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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청풍(百世淸風)
‘백세청풍(百世淸風)’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의 절개를 의미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자를 충신들의 고택(古宅)에 현판으로 걸거나, 혹은 거주지의 바위나 비석에 새겨 기념하였다고 합니다.
경남 함안군
서산서원(西山書院)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
서원으로 생육신인 이맹전, 조려,원호,
김시습, 남효은, 성담수 등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다.
서산서원은 숙종 계미년(1703)에
경상도 유학 곽억령(郭億齡) 등이 생육신이신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성담수(成聃壽) 등의 병향(幷享)이사육신의 예에 따라
이루어짐이 마땅함을 국왕께 상소하여 윤허를 받고 여섯 분의 제향을 위하여 창립한
서원이다.
숭의문
조려(趙旅)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 함안(咸安). 자 주옹(主翁). 호 어계은자(漁溪隱者).
시호 정절(貞節)조선 전기 문신.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함안에 돌아가 백이산(伯夷山)아래에서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주요 저서에는《어계집》이 있다.
1453년(단종 1) 진사가 되고 명망이 높았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함안에 돌아가 백이산(伯夷山) 아래에서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1698년(숙종 24)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정조 때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03년 西山書院에 配享되었다.
숙종 계사년(1713)에 국가에서는
제물을 내리고 서산서원의 현판을 내렸으나, 고종 신미년(1871)
서원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 그 후 조려선생의 후손들이 1984년에 사우(祠宇)
강당(講堂), 재료(齋寮), 문(門), 원장(垣墻) 등을 빠짐없이 갖추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산서원 옆에는 고려
전서공 금은 조열선생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1일과 9월 9일에 생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동재라고도 불리는 헌관의 숙소인 양정당
왼쪽에는 서재라고도 하는 유생의 숙소인 상의재가 있다.
정면에 휴생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숭의당 정당(강당)
숭의당 주련(柱聯-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인 글씨)의
첫번째 글씨는 생가 주련에 붙은 시문의 첫 구절을 옮긴 것이다.
천재풍류여차일(千載風流如此日) / 천 년 전 풍류가 어제 일 같도다
지금호기늠추상(至今豪氣凜秋霜) / 지금도 그 기상 서릿발 같이 엄숙하네
생육신 사적비
왼편에는 정절공 사적비가 서 있다.
서산서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세청풍바위가 있다.
百世淸風
西山(서산)
漁相登臨日(어상등림일) /어계 선조 산 오르신 날
溪山淸復淸(계산청부청) /시내와 산 맑고 깨끗하구나
後生誰不仰(후생수불앙) /후손 누군들 우러러 보지 않으리
百世樹風聲(백세수풍성) /백세토록 맑고 곧은 그 기풍을
後孫(후손) 趙三奎(조삼규) 稿(고)
淸巖(청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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