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퇴계가 ‘계곡으로 물러난’ 까닭/ 배 병 삼 (영산대)
    철학/동양철학 2023. 3. 25. 23:32

    퇴계가 ‘계곡으로 물러난’ 까닭 배 병 삼 (영산대) 1. 분석: ‘조광조’ 읽기 - 한낱 선(善) 만으로는 부족하고, 법(法)은 스스로 작동하지 않는다. (맹자)1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이하 퇴계. 존칭 생략)은 ‘사화(士禍)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특별히 청년 시절 목도한 기묘사화(己卯士禍)는 그의 평생 과제가 되었다. 퇴계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정치적 실패를 거울삼아 그가 남긴 과업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퇴계의 정치적 생애는 조광조의 정치에 대한 연구와 분석 그리고 처방의 제출로 요약된다. 그는 기묘사화의 원인을 다음 셋으로 압축한다. (1) 개혁파 정치가들의 학문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점.(인적 자원의 자질 문제) (2) 국가의 인사적체/ 재정궁핍으로 정쟁은 필연적이었다는 점. (조선정계의 구조적 문제) (3) 퇴로(退路)가 부재한다는 점.(시스템상의 문제) (1) 사람이 문제다 정치의 근본으로 사람(의 자질)을 문제삼는 것은 유교 정치학의 기본 특징이다. “그 사람이 있어야 그 정사가 일어난다.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정사는 몰락한다”(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라는 <중용>의 금언이 대표적이다. 퇴계는 조광조 사건을 리뷰하면서 젊은 선비들의 교과서적 이상주의, 이를테면 광사(狂士)의 급진주의에서 그 일차적 책임을 찾았다. 1 “徒善不足以爲政, 徒法不能以自行.”(맹자, 7:1) 4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1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선비 중에 조금이나마 뜻을 가지고 도의를 좇은 사람들 거의가 세상의 환란에 걸린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비록 땅이 좁고 인심이 박한 까닭이기는 하지만, 역시 그들 스스로를 위한 계획이 미진했기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이른바 미진했다 함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을 높이고 시대를 헤아리지도 못했으면서 세상을 일구는 데에 용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한 까닭이니 큰 이름을 걸고 큰일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이황, <답기명언答奇明彦>) 우회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이 대목은 ‘조광조 사건’에서 얻은 교훈임에 분명하다. 기묘사화의 발단 원인으로 그는 “사림 세력들의 학문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스스로 너무 높은 곳에 처하며, 때를 헤아려 보지도 않고서 세상을 다스려 보겠다고 용감하게 나섰기 때문”2이라고 지목한 점에서도 그렇다. 그렇다면 사화=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1차적 처방은 ‘새로운 인간의 육성’일 수밖에 없다. (이 요구는 새로운 학교, 즉 ‘서원書院’의 건설로 표출된다. 후술) (2) 정치의 구조적 문제: 인사적체/ 재정궁핍 당시 조선중기 정부관료의 적체에 대해서는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지적이 적절하다. 조선의 크기는 중국에 견주어 볼 때 그 한 성(省)만도 못한데, 중국의 관직과 아문(衙門)은 조선의 두 배가 되지 않으니 우리나라 관청이 지나치게 번잡함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군과 읍[郡邑]이 너무 많아, 수령(守令)은 있으나 백성은 없는 곳조차 있다.(이이, <율곡전서>, 권4.) 중국보다 높은 공직자 비율은 벌써 치열한 자리다툼을 예고한다. 역시 이점은 국가재정의 고갈과 직결된다. 국가재정 문제와 관련해서 퇴계는 이렇게 논한 바 있다. 요즘 세상 형편을 간추려 말한다면 남북에서 외침이 잦고 곳간은 텅 비어서 장차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지경입니다. 갑자기 사변이라도 터지게 된다면 막을 도리가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면 반드시 난리가 될 조짐이 있는 2 이황, <정암조선생행장(靜庵趙先生行狀)>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5 법인데 지금이 바로 그러합니다.(이황, “논사학사생문(論四學師生文)”) 이에 대한 처방은 퇴계의 경우,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로 제시된다. (3) “물러나는 길이 없다.” 주목할 점은 당시 조선의 정국이 왜곡되어, 놀랍게도 출사의 길인 ‘진로(進路)’는 존재하지만 물러나는 길, ‘퇴로(退路)’가 막혀있다는 지적이다. 특별히 ‘퇴로가 없다’는 지적은 차후 퇴계의 정치적 행동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은 신하가 벼슬을 버리고 물러날 수 있는 길이 영영 막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물러나기를 청하는 이가 있으면 허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뭇사람들의 분노와 시기를 사게 되어 갖은 핍박을 받고, 다시는 물러나 피하지 못하고 그들과 한데 휩쓸리고 맙니다. 이렇게 때문에 선비가 한번 조정에 서게 되면, 모두 낚시에 걸린 물고기꼴이 되는 것입니다.3 급기야 군주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스스로 사퇴할 길이 없다는 금기가 관례로서 뿌리내리고 말았다고 퇴계는 진술한다. 늙고 병들어 물러나는 것이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처럼 예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직하는 사람은 기어이 자기 뜻을 이루었고 사람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조선에는 이런 법도(물러나는 길) 가 쇠퇴하고 끊어져서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겨우 나이가 찬 대신이 ‘관례에 따라 사직하는 글’[啓辭]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고, 나머지 관리들은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4 특별히 난진이퇴(難進易退)의 처신을 도덕적 규범으로 장착한 유교 전통에서는 이해할 수조차 없는 정치적 악폐가 구조화된 것이 당시 조선의 현실이었다.5 이상 세 가지로 요약되는 3 번역은 김영두 편역,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소나무, 59쪽; <고봉전서>, “양선생왕복서” 제1권. ‘존재(存齋) 계우(契右)에게 답하여 올림’ 한국고전번역원 2007 참고. 4 김영두 편역,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소나무, 110쪽. 6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1 조선 정치 구조에 대한 문제 인식은, 퇴계가 기묘사화에 대한 정치학적 분석을 통해 획득한 성과다. 