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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승의 붓을 따라] 실버타운
    좋은 글 2023. 12. 24. 22:41

    [이영승의 붓을 따라] 실버타운

    언젠가부터 아내가 실버타운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매번 듣기만 했다. 하지만 너무도 진지해 마냥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언제 입주할 것인지 약속하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실버타운에 입주할 생각이 없었다. 마지못해 “골프와 문학 활동을 접게 되면 그때 한번 생각해보겠다”라고 했다. 아내가 그 대답은 입주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며 구체적인 입주 연도를 지정하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늦어도 10년 내로 무조건 가겠다고 약속 후 위기를 모면했다.

    그렇게 약속한 것이 작년 3월이다. 벌써 1년 9개월 흘렀으니 이제 8년 남짓 남았다. 약속한 이상 나도 실버타운에 대한 기초상식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누가 실버타운 얘기만 하면 귀가 쫑긋해진다. 한 지인이 아파트 재개발 공사 기간 4년을 용인의 어느 실버타운으로 이사했다. 일전에 만날 기회가 있어 “실버타운 생활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여러 가지 장점을 얘기 후 “진작 실버타운에 입주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라고 했다. 아내에게 말하면 약속을 앞당기자고 할 것 같아 비밀로 했다. 그리고 그동안 아내에게서 들은 얘기를 바탕으로 실버타운에 대한 각종 자료를 수집했다.

    먼저 수도권의 규모 있는 실버타운 두 곳을 선정해 운영 실태를 파악했다. 건국대 입구 ‘더 클래식 500’은 도심의 주상복합 호텔형이고, 용인 기흥구의 ‘노블카운티’는 고급 아파트형인데 모두 국내 수준급 실버타운이다. 참고로 소개하면 전자는 세대(1~2인)당 보증금 9억 원에 월 이용료와 관리비 및 의무 식사비를 합해 500만 원 정도인데 메디컬 및 피트니스 센터, 스파 골프, 연회장, 영화관, 도서관, 오락실 등 각종 서비스가 제공된다. 입주 자격은 60세 이상(부부 중 1인)이다. 하지만 경제력 상위 1%를 겨냥한 최고급 타운이라 웬만한 사람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에 비해 후자는 도심에서 다소 멀지만 비용이 적고 환경이 좋은 장점도 있다. 어느 날 이 두 곳에 대해 아내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더니 더 클래식은 너무 비싸 우리에겐 벅차고, 노블카운티는 생각해볼 수 있으나 그 외에도 갈만한 곳은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이미 수도권 실버타운 현황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내의 의지가 이토록 확고하니 나도 실버타운 입주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실버타운은 고령화 시대의 새로운 주거형태로 국가가 운영하는 복지시설과는 달리 입주자가 비용 전액을 부담하고 각종 편의 시설 이용과 서비스를 받는 개념이다. 선진국은 이미 정착되고 있으나 자식이 부모 봉양을 당연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실버타운 입주를 고려장으로 여겨 꺼리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인생의 핵심 과제다. 실버타운 생활 또한 지금까지 살아오던 주거 방식의 획기적 변화이니 삶의 본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번 기회가 남은 내 인생을 더 만족하게 살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한 편이며, 본인이 아니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족 각자가 해야 할 일까지 혼자 하다 보니 항상 자기만 고달프게 산다. 45년 전 결혼할 때는 23세로 나보다 여섯 살이나 적어 어리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맞먹으려고 하더니 지금은 완전히 누나인 양 한다. 부부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이다. 그런데 수개월 전 수술을 받고 나서는 마음이 무척 약해진 것 같아 요즘은 내가 아내의 심기가 어떤지 눈치를 살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해외여행은 못가도 서울을 벗어나 며칠이라도 조용히 한번 살고 싶다”라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면 일본 온천여행이라도 며칠 다녀올까?”라고 했더니 일본보다 동해의 ‘약천온천 실버타운’으로 가자고 했다. 좋다고 대답하기 바쁘게 아내는 중요 일정을 피해 12월 중순 8일간 예약했다. 그곳은 호텔형 임대 실버타운으로 온천이 나오고 동해가 한눈에 조망되는 절경이다. 두 사람 먹고 자는 비용이 하루 15만 원이니 일본 온천여행보다 가성비가 좋으며, 8년 후 실버타운 입주를 대비한 사전체험도 되니 더욱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아내는 이번 실버타운 여행에 마음이 부풀어 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며 모래사장을 걷고, 맑은 계곡도 자주 다니겠단다. 우리는 해물을 좋아해 동해안의 신선한 특식도 기대된다. 아내가 이번 체험에 만족하면 아마도 ‘집 나가서 단기간 살아보기’를 매년 강요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사회활동이 많아 실버타운 입주가 솔직히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여성들의 여행 목적은 무엇보다 밥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내도 실버타운 입주 이유가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절실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수십 년째 삼시 세끼를 당연한 듯이 먹고 있다. 그 하나만으로도 너무 큰 빚을 졌다. 이번 기회에 그 빚을 일부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운전기사 노릇에 충실할 작정이다.

