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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를 꿈꾸다 두 번 죽은 홍영식, 그가 여주에 잠들어 있다[박종인의 땅의 歷史]
    역사/한국사 2023. 2. 22. 22:11
    경기도 여주 문장마을에는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인 홍영식 무덤이 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과 서광범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홍영식은 고종을 수행해 민비와 고종 부부 측근인 무당 진령군의 북묘(北廟)로 갔다가 그곳에서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살해됐다.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에 따르면 홍영식은 살해된 뒤 다시 한번 토막이 나고, 가족이 수습한 그 시신 또한 부관참시됐다. 근대를 지향했던 한 지식인에게 닥친 가장 전 근대적인 죽음이었다./박종인 기자
     

    * 유튜브 https://youtu.be/mX0M5_hZUyg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만(野蠻)의 전사(前史)

    1885년 여름, 3년 전인 1882년 여름 임오군란 때 수괴로 낙인찍혀 청나라로 끌려간 대원군이 귀국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종-민씨 척족정권은 최고 실권자 민영익을 비롯해 여러 사신을 보내 귀국 저지를 시도했다. 문의사(問議使)로 천진에 파견된 김명규는 “대원군이 귀국하면 반드시 화란이 일 것”이라며 결정 번복을 요청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민씨들이 변을 도모하여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그런 일 없다”고 반박했다.(‘청계외교사료’, ‘1885년 음 7월 15일 이홍장과 김명규 필담록’. ‘흥선대원군 사료휘편’ 1, 현음사, 2005, p627) 8월 27일 대원군이 귀국했다. 아들 고종은 남대문까지 나가서 아버지를 영접했다. 대원군은 청나라 군사 40명 호위 속에 옛집 운현궁으로 돌아갔다.(1885년 음 8월 27일(이하 음력) ‘고종실록’)

    바로 다음 날 고종 정권은 임오군란을 주도했던 김춘영과 이영식을 능지처사형에 처했다. 두 사람은 3년째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며 공범 이름을 자백해왔던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지금 서울시청 자리에 있던 군기시에서 토막 나 죽었다.(1885년 8월 28일 ‘일성록’ 등) 토막들은 며칠 동안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 공사 포크(Foulk)가 본국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이 형이 집행된 날짜는 양력 10월 5일, 즉 음력 8월 17일이다.(1885년 10월 14일 ‘조지 포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Korean-American Relations’ vol 1, no.237, p237.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3, 에이치프레스, 2020, p710, 재인용) 어느 쪽이든, 남대문에서 아들을 만나고 운현궁으로 돌아간 대원군 코에 그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다는 뜻이다. 대원군을 귀국시켰던 이홍장은 “충효를 모두 저버리는 소행”이라고 평했다. 대원군을 수행했던 사람들 10여 명은 공포 속에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다. 9월 1일 대원군은 운현궁 대문을 잠그고 바깥 출입을 멈췄다.(‘청광서조중일교섭사료’ 407. 이홍장 서신. 앞 ‘사료휘편’, pp.680, 683) 9월 10일 고종 정권은 ‘대원군 존봉 의절’을 만들어 대원군을 운현궁에 유폐시켜버렸다.(1885년 9월 10일 ‘고종실록’)

    서울 조계사 옆 우정총국 체신박물관에 있는 홍영식 흉상./박종인 기자

    근대인(近代人) 홍영식과 갑신정변(1884)

    동서를 막론하고 전(前)근대는 야만의 시대였다. ‘법치보다 덕치(德治)’ ‘시스템보다 사람’을 앞세워 권력을 행사하던 시대였다. 사람과 덕망. 부드럽고 유연한 개념이지만, 현실에서는 시스템과 법을 초월한 권력은 대개 야만스러웠다.