한편 퇴계는 오랜 기간 편지를 통해 신예 유학자,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 정치와 철학에 관하여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다. 다음 인용한 글은 퇴계가 기대승에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이것은 퇴계의 기묘사화에 대한 연구의 결론이자, 앞으로 그가 취할 정치적 실천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치가 퇴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문건으로 보인다. 조정암(趙靜庵)이 임금께 올린 글들을 모아 요약한 것을 보내니, 한가한 때에 시험 삼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글을 본 뒤, 마치 취한 것도 같고 깬 것도 같은 상태로 근 한 달을 보냈습니다만 아직도 낫지 못한 형편입니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 이 사람은 어려움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 어려운 줄 알면서도 잘못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ƒ 하지만 또 잘못 믿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물러나려 했지만 ‘길’이 없어서 결국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길이길이 영웅적 행동에 눈물로 손수건을 적신다’는 말이 죽은 제갈량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또 당시의 상황을 살피건대 비록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 건이 없었더라도 또 한 번의 패배를 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뭍 간신 소인배들(훈구파, 왕당파)을 들끓게 하여 경악스러운 계략을 촉발시킨 것은 바로 이 한 가지 일(곧 위훈삭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것은 곧 여러 현자(賢者)들이 위태로운 때를 맞아 경계하지 않고 너무 날카롭게 앞으로만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이 점 또한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6 이 대목은 조광조의 정치적 성패에 대한 퇴계의 사상 연구의 결과물이다. 특히 인용문에 밑줄 친 부분은 퇴계의 조광조에 대한 연구의 핵심처로 보인다. 5 유교의 본령은 벼슬길의 진퇴 과정, 특히 퇴임에 엄격할 때만 정치의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이후 ‘선비’는 난진이퇴(難進易退)라, “출사는 어렵게 여기고, 사퇴는 쉽게 여긴다”라는 윤리규범을 체화하게 되었다. 가령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출처진퇴(出處進退)에 선비의 사활이 걸려있다”라고 하였다. 출·처·진·퇴, 네 글자에 선비의 정 체성이 달려있다는 말이다. 막상 이 네 글자를 중시한 것은 맹자로부터다. 상세는, 배병삼, <맹자, 마음의 정치학> 참고. 6 “趙靜庵陳啓抄送去. 閒中試詳披閱. 滉自見此文字來, 如醉如醒半月十日, 猶不能瘳也. 竊料斯人也. 非不知爲難, 知難而誤有所恃, 亦非獨誤恃之故, 良由求退無路而致之. 可知是長使英雄淚滿巾者, 不獨死諸葛一人也. 且觀當時事勢, 雖不有靖國奪功事, 亦不免一敗, 然所以激衆奸而促發駭機, 正由此一事. 是乃諸賢臨危不戒. 直前太銳之故, 此又不可不知者也.”(이황, <答奇明彦>)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7 2. 진단: ‘조광조’ 해석 - 진실로 물러나기를 구하였으나, 물러날 길이 없어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良由求退, 無路而致之) 퇴계가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를, ‘조광조 문건’과 대조하여 검토함으로써 그 추이를 추적해보자. (1) 이 사람(조광조)은 어려움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어려운 줄 알면서도 잘못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3) 하지만 또한 잘못 믿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물러나려 했지만 ‘길’이 없어서 결국 그렇게 된 것입니다. (1) 이 사람(조광조)은 어려움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광조가 지향했던 정치는 군주 독재체제를 극복하고 군주와 대신의 ‘공치共治’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조광조의 말을 들어보자. 한 나라의 법도가 거칠게나마 정해지고 기강이 거칠게나마 서게 되는 것은 어느 나라든 군주가 대신(大臣)을 공경하여 그에게 정치를 위임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군주가 독치(獨治)를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대신을 임명하고 그에게 정사를 위임한 연후에야 치도(治道)가 서게 됩니다. (····) 군주 스스로 정치를 다 떠맡는다 하더라도 대신들의 보좌가 없다면 정치적 성취가 얻어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조광조)7 그러므로 “옛날 성군들과 현명한 재상들은 반드시 진심으로 서로를 믿고 각기 할 일을 다 했기에, 광명정대한 큰 공업을 ‘함께 이룰’[共成] 수가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도 진정으로 대신들을 공경하고 그들에게 정무를 위임하여 기강을 세우고 법도를 정해서 훗날까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하기 바랍니다.”(조광조)8 7 “若法度之所以粗定, 紀綱之所以粗立者, 未嘗不在乎敬大臣而任其政也. 君未嘗獨治而必任大臣以後 治道立焉. ...君而自任而無大臣之輔 則萬化不興焉.” (조광조, <謁聖試策>) 8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1 그러나 주희로부터 계승한 도학적 ‘군신공치’의 비전은 당시 훈구파(즉 ‘왕당파’)의 군주독재주의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낮에 개혁파를 테러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요즘엔 공리(功利)를 다투는 마음들이 크게 성하여 소인배들이 조금이라도 불만이 생기면 곧바로 국가정책에 반기를 듭니다. 