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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촌할매를 찾아서/이원주(李源珠, 진성이씨 퇴계 14대손)나의 이야기 2023. 3. 29. 22:36
보촌할매를 찾아서
이원주(李源珠, 진성이씨 퇴계 14대손)
이원주씨는 안동여고와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평생을 교직에 근무하다 정년퇴임 후 경전연구와 재능기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성균관대 입학시험에서 단과대학 수석을 차지해 명문 안동여고를 더욱 빛냈다. 부군은 상지대학교 이상은 교수이며 슬하에 1남2녀가 있다. <편집위원 수일 주>
우리 조부 보촌할배(이중육李中堉)는 진성이씨 퇴계 12대손이시며 도산서원 원장을 지내셨다. 도산서원 원장이 되실 때 경상도 유림 전체의 추대로 되셨을 정도로 당시에 할배께서는 명망과 인품을 고루 갖춘 분이셨다고 한다. 우리 할매(김영근金永根)는 안동김씨이시고 보촌에서 시집오셔서 우리집은 보촌댁이라 불리워졌다.
경북 안동군 예안면 동부동 366번지는 우리집의 본적 주소이다.
그 당시 할배께서는 천석군으로 부자셨는데 그 일대 땅은 전부 우리집 것이었고 우스갯소리로 할배께서는 우리 땅 아닌 곳은 밟고 다니지 않으셨다고 한다.
예전에는 안동에서 도산까지 버스 노선이 없어서 안동에 볼일 보러 오갔던 우리 일가친척들은 모두 예안 우리집에서 점심을 드시고 가셨는데 엄마는 보통 하루에 30인분이상의 손님 점심상을 준비하셨다고 한다.
어릴 때 어른들이 하시는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집에는 소만 600마리였다고 한다. 할배께서는 인심도 좋으시고 통도 크셨다고 한다.
일제 때 퇴계 종가에 독립운동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가 종택에 불을 질러 태워버린 일이 있었다. 그 후에 후손들과 경상도 유림이 힘을 모아 퇴계 종택을 중건하게 되었을 때 할배께서 일천냥이라는 가장 많은 헌성금을 내셨는데 그 사실이 한수정중건시향도서초(寒水亭重建時鄕道書抄)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조부모님은 두분 모두 1870년생 동갑이신데, 할매께서는 1943년에 먼저 돌아가시고 할배께서는 88세 때인 1957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1954년생이니 할매는 뵙지를 못했고 할배는 내 나이 4살 때 돌아가셨는데 막내 손녀인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귀여워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그 시절 할배의 흰 수염과 지팡이 짚으신 모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할배 할매 두 분은 평생을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사셨다고 한다. 두 분은 의가 너무 좋으셔서 할배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할매 외에 어떤 여인도 가까이 하지 않으셨다.
예전에 나는 외가가 하회(풍산류씨豊山柳氏)인데도 누가 물으면 꼭 보촌댁 손녀라고 대답했다. 엄마에 관해 물을 때만 하회댁 딸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 할배의 명성이 자자했던 시절이어서 어느 누구나 보촌댁 자손은 한 번 더 쳐다보며 인정해 주었고 주변 사람들이 우리집을 모두 보촌댁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향 예안에서 내가 아는 보촌댁은 우리집이 유일했다. 아직도 나는 누가 물으면 보촌댁 손녀라고 한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찝찝한 것이 있었다. 누가 우리집 택호가 뭐냐고 물을 때마다 보촌인지 보천인지 확신이 서지 않은 점이다. 조부모님은 슬하에 5남매를 두셨으며 자손들도 수십명이나 되고 성공한 자손도 참으로 많은데 누구에게 물어도 보촌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할매는 원래 무남독녀 외딸이셔서 진외증조부께서 조카를 양자로 들이셨고 할매 별세 후 이어진 해방과 6‧25 혼란기를 거치며 진외가와 완전히 내왕이 없어서 거의 잊혀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보촌인지 보천인지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해 4월 9일에서 4월 21일까지 도산서원 주최로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 재현 행사’가 있었다. 선조 임금께서 아무리 높은 벼슬을 내리려고 해도 사양하시고 도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시며 제자를 양성하시고자 하는 선생의 뜻을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보내드리는 귀향길의 재현 행사로서 서울 봉은사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장장 800리길 걷기 행사였다.
나는 첫날인 9일 봉은사 강연회에 참석했고 다음날 10일 봉은사에서 미음나루까지 20km거리를 퇴계 선생 할배를 모셔다 드리고 올 마음으로 갔는데, 양평에서 하룻밤 자고 이어서 11일 하루 더 남한강을 따라 한여울(국수역)까지 30km 더 참여했다.