    약체 국가 남송 때 나온 성리학으로 도덕 정치를 한 조선도 그랬다. 500년 도학 정치 결과가 가난과 부패였고 교류하는 외국이라곤 오직 역대 중국밖에 없었다. 17세기 조선에서 13년을 살았던 네덜란드 사람 하멜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인은 전 세계에 나라가 12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옛 기록에 나라가 8만4000개라고 적혀 있지만 태양이 한나절 동안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 비출 수 없기 때문에 지어낸 얘기라고들 했다.”(‘하멜표류기’, 서해문집, 김태진 역, 2003, p134)

    그 가난과 부패를 끊고 사대 본국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가 갑신정변이다. 정변 목적은 안으로는 가난의 진앙인 부패 민씨 정권 타도, 밖으로는 그 민씨 정권을 받쳐주는 사대 본국과 절연이었다. 이를 위해 준비한 정령 14개조에서 중국과 속국 관계 절연이 그 첫째 강령이었다. ‘조공하는 허례는 폐지할 것. 문벌을 폐지하고 토지법을 개혁하고 내시부를 혁파하며 탐학한 관리를 처벌하고 경찰 제도를 도입하고 군사 제도를 혁신하며 국가 재정을 단일화하고 정승 회의를 정례화하고 그 법령은 반드시 공포할 것, 그리고 불필요한 관청은 모두 없앨 것.’

    서울 북촌에 살던 홍영식은 이웃집에 사는 개화파 지식인 박규수로부터 근대와 개화를 배웠다. 갑신정변 주역들은 모두 연암 박지원 손자인 박규수 문하생이다. 박규수 집터는 지금 헌법재판소이고 홍영식 집은 그 북쪽에 붙어 있었다. 훗날 신채호는 그 수업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박규수가 지구의를 한 번 돌리더니 김옥균에게 가로되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된다. 오늘에 어디 정한 중국이 있느냐?” 그 말에 크게 깨닫고 김옥균이 무릎을 치고 일어섰더라. 이 끝에 갑신정변이 폭발되었더라.’(신채호, ‘지동설의 효력’, ‘룡과 룡의 대격전’, 기별미디어, 2016)

    1881년 고종이 일본으로 보낸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이 소화해낸 근대를 목격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83년 홍영식은 보빙사 부사(副使)로 정사 민영익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기절초풍할 근대 국가를 목격했다.

    1884년 초 귀국한 홍영식은 그해 겨울 곧바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타깃은 함께 보빙사로 갔다가 수구파로 돌아선 민영익이었고 목표는 개화와 독립이었다. 그리고 실패했다.

    1872년 1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진관에서 촬영한 이와쿠라 사절단 수뇌부(왼쪽). 가운데 대표인 이와쿠라 도모미는 서양 구두에 일본 전통 의상과 상투를 하고 있다. 한 달 뒤인 2월 26일 시카고에 도착한 이와쿠라는 상투와 전통 복장을 버렸다(오른쪽). 근대가 던진 충격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실세들로 구성된 이와쿠라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12개국을 순방하며 부국강병의 각론(各論)을 배웠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과 ‘동변군(童便軍)’

    매년 4월 22일은 ‘정보통신의 날’이다. 1884년 양력 4월 22일(음력 3월 27일) 귀국한 보빙사 홍영식이 제안해 근대 우편제도 관할 관청인 ‘우정총국’ 설립을 고종이 명한 날이다. 낙성식은 그해 10월 17일, 양력 12월 4일로 결정됐다. 2주 전인 양력 11월 19일 홍영식이 미국 공사 푸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빛을 가리는 물건은 깨뜨려서 사방을 밝혀야 한다.”(1884년 11월 19일 ‘윤치호일기’) 낙성식 날 정변이 터졌다. 정변은 실패하고 10월 21일 홍영식이 맡았던 우정총국은 폐쇄됐다.

     

    그가 깨뜨리려던 물건은 이런 것이었다.

    13년 전인 1871년 양력 12월 23일 일본 메이지 정부 수뇌급 관리 46명이 미국과 유럽을 향해 떠났다. 단장인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이라 한다. 이들은 1년 10개월 동안 서양을 돌며 근대를 몸과 눈과 두뇌로 목격했다. 그들이 본 근대, 그들이 배워야 할 근대는 보고서 ‘미구회람실기’ 100권에 낱낱이 기록됐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출항하기 2개월 전인 1871년 양력 10월 4일(음8월 20일) 고종이 주치의 격인 내의원(內醫院) 도제조 이유원에게 묻는다. “내가 열이 조금 있다. ‘동변(童便)’을 복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동의를 얻고 고종은 그날 밤부터 동변을 먹었다. 닷새 뒤 고종이 말했다. “동변을 닷새 먹으니 효과가 있다. 이제 이틀에 한 번씩 먹었으면 한다.”(1871년 8월 20일, 25일 ‘승정원일기’)

