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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나무와 우영우의 홀로 서기/신종찬(시인, 수필가, 의학박사)좋은 글 2023. 1. 1. 22:30
[엠디저널] 중고등학생들이었던 우리는 팽나무 주막 툇마루에 앉아 땀을 식히며, 뜨거운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낙동강을 건너갈 준비를 했다. 빛바랜 툇마루 바닥은 소나무나이테가 도드라지게 드러났고, 부엌으로 향한 주막 나무문 빗장은 닫혀 있었다. 오후 햇살이 이끄는 대로 문짝 판자 사이로 부엌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렁에는 소반을 몇 개 뒤집어 얹어놓았고, 그 아래 탁주를 담는 것으로 보이는 양은 주전자가 걸려 있었다. 뒤란에서부터 초가집 주막을 뒤덮은 아름드리 고목 팽나무 가지에는 콩알만 한 빨간 열매들이 닥지닥지 달려 있었다.
요즘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때문에 팽나무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그 풍성하고 커다란 팽나무 밑에 서면, ‘홀로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넉넉함’이 무엇인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는 팽나무 노거수들이 많아, 여러 그루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비록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자태가 천연기념물에 못지않은 팽나무들도 무수히 많다.
한국과 중국, 일본이 원산지인 팽나무(彭木)는 우리나라 중남부지방의 해안가나 포구에 널리 자라고 있다. 특히 해안 여러 곳에서 방풍림으로 심어 줄지어 자라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다. 그래서 포구나무라고도 부른다. 소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팽목항(彭木港)도 바로 이런 곳이다. 팽나무는 전국에 분포하며 느티나무, 은행나무 다음으로 노거수가 많다고 한다. 특히 예천 용궁면 금남리 팽나무는 등기부에 땅을 3,500평이나 소유한 나무로 유명하다. 이 팽나무 당산나무를 황근목이라 하며 천연기념물 제400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사람들이 풍년제를 지내기 위해 쌀을 모아 땅을 마련하였고, 훗날 재산 다툼을 피하기 위하여 나무이지만 토지등기를 냈다고 한다. 인근에 있는 소나무인 석송령도 등기부에 재산을 가진 나무로 유명하다.
'소덕동 팽나무'로 알려진 경남 창원 동부마을의 나무
느릅나무 과인 팽나무는 잎만 봐서는 같은 과인 느티나무, 서어나무, 시무나무 등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특히 같은 노거수로 자라는 느티나무와는 멀리서 봐서는 구분이 안 된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팽나무는 느티나무보다 잎이 둥근 편이고 나무표면이 매끈한 점이 다르다. 느티나무는 표면에 껍질이 많이 붙어있어 매끈하지 못하고 덕지덕지 거친 편이다. 물론 가을로 접어들어 열매가 열린다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빨간 팽나무 열매는 느티나무 열매보다 훨씬 커서 콩만 하고 까먹을 수 있다. 느티나무 열매는 작고 딱딱하며 식용이 아니다.
우리 옛 문헌에서 느티나무에 대한 기록이나 문학작품은 많이 있으나, 팽나무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고 한다. 모양이나 쓰임새가 느티나무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다만 『산림경제(山林經濟/洪萬選)』에 실린 “소나무, 팽나무(彭木), 참나무에서 나는 버섯은 독이 없다”라는 내용이 전해온다. 비록 기록이 별로 없다지만 서민들의 친근한 벗으로 남아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란 바로 딱총놀이의 좋은 재료로 팽나무의 열매인 팽(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딱총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콩알이 들어갈 만한 긴 대나무 통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통의 앞쪽을 물에 적신 닥종이(한지) 덩이로 막고 뒤쪽도 같은 종이덩이로 막은 뒤, 대나무 통 안에 들어갈 만한 나무를 통 뒤에 박은 후, 오른손으로 나무를 갑자기 쳐 넣으면 공기 압력에 의해 앞에 있던 닥종이 마개가 “딱”하는 소리를 내며 멀리까지 날아간다. 이때 종이덩이 대신에 콩을 쓸 수도 있고, 팽을 쓸 수도 있다. 중국에서도 이 놀이를 해왔는데, “팽”하고 날아간다 하여 이 놀이를 팽총놀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얻어진 이름이 바로 팽나무이다. 콩은 값이 비싼 곡식이니 아이들 놀이는 주로 팽으로 했다한다.