만일 정부의 작은 실수의 꼬투리라도 있다면 곧 그 반발의 형세는 벌떼와 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근래 대간(개혁파)이 부정한 자를 몰아내고 청렴한 자를 천양하니 논의가 정말 물이 끓듯 합니다. 지금 무뢰배들이 화살을 쏘아 대간을 협박하는 짓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백성들이 저지른 짓이겠습니까? (곧 왕당파의 사주에 의해 무뢰배들이 저지른 테러라는 것!)(조광조)9 조광조는 개혁파에 대한 테러의 배후를 알고 있었고, 또 그 정치적 의미를 읽고 있었다. 이것은 조광조가 ‘위훈삭제’와 같은 개혁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사업인 줄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퇴계가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이 사람(조광조)은 어려움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라고 언급했던 것은 바로 이런 점을 가리킨다. 한편 퇴계의 언급은 조광조가 남긴 텍스트들에 대한 치밀한 연구의 결과로 발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 어려운 줄 알면서도 잘못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조광조의 잘못 믿은 구석’이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개혁의 실패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 조광조가 군주[中宗]에게 올린 최후의 호소문을 보자. 저의 나이 38세입니다.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입니다’(所恃者君心而已). 망령되이 국가의 병통이 이욕의 뿌리에 있다고 생각하였던 까닭에 국맥을 무궁토록 새롭게 하고자 하였을 뿐 다른 뜻(곧 ‘역모’)은 전혀 없었습니다. (조광조)10 8 “故古之聖君賢相, 必誠意交孚, 兩盡其道 而可以共成正大光明之業矣. 伏願殿下 姑以敬大臣而任其政, 粗立其紀綱, 粗定其法度 以基後日大本之立, 大法之行也.” (조광조, <謁聖試策>) 9 今世功利之心大盛, 細人小不滿意, 則輒欲國家生亂, 若朝廷小有變故, 則其勢必蜂起也. 近者臺諫欲激濁揚淸, 所論果多矣. 今之射箭, 豈愚迷者所爲乎. (조광조, <大司憲時啓>) 10 “臣年三十八, 士生斯世, 所恃者君心而已. 妄料國家病痛在於利源, 故欲新國脈於無窮而已. 頓無他意.” (조광조, <獄中供辭>)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9 퇴계가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가할 적에 읽어보기를 권한” 조광조의 글들 가운데는 이 ‘옥중공사(獄中供辭)’는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퇴계가 ‘조광조 텍스트’의 독후감으로서 “나는 이 글을 본 뒤, 마치 취한 것도 같고 깬 것도 같은 상태로 근 한 달이나 있었지만 아직도 낫지 못한 형편”이라고 말하고, 또 “‘길이길이 영웅적 행동에 눈물로 손수건을 적신다’는 말이 죽은 제갈량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라는 비감어린 탄식을 하게 만든 문건도 이것일 것이다. 퇴계는 조광조의 글과 죽음을 대조함으로써 ‘임금의 마음만 믿고 기대는’ 방식(所恃者, 君心而已)으로는 더 이상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한 것이다. 나아가 신하 한 사람의 절의나 의지만으로는 권력의 독과점 상태를 타파할 수 없다는 도저한 절망감을 가졌다. 이것은 “선한 마음만으로 정치는 이뤄질 수 없으며, 제도[法] 스스로 작동하는 수도 없다”11라는 맹자의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선한 마음(동기)이나 정치적 윤리(절의)만으로 좋은 정치를 이뤄낼 수 없음이 조광조의 죽음을 통해 증명되었다면 이제 문제는 제도개혁의 길로 나아가야만 한다! (퇴계에게 제도개혁의 길은 ‘퇴로의 개척’과 ‘서원의 건설’ 로 표출된다. 후술) 요컨대 퇴계가 조광조 텍스트 연구를 통해 획득한 ‘임금의 마음만 믿고 의지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 혁신은 이룰 수 없다는 정치적 각성은 그로 하여금 제도개혁, 체제혁신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3) 오랫동안 물러나려 했지만 ‘길’이 없어서 결국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조광조 텍스트 연구를 통해 획득한 최종 결과물이다. 이제 임금의 마음을 믿고 또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格君心.” <맹자>) 방식으로는 새로운 정치를 이룰 수 없다는 결단이 이 토로 밑에 깔려있다. 그러면 조광조가 ‘물러나려 했으나 길이 없어 죽음을 당하였다’라고 퇴계가 판단한 근거를 살펴보자. 조광조가 임금에게 올린 상소다. 선비란 모름지기 임금에게 믿음을 보인 연후에야 조정에 나아가서 임금을 섬길 수가 있는데, 신과 같이 무식한 자가 어찌 능히 임금의 믿음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매양 물러나서 독서하고자 하면서도 능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을 따름입니다. (······) 말세의 대간들조차 군주가 비록 중하게 대우하더라도 오히려 물러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11 “徒善不足以爲政, 徒法不能以自行.” (맹자, 7:1) 10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1 헌데 지금 임금께서 이런 식으로 대접해주신다면, 조정에 장차 기강은 없어질 것입니다.(조광조)12 이것은 대간(臺諫)들의 조언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또 물러나지도 못하게 하고 도리어 직급을 높여 무마하는 군주의 고식책(姑息策)에 대해 조광조가 비판한 것이다. 여기 “매양 물러나서 독서하고자 하면서도, 능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을 따름”이라는 대목은 차후 퇴계의 정치적 행동을 예견케 한다. 조광조의 운명이 “물러나서 독서하고자 하였지만, 길이 없어서”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는 인식이 곧 퇴계로 하여금 ‘퇴로의 개척’이라는 정치적 행동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퇴계에게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조광조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조선 정치의 구조적 문제라는 점에 있었다. “선비가 한번 조정에 서게 되면, 모두 낚시에 걸린 고기 꼴이 되는 것”이라는 표현 속에 그런 뜻이 잘 들어있다. 