    [이영승의 붓을 따라] 실버타운 살아보기 체험

    가정이란 둥지를 튼 지 45년이다. 그 긴 세월의 삶이 녹녹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더없이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요즘 그 소중한 둥지를 며칠이라도 벗어나 남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살아보고 싶단다. 순간적으로 해보는 투정은 분명 아니다. 4년째 지방의 딸아이 집을 오르내리며 외손녀를 돌봐주고, 주말에는 서울로 올라와 나를 챙기는 두 집 살림을 살자니 그 고충이 오죽하랴. 삼시 세끼 밥을 차려야 하는 변함없는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심정 충분히 이해가 되어 아내가 제의한 ‘실버타운 살아보기 체험’에 기꺼이 응하기로 했다.

    선진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버타운 선풍이 불고 있다.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실버타운이 39개소인데 비해 고령사회에 미리 진입한 일본은 16,000개소나 된다고 한다. 자식이 부모의 노후를 책임질 수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보장제도가 정착되지 못한 우리나라의 노인복지 문제는 실로 심각하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으니 노인 각자가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다.

    멀다고 생각했던 대관령 너머 동해가 경춘고속도로를 타니 2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동해시에 도착 점심을 먹으려고 맛집을 검색하니 우리가 입소하는 약천온천 실버타운 구내식당이 맨 먼저 나타나 웃어넘겼다. 입소하여 첫날 저녁을 먹는데 아내는 “모든 반찬이 다 맛있다”라며 혹시 내가 음식에 불만이 있지 않을까 연신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나도 예상외로 음식 맛이 좋아 연일 과식을 했다. 가끔 외식도 하려고 계획했었는데 외부에 나가도 이만한 식당이 없을 것 같아 바닷가 횟집에서 단 한 번 외식하고는 줄곧 구내식당만 이용했다.

    다음날 새벽 동트기 전에 일어나 건물 옆 동산에 올라갔다. 능선에 조성된 파크 골프장 길의 잔디를 밟으며 중턱에 다다르니 멀리 바다에 널려있는 오징어 배의 등불이 나를 반겼으며 잠시 후에는 붉은 해가 바다 밑에서 솟아올라 환영 인사를 했다. 내 평생 처음 경험한 동해의 해돋이다. 첫날부터 계획된 일정에 따라 동해 일대를 관광했다. 출렁다리와 촛대바위 등 명소가 있다는 추암 권역과 별유천지를 중심으로 한 무릉계곡 권역 그리고 망상 해수욕장 권역으로 3등분 하여 답사했는데 가는 곳마다 공기가 맑아 산책하기 정말 상쾌했다. 퇴소 전일에는 마지막으로 묵호항 수산시장을 찾아 대게를 포식하고 자식들에게 나눠줄 건어물도 한 보따리 샀다.