배도 없는 포구에/ 손님도 없는 주막,/ 닫힌 부엌 문 틈새로
가을 햇살들이 왁자지껄 찾아들어/ 시렁에서 소반 내려놓고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부뚜막 왕소금을 작은 접시에 담아
툇마루에 한 상 차려 놓으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팽나무 영감
드넓은 백사장을 바라보며 걸타 앉아/ 지나가는 강바람이 권하는 대로
금방 한 주전자 다 비워버리곤 했다
-중 략-
내가 할 말 다 하면/ 백사장 모래알들 보다 더 많다며,
팽나무 영감은 제자리로 돌아가
말없이 그냥 주막 뒤에 서 있기로 했다한다
「팽나무 주막/신종찬」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제7~8회 ‘소덕동 이야기’의 촬영지는 경남 창원시 의창구에 있는 동부마을이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우영우는 자폐증이지만 천재적인 두뇌로 법률조항들을 척척 외우며, 남들과 다른 발상으로 사건을 해결하여 시청자들은 그의 연기에 빠져들게 한다. 지역 개발을 한다는 명목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이 팽나무 거목을 구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우영우변호사는 생모인 태수미변호사와 이 팽나무 밑에서 극적으로 만난다.
그 후 생모는 직접 우영우의 입을 통해 ‘아버지가 우광호라는 사실과 당신은 나의 어머니’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바로 그때 우변호사는 팽나무가 천연기념물 지정될 거 같다는 문자를 받는다. 그 사실을 생모에게도 알려주고 사건은 승리가 확정된다. 하지만 생모가 듣고 싶은 얘기는 지금 사건에 관련된 얘기는 아니었다.
“저기... ... ... 나를 원망했니...?” 하고 어머니로서 처음 자신이 버린 딸에게 물었다.
“소덕동 언덕에서 함께 나무를 바라봤을 때... 좋았습니다.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어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라고 버림받은 딸은 짧게 답할 뿐이었다.
우리는 토요일 오전수업을 마치고 안동시 법흥동 99칸 집 임청각 앞 회나무 밑에서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신작로로 한 시간 반을 달려 팽나무주막에 도착했다. 신작로는 깎아지른 고바우 벼랑과 고인돌들이 수 십 기 늘어선 언덕을 지나 두 개의 높은 고개까지 넘으며 나있었다. 고개 꼭대기까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기는 힘들었으나 내려갈 때는 정말 신이 났다. 팽나무주막에서 자전거를 세워놓고 겉옷을 벗어 자전거에 실었다. 일행은 넓은 백사장을 걸어가 어깨에 자전거를 메고 얕은 물을 찾아 낙동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 혼자서는 물에 휩쓸릴 수도 있고, 모래 웅덩이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 고소한 팽나무 열매를 주워 까먹으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과 당시 관심 있던 권투선수 김기수나 가수들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팽나무주막도, 고인돌들도, 금모래사장 수 십 개도 물속에 잠겨 있다. 정치적 결정으로 모두 안동댐 아래 수장되어 버렸다. 드라마에서도 아빠는 딸에게 세상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고 말해준다.
“영우야, 아빠가 살아보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정치적이야, 네가 취직한 데도, 엄마가 영우를 버린 것도, 영우란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야. 나 같은 남자랑 결혼할 수 없는 그런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야.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는 줄도 모르고, 자기 혼자 약속과 의리 타령하는 못난 남자(아빠)는 그 성공하지 못한 대가를 자기 딸한테 치르게 하고 있지”
그 순간 영우는 머릿속에 큰 고래가 떠오르고 “소덕 동의 팽나무도 그랬을까요?”라 외친다.
신종찬(시인, 수필가, 의학박사/ 신동아의원 원장)
출처 : 엠디저널(http://www.mdjourn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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