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어느 가을날, 절(寺) · 요(窯) · 길(路) /도헌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염원하던 일이 현실이 되면 그 순간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도 지나고 나면 유년기 어머니 품 같은 이미지로 포근함과 넉넉함이 느껴지는 공간이 있다.
지난 10월 9일, 한문 초서 간찰 공부 모임 회원들과 함께 문경시 지역을 여행하고 답사했다. ‘문경(聞慶)’은 ‘새재(鳥嶺)’가 유명하지만, 천혜의 자연과 함께 역사와 문화유산의 풍부한 곳이다. 문경은 고려시대 때 ‘문희(聞喜)’였다가 ‘문경(聞慶)’으로 바뀌었다고 하니 문희, 문경은 들을 문(聞), 기쁠 희(喜), 경사 경(慶) 자로 ‘기쁘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을 가진 지명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문경은 기쁜 소식을 듣고 경사스러운 일의 조짐이 있다는 뜻으로 “문희경서(聞喜慶瑞)의 고장”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풍부한 지리적 공간성과 함께 민초들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보다 이 지명에 깃들어 있는 셈이다.
서울 인사동에서 대절 버스로 아침에 출발해서 일행과 함께 먼저 도착한 곳은 봉암사(鳳巖寺)였다. 이곳은 지난 1982년 이후 일 년에 사월 초파일에 한하여 하루만 외부인 출입이 허용되는 사찰이므로 원래 다른 날은 일체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나 문경이 고향인 공부 모임 회원 한 분의 지극한 노력 덕분에 어렵사리 성사된 답사였다.
절(寺)
봉암사는 창건 직후인 신라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페허가 되었다가, 또한 중창을 거듭해온 만큼 숱한 사연과 곡절을 간직한 사찰이지만, 특히 근현대 한국불교의 면모를 일신하는 출발점이 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청담, 성철, 보문, 자운, 향곡, 우봉, 혜암 등 근현대의 고승들이 바로 이곳에서 일제시대의 왜색 불교를 청산하고자 1947년에 결행한 이른바 ‘봉암결사(鳳巖結社)’를 통해 당시 불교의 면모를 일신한 장소라는 것이다.[결사(結社)란 불교에서 이념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수행을 함께 하면서 교단을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을 가리킨다] 이들은 ‘소작인의 세금과 신도의 보시에 의존하는 생활은 완전히 청산한다.’ ‘매일 두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다.’ 등의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바탕으로 이후 한국불교의 위상을 바꾸게 되는 혁명적인 일을 감행한 것이다.
사찰로 경내로 들어가기 전 진입 공간에는 사찰을 감싸고 봉암 계곡에서 흘러나온 시냇물이 흐르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백 명이 머물러도 넉넉할 편평한 화강암 너럭바위 벽에 최치원(崔致遠)의 글씨로 전하는 ‘야유암(夜遊岩)’이란 글자가 힘찬 골기를 드러내는 초서체로 쓰여 있다. 어느 덧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날씨와 함께 그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는 희양산은 높고 푸른 가을 하늘아래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는 높이와 거리로 그 자태를 드러낸다.
눈부신 가을 햇살로 반짝이는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외는 고요하기 그지없는 경내로 들어서자, 봉암사라는 사찰 이름에 걸맞게, 봉황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상의 희양산 자락에 선도량(禪道場)인 사찰이 화심(花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우뚝한 희양산 봉우리 위로 하늘마저 더없이 높고 푸른 날에, 풍부한 수량의 물이 맑게 흐르는 계곡을 앞에 두고 널찍한 평지형으로 자리 잡은 사찰은 수행 위주의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경내에 들어가서 점심을 접대 받았다. 사찰음식답게 소박한 ‘풀(草) 코스’였지만 특히 된장국 맛이 일품이었다. 식사 후 주지 스님의 친절한 안내 덕분에 경내 주요 건물에 얽힌 사연과 함께 경내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선방까지 볼 수 있었다. 현존하는 사찰 건물들은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었다. 그런데도 임란 직후에 중건된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은 주지 스님의 자세한 안내로 관심 있게 볼 수 있었는데, 건물의 가구(架構) 방법이 일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인데다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珠)까지 얹고 있음이 특이했다.
