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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石壕吏/두보
    한국한시/한국한시협회 2023. 3. 10. 21:17

    菩提寺禁裴迪來相看說逆賊等凝碧池上作音樂供奉人等擧聲便一時淚下私成口號誦示裴迪

    보리사에 갇혀 있는데 배적이 나를 보러 와서는 역적 안녹산의 무리가 응벽지에서 음악 판을 벌였는데 공봉인들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다가 일시에 눈물을 떨어뜨렸다고 하였다. 그래서 몰래 즉흥시를 지어 배적에게 읊어서 보여주다

     

    萬戶傷心生野煙 百官何日再朝天

    秋槐葉落空宮裏 凝碧池頭奏管絃

     

    만백성 집집마다 마음 아파할 때 들판의 연기가 이니

    백관은 언제나 다시 천자를 뵐까

    가을 홰나무 잎이 빈 궁중에 떨어지는데

    응벽지 가에서는 관현을 연주하네

     

    지덕 원재 8월에 지은 시. 반군이 장안에 입성했을 때 일부러 약을 먹어 설사를 하고 벙어리 시늉을 했어도 낙양에 압송되어 보리사에 구금됨. 이 때 배적이 찾아와, 안녹산이 응벽지에서 연회를 열어 이원梨園의 악공들에게 연주를 명하자 악공들이 연주를 시작하면서 일시에 흐느끼니 칼로 위협하며 강요하였는데, 뇌해청雷海靑이란 악공은 악기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서쪽을 향해 통곡하며 저항하다가 처절한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음.

     

    供奉(공봉) - 여기서는 이원제자梨園弟子 등의 악공을 말함

    野煙(야연) - 전화戰火에 의한 연기

     

    口號又示裴迪

    즉흥시를 지어 다시 배적에게 보여주다

     

    安得捨塵網 拂衣辭世喧 悠然策藜杖 歸向桃花源

    어떻게 하면 티끌세상의 그물을 버리고

    옷을 털고서 속세의 소란함을 떠나

    한가로이 명아주 지팡이 짚고

    도화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塵網(진망) - 世網 도연명 <歸園田居>시에 “少無適俗韻, 性本愛丘山. 誤落塵網中, 一去三十年(어려서부터 세속에 어울리는 취향이 없었고 성품이 본시 자연을 좋아했는데, 잘못 티끌세상의 그물에 떨어져 단숨에 삼십년이 지났다)”이라는 말이 있다

     

    路逢襄陽楊少府入城戱呈楊四員外綰

    성으로 들어가는 양양 양소부를 길에서 만나, 원외랑 양관에게 장난삼아 드리는 시

    寄語楊員外1 山寒少茯苓2

    歸來稍暄暖3 當爲斸靑冥4

    翻動龍蛇窟5 封題鳥獸形6

    兼將老藤杖7 扶汝醉初醒

     

    양원외에게 안부 전합니다

    산이 추워서인지 복령이 적게 나옵니다.

    돌아와서 조금 따뜻해지면

    당연히 그대 위해 푸른 소나무 밑을 파야겠지요.

    용사굴을 뒤집어 엎어서라도

    짐승모양 최상품을 포장해 올려야지요.

    아울러 오래된 등나무 지팡이도 보낼테니

    술에서 막 깨어나실 때 부축이나 하시구려.

     

    이 시는 건원 원년에 두보가 화주에서 동도인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양소부를 만나게 되어 양관에게 보낸 것인데, 일종의 편지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 시의 원주原注에 “나 두보가 화주로 갈 때에 원외랑인 양관에게 복령을 보내주겠다는 약조를 하였다.(甫赴華州日, 許寄員外茯苓.)”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두보는 그 약조를 지키지 못하다가, 이제 화주를 잠시 떠나면서 길에서 양소부를 만나게 되자 그 약조가 생각나서 양관에게 반드시 복령을 보내줄 것과 아울러 화주 특산인 등나무 지팡이까지 보내줄 것이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한 것이다. 양소부의 구체적인 성명은 미상인데, 소부란 현위縣尉의 별칭으로 말단 관직이다. 양관은 화음사람으로 숙종이 즉위했을 때 반란군의 포위를 뚫고 행재소에 당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 사훈원외랑 등司勳員外郞의 관직을 맡았던 사람이다.

    1 寄語(기어) - 말을 전하다. 즉 양소부를 통하여 양관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이다. 楊員外(양원외) - 양관楊綰을 가리킨다. 원외는 원외랑員外郞을 말한다.

    2 茯苓(복령) - 버섯종류로 오래된 소나무의 땅 속 뿌리에 기생하며, 겉은 흑갈색이고 주름이 많고, 약재로 쓰인다. 2월과 8월에 캐서 그늘에 말린 뒤 사용다고 한다. 山寒(산한) - 산이 차다. 이 구에서의 산은 두보가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있던 화주의 산을 지칭하는데, 화주는 복령의 주요 산지이다.

