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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산서원(培山書院)
    역사/한국사 2023. 5. 14. 12:23

     

     

    축사

    퇴계선생 14대손 입니다.

    종손을 대신하여 인사를 드립니다

    합천 이씨 배양 입향조이신 황해도 관찰사 이계통 선생의 행적비와 청향당 이원 선생, 죽각 이광우 선생 , 진암 이병헌 선생, 만은 이상보 선생 등 네분의 업적을 모아 유림과 후손들의 협력으로

    사적비릍 건립하게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귀빈 여러분과 관계자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축사를 대신하여 배산서당

    설립배경 설명으로 가름하겠습니다.

    구한말 서구의 기독교 사상이 밀려오자 유교를 시대 변화에 맞추어 복원ㆍ개혁하고자 하는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유교를 종교화 하자는 공자교 운동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강유위 선생이

    앞장서 공교화를 주도했습니다 . 당시 우리나라 유학자들도 강유위 선생과 접촉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진암 이병헌 선생은 우리나라 유교의 공교를 위해 경남 산청에 배산서당과 문묘를 설립할 계획을 세운후 퇴계 선생 후손들에게 이를 알리고 동의를 구하였습니다.

    1920년 퇴계선생 13대 종손 저의 종숙이신 이 충자 호자 공은 배산서당 문묘에 봉안할 공자의 진상과 진경을 구입하기 위해 배산서당을 대표하여 중국 곡부 연성 공부에 협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진암 이병헌 선생을 통해 전달하였습니다. 이때 진암 이병헌 선생이 종숙이신 이 충자 호자 공을 궐리의 상공과 같은 분이며 공자의 도를 지키는데 뜻이 있어 한국과 종교계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면 의논할 사람이 없다라고 소개하자 강유위 선생은 또한 종숙이신 이 충자 호자 공을 극찬하였습니다. 종숙이신 이 충자 호자 공은 연성공의 허락 회신과 강유위 선생의 격려 회신을 받았습니다.

    1921년 종숙이신 이 충자 호자 공은 진암 이병헌 선생 등과 함께 배산서당 유회를 발기하여 배산서당 설립 취지서와 진행사목을 정하였습니다

    배산서당 상단에 문묘를 세워 공자만을 모시고, 중단에는 네분의 위패를 모신 도동사를 세워 퇴계 선생, 남명 선생, 청향당 선생, 죽각 선생

    을 배향하고, 하단에는 강당인 배산 서당을 배치해 건설하였습니다.

    1923년 배산서당 문묘와 도동사가 완공되자 곡부의 공자상을 모사하여 9월 19일 배산서당 낙성식때 문묘에 배향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공자가와 퇴계가는 서신왕래, 상호방문, 학술대회 등 유교문화를 세계화시키기 위해 공자가와 협력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육원

    진주에서 출발해서 대전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20분쯤 달리다 보면 단성(丹城) 출입구가 나온다. 그 출입구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산 밑에 여러 채의 기와집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배산서원(培山書院)이다.

    1587년 경상도 유림들이 신안(新安)의 구산(邱山)에 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 선생의 사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배산서원의 시초이다. 1792년에 이르러 배산에 배산서원을 지어 청향당(淸香堂)을 향사(享祀)하고, 그 조카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그러다가 1868년에 이르러 훼철당했다.

    1923년 청향당의 후손 진암(眞庵) 이병헌(李炳憲) 선생이 다시 배산서당(培山書堂)을 지었다. 그 안에 문묘(文廟)를 세워 공자(孔子)를 모셨다.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공묘(孔廟)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모사해 와서 모셨다. 그 아래 도동사(道東祠)를 짓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 청향당을 봉안(奉安)하고, 죽각을 종향으로 모셨다.

    우리나라에서 성균관이나 향교 이외에 서원에서 공자를 모신 유일한 곳이다. 유교를 새롭게 하기 위해 유교를 종교화한 공자교(孔子敎) 운동의 한국 본산(本山)이었다. 퇴계·남명 두 선생을 성인(聖人)급으로 승격하여 이자(李子), 조자(曺子)라고 위패를 모셨다.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을 동시에 모신 서원도 전국에서 유일하다. 오랫동안 배산서당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다시 옛날 서원의 이름을 회복하여 배산서원으로 부른다.

    지난 5월 7일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유림, 지역인사, 후손 등 500여 명이 모여 배산서원 옆에서 수비(樹碑) 고유제 및 개막식을 장엄하게 거행하였다.

    청향당은 퇴계·남명 두 선생과 동갑으로 두 선생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그 학덕이 높았다. 죽각은 퇴계·남명의 뛰어난 제자였다. 청향당의 조부 황해도 관찰사 이계통(李季通) 공이 배양에 처음으로 자리 잡았으니, 지금부터 600년 가까이 되었다.

    배산의 입향조 이계통 공과 그 손자 청향당, 청향당의 조카 죽각, 청향당의 후손 진암, 죽각의 9대 종손(宗孫) 만은(晩隱) 이상보(李尙輔) 공 등의 비석을 한 자리에 세웠다.

    비석을 세우는 것은 양반 자랑이나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옛날 뛰어난 학덕을 칭송해 후세 사람들이 배워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3년여 동안 코로나가 심하게 유행하여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를 못 했다. 그동안 서원이나 향교에서 행사를 할 수 없었으니, 코로나의 피해를 가장 크게 받았다. 500여 명 운집한 유림들 속에서 유림의 기운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느꼈다.

    옛날 것만 회복하자는 것이 유림활동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학문과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윤리 도덕을 회복하자는 것이 유림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樹 : 세울 수. *碑 : 비석 비.

    *而 : 말 이을 이. *頌 : 기릴 송

    허권수 동방한학연구원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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