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가 생각난다. 얼마나 사랑했다면 모란이 뚝뚝 떨어질 날을 기다리겠다고 했을까. 분명 모란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아니다. 사로잡기보다는 가까이 하기엔 오히려 먼 당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눈 속의 매화가 세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매화 대신 붓과 물감을 쓰지 않고, 연지로나마 모란을 그리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눈 속에 피는 매화 비온 뒤 산 빛깔은
보기엔 쉽겠지만 그리기엔 어려워라
세인들 눈 밖에 난다면 연지곤지 그릴 것을.
雪裏寒梅雨後山 看時容易畵時難
설리한매우후산 간시용역화시난
早知不入時人眼 寧把臙脂寫牧丹
조지불입시인안 영파연지사목단
【한자와 어구】
雪裏: 눈 속. 寒梅: 찬 매화꽃. 雨後山: 비가 온 뒤의 산. 看時: 때때로 보다. 容易: 용이하다. 畵時難: 그리기엔 어렵다, 쉽지 않다. // 早知: 진작 알다, 일찍 알다. 不入: 들어오지 않다. 時人眼: 세인의 눈. 寧: 차라리. 把: 잡다, 갖다. 臙脂: 연지. 寫: 그리다, 복사하다. 牧丹: 모란
차라리 연지로나 모란을 그릴 것(寧畵牧丹)으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 정치질서를 확립하여 사림파의 사조(師祖)가 되었고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했다.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무오사화를 불렀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눈 속에 핀 매화, 비 온 뒤의 산은 / 보기엔 쉽지만은 그리기는 어려워라 // 진작 세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다면 / 차라리 연지로나마 모란을 그려볼 것을'이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차라리 모란을 그릴 것을'로 번역된다. 16세 때에 과거에 낙방하고 귀향하면서 한강의 제천정(濟川亭) 벽에 붙여놓았다고 알려진 시다. 세상에 대한 열정도 크지만, 그에 비례하여 실망감도 크겠다. 그래서 다소 가볍게 치기도 한다. 인생의 경험이 적기 때문이다. 반면 정습명의 시는 슬퍼하되 지나치지 않는 '애이불비'(哀而不悲)로 격조가 높다고 한다.
시인은 눈 속에 핀 매화와 비온 뒤 산을 보면서 이것들은 보기엔 쉽지만 그리기엔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작 많은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나 않았다면 차라리 여자들이 화장할 때에 입술에 바르는 연지로 그리기 쉬운 모란을 그려보았을 것을 하면서 후회는 모습을 본다.
시인은 시심도 대단하지만 시문 속에서 풍기는 화자의 은근과 끈기에 놀라게 된다. 연지로 모란을 그리기는 쉽겠지만, 매화와 산을 그리기엔 어렵다고, 그것이 세인들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고 후회한다. '애이불비'라는 두 마음도 읽게 된다.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시대 전기 문신이자 사상가다. 세조 때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해 출사했고,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을 기록에 남겼으나, 그 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청구풍아' 등이 있다.
장희구 (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鄭襲明
- 명사 인명 고려 시대의 문신(?~1151). 호는 형양(滎陽). 최충, 김부식과 함께 인종에게 시폐 십조(時弊十條)를 올렸다. 의종 즉위 후 거침없이 간하여 왕의 미움을 샀으며, 폐신(嬖臣)들의 무고를 입게 되자 자결하였다
김수온 (金守溫1410~1481)/괴애(乖崖)
1410~1481, 조선 전기 문신이다.
자 문량(文良), 호 괴애(乖崖) 식우(拭疣), 시호 문평(文平) |
인물 |
조선 |
1410년(태종 10) ~ 1481년(성종 12) |
문신 |
남 |
영동(永同) |
병조정랑, 지영천군사, 판중추부사, 호조판서 |
정의
조선전기 지영천군사, 판중추부사,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영동(永同).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식우(拭疣). 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훈(金訓)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41년(세종 2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가 되었으나 곧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1446년 부사직(副司直)이 되고, 이어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승문원교리(承文院郊理)·병조정랑을 거쳐 1451년(문종 1) 전농시소윤(典農司少尹), 이듬해 지영천군사(知榮川郡事)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457년(세조 3) 사예(司藝)로서 문과 중시에 2등으로 급제해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9년에 한성부윤, 이듬해 상주목사, 1464년 지중추부사·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장원,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쌀 20석이 하사되었는데, 문무과 장원에게 쌀을 하사하는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어서 호조판서를 거쳐 1469년(성종 즉위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74년 영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세종 때 수양대군·안평대군이 존경하던 고승 신미(信眉)의 동생으로 불경에 통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육경(六經)에 해박해 뒤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한림 진감(陳鑑)과 「희정부(喜睛賦)」로써 화답한 내용은 명나라에까지 알려졌다. 그리고 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이석형(李石亨)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문명을 다투었다.
『치평요람(治平要覽)』·『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편찬, 『석가보(釋迦譜)』의 증수, 『명황계감(明皇誡鑑)』·『금강경(金剛經)』 등의 번역에 참여했으며, 「원각사비명(圓覺寺碑銘)」을 찬하고 사서오경의 구결(口訣)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식우집(拭疣集)』이 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식우집(拭疣集)』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대동기문(大東奇聞)』
- 『해동잡록(海東雜錄)』
[네이버 지식백과] 김수온 [金守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