풍군수 龜潭舊主人 단양 구담의 옛 주인이었지. 行藏雖有異 벼슬과 은퇴가 차이는 있으나 隱見豈無因 숨음과 드러남이 어찌 원인이 없겠소. 臥治凝香寢 다스림은 누워서 떡먹기 사또 방이 중심이고 欣耕抃野民 밭 갈기 즐겨 농민들이 손뼉 치겠지. 丁寧猿鶴友 정녕 원숭이와 학과 벗해도 莫枉訝周倫10 그릇되이 주언륜(周彦倫)처럼 혼미하게 은거하려 하지 마시오. 성암공이 회갑의 노년에 군수로 부임하게 되자, 퇴계선생은 성암공이 고을을 누워서 다스릴 지경으로 쉽게 관직을 수행할 것이라고 축원하고, 원래 성암공은 농사 짓던 경력이 있으므로 농민들이 대환영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즐기더라도 주언륜처럼 벼슬하다가 다시 은거하려 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附) 아계공의 登寒碧樓 시 성암공의 아들 아계 이산해공이 한벽루에서 지은 시가 있으므로 이를 소개한다. 登寒碧樓 한벽루에 올라 玉欄飛棟枕江流 화려한 난간 날씬한 기둥 누각이 강물을 베고 있는 듯 形勝湖西第一州 명승지 호서 지역에 첫 째 가는 고을이라. 紅樹白雲曾駐馬 붉은 꽃나무 흰 구름 속에 말 타고 가다가 머물렀었는데 亂峯殘雪又登樓 많은 봉우리 남은 눈 속에 또 이 누각을 올랐네. 荒郊霽色明村徑 황량한 들 비 개인 경치에 마을 길이 환하고 極浦斜陽逞釣舟 먼 물가 저녁볕에 낚시 배 들어오네. 自笑浮名眞誤我 절로 가소로워라 부질없는 명예가 정말 나를 그르쳐도 拂衣猶未老滄洲 옷깃을 떨치며 아직도 은거지에서 늙지 못하네. 弘文館副應敎李山海 홍문관부응교 이산해(1539∼1609) 隆慶己巳春 융경 기사년(1569)€봄 10 周倫 : 육조(六朝) 때 송(宋) 나라의 공치규(孔稚圭)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주언륜(周彦倫)을 말한다. 주언 륜이 북산(北山)에 숨어 살다가 천자의 부름을 받고 산을 나가 해염현령(海鹽縣令)이 되었는데, 뒤에 그 산을 또 찾으려 하자 공치규가 북산 신령의 뜻을 빌려 주언륜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각 역로에다 공문을 발송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文選 北山移文) 10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2 이 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계유고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수년 전 우리 집 문서를 정리하던 중에, 아계공 친필본이 발견되었기에 제천시와 협의하여 4년 전인 2019년 봄에 한벽루에 다시 현액하였다. 맨 아래 “隆慶 己巳 春”이라고 적은 것을 보면, 이 시를 지은 것은 1569년 봄의 일이다. 이 때는 성암공이 청풍군수로 재임 중이었으므로 아계공이 아버님을 뵈러 왔다가 청풍 관아의 명승인 한벽루에서 지은 것이다. 다만 아계공이 이 시를 지었던 그 해, 3월 12일에 퇴계선생이 마지막 귀향 중에 이곳 청풍에 들러 성암공과 만났는데, 그 자리에 젊은 시절의 아계공이 배석하였는지는 단언할 수가 없다. 퇴계선생과 성암공의 당시 기록에는 물론이고 아계공의 문헌에도 당시의 사정을 확인할 수 없는 자료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앞에 소개하였던 것처럼 아계공 역시 어린 시절에 퇴계선생과의 인연이 각별하였으므로, 퇴계선생의 귀향길 노정 중 이곳 한벽루에서의 인연을 강의하는 자리를 빌어 이 시를 소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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