    국왕이 복용한 이 구급약 ‘동변’은 내의원에 상설돼 있는 ‘동변군(童便軍)’에게서 나왔다. 동변군은 약사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다. 내의원에 고용돼 매달 쌀 4두를 받고 국왕 행차 시에도 동행하는 ‘아이들’이다.(’육전조례’ 6, 예전 내의원 수가(隨駕) 등) 그러니까 ‘동변’은 조제약이 아니라 ‘아이 오줌’이다. 조선 왕실은 이를 제공하는 아이들을 법전에 규정된 ‘법정 관원’ 동변군으로 고용해 왔다.

    근대 이전, 동서를 막론하고 똥오줌 약재와 잔혹한 형벌을 가지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하지만 때는 온 지구가 근대를 다투던 19세기 후반이었다. 더군다나 이웃 일본이 그 근대 한복판을 휘젓고 다니던 시대에 조선 지도부는 똥오줌을 기꺼이 권하고 기꺼이 먹었다. 박규수에게 개화를 배우고 일본과 미국에서 근대를 목격한 홍영식에게는 두려운 풍경 아닌가.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홍영식은 목숨을 걸었다. 고종은 기꺼이 그 목숨을 빼앗았다.

    홍영식 두 번 죽던 날

    동지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홍영식은 고종을 수행해 북묘(北廟)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청나라 군사에 의해 피살됐다. 북묘에는 고종과 민비가 총애하는 무당 진령군이 살고 있었다.

    역모 조사가 마무리되던 1884년 음11월 26일 영동에 사는 선비 김병희가 상소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비록 죄를 인정하여 신속히 형을 더하여 시행하였으니[亟施加律·극시가율] 도망간 역적들 또한 끝까지 쫓아 체포하소서.”(1884년 11월 26일 ‘승정원일기’)

    노천에 버려진 시신에 추가 형을 집행했다는 뜻이다. 기록이 맞는다면 죽은 홍영식은 이날(양력 1885년 1월 11일) 이전 시신 능지형을 당했다는 말이다. 이는 1759년 영조가 정한 ‘역률(逆律) 추시(追施) 금지령’(1759년 8월 19일 ‘영조실록’)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행위였다. 역률 추시 금지는 역적이라도 이미 죽은 자는 소급해서 벌하지 못한다는 명이다. 영조는 ‘이를 따르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고 경고했고, 이 율법은 ‘대전통편’에 공식 규정됐다. 고종은 이를 무시했다.

    한 달 뒤 대사헌과 대사간이 합동으로 고종에게 이렇게 상소했다. “흉악한 자들은 모두 풀을 베듯 짐승을 잡듯이 죽여 근원을 철저히 없애야 한다.”(1884년 음12월 13일 ‘승정원일기’) 그러자 바로 그날 고종은 홍영식 가족들 또한 연좌해서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미 죽은 역적에 대한 연좌 처벌 또한 108년 전인 1776년 정조가 즉위와 함께 금지한 형벌이다.(1776년 9월 1일 ‘정조실록’) 고종은 이마저도 무시했다.

    그리고 의금부는 두 번 죽임당한 홍영식에게 재차 능지처사 형률을 가하겠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이를 윤허했다. 함께 붙잡혔다가 살해된 동료 최영식 가족에게 연좌 처벌 또한 허가했다. 망명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가족에 대한 연좌 처벌도 모두 허가했다.(1884년 12월 16일 ‘승정원일기’)

    10년 세월이 갔다. 1894년 양력 4월 14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 시신이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됐다. 그해 12월 27일, 양력으로는 1895년 1월 22일 고종은 갑오개혁정부 요청을 받아들여 마침내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과 능지처사형 폐지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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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홍영식은 지금 경기도 여주에 잠들어 있다. 딱 30년 살고 죽었다. 연좌법에 얽힌 후손들이 어렵게 경기도 광주에 유해를 모셨다가 이곳 여주로 이장했다. 비석도 없던 묘에는 1977년 당시 체신공무원 훈련소장 정규석이 비문을 쓰고 비석을 세웠다. 무덤 가는 산길에는 철쭉이 가지런하게 심어져 있다. 봄이면 찬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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