이틀 걷고 일단 귀가했다가 걷기 행사 마지막 구간인 영주 두월리에서 도산토계 삽골재까지 33km걷기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4월 19일 서울에서 영주로 내려갔다. 그날 행사 재현단과 일반 참가자들은 아침에 풍기를 출발하여 영주 이산면에 있는 퇴계 선조 배위이신 정경부인 허씨 할매 묘소를 참배하기로 되어 있어서 나는 물어물어 그곳을 찾아 가기로 했다.
영주 이산면은 나의 큰언니가 우금 선성김씨 두암고택 종부로, 둘째언니는 두월 연안김씨 괴헌고택 둘째 자제에게 출가해서 내게는 참으로 특별히 관심이 많은 지역이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허씨 할매 묘소를 물어보니 시골 노인들뿐만 아니라 버스기사조차도 그곳의 위치를 잘 몰랐다. 버스기사가 이산면 이라고 내려준 곳은 집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길가였다.
여러 소로로 갈라져 있는 길 복판에서 한참 헤매고 있는데 마침 경운기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점잖아 보이는 60대 농부가 타고 있었다. 이 근처에 퇴계 선조 배위 허씨 할매 묘소가 있다는데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처음 듣는 곳이라 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 분은 내가 묘소 주소를 갖고 있다고 했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인근에 세워둔 승용차로 바꾸어 타고 와서는 나를 태워다 그 주소에 적힌 장소에 내려주었다.
나더러 자기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할 뻔했냐며 내가 조상 할머님 찾는 것이 너무 대견해서 도와주었노라고 했다.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라 속으로 그 분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기원했다. 좁은 시골 길을 한참 들어간 그곳에는 사람이 살 것 같은 허름한 집이 두어 채 있었다. 그리고 미리 온 두 대의 차에 내가 아는 족친도 있어서 안심을 하고 함께 재현단 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니 재현단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고 이어서 몇 대의 승용차가 도착했다.
그 중에 이근필 퇴계 종손께서 내리고 계셨다. 모두 인사를 드리느라고 모여 들었는데 종손께서 내게 어느 집에서 왔느냐고 물으셨다. 연로하신데다 귀가 많이 어두우셔서 옆에 모시고 온 분이 일일이 글을 써서 보여드리며 필담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내가 “보촌댁 손녀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필담하는 사람이 “보촌이에요? 보천이에요?”하고 다시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저도 잘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 우리를 둘러 싼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자기네 집 택호도 제대로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정도로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날은 4월이었지만 흐리고 바람이 불어 추운 날씨였는데, 연로하여 기운이 없어 힘든 모습이었던 종손께서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으시며 눈을 크게 뜨시고는 보촌댁 손녀냐며 내 손을 꼬옥 잡으셨다. 완전 반가워하는 눈빛이었다. 주변에 인사를 나누고자 모여든 사람들이 많아 자리를 비켰지만 그 낭패스러움 가운데서도 우리 할배가 아직도 퇴계 종손의 기억 속에 확실히 자리했음을 느끼며 얼마나 마음이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 행사 후 본격적으로 보촌을 찾기 시작 했다. 나의 숙원 사업이었다. 평생 스스로 헷갈리며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을 알고 싶었을 때는 이미 부모님께서 예전에 세상을 떠나신 후이고 우리 9남매 중 생존한 사람은 겨우 4명인데 나 외엔 아무도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보촌 보천 어느 쪽인지 큰오빠께 물어 보았더니 본인 생각으로는 보촌일 것 같다고 했다. 나이든 여러 친척에게도 물었는데 모두 대답이 같았다.
우리 집안에서 족보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6촌 오빠께 물어봤더니 보촌이 보가리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문경 어디라고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오빠도 보촌의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했다. 문경시청에 전화해서 보촌과 보천 어느 쪽이라도 그런 지명이 있느냐고 문의를 했더니 3일만 기다려 주면 알아봐 주겠다고 했는데 결국 그런 지명은 없다고 연락이 왔다.
안동시청에서도 마찬가지 대답이었다. 이번에는 동네 주민센터에 가서 할배 제적등본을 떼어 보았다. 일제 때 만들어진 호적 영인본은 매우 흐렸지만 한자로 쓰여진 할매 이름은 김영근(金永根), 할매 부친 란에는 김우순(金祐淳)이라고 적혀있었다.