달리 말해서 “지금 조선에는 이런 법도(물러나는 길)가 쇠퇴하고 끊어져서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겨우 나이가 찬 대신이 ‘관례에 따라 사직하는 글’[啓辭]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고, 나머지 신료들은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는” 그 막혀버린 퇴로의 문을 열고 퇴로의 길을 개척하는 작업이 그가 자임한 정치적 행동이었다.13 12 “士須見信於君, 然後乃可出而事君矣. 如臣無識, 安能取信乎. 每欲退而讀書, 未能遂意耳.(·······) 末世臺諫, 人君雖重待, 尙有頹靡之習, 待之若是, 則朝廷將無紀綱矣.” (조광조, <兩司請改正靖國功臣啓>) 13 64세, 노경의 퇴계는 조광조의 아들로부터 그 아버지 행장을 청탁받는다. 퇴계는 젊은 시절 ‘히어로’를 애틋하게 회상하 면서도 그 정치적 유산을 객관적으로 논한다. 여기서도 핵심은 ‘길이 없어서 물러날 수 없었다’는 인식이다. 곧 퇴계는 평생토록 조광조의 죽음이 퇴로의 부재 때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조광조)가 사헌부의 대사헌 자리를 극력 사양하다 가 허락받지 못했을 때 깊이 근심하였고, 기준(奇遵)이 언젠가 산림에 홀로 갔으면 하는 탄식을 하니 자주 칭찬하며 마음 에 들어 하신 것을 보면, 물러서기 어려운 때에 용감하게 물러서는 것은 평소 선생의 뜻이었다. 그러나 근세에는 사대부 를 대우함이 예전 의리를 따르지 않아서, 물러가기를 구하여 허락을 얻은 예가 없고, 신하가 벼슬에서 물러가는 길이 끊겨, 한 번 조정에 서면 병으로 폐하거나 죄로 물러나는 것 외에는 국사를 떠날 방도가 없으니, 비록 선생이 화합하지 못하여 물러가기를 도모하고, 기미를 보아 일어나고자 했으나, 어찌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미 선생이 물러 나려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또 어찌 화가 오는 것을 지혜와 꾀로써 면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선생의 더욱 어려웠던 점이다.” (<정암조선생행장(靜庵趙先生行狀)>)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11 3. 처방전⓵: 퇴로의 건설 - 내가 이번에 고향에 돌아와 버린 것에 대해 온 세상이 비웃고 욕을 합니다. (퇴계) 이리하여 퇴로(물러나는 길)를 뚫는 작업이 퇴계의 1차적 정치적 행동이 되었다. (*목숨을 건 행동이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제부터 퇴계는 고작 정치사상가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자, 곧 정치적 의사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의 50대 이후 정치적 활동은 ‘퇴로의 건설’과 퇴장의 정치적 공간으로서 ‘서원의 건설’에 바쳐진다. 퇴계는 정치 현장으로부터 물러나 학문의 세계로 떠난 것이 아니라, 즉 ‘정치로부터 물러난 것’이 아니라 ‘물러나는 정치적 통로를 만들었다’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14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만들 때에야 인사적체와 재정위기로 인한 사화의 재발을 막을 수 있고, 또 물러나서 스스로를 수련하는 시스템 속에서만이 유교가 기약한 ‘소통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퇴계가 왜 고향, 안동의 지명 ‘兎溪’(토끼 골짜기)를 ‘退溪’(물러난 골짜기)로 개명하여, 자호(自號)하였던지를 환기할 필요가 있으리라. 위에서 “진실로 물러나기를 구하였으나 물러날 길이 없어 그렇게 된”(良由求退, 無路而致之) 조광조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제도로서 퇴로의 건설’이라는 정치적 행동으로 나선다는 뜻이 ‘퇴계’라는 이름 속에 들어있다. 토계(토끼골)에서 퇴계(물러난 골)로 바뀌는 것은, 자연이 인문의 세계로 전환하였음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역시 그가 실천하려했던 정치의 새로운 패턴도 ‘退-溪’라는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퇴로의 건설, 이것은 자칫 피바람을 부를 수 있는 문제였다. 군주 독재체제인 조선 중기에 ‘신하가 자발적으로 사퇴한다’는 것은 곧 임금에 대한 불충(不忠)과 배신을 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 선비들은 한번 조정에 나서면 감히 물러나지 못했다. 퇴계가 이 모양을 두고 “낚시에 걸린 꼴”이라고 묘사했던 까닭이다. 이에 퇴로의 건설은 대단한 결단을 필요로 하였다. (그의 상소문과 편지 속에 ‘아프다’, ‘병들었다’는 언급은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14 퇴계의 행동에 대해 ‘정치 현장으로부터 은퇴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는 식의 진술은 한국학계의 오래된 고질이다. 예를 들어 “퇴계는 벼슬하려는 생각보다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고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데 힘쓰고자 했다. 퇴계가 이렇게 벼슬 에 마음을 두지 않은 것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몸의 허약함 때문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너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김인규)라는 식의 진술이 한국학계 전반의 퇴계 인식을 대변하고 있다. 니체 연구자들이 니체 를 “‘비정치적 철학자’라느니, ‘개인의 실존을 고민한 은둔의 철학자’라는 이름을 달”아 놓고 오해해 왔던 것과 마찬가지 로 오늘날 한국학계 역시 퇴계를 ‘비정치 철학자’요 ‘은둔의 철학자’로 곡해하고 있다고 본다.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79쪽 참고) 실은 당대 정치를 염두에 두지 않은 일류 철학자는 없다. “모든 철학적 논의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자크 데리다) 12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1 한다.)15 자퇴를 저항으로 여기는 것은 일종 동아시아 정치문화로도 여겨진다. 예컨대 이 대목에서 현대일본의 지성인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1910-1977)의 예를 들어본다. 그가 1960년 미일안보조약美日安保條約을 계기로 도쿄 도립대학 교수직을 사임하였을 때 일본사회가 보인 반응을 통해 ‘퇴로의 개척’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큰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자. “다케우치 요시미의 대학 교수직의 사퇴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사적私的인 성격에 집중되었다. 