이어서 마침내 보호각 속에 나란히 안치된 지증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와 지증대사 부도를 볼 수 있었다. 이 중 지증대사비는 신라 말 대문장가 최치원이 쓴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중 하나로, 다방면의 사료적 가치와 함께 명문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비문은 지증(智證, 824~882)의 행적에 초점을 두었지만 통일신라 시기 전반의 불교사는 물론 사회 문화사까지 당대를 알게 하는 1차 텍스트이므로 귀중한 역사적 유산으로 꼽힌다. 비문에 의하면,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 이라 해서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9산의 선문(禪門)은 ‘도의(道義)’를 시조로 한 설악산 진전사의 ‘북산파’와 ‘홍척(洪陟)’을 시조로 한 지리산 실상사의 ‘남악파’로 분열 양상을 보였는데, 9산 중 희양산문(曦陽山門)인 지증대사는 더 이상 이들 유학파들의 선(禪)에 의지 않고 자득한 깨달음으로 당시 남북으로 갈라진 종파간의 갈림을 모두 포용했다고 나온다. 지증대사가 화합 정신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 비문에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는 장면도 있다.
“이때는 바야흐로 가느다란 등라(藤蘿) 덩굴에도 바람 한 점 일지 않고 궁정의 온실(溫室)의 나무에 바야흐로 밤이 깃들고 있었는데, 때마침 황금빛 파장의 달그림자가 옥빛 연못의 한복판에 단정히 임하였다. 대사가 달그림자를 굽어보다가 고개를 들고 고하기를,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머지는 말씀드릴 바가 없습니다.”…[時屬纖蘿不風, 溫樹方夜. 適覩金波之影 端臨玉沼之心 大師俯而覬 仰而告曰 是卽是, 餘無所言...]“
최치원의 비문은 유난히 《장자》에서 인용한 용어가 많이 있지만, 유 · 불 · 선을 넘어 중국 고전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변려문과 고문 혼합체로써 아름답고도 화려하며, 장중한 문체를 보여준다. 그는 지증대사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 별들은 하늘 위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떨어졌다.[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
비문 뒷면 아래 위는 빈 공간이나, 가운데서 약간 위쪽에 새겨진 음기와 함께 왼쪽 끝부분에 ‘분황사의 중 혜강(慧江)이 나이 83세에 글씨를 쓰고 아울러 글자를 새기다.[芬皇寺 釋慧江 書幷刻字 歲八十三]’라는 적힌 것을 희미하나마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이 비석이 세워진 당시 신라는 이미 말기에 이른 시점이었다. 그래서 지증대사비는 당대의 대표적 문사가 남긴 기록과 함께, 세월과 역사 속 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이어서 숱한 화마 속에서도 상륜부까지 최초 세워진 원형대로 1200년의 비바람을 견뎌낸 금색전 앞에 위치한 삼층석탑을 본 후 마애불과 백운대를 답사하기 위해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약 700m쯤의 산길을 걸었을까, 마침내 너럭바위 계곡 옆 옥석대(玉石臺)라는 큰 바위에서 조성된 마애불을 볼 수 있었다. 곧이어 조금 더 오르자 유려한 초서체로 ‘백운대(白雲臺)’라 새겨진 암벽이 있는 공간이 이르렀는데, 드넓게 펼쳐진 너럭바위들이 장구한 세월을 머금고 있었다. 봉암 계곡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다는 공간답게 참으로 비현실적인 선경이었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일행과 함께 맑은 계곡물이 고인 소(沼)에 발을 담그니, 곧 발이 얼얼할 정도로 물이 차가왔다.
경내에서 나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이자 이 절의 중창자로 알려진 정진대사원오탑비(靜眞大師圓悟塔碑)를 보았다. 사찰 입구 쪽에 위치한 이 비는 비신 높이만 270c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으며, 비문은 당대 문장가 이몽유(李蒙游)가 지었다고 하는데, 명필 장단열(張端說)이 썼다는 구양순체의 해서는 아직도 전반적으로 그 새김이 뚜렷했다.