    3 歸來(귀래) - 돌아오다. 두보는 화주에서 동도 낙양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다음에 화주로 다시 돌아올 상황을 상정한 것이다. 두보는 건원 원년 겨울 화주를 떠나 동도로 갔다가, 다음해인 건원 2년 봄 다시 화주로 돌아온다. 稍(초) - 조금. 약간. 暄暖(훤난) - 온난하다. 온화하다. 날씨가 따뜻해지는 것을 말한다.

    4 斸(촉) - 베다. 찍다. 여기서는 땅을 파는 것을 말한다. 靑冥(청명) - 푸른 하늘. 여기서는 푸른 소나무나 소나무 숲의 빛깔을 가리킨다. 무성한 노송의 아래에 복령이 있는데, 하늘색이 맑게 개었을 때 소나무 아래에 푸른 기운 한 줄기가 나타날 때 땅을 파면 복령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곧 청명을 ‘파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청명이란 것이 소나무를 두고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5 翻動(번동) - 뒤집다. 뒤집어 엎다. 여기서는 복령을 찾기 위해 소나무 밑을 파헤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龍蛇窟(용사굴) - 용과 뱀이 있든 굴. 여기서는 복령이 있는 땅 속을 가리킨다.

    6 封題(봉제) - 포장을 하고 겉에 이름을 쓰다. 여기서는 양관에게 보낼 복령을 준비하는 미래의 일을 미리 서술한 것이다. 鳥獸形(조수형) - 새나 짐승의 모양. 여기서는 복령의 외양을 묘사한 것으로, 복령 중 고급품질은 조수의 모양을 닮았다고 한다.

    7 兼將(겸장) - 함께 보내다. 老藤杖(노등장) - 오래된 등나무 지팡이. 복령과 함께 화주의 특산물이다.

    # 율시로써 짧은 편지를 대신한 것인데 꾸밈없이 질박하면서 멋이 느껴진다. ‘훤난暄暖’은 복령을 채취할 때의 날씨이다. ‘청명靑冥’은 소나무 숲의 색깔이다. ‘용굴龍窟’은 뿌리를 맺은 곳이 깊다는 것이다. ‘조수鳥獸’는 특이하게 모양을 맺은 것이다. ‘등장藤杖’은 또한 화주에서 나는 산물이다. 양관이 필시 술을 좋아하기에, 미련에서 농담을 한 것이다.

     

    石壕吏

    석호의 관리

     

    暮投石壕村1 有吏夜捉人2

    老翁踰牆走3 老婦出看門4 (眞部 평성 元운 眞운)

    吏呼一何怒5 婦啼一何苦

    聽婦前致詞6 三男鄴城戍7 (魚부 거성 遇운 상성 麌운)

    一男附書至8 二男新戰死9

    存者且偸生10 死者長已矣11(支부 상성 紙운 거성 寘운)

    室中更無人 惟有乳下孫12

    有孫母未去13 出入無完裙14(眞부 평성 眞운 文운 元운)

    老嫗力雖衰 請從吏夜歸

    急應河陽役15 猶得備晨炊16(支부 평성 支운 微운)

    夜久語聲絶 如聞泣幽咽17

    天明登前途 獨與老翁別 (眞부 입성 屑운)

     

    저물어 석호촌에 투숙하였는데

    한밤중 관리가 사람을 잡으러 왔네.

    영감은 담장 넘어 달아나고

    할멈이 나가서 문을 지키네.

     

    관리의 호령은 어찌 그리 사납고

    할멈의 울음소리는 어찌 그리 고통스럽던지.

    할멈이 나가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세 아들이 모두 업성에 수자리 나갔는데

    한 아들이 부쳐온 편지에

    두 아들은 최근 싸움에서 죽었답니다.

    남은 자는 그래도 구차하게 살 수 있겠지만

    죽은 아들은 아주 끝난 것이지요.

    집에는 다른 사람이라곤 없고

    오직 젖먹는 손주녀석뿐

    손주가 있어 어미는 떠나지 못했지만

    나고 들 때 입을 마땅한 옷 한 벌 없으니

    늙은 이 몸 힘은 비록 쇠하였어도

    나으리를 따라 밤 도와 가기를 청하오니

    서둘러 하양의 부역에 응한다면

    그런대로 새벽 밥은 지을 수 있을 거외다.”

     

    밤 깊어 말소리는 끊겼으나

    숨 죽여 오열하는 소리 들리는 듯

    날 밝아 길 떠날 적에는

    오직 영감과 작별하였네.

     

     

    이 시는 건원 2년 두보가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가는 도중 석호촌에 하룻밤 머물며 지은 것이다. 당시 전란의 와중에서 일반 백성들이 겪는 부역의 고충을 한 할멈의 육성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서둘러 하양의 부역에 응한다면’이라는 구절을 보건대, 건원 2년 아홉 절도사의 군대가 궤멸당하고 곽자의郭子儀가 황하의 다리를 끊어 남은 군대로 동경을 보호할 때의 작품이다.