악의적 공격은 대개 두 가지 모습을 띠었다. 하나는 ‘빨갱이’라는 비난(당시 다케우치 요시미가 중공中共에서 천만 엔을 받았다거나 공산당의 비밀당원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또 하나는 ‘이름 파는 행위’라는 비난이다. 선의의 반응에도 오해는 담겨있었다. 공무원이면서 정치 활동을 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그만뒀다는 설, 기시 내각 아래에서 공무원으로 살아가기가 싫어 떠났다는 설, 사직하고 나서는 그렇게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을 거라는 의견 등이었다.” (쑨거, 윤여일 역,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그린비, 273-274쪽) 다키우치 요시미의 대학교수직 사퇴에 대한 당시 일본 사회의 비평들은 공직을 스스로 물러난다, 즉 ‘자퇴(自退)한다’는 것의 복합적이고 또 정치적인(전혀 의도하지 않은 반응을 초래하는) ‘동양적’ 성격을 보여준다. 20세기 일본사회조차 자퇴는 자칫 “본인의 혹독한 시련에 처하게 되는”(쑨거의 비평) 결과를 낳는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황의 경우는 더 가혹했다. 당시 퇴계의 퇴장을 두고 노장풍의 은둔으로 비난하는 의론이 크게 들끓었다. 그를 유자가 아니라 이단으로 몬 것이다. (斯文亂賊!) 이에 대해 그는 크게 분노를 표한다. 물러남의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상심은 더욱 컸다. 내가 이번에 고향에 돌아와 버린 것에 대해 온 세상이 비웃고 욕을 합니다. 어떤 이는 저를 산새[山禽]에 비유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단(異端)이라 배척하기도 하면서 다시는 그들 사이에서 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뜻을 보였습니다. [나의 퇴장의 의미를 이해할만한] 박화숙(朴和淑.1523~1589), 이중구(李仲久. 1510~1575)16, 정자중(鄭惟一. 1533~1576), 이숙헌(李叔獻. 1536~1584. 곧 율곡) 같은 사람들조차 모두 15 아프다는 핑계로 회견을 거부하는 ‘정치적 행동’은 이미 공자부터 그러하였다. (孺悲欲見孔子, 孔子辭以疾. 將命者出戶, 取瑟而歌, 使之聞之. 논어, 17:20) 맹자 또한 그러했다. (맹자, 5:5) 16 이중구: 중구(仲九)는 이담(李湛)의 자(字). 호는 정존재(靜存齋)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13 소식을 들은 이는 더욱 소리 높여 비난하고 내가 떠난 사실을 더욱 의심하니, 다른 사람들에게서야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답기명언>) 이 편지글은 퇴계의 솔직한 심정이 토설되었기에 전편에 대한 침착한 독서를 필요로 한다. 다만 이 대목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의 쟁쟁한 유자들에 대한 퇴계의 좌절감을 너껀히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신예로 숭앙받던 율곡에 대한 실망감도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자신의 정치적 행동, 즉 물러남이 정계에서 은퇴하여 학문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물러남이라는 행동 자체가 정치적이며, 이점은 유교 경전을 읽어본 선비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도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억견으로 그를 몰이해했다는 분노다. 처방전⓶: 서원의 건설 - 한 사회가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니체) 퇴계에게 ‘퇴로의 건설’은 결국 퇴장 공간으로서 서원 건설로 완성된다. (*향약鄕約을 통한 자율적 사회 공동체 구성에 대해서는 따로 논한다.) 서원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국가의 용도에 필요한 지식과 인간의 배출은 소학과 대학으로 충분했다. 문제는 당시 학교들이 병들었고(특히 대학=성균관이 타락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퇴계의 정치적 인식이었다.17 서원은 국가제도를 벗어난 인문학교였다.18 퇴계에게 서원은 다음 두 특성을 갖는다. (1) 서원은 정치기구(political institution)다. (2) 중앙과 지방 사이 ‘순환’을 위한 정치적 플랫폼(political platform)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조정에서 물러난다는 것이 퇴계에게서 ‘정치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물러남을 통해 정치의 영역은 재조(在朝=조정)에서 재야(在野=지방)로 확산된다. 서울과 지방, 조정과 서원 사이의 순환을 통해 유교경전에서 제시된 정치적 이상, 곧 인정(仁17 그는 ‘아프다’는 핑계로 수백 건의 은퇴 상소문을 올리면서도 생전에 10여 곳의 서원을 건설하였다. 18 “고등교육의 핵심적 의미 가운데 하나는 기존 사회나 국가가 존속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양승태, <소크라테스의 앎과 잘남.> 366쪽, 주석 1) 14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1 政)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가의 질병이 치유되고 건강을 회복(의료적 의미에서 인仁의 상태)하리라는 희망이다. 이것이 그의 이름 ‘퇴-계’19 속에 깃들인 정치적, 경학적 의미였다. 이를 위해 어떤 실마리[發端興起]20가 있어야 할 터인데 그는 이것을 ‘스스로 물러남’ 즉 자퇴(自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또 그것을 과감히 실행으로 옮겼다. 한 연구자의 언급은 퇴계의 서원 건설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잘 묘사하고 있다. 