요(窯)
이번 문경에서의 두 번 째 답사 장소는 고려 다완, 또는 ‘이도 다완(井戸茶碗)’을 재현한 도예가로 알려진 천한봉 선생을 기념한 전시관과 전통식 도요(陶窯)가 있는 곳이었다. 천 도예가의 따님이 일행 모두에게 정성껏 만든 말차를 직접 제작한 찻그릇에 담아 대접해주었다. 작년에 작고한 천한봉 도예가의 경우, 일본 절의 한 주지 스님으로부터 후원과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문경에서 고려 다완을 재현함으로써 예로부터 도요지로 알려진 이 지역을 대표하는 도자기 장인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만들어진 그릇인 이도 다완은 16세기에 일본의 와비차(侘び茶)를 완성한 센노리큐(千利休)에 의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도다완은 이 땅에서 제작된 찻그릇이면서도 16∼17세기 서일본 지역에서 크게 유행한 다도구의 하나인 말차(抹茶)를 마시는 찻사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찻잔과는 형태와 크기가 다르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조선의 도공이 만들었지만 이도 다완의 특성으로 꼽는 굽의 형태나 ‘빙열’, ‘매화피(가이라기)’ 등의 특성은 당시 일본인들에 미감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도 다완을 흔히 조선 막사발이라 부르는데, 사실 아직 원래의 용도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실정이며, 다만 경남 하동군 진교면 백연리, 경남 창원 웅동면 두동리 가마(웅천가마터) 등 남해안 일대를 조선시대 이도 다완 제작 장소로 추정하는 단계이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찻그릇은 그 파편조차 매우 희귀하다. 현대에 와서 흔히 보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찻그릇은 그 수준의 높고 낮음을 떠나 대개 재현된 도자기들인 것이다. 여기서 갖게 되는 물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이 재현 찻그릇은 과연 어떤 실용적, 미학적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이다.(아무튼 분명한 것은 애초에는 실용적 용도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길(路)
세 번 째 답사 코스는 하늘재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늘 재는 가파른 산세와 마치 농담이 풍부한 수묵으로 그린 듯한 암벽이 예사롭지 않은 포암산(布岩山) 포암사 옆으로 해서 가파르게 올라가는 길이었다. 우리 일행 다수는 맨발로 하늘 재를 향해 걸었다. 꼭대기에는 산신각이 있었다. 정상은 경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이므로 한 발자국만 내려가면 ‘미륵리’였다.(하늘재를 중심으로 경상도는 관음리, 충청도는 미륵리로 모두 불교에 연원을 둔 지명이었다). 그리고 이 곳 정상에 위치한 정자에서 잠시 한시 전문가로서 이번에 동행한 분으로부터 한시(漢詩)의 꽃이라는 영물시(詠物詩) 중심으로 잠시나마 흥미롭고도 재미있는 특강이 있었다.
봉암사 답사를 포함, 이번 문경 답사가 프리미엄 코스가 된 데는 역시 이곳 출신의 모임 회원 덕분이었다. 문경의 햇빛, 문경의 땅, 문경의 바람, 문경의 나무, 문경의 문화유산에 대한 소상한 안내는 물론 조선시대 특유의 악법으로 인해 문경새재에서 일어난 명문가 서자들의 ‘강변칠우(江邊七友)’들의 문경새재 은(銀) 약탈 사건까지 그야말로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이 스미면 신화가 되는”이야기들이었다. 세상일이란 누군가의 열정과 남다른 관심으로 비로소 그 의미와 가치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답사 일정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일행 중 한 분은 이번 답사에 대해 ‘몽유문경도(夢遊聞慶圖)’라 했다. 밤늦게 귀가하며 생각하니 낮 동안의 공간 체험이 더욱 꿈결 같았다. 이번 답사는 희양산에 자리 잡은 사찰이 품고 있는 정신성과 공간성, 그릇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본적 성찰, 맨발로 체험한 하늘 재 공간에서는 마음으로 느낀 정신의 자유로운 해방감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희양산 아래 1000년을 이어 온 공간의 흥망성쇠는 우리 삶이 색공(色空), 혹은 공색(空色) 사이에 존재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모든 것은 미완성이며, 다만 변화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번 답사가 절(寺), 요(窯), 길(路)에서 ‘유(遊)’를 느끼는 여정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