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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광스님의 한국학에세이 시즌2] <21> 한국 소리철학의 진면목 '에밀레종 명문'
    좋은 글 2022. 11. 29. 07:20

    [문광스님의 한국학에세이 시즌2] <21> 한국 소리철학의 진면목 '에밀레종 명문'

    세상의 진리, 표현할 길 없어 이 종소리로 대신하노라”

    “지극한 도(道)는 형상 바깥을 포함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설을 열어서 삼승의

    심오한 가르침을 관찰하게 하고

    신령스러운 종을 내걸어서

    일승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한다”

    성덕대왕 신종 ‘명문 첫 구절’

    위대한 ‘한국학 전형’으로 충분

    성덕대왕 신종의 비천상 사이에 명문(銘文)이 보인다.(사진출처=불교신문 2017년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에밀레종의 새로운 발견

    장욱진 화백의 선사상을 담은 목판화 작품의 평론을 쓴 뒤 귀한 인연을 맺게 된 서울대 조소과 명예교수 최인수 선생으로부터 <감각의 시어>라는 작품 도록이 당도했다. 건축가 김준성 교수와 함께 ‘건축과 조각의 만남’이라는 기획전시를 한 내용이었다. 기(氣)로 가득한 텅 빈 공간의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건축과 조각은 뿌리가 같은 것이라는 사유를 접할 수 있어서 매우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도록 뒷부분의 작가와의 대화 부분에서 너무나 놀라운 대목을 발견하고 폭포수를 맞은 것과 같은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의 소리 철학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던 나에게는 상상을 초월한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이야기인즉 이러하다.

    최인수 선생은 한때 외국에 있으면서 조각 작품에 대한 심미적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멀리 고속도로에서 차들이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고, 그 바람 소리에 섞여 갑자기 한국 땅으로부터 에밀레종의 종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도 환청일 것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는 그가 젊어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인 최순우 선생을 따라서 경주에서 에밀레종의 종소리를 녹음하러 다녔던 강인한 기억이 뇌리에 깊이 남아 평생의 화두가 되어 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성덕대왕 신종 소리와 명문에서 받은 감응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작품으로 승화시킨 최인수 작가의 ‘먼 곳으로부터 오는 소리(At the Edge of Sound, 1992, 주철, 39×39×397cm)’이다. (사진 출처=최인수 교수)

    에밀레종의 비천상 옆에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 세상에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어 이 종소리로 대신한다’는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최순우 선생으로부터 이 구절을 들은 뒤로는 늘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예술에 대한 미학적 고민이 깊어졌던 어느 날 이역만리로부터 울려온 종소리를 듣고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먼 곳으로부터 오는 소리(1992)’라는 작품이었다. 흙덩어리를 깊게 굴려서 만들었다고 하는 이 조각 작품은 보이지 않는 소리의 세계를 보이는 물체로 표현한 것이다. 범종에서 울려 퍼진 수십 년 전의 소리는 형체나 모양이 없어도 공간을 달리한 외국에서 다시 살아나서 귓전을 울렸고 그것은 주철을 소재로 멋진 조각 예술로 화현한 것이다.

    이 세계에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 종을 만들어 울려서 소리를 통해 진리를 드러나게 했다는 말이 이미 1350여 년 전 한국인의 사상이었다는 것은 실로 감동적인 사태이다.

    소리를 듣고 귀로 깨닫는 이치

    ‘도(道)’라는 것이 언어와 문자가 끊어진 세계라는 것은 동아시아 문명에서는 공인된 상식에 속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도를 깨닫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던가? <능엄경>에서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제시하고 있는데 25가지 원통(圓通) 가운데에서 귀로 통하는 이근원통이 제일이라고 했다.

    관세음보살은 귀로 깨달았으며 세상의 모든 음(音)을 관(觀)할 수 있어서 대자대비의 지혜를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귀로 듣는 소리는 눈으로 보이는 색경(色境)과는 달라서 영원한 실체가 없는 공(空)한 이치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세계가 공하다는 것은 쉽게 믿을 수 없다. 분명히 눈앞에 존재하고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임에도 공(空)하다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는 인연(因緣)에 의해서 잠시 존재하고 있을 뿐이요, 영원한 실체가 있어서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공사상의 핵심이다. 연기(緣起)로 이루어져 있고 자성(自性)이 없어서 실체가 없으므로 이를 무아(無我)라고도 하고 공(空)이라도 하는 것이다. 이 진리에 가장 잘 부합하는 감각기관과 경계가 바로 귀의 대상인 소리(聲)인 것이다.

    10분 전의 소리는 분명히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라지고 없으니 과연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의 진리에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적부터 소리로 깨쳤다는 도인이 무수히 많았고 불교에 입문하면 소리 내어 경전을 독송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다라니를 외우게 시켰던 것이다.

    이 세상에 진리를 드러내기 힘드니 종을 만들어서 소리를 내어 진리를 표현한다는 사유가 8세기 한국인의 정신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고차원적인 사유이며, 위대한 소리 철학의 발현이다.

    한국학의 한 전형, 성덕대왕 신종 명문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주조를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한 것이 바로 에밀레종 전설로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이다. 높이는 3.66m나 되고 무게가 18.9t이나 되는 거대한 범종이다. 이 범종의 앞면에는 유명한 비천상이 있고 그 옆에는 신라의 김필오(金弼奧)가 지은 명문장이 있다. 최인수 선생이 최순우 선생에게 들었다고 하는 원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성덕대왕 신종의 명(銘)의 첫 구절은 위대한 한국학의 전형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지극한 도(道)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설을 열어서 삼승의 심오한 가르침을 관찰하게 하고, 신령스러운 종을 내걸어서 일승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한다(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 是故, 憑開假說, 觀三眞之奧載. 懸擧神鍾, 悟一乘之圓音).”

    위대한 사상이 위대한 예술로 승화

    “신종(神鐘)을 내걸어서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한다”는 구절은 <요한복음>에서 말한 ‘태초의 말씀’과 원효스님이 <대승기신론소>에서 ‘원음(圓音)’을 주석하면서 말한 일음(一音), 일체음(一切音), 중음(衆音), 무음(無音)의 의미와 함께 깊이 사유해 보아야 한다.

    종소리를 울려서 일승의 원음을 깨닫게 했다는 것이 범종을 제작한 이유라는 것은 신라의 철학이 도달한 경지를 단번에 알 수 있게 해 준다고 하겠다. 솥의 국 맛을 알고자 하면 다 먹어볼 필요 없이 그 속의 고기 한 점만 먹어보아도 안다고 했던 경구가 떠오른다.

    이처럼 한국의 모든 문화예술은 깊은 철학과 사상에서 기반한 탁월한 미학적 승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세계가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열광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바로 이러한 우리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불교신문 3744호/2022년11월29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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