서원이 사립(私立)을 원칙으로 하지만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향중(鄕衆)이 공의(公議)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생각하면, 관직 생활과 대비되는 후기 퇴계가 보여준 서원 건립 활동을 도피(逃避)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원의 건립은 많은 사람들 간의 접촉과 마찰을 야기하는 것이고 퇴계 역시 그러한 마찰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서원 건립 활동은 그의 성리학적 이념과 함께 현실문제에 대한 해답과 대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교 이념을 담보해내고 재생산해야 할 관학과 관료체제 그리고 사대부들이 현실적 권력관계 내에서 오히려 본래의 가치를 상실함으로써 오는 현실 위기를 서원이라는 새로운 교육체계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21 동시에 지방의 자율적 교육기관이자, 재교육기관으로서 서원의 ‘정치적’ 의의를 그가 최초로 발견하고, 또 제도화했다는 점도 주목하자. ‘진-퇴 순환구조의 패턴’에서 서원은 중요한 정치적 공간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처음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을 요구하여 건립하였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서원이 사립으로서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그 영속성을 위해서는 군주의 공식적 담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사액서원이라는 구상을 내놓은 것이다. 즉 지방 관료들의 침탈을 방지하면서도 ‘학교’로서의 자율성을 보장받으려는 고충이 사액서원의 요청으로 나타났다. 퇴계가 서원에서의 과거 공부를 배척한 것은 당시 중국의 서원이 그 실상은 과거준비의 장소로 운영되고 있었던 점과 비교할 때 극히 대조적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당시의 향촌사회에 도학적 가치관과 사회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기구로서 서원19 퇴계의 溪(계곡)가 ‘낮은 곳에 위치한 골짜기’라는 점에 주목하자면, 溪는 서울의 조정에 대칭되는 향당, 향촌을 의미한다. 또 중앙의 대학(성균관)에 대칭되는 지방의 서원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退-溪’라는 이름 속에는 서울-중앙 -정부로부터 지방-향촌-서원으로 물러나는 ‘길을 뚫는다’라는 제작적이고 동사적 의미를 함장하게 된다. 역시 퇴계 향 약은 향촌을 자율적으로 ‘정치’하기 위함이다. 20 이황,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 21 이욱, “퇴계의 서원건립 활동에 나타난 유교 이념과 사회적 관계”, 서울대대학원, 종교학 석사학위논문. 1993, 40쪽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15 이 필요하였던 것이며 이 점이 퇴계 서원론의 커다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22 물러난 공직자의 재교육기관이자, 기술적 관료가 아닌 ‘정치가’를 길러내는 양성기구으로서의 서원은 퇴계가 건설하고자 했던 새로운 정치체제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흥미롭게도 중국의 명말청초 사상가 황종희(黃宗羲. 1610~1695)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속에 그려진 “학교” 항목의 지향과 퇴계의 서원에 든 정치적 의미에는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23 황종희와 퇴계는 시공간을 달리하지만, 국가의 위기에 대한 깊은 사색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비전을 ‘학교’(서원)를 통해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동질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본적으로 경학에 기초하여 새 체제를 도모한 유자라는 점에서 더욱 밀접하다. 조국의 멸망으로 절망의 벽에 부닥친 황종희의 경우와, 군신공치(또는 지치至治)의 이상이 부서지고 군주독재로 병든 국가를 마주한 퇴계의 경우는 그 절망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막힌 국가의 혈맥을 뚫는 길을 ‘학교 건설’을 통해 찾았다는 점에서는 동질적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처방이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학교를 중앙정부에서 벗어나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지방의 정치적 공간으로 삼았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드 베리가 적절하게 지적했듯, “황종희는 서원을 광범위한 공공교육과 민중교육 제도의 참된 모델로 삼고자 했다. 국가에 의해 유지되면서도 모든 중앙집권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보편적인 공공 교육체계의 구상을 전개했다. 서울과 시골에도 모두 학교를 세워야 하며, 모든 학교들은 위로부터의 감독과 통제를 받지 않고 각 학교 나름대로 자주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는 황종희 학교론은 퇴계의 서원론과 다를 바없다. 나아가 서원의 비전을 <성학십도>를 통해 군주에게 통첩하고, 요구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새로운 학교는 ‘새로운 정치’, 곧 ‘미래의 국가를 의미한다’는 점에 주의할 때 더욱 그러하다. 니체 연구자의 다음 비평은 학교를 통해 병든 국가를 치유하려는 퇴계의 의도를 해설해준다. 한 사회가 자신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커다란 위기이다. 교육의 목표가 미래 주체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면 정치의 목표는 그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24 22 정만조, <조선의 서원연구>, 집문당. 65쪽 23 황종희는 ‘학교’란 공중(公衆)이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정치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로서도 기능해야 한다고 믿었다. (드 베리, <중국의 ‘자유’ 전통>, 159~161쪽.) 24 고병권,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 123쪽 16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1 여기서 <성학십도> 열 개의 그림 가운데 세 개가 학교에 대한 것임에 주의하자. ‘소학도’, ‘대학도’ 그리고 ‘서원도’(원명은 ‘백록동규도’)가 그것이다. 유교 사상의 핵심은 배움이요, 유교 국가는 학교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이것은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에 압축돼있다. 당시 문제는 학교의 변질과 배움의 타락에서 비롯했다고 퇴계는 판단한 것이다. 이에 소학교를 고작 글이나 암기하는 곳이 아니라 제 몸을 수련하는 마당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뜻을 ‘소학도’에 담았다. 