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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왕조 500년 중 260년 동안 정궁으로 썼어요
    역사/한국사 2023. 3. 12. 12:18

    창덕궁

    ▲ 창덕궁 인정전. 이곳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정전(正殿)으로, 임금 즉위식, 세자 책봉식 등 국가 공식 행사가 열렸던 곳이에요. /위키피디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다음 달 30일까지 매주 금·토·일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서울 창덕궁(昌德宮) 인정전의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해설 프로그램을 마련한다고 해요.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정전(正殿)으로, 임금의 즉위식과 결혼식, 세자 책봉식, 문무백관 하례식 같은 국가 공식 행사가 열렸던 곳이에요. 경복궁의 근정전, 덕수궁의 중화전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조선 5대 궁'의 하나로 꼽히는 창덕궁은 어떤 궁궐이었을까요?

    조선 11명 임금의 기본 거처

    두 가지 문제를 내 볼 테니 알아맞혀 보세요. 첫째,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임금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궁궐은 어느 곳일까요? 둘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일한 조선 궁궐은 과연 어느 곳일까요?


    두 문제 다 '창덕궁'이 정답입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죠?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정식 궁전)이라 불리는 대표적인 궁궐은 경복궁인데 말이죠. 경복궁은 1395년에 지어져 채 200년이 되지 않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불타고 말았어요. 그래서 광해군 2년인 1610년부터 조선 말인 1868년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까지 약 260년 동안 정궁 역할을 했던 곳은 창덕궁입니다. 광해군부터 철종까지 11명의 임금이 창덕궁을 기본 거처로 삼았습니다. 만약 숙종이나 정조가 나오는 사극을 경복궁에서 촬영한다면 고증(考證)이 잘못된 것이죠.

    5대 궁 가운데 창덕궁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이유를 알아보죠. 현재 남아있는 조선 궁궐 중 창덕궁이 궁궐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경복궁과 덕수궁은 19세기 후반 이후에 지어졌고 상당 부분 훼손된 것에 비해 창덕궁은 돈화문·인정전·선정전 등 많은 건물이 수백 년 전 원래 모습을 지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은 궁궐은 창덕궁

    1392년 세워진 조선 왕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어요. 그로부터 조선왕조는 계속 한양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훗날 태종이 되는 왕자 이방원이 이복(異腹·어머니가 다른) 형제들을 죽였습니다. 이방원의 형인 이방과가 2대 임금 정종이 됐는데, 그는 형제들의 피비린내가 풍기는 한양이 싫다는 듯 1399년 옛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1400년 제3대 임금이 된 태종은 다시 한양 천도(遷都·도읍을 옮김)를 계획하고 이궁(離宮·따로 지은 궁궐)인 창덕궁을 경복궁 동쪽에 짓게 했습니다. 1405년 한양 천도와 동시에 태종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주로 생활했죠. 한마디로 경복궁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지은 궁궐이라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자신이 제1차 왕자의 난 때 피바람을 일으킨 현장인 경복궁을 꺼렸을 수도 있습니다. 창덕궁 내부 전각(殿閣·임금이 사는 궁전)을 지은 뒤인 1412년엔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조선 왕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머물렀고,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타자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다시 지어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이유는 그전까지 임금이 주로 머물던 곳이 창덕궁이었고,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시됐기 때문이었답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한 차례 불탄 창덕궁은 1647년 복구됐습니다. 효종 때는 대비(大妃·선대 왕의 왕비)를 위한 수정당·만수전 등을 지었고 숙종은 후원을 본격적으로 꾸미면서 천문기기를 설치한 제정각을 건축했습니다. 학문을 중심에 둔 정치를 꿈꿨던 정조는 왕실 도서관이자 학술·정책 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창덕궁 안에 지었습니다. 경관이 아름다운 영화당 옆 언덕을 골라 2층 누각을 짓게 했는데, 건물 1층이 규장각이고 2층 누각이 주합루입니다. 지금도 창덕궁 방문객이 반드시 사진을 촬영하고 가는 곳이죠.

    1910년 나라가 망한 뒤 창덕궁에는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기거했는데, 이 무렵 자동차 차고, 전등, 커튼, 서양식 의자 같은 근대식 설비가 도입돼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건물이 희정당이죠. 왕실 가족들이 마지막까지 거주한 곳은 창덕궁 남동쪽의 낙선재였습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한국적인 궁궐'

    그런데 왜 조선 왕들은 정궁도 아닌 창덕궁을 오히려 경복궁보다 더 선호했던 것일까요? 실제로 살기엔 창덕궁이 훨씬 좋은 궁궐이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격식을 갖춰 지은 경복궁은 구조가 직사각형으로 빽빽하고 녹지도 적었던 데 비해,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죠.


    그런 창덕궁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 후원(後苑)입니다. '비원(祕苑)'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시절엔 창경원(현 창경궁)과 함께 학생들의 단골 소풍 지역이었어요. 지금은 예약을 통한 특별 관람만 가능합니다. 후원 서쪽 담 안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금천교 밑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고, 동쪽으로는 옥류천 물이 흐르는 가운데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나며 부용지와 애련지 같은 연못 곳곳에 아름다운 정자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단순히 유흥을 위한 곳이 아니라 임금과 세자의 학문과 수양이 이뤄진 장소였습니다. 만약 외국인 친구가 '한국의 고급스러운 전통 미학을 가장 잘 간직한 곳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이곳으로 데려가면 될 거예요. 정문인 돈화문에서부터 인정전과 희정당, 규장각 같은 숱한 얘깃거리를 지닌 건물들을 거치면서 말이죠.

    [창경궁·덕수궁·경희궁]


    '조선 5대 궁'은 경복궁·창덕궁과 창경궁·덕수궁·경희궁을 말합니다. 창경궁은 조선 성종 때 생존해 있던 세 왕후(세조, 추존왕 덕종, 예종의 비)의 거처를 위해 창덕궁 동쪽에 지었던 궁궐로, 임진왜란 뒤 창덕궁이 정궁 노릇을 할 때 창덕궁과 경계 없이 궁궐로 사용됐습니다. 1909년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고 1911년 '창경원'으로 격하됐다가 1980년대 복원 사업을 통해 궁궐의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덕수궁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터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 거처였고, 광해군 때 '경운궁'이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뒤 중화전과 서양식 건물인 돈덕전 등이 세워져 대한제국의 궁궐 역할을 했습니다.

    경복궁의 별칭인 '북궐(北闕)', 창덕궁·창경궁을 일컫는 '동궐(東闕)'과 대비돼 '서궐(西闕)'로 불렸던 경희궁은 광해군 때 이궁으로 지어졌던 궁궐로 이후 여러 임금이 머물러 정사를 보기도 했고, 숙종과 경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 창덕궁 희정당. 본래 왕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부터 왕의 집무실로 사용된 곳이죠.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장소입니다. /장련성 기자
    ▲ 창덕궁 규장각과 주합루. /이진한 기자

    ▲ 1800년대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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