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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종의 문학잡설(21)] ‘지기추상(持己秋霜)’과 ‘비로소’
    좋은 글 2023. 5. 27. 21:59

    [김승종의 문학잡설(21)]  ‘지기추상(持己秋霜)’과 ‘비로소’

     

    우리는 대체로 자신을 가르치려는 말을 꺼리기 쉽다. ‘지기추상(持己秋霜 :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의 취지에서 옳은 말을 긍정하며 따르자고 우리는 서로 격려하지만, 막상 그런 처지가 되면 은근히 자존의 정서가 손상되며 자신이 부끄럽기도 해 반발하기 쉽고, 상대가 나보다 우월하다는 위치를 부각하려고 저러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더욱이 시비와 이해가 걸려 있다면. 하지만 우리는 안다. 조언과 충고는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하고, 세대교체와 문화전승에도 원만한 연계의 맥락이 된다는 사실을. 그렇다. 미숙한 우리 인간에 어찌 공동 지혜에 의거한 쓴소리가 없을 수 있겠고, 영성과 지성을 함유한 인간이 진실과 공익에 봉사하자는 권유를 어찌 수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상에서도 쓴소리를 경원하기보다는 잘 선용하면 품격과 성숙에서 기회가 되기도 하고, 회복하기 힘든 시행착오를 예방하며, 쓸데없는 미망과 갈등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세태 풍조에서 쓴소리를 포함해 ‘유익한 교설(敎說)’이 지난 시절 같지 않다. 도피성 함구의 자기검열이 늘어나고 있고, 어쩌다 억울한 꼰대가 되는 사례도 많다. 

     그런데 시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있지 않나 한다. 도(道)를 구현하는 수단이라는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오랜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시는 삶을 주제로 한 노래이기에 삶의 이치나 도리를 각성하고 피력하는 화자가 출현하기 쉽다. 결과론으로 굳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애초의 동기는 독자에게 잘난 체하거나 교편(敎鞭)을 들려 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근대 이후 시인들은 내밀한 각성과 고백의 미학을 구사하거나 의존해 왔다.   

    그때가 떠오른다 저 광활한 바닷물이 강물에 물을 조금씩 나눠준다 착각했던 일곱 살 여덟 살 무렵 철이 조금 덜 들었던,

    그때가 떠오른다 세상에 바닷물이 조그만 강물마저 다 빼앗아 가는 것에 뜨겁게 분노하면서 머리띠를 둘렀던,

    그때가 떠오른다 놀랍게도 바닷물이 조그만 강물들을 죄 수탈해 가는데도 강물이 여전한 것을 의아하게 여겼던,

    이제 좀 알 것 같다 내 비로소 철이 들어 저 광활한 바닷물이 구름 되고 비가 되어 강물에 조금씩 나눠주고 있다는 걸 

                                                         - 「내 비로소 철이 들어」/이종문 

     

     사리와 도리를 분별하는 철을 운운하며 개인 차원의 주관 형식을 화자가 원용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이 시를 읽고 화자의 경과와 각성을 일종의 정제된 교훈으로 여길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조금씩’이 약간 유감스럽지만 수용할 것이며, 어떤 독자들은 호흡을 같이 하며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유대의 감개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독자들은 4연의 ‘이제 좀 알 것 같다 내 비로소 철이 들어’를 읽으며, 역시 반전을 인식하고 관심이 고조되지만, 자신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결미, ‘저 광활한 바닷물이 구름 되고 비가 되어 강물에 조금씩 나눠주고 있다는 걸’이란 최종 각성에, ‘조금씩’에도 불구하고 반감은 아니더라도 일종의 성급한 추인의 교조(敎條)를 표출하고 있다고 유감스럽게 여길 수 있을 것이며, 어떤 독자들은 단번에 외면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기저 갈등이자 오랜 논란거리인 생산과 분배 문제를 다룬 이 시, 이제 독자의 수용 양상에서 시로 돌아가 살펴보면, 자신에게 용감한 화자의 태도가 주목된다. ‘세상에 바닷물이 조그만 강물마저 다 빼앗아 가는 것에 뜨겁게 분노하면서 머리띠를 둘렀던’ 지난 날 자신을 계속 그대로 자긍하지 않고, ‘강물이 여전한 것을 의아하게 여겼던’ 의문을 은폐하지도 않고, ‘이제 좀 알 것 같다’며 보지 못했던 미숙이 있었다고 자인하는 면모, 보기 쉽지 않은 ‘지기추상(持己秋霜)’의 하나가 아닌가. 오히려 그 젊은 날의 의기가 부끄럽지 않게 지속되고 있다고 하겠다. 자기애착은 인간의 무의식이며 더욱이 젊은 시절의 그 지향은 당시 시대 상황에 부합했으며 지금도 옳다고 자신에게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담하지는 못 하지만 자신을 자강불식(自强不息) 확충하고 보완하는 경로는, 어렵고 어렵지만 우리가 동의는 할 수 있는 인간이 가야 할 길 아닌가.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이 시와는 반대되는 경과를 같은 성찰의 자양으로 자은 다른 시인의 시를 읽고 싶다. 다 함께 다음 시를 읽고.     
     

     울화통 터진 날엔 울화통이 터진 즉시
     커다란 다라이에 물을 반쯤 부은 뒤에 
     빨랫감 다 집어넣고 발 빨래를 해보게나

     하이타이 풀어놓고 청바지를 둥둥 걷고 
     울화통 터지게 한 놈 내 발밑에 있다 치고
     맨발로 첨벙 들어가 지근지근 밟아보게


     그 무슨 지신 밟듯 허벌나게 밟다보면
     서늘한 물 기운에 울화통이 가라앉지
     아구통 날릴 놈들도 죄다 용서하게 되고


     물방울 튀는 맛에 세 번 탁, 탁, 힘껏 털어 
     새하얗게 걸어놓고 바지랑대 받칠 때는
     슬며시 반성도 되지, 내 잘못도 있었거든 

                       - 「내 잘못도 있었거든」/이종문 

     
     사족 : 「내 비로소 철이 들어」에 이어 「내 잘못도 있었거든」에 내포되어 있는 ‘비로소’. 언제부턴가 글을 읽으며 이 부사를 목도하면 내심 반갑다. ‘늦었다’는 뜻이 없지 않지만, 아니 우선 전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방과 향상의 각성을 대체로 예고하기에. 자신의 한계를 끝까지 옹호하거나 방치하지 않는 삶은 아무래도 세속의 속기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성패 따위를 초월하는 진정성이 있다.

    출처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http://www.suwonilb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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