    나는 목욕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것도 몸에 좋다는 온천탕이니 더 바랄 게 없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목욕하고 첫날과 마지막 날만 한 번 했는데 관광을 다녀온 후에 목욕하고 나면 피로가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새벽 목욕은 1시간 정도 했으나 저녁에는 기본이 2시간이었는데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고 등과 어깨 및 정수리에 인공 폭포수를 맞고 나면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그리고 한증탕에서 장시간 땀을 뺀 후에 체중을 달면 1kg이나 감량되어 즐거움을 더했다. 나처럼 오래도록 목욕을 하지 못하는 아내는 목욕으로 본전을 빼려고 작정한 사람 같다며 부러워했다.

    첫날 목욕 후 휴게실에서 서울 강남에서 온 동연배로 보이는 분과 잠시 대화했다. 부부가 함께 입주했는지 물으니 인근 친구 별장에서 2달간 집 나가 살기를 체험했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이며, 애완견 때문에 집을 비울 수 없어 혼자 왔다고 했다. 홀로서기 체험에 나보다 선배이며 우연히 만난 인연이 아닌 것 같아 연락처를 메모했다. 다음 날은 식당에서 옆 좌석 부부와 대화하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승용차를 여객선에 싣고 먼 길을 달려 이곳 실버타운에 3일간 입소했는데 이미 여러 번째 왔다고 했다. 내가 “남들은 제주도를 찾는데 역행하셨네요? 우리도 제주도에 여러 번 갔으나 기회 되면 또 가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다음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고 친절히 말했다. 나보다 10여 년 아래로 보였지만 친화력이 있고 세상을 재미있게 사는 분 같아 앞으로 소통하고 싶어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마지막 날 밤에는 구내 소극장에서 ‘7명 주부 연주단의 봉사공연’이 있었다. 연주자들이 직접 선물까지 준비해 와서 나눠주며 분위기를 살렸는데 조용하던 관객들을 시간이 흐를수록 함께 손뼉을 치며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이어서 이곳 지방에서 유명하다는 솔로 가수를 초청한 공연이 연속되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여러 곡 부른 후 관객들이 듣고 싶은 노래를 신청받았다. 내가 제일 먼저 ‘청춘을 돌려다오’를 신청해 선정되자 다른 분들도 ‘내 나이가 어때서’ 등을 계속 신청했다. 초청 가수가 얼마나 열창하는지 공연장의 분위기가 일시에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으며, 급기야 주부 공연단과 관객들도 함께 나가 춤을 추는 바람에 계획 시간보다 훨씬 초과했다. 연말을 맞아 실버타운에서 주최한 위문공연이었지만 마치 체험을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 부부의 환송 행사인 것 같아 더욱 재미있었다.

    실버타운에 일주일간 생활하는 동안 가끔 80대 중반 전후 거동이 다소 불편해 보이는 어르신들과 마주치면 10년 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우울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공연 때 그분들 중 한 할머니가 앞에 나가 굽은 허리로 신나게 맘보춤을 추어 폭소를 자아내었다. 연세 든 분들의 외부로 나타나는 단면만을 보고 그분의 삶 전체인 양 측은지심을 가진 내가 잘못이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인데 정신이 온전하고 함께할 벗이 있다면 몸이 다소 불편한들 무슨 대수겠는가? 다음날 식당과 복도에서 마주치는 분들을 새로운 마음으로 눈여겨보니 서로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지내시는데 표정들이 하나같이 밝았다. 인생은 생각하기에 따라 같은 상황에서도 ‘창살 없는 감옥’도 되고 ‘지상의 천국’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가 체험의 소감을 물었다. “실버타운에 언제 입주하게 될지는 모르나 매년 전국의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수시로 체험을 다닙시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이번 체험에서 느낀 바를 혼자 곰곰이 생각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생은 새로움을 찾아 끝없이 떠도는 유랑’이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부회장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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