인터넷으로 안동김씨대종회를 검색해서 전화했더니 그런 이름은 (신)안동김씨라며 안동김씨대종중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곳에 전화해서 전화 받으신 분께 그간의 사정을 간추려 말하고는 우리 할매 택호가 보촌댁인데 보촌이 어디인지 알고 싶다고 했더니 “지금 할매는 찾아서 뭐할라꼬?”라고 해서 기가 막혔다. 뿌리를 찾는 것이 요즘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참 이야기를 듣더니 내 이름을 물어서 이름을 말했더니 혹시 교직에 있지 않았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반갑게도 그 분은 내가 처음 교직에 나갔을 때 함께 근무한 적이 있던 김득년 선생님이셨다. 교장 출신으로 안동김씨대종중 부회장과 사무총장으로서 종중일을 맡아 총괄하고 계셨다. 한번 직접 와서 찾아보자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정말 할매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안동김씨대종중을 방문한 날, 안동김씨는 족보가 전부 전산화가 되어있어서 이름만 넣으면 바로 찾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리 할배 휘 ‘이중육’으로 검색하니 드디어 할매 친정 족보가 뜨고 진외증조부의 사위 란에 할배 그리고 자녀인 아버지(이현호李顯鎬), 작은아버지 두분(이우호李祐鎬, 이삼호李參鎬), 고모부 두분(이익호李翊浩 재령인, 김하섭金河燮 풍산인) 모두 다섯 분의 이름이 다 나오는 게 아닌가!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안동김씨네 인터넷 족보는 너무나 정확하였다.
그런데 진외증조부님 휘가 김호순(金祜淳)이라고 되어 있었다. 김총장님께서 계공랑공파(啓功郞公派)라고 하면서 관련된 족보를 복사해 오셔서 보니, 제적등본에 쓰여 있는 김우순(金祐淳)은 진외증조부 김호순(金祜淳)의 동생 분이셨고 그 아드님 김국근(金國根)이 형님의 양자로 와서 보촌할매의 오라버니가 되셨다.
호적법이 생긴 직후 당시에 호적을 만들 때 호(祜)자와 우(祐)자가 획이 비슷하여 수기로 작성하였던 때라 면 서기가 실수한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지금도 진외가 주손인 김영진(김국근의 증손)씨와 함께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일! 할매 친정 보촌을 찾아야 했다. 김총장님께서 할매의 종파인 계공랑공파 상리종중 군수공 주손 김원동씨의 연락처를 알려주셨다. 김원동씨는 내가 보촌이 어디냐고 질문하자마자 보촌은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이고 그곳은 보가리(保家里)라고도 하는데 보가리는 집을 잘 보존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그곳을 보촌(保村)이라 한다고 했다.
역시 주손은 달랐다. 준비된 대답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시원하게 대답해 주었다. 60여 년 동안 마음에 숙제로 남아있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누가 물어도 자신있게 “나는 보촌댁 손녀입니다.”라고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행복했다. 그 며칠 뒤 김원동씨에게 안국동에서 설렁탕 한 그릇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원동씨는 한문과 서예에 대단한 실력자였다.
예전에 나보다 나이 많은 질녀가 자신의 증조모를 추억하며 들려준 이야기 하나. 보촌할매의 어머님은 고을 원님의 딸이었다고… 전설같은 이야기였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족보를 보니 과연 할매의 외조부(류진휘柳進徽)께서는 서애(西厓)선생 자손으로 고원군수(高原郡守)셨다고 적혀있었다.
할매의 외삼촌 류도발(柳道發)선생과 외사촌 류신영(柳臣榮)선생 부자분은 구한말 나라가 무너질 때 자정순국하셔서 광복 후 애국장과 애족장을 받으셨고 안동 내앞마을 독립기념관에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풍산류씨 문중에서도 두 분을 가문을 빛낸 순국선열로서 크게 칭송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이동수 안동문화원장님 주선으로 류도발 선생의 현손이며 내게는 9촌 질녀인 류금하를 만나 기적같은 상봉의 기쁨을 나누었다.
11월에는 김원동씨의 수고와 배려로 진외가 김영진 주손도 안동에서 만났는데, 정말 너무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김영진 주손은 내게 진외재종질이라 7촌이 된다. 식사를 함께 하며 그동안 오래 끊어졌던 시간을 이어갔다. 처음 만났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친척마냥 금방 혈족 간의 정이 느껴졌고 내가 몇 살 아래인데도 기꺼이 아지매라고 불러 주었다.
서(西)안동의 경상북도청 인근 풍산읍 신시가지 언덕에 멋지게 지은 그의 집에 초대해 주어 방문하여 다과를 대접받는 감격도 누렸다. 새롭게 소중한 진외가 친척을 찾게 되어 너무 기쁘다. 지금도 틈틈이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늘과 조상님들께서 혈연의 끈을 찾도록 도와주신 것이라 여겨진다. 언젠가 할매의 친정 보촌과 진외가 조상들이 사셨던 안동 풍산 상리를 꼭 찾아 가보고 싶다.
그리고 안동출신 성균관대학교 동문 모임의 멤버인 고등학교 같은 기수 김수일씨가 안동김씨 종중회보 책자 집필에 기여하고 있음을 알았고 이후 더욱 친하게 지내고 있다.
언젠가 동문모임에서 내가 우리 할매 찾은 과정을 밥도 안먹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걸 듣더니 자기가 바로 그 안동김씨라며 그 할매 얘기를 써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글이 내 마음을 다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조모 보촌할매를 다시 찾은 이 기쁨과 감사를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 보촌할매를 찾아주신 안동김씨대종중에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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