또 고시 공부 장소로 타락한 대학을 주체적인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비전을 ‘대학도’에 담았다. (사화의 원인이 대학, 즉 성균관의 타락 때문이라고 퇴계는 확신했다) 핵심은 ‘서원도’에 있다. 새 문명의 꿈이 여기 담겨있다. 서원은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를 기르는 곳이 아니다. 그런 기능은 소학과 대학으로 충분하다. 서원은 국가와 정치의 의미, 인간과 사회의 근원을 질문하고 성찰하는 인문학교다. 즉 서원은 국가의 바깥에 위치한다. 퇴계는 권력으로부터 거리 두기와 학문의 자유, 자율과 자치를 내내 강조했다. 서원들 대부분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자리한 것도 까닭이 있는 것이다. 처방전⓷: 사람이 변해야 한다 - 내가 변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克己復禮) 유교 정치학의 본령은 ‘나의 변화’가 세상의 변혁을 이끄는 단서라는 사실에 있다. 애당초 “내가 변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克己復禮)라는 전망이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외려 내가 먼저 행해야 한다”(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행동강령은 퇴계가 자발적으로 솔선수범하여 자기 수양의 길을 닦는 심성 공부에 뛰어든 것을 해명한다. 즉 퇴계의 심학은 결코 철학 공부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덕성을 배양하여 거기서 발현한 ‘덕력’(德力)으로써 사람과 국가를 치유하려는 유교 본령의 경학적 실천이다. 유교적 인간(군자)이란 자신이 먼저 문제의 한 가운데 뛰어들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실존적 행위자’, 또는 ‘첫번째 행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점을 공자는 선지로지(先之勞之)25 즉 솔선수범하는 자가 정치가라는 말로써 요약한 바 있다. 퇴계는 이점에 충실했25 子路問政. 子曰, “先之勞之.” (논어, 13:1)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17 다. 조광조 연구를 통해, 뜻만 높은 젊은 선비들의 부족한 역량이 개혁의 걸림돌이 되어, 나라의 병증을 더욱 깊게 하고 또 죽음을 자초한 화근을 인식한 이상, 이점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것이 단순히 제도의 개선과 기관의 개설로 이뤄질 수는 없다는 실존적 사태를 직시했다. 그 변화는 스스로의 묵묵한[訒]26 실천을 통해 실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즉 진정한 치유는 외부에 요구하거나, 신비한 처방이나 혹은 기묘한 약재를 얻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치유된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니체의 말이지만, “의사여, 그대 자신부터 고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대의 환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 환자에게 최상의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27 이 말은 퇴계의 자기수양=국가구제의 등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역시 이것은 퇴계가 왜 자기 행동에 대한 광고나 정당화 노력을 언설로 표현하지 않고 (상소문이나 시무책으로 표출하지 않고), 묵묵하게 골짜기로 퇴거하여 서당을 차리고 공부하며 스스로를 수련하고 변모한 이력의 해명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점을 잘 보아야 한다. 즉 그는 철학을 한 것이 아니라 본인도 가보지 못한 길을 유교 경학의 지도를 따라 탐색했고, 그 과정에서 몸소 변화를 체험하였으며 그 결과를 체현함으로써 주변을 치유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예던 길 여기 있네”라는 시 구절은 선현들의 길을 따라 걸으며 실제로 변모를 겪은 후 터져나온 게송으로 읽혀야 한다.28 그는 공자와 맹자가 그린 지도를 주희의 해석을 믿고 몸소 걸어 몸과 마음의 변화를 실제로 체험했다. 그 결과 그 뒤를 많은 사람이 좇아왔고 또 흠모하였다.(권위의 발생: 퇴계의 등짝에 정치적 힘이 모여들었다고 표현할 수 있으리라) 이 정치적 힘(authority)이 서울로 전파되었을 때, 국가는 그의 힘을 느끼고 손을 내민 것이다. 유자인 그는 자기변화의 경험을 국가 질환의 처방전으로서 군주에게 전수하였다. 이것이 <성학십도>다. <성학십도>의 바탕에는 군주는 국가의 의사(醫師)이며, 군자는 또 군주의 의사라는 전통적 인식이 깔려있다. (탕임금에게 이윤이며, 제환공에게 관중이 대표적이다)29 역시 군주의 자기-치유 경험이 나라 사람들의 모델이라는 의료철학(정치철학)이 함께하고 있다.30 탓과 원인을 26 司馬牛問仁. 子曰, “仁者, 其言也訒.” (논어, 12:3) 27 니체, “베푸는 덕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28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어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니 아니 예고 어이 리.” (이황, ‘도산십이곡’ 중 제9곡) 29 湯之於伊尹, 學焉而後臣之, 故不勞而王; 桓公之於管仲, 學焉而後臣之, 故不勞而覇.(맹자, 4:2) 30 맹자, 말씀하시다. “조정의 소인배들은 낱낱이 허물할 것이 없고, 임금의 정책들도 일일이 흠잡을 것이 없다. 오직 대인大人만이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 임금이 인仁하면 불인할 사람이 없고 임금이 의義로우면 의롭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며, 임금이 바르면[正] 바르지 않을 사람이 없으리니, 한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안정되는 것이 다.”(맹자, 7:20) 18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1 외부에서 찾는 눈길을 되돌려 자기 몸과 마음에서 발견하고, 발굴하여, 발현하는 과정만이 올바르고 유일한 국가치유의 길이라는 것이다. (성리학자들의 상소문이 결국 ‘마음’의 주제로 귀결하는 까닭이기도 하다.31) 여기서 유교 정치학의 기본 개념이 마음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이점을 외면하고 제도나 군사, 무력에서 정치를 찾는 작업은 각주구검의 오류를 저지른다. 나아가 퇴계의 <성학십도>가 마음과 성찰, 본성과 함양을 논한다고 하여 그것이 군주 일개인의 성인되기 프로젝트가 아님도 주의해야 한다. 군주 스스로 자기 변화를 체험하고 현시할 때만이 참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4. 