     

    1 投(투) - 투숙하다. 의탁하여 머무르다. 石壕村(석호촌) - 석호촌. 지명. 구체적인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섬주陝州의 석호진石壕鎭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2 捉(착) - 붙잡다. 이 구는 관리가 부역에 내보낼 백성들을 잡으러 나온 것을 말한다.

    3 踰牆走(유장주) - 담을 넘어 달아나다. 부역에 나가지 않기 위해 달아난 것이다.

    4 出看門(출간문) - 나가서 문을 지키다. ‘出門看’으로 된 판본도 있다.

    5 一何(일하) - 어찌 그리. ‘一’은 어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6 前致詞(전치사) - 나가서 말을 하다. 이 이하는 할멈이 관리에게 자기 집안의 사정을 아뢰는 것이다.

    7 鄴城(업성) - 업성. 지명. 당시에 곽자의가 이끈 아홉 절도사의 군대가 상주相州에서 안경서安慶緖를 포위하였는데, 일사불란하게 통제가 되지 않아서 결국 아홉 절도사의 군대가 모두 패하여 돌아갔다. 업성의 수자리라는 것은 장정을 차출하여 안경서를 포위한 일을 말하는 것이다.

    8 附書至(부서지) - 편지를 보내 오다.

    9 新戰死(신전사) - 최근 싸움에서 사망하다. 최근 싸움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업성에서의 패배를 가리킨다.

    10 存者(존자) - 산 사람. 且(차) - 그럭저럭. 偸生(투생) - 구차하게 살다. 생명을 아끼다. 즉 살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11 長已(장이) - 영원히 끝나다.

    12 惟(유) - 오직. 乳下孫(유하손) - 젖먹이 손자.

    13 母(모) - 손자의 어이. 할머니의 며느리이다.

    14 無完裙(무완군) - 제대로 된 치마가 없다.

    15 河陽(하양) - 낙양 부근의 지명. 곽자의의 군대가 패하고 나서 다시 하양을 수비하였다.

    16 晨炊(신취) - 새벽밥을 짓다.

    17 幽咽(유열) - 울음을 참아 흐느끼는 소리. 이것은 시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며느리가 우는 울음소리이다.

     

    (참고) 郭子儀

    40세 정도에 역사서에 처음 이름이 나오고 안사의 난이 일어난 59세 이후에 유명해짐. 현종 숙종 代宗 德宗 4대를 섬기다가 84세에 사망하여 대기만성의 전형임. 그가 황제와 성이 다름에도 汾陽郡王의 작호를 받아 흔히 곽분양이라 칭호됨.

    난리로 빼앗긴 장안을 두 번 수복하고 안사의 난과 토번의 침입을 평정하는 등 수많은 공을 세워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가 150년을 더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곽자의 때문이라는 평을 역사가에게서 받음

    환관 어조은과 정은진의 견제와 모함을 받아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고, 심지어 부친의 묘과 훼손되는 일 등도 있었지만 이 모든 위기를 그의 신망으로 극복함. 9절도사의 패전도 사실은 황제와 환관 그리고 다른 절도사의 잘못이었지 곽자의 탓은 아니었음. 회흘이 침입했을 때 갑옷과 창을 벗고 적진에 가니 평소 그를 존경하던 회흘이 감복하여 화친이 성사됨.

    큰 공과 명성으로 황제 및 간신배의 질시와 견제를 받아 여러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그럼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겸양의 도를 실천했기 때문이고 사람 보는 눈도 있었기 때문임. 일례로, 당시의 권력자인 노기盧杞가 방문했을 때 가족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혼자서 만났는데, 이는 노기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 가족 중에 무심코 티를 내는 사람이 있게 되면 음흠하고 속좁은 노기가 훗날 가족을 해할까 염려해서였음. 안녹산의 난 때 곽자의와 함께 양대 명장으로 꼽히는 李光弼은 원래 곽자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를 후임으로 추천하여 이광필이 그에게 감복함.

    아들 곽애가 대종의 딸인 승평공주와 결혼했는데 곽자의의 생일 날 공주가 아프다는 핑계로 며느리의 도리를 하지 않자 곽애가 “이 나라는 우리 아버지 때문에 보존되었고 우리 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황제가 될 수 있다”고 폭언을 함. 공주가 이를 대종에게 그대로 고자질하였고 이 사실을 안 곽자의는 아들을 엄하게 문책하고 황제에게 죄를 청하자, 황제는 “애들 일은 들어도 못들은 척하고 말을 꺼내지 않아야 한다”면서 문제를 삼지 않아 ‘장롱작아裝聾作啞’라는 사자성어가 생김. 이 사실을 대종이 곽자의를 절대적으로 신임했음을 알려줌.

    만년에 집안 식솔이 수천명이었고 저택의 크기는 황궁 다음이었음. 아들 8명과 사위 7명이 모두 높은 벼슬을 하였음. 그는 훗날 민간에서 ‘福星’, 또는 ‘財神’으로 숭배되고, 우리말에도 ‘곽붕양팔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복을 누린 사람으로 여겨짐

     

    石壕吏/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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