치유된 나라: 순환시스템 - 대지는 이제 치유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대지의 주변에는 이미 새로운 향기, 치유를 가져오는 새로운 향기가 감돌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 (니체)32 건강을 회복한 국가는 중앙과 지방, 조정과 서원 사이의 ‘진출-퇴장이 연속적으로 순환하는’(退而進, 進而退) 나라다. 퇴계는 조정에 나아가 정치를 행하다가 뜻에 맞지 않으면 (또는 능력에 부치면) 스스로 물러나 서원에서 학문을 닦고, 또 출세하였다가 다시 서원으로 물러나는 순환구조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것은 <논어>에서 지적한 “사이우즉학, 학이우즉사(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의 제안을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서원 건설은 경학적 정당성을 확보한다.33 건강을 회복한 새로운 국가 모습을 퇴계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대신(大臣)은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 소신(小臣)은 일도 않고 공연히 녹만 먹는 허물이 없게 되어, 현명한 이가 그 자리에 앉고 능력 있는 이가 그 직책을 맡습니다. 그리하여 충성심을 떨쳐 능력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어 조정[朝] 31 “마음에 관한 교설은 주희 사상의 매우 중요한 주제로서 그의 경서 해석이나 임금에게 올린 상주문(上奏文_에서도 두드 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드 배리, <중국의 ‘자유’ 전통>, 48쪽) 32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베푸는 덕에 대하여’, 135쪽 33 한편 퇴계가 지방 공동체[鄕村]의 자율적 운영을 서원 건설과 연계시켰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향약과 서원은 그의 ‘사회학’이나 ‘교육학’의 주제만이 아니라 그의 정치학의 또 한 축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향약·향규를 제정하고 각 마을 을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노력을 실제적 정치 활동으로 보았다. (이황, “향립약조(鄕立約條)” 참고. 이점은 따로 논하기로 한다.)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 19 에선 좋은 정치를 이루게 되고, 지능이 미치지 못하는 자는 재야[野]에 물러가 있도록 허락하여 자기 분수대로 편안히 살며, 제 노력으로 먹고 또한 예의염치를 지킵니다. 이것이 옛적에 현(賢)과 우(愚)가 각기 제 자리를 얻고 예양(禮讓)이 행해져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까닭입니다.(이황)34 진이퇴, 퇴이진(進而退, 退而進)의 순환이35 제도화되면 인재의 적재적소 배치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이에 따라 국가의 질환(적체와 사화)은 치유되리라는 전망이다. 유능자는 조정에 남고 무능자는 물러나며, 물러나서는 향촌에 머물거나 수련하여 다시 출세하는 나선형적 순환구조야말로 퇴계의 치국(치유된 나라) 비전이다.36 비유하면 조선 중기 국가 질환은 동맥[出路]은 팽창해 있고 정맥[退路]은 막혀 발생한 총체적 마비 증상이었다. 그는 퇴로를 몸소 시술하여 중앙(심장)과 지방(말절), 조정과 서원의 순환을 확보함으로써 국가를 건강상태로 이끈 것이다. 퇴계의 정치적 시술은 중앙[朝廷]에 국한되었던 정치영역을 지방에까지 넓혀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했다는 데도 의미가 있다. 그로 인해 조선의 정치는 서울의 정부에서 정책을 결정하면 지방에선 집행되는 소수의 권력적 행위에서, 전국적 차원에서 다수의 (인민 전체는 아니지만) 참여를 도모하는 광역적 형태로 확대하는 기틀을 형성하였다. (양란 후, ‘산림山林 정치’는 일종 의회의 역할을 했다. 그 단서가 퇴계의 ‘퇴로 개척’에서 비롯했다.) 5. 결론: 퇴계는 혁명적이다 결론적으로 퇴계의 물러남은 소극적인 은둔의 길이 아니라 적극적인 ‘새 길의 개척’이었다. 그의 꿈은 능력으로 조정에 나아갔다가(進), 자리가 없으면 서원으로 물러나오고(退), 재교육을 통해 능력을 갖추면 또 조정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물러나오는, 그런 순환 시스템이었다. 34 이황, <무오사직소(戊午辭職疏)> 35 “세상에 나가 벼슬할 때는 오로지 국사를 걱정하고, 그 외에는 항상 한 걸음 물러서고 한 계단 낮추어 학문에 전념하 며···· ‘한 번 나아가고, 한 번 물러나는 데’(一進一退) 오로지 학문으로써 주를 삼아야 한다.”(<退溪先生文集>, 卷16, “答奇明彦”, 5쪽) 36 “이미 벼슬길에 나와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허락했다면 어찌 물러날 뜻만을 견지할 수 있겠으며, 도의를 따르기로 뜻을 세웠다면 어찌 출사할 줄만 알고 퇴거할 줄 모를 수 있겠는가. ‘벼슬하다가 힘이 남으면 학문하고, 학문하다가 힘이 남으 면 벼슬하라’(子夏曰,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 논어, 19:13)는 말씀을 처신의 기준으로 삼고 의리에 비춰 올바른가를 잘 살펴야 한다.”(<답기명언>) 20 | 제4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 자료집1 이 구조가 뿌리 내릴 때라야 사화와 같은 국가위기가 극복되고 유교문명을 꽃피울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이것은 곧 <논어>와 <맹자>에서 제시한 정치모델의 16세기 조선식 해석이었으며, 또 그는 이 정치적 실험에 성공했다고 판단된다. 퇴계가 남긴 정치적 언설은 적지만 그의 정치적 행동은 조선의 정치 구도를 재편했다는 점에서 개혁적(reformaive)이기를 넘어 혁명적(radical)이며37, 유교 이념의 해석자(철학자)이기를 넘어 정치체제를 재편한 실천자(치유자)라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 그는 결코 산새[山禽] 가 아니라 혁신 정치가였다. (끝) 37 혁명revolution의 사회과학적 의미는 체제의 전면적 변동, 예컨대 프랑스 대혁명이 모범이다. 정치적으로 왕정(봉건제)을 민주제로, 사회적으로는 공동체를 개인 사회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로 변화하는 것을 이른다.(이런 관점은 서구-근대, 시장자본주의를 역사의 완성으로 인식하는 서구 사회과학의 역사적 관견이 들어있다.) 한편 유교에서 혁명은 폭군의 정치를 왕도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이른다. 이른바 걸주(桀紂)의 폭력적 지배를 정벌하여 왕도정치로 회복한 탕무(湯武)의 혁명이 대표적이다. 퇴계가 조선을 변화시킨 것은 사회과학적 의미에서 혁명은 아니나 근본적 혁신이라는 점에서 radical transformati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주역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