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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역사상 최악의 전쟁 Top 6
    역사/세계사 2023. 3. 11. 00:11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역사상 최악의 전쟁 Top 6

    gettyimages

     

    [인사이트] 장형인 기자 =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정도로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뗼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과거 국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또는 국가의 온전한 통일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오로지 국가의 명을 받아 전쟁에 나가 싸운 군인들은 전쟁터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여성들과 아이들은 성노예와 위안부 등 2차 피해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

     

    극심한 피해를 일으켰던 전쟁 중 그중에서도 역사상 사상자를 많이 낸 최악의 전쟁으로 불리는 전쟁 6개를 추려봤다.

     

    아래 준비된 정보를 통해 어떤 전쟁이 있는지 함께 확인해보자.

     

    1. 제2차 세계대전 (1939-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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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전쟁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으로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은 약 1억 5000만 명의 군인이 동원됐다.

     

    그중 5,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됐으며 홀로코스트와 전략폭격 등으로 숨진 민간인을 포함하면 사상자 수는 어마어마하다.

     

    2. 6.25 한국 전쟁 (1950~1953)

     

    YouTube 'LEEWOOJINMOVIE'

     

    한국의 남한과 북한이 싸운 전쟁으로 미국, 소련, 중국도 이 전쟁에 참여했다.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발발했다.

     

    6.25전쟁은 공식 집계만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남한 지역 민간인 인명 피해는 99만 968명에 달했다. 

     

    3. 나폴레옹 전쟁 (1803-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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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가 나폴레옹 1세의 지휘하에 유럽의 여러 나라와 싸운 여러 전투를 일컫는다.

     

    초반에는 프랑스혁명을 방위하는 전쟁의 성격이었으나 점차 침략적인 성향으로 변질됐다.

     

    나폴레옹 전쟁에 속하는 마렝고 전투에서는 프랑스 군만 약 6,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 외에도 다른 전투에서 무고한 생명이 숨졌다.

     

    4. 베트남 전쟁 (1955-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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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과 북으로 나뉜 베트남이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움을 벌이며 시작됐다.

     

    이후 미국은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남베트남 정권을 지원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1만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피해 등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5.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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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전쟁(Soviet–Afghan War)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9년 이상 지속된 전쟁이다.

     

    9년 이상 지속된 전쟁 동안 최소 85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수백만 명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도망해 난민이 되었다.

     

    6. 미국 남북전쟁 (1861-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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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합중국의 북부와 남부가 벌인 내전으로 4년에 걸친 격전 끝에 남부는 패해 다시 연방으로 복귀하는 결말을 낳았다.

     

    미국 남북전쟁의 그 원인은 매우 복잡한데 주(州)가 연방으로부터 분리되는 문제와 노예제도에 관련해 남북의 이해관계 등이 주요 원인이다.

     

    이 전쟁으로 양측의 사상자는 약 100만 명으로 집계됐다. 그 중 사망자는 50만 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를 웃돌았다

     

    안록산의난 8년간 36,000,000명사망 

    안사의 난(安史之亂, 영어An Lushan Rebellion)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록산과 사사명의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록산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燕)으로 하고 스스로 황제(稱帝)라고 선포하고서 9년간 지속했다. 이 기간동안 당나라의 인구는 3600만명이나 줄었다.[1] 위구르족에 의해 구출되나 위구르에 의해 장안은 황폐해진다.

    당나라 말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개원의 치를 이끌었던 현종은 양귀비에 빠졌다. 무혜비를 잃고 왕자들을 억울하게 죽게 해 가슴 아파하던 현종은 전국에 화조사(花鳥使)를 파송하여 미녀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궁중에 무혜비의 소생인 수왕의 비 양옥환에게 반했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수왕과 양옥환을 이혼시킨다. 그리고 양혹환을 도교 사원에 가 있게 한 후 그녀를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귀비로 삼았다. 그는 밤낮으로 양귀비와 놀고 먹으며 그녀가 말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다. 백거이(白居易)가 〈장한가(長恨歌)〉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궁정에서 환락의 생활에 빠졌다.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물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조차 넘겨주는 일을 서슴없이 행한 현종은 여산(驪山)의 온천에 있는 별궁을 수리하여 화청궁(華淸宮)이라 하고, 사시사철 그곳에서 지냈다. 현종은 정치를 고력사 등의 환관들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양국충 등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정치가 시작되었다. 현종은 양귀비에게 빠져있었고 그로 인해 현종이 넘겨준 정치권력을 손에 넣은 재상 이임보는 양귀비를 조종하여 독재정치를 하였다. 현종은 명신 장구령의 충언은 무시하고 이임보만 절대적으로 신임하였는데 그로 인해 746년 과거 응시자를 전원 탈락시키는 사건을 내는데 그는 그보다 우수한 관리가 나오면 그의 정치가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임보가 죽고 난 후에 양귀비의 사촌인 양국충이 재상이 되는데 현종은 양국충뿐 아니라 양귀비의 언니들 세 명에게도 호화 저택을 하사하고, 그 친척들을 고관으로 임명하는 등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결국 755년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된다.[2]

    부패한 관리와 환관정치로 인해, 수탈을 당할 대로 당한 농민의 소외로 자립 소농민층이 해체된 것도 원인이다. 해체된 자립 소농민층은 유민화되었다.

    당나라는 측천무후 때 억압된 귀족 세력이 현종 때에 다시 집권했다. 구집권층과 지주, 상인층 출신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경과[편집]

    영향[편집]

    안사의 난으로 8년 간의 전란에 시달려 많은 농민들이 죽고, 나라의 정치 제도는 무너지게 되며 당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다. 또한 위구르족 등 이민족에 의해 수도 장안이 함락되면서 당나라 전 국토가 유린당하며 황폐해진다. 이 전란으로 인해 전국의 인구는 293만 호로 13년 전의 890만 호에 비해 70%의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753년 52,880,488명의 인구가 764년에는 16,900,000명으로 기록되었다.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뀌었다.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875년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당은 안사의 난으로 인해 제도와 지배력등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지만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 덕분에 명맥을 유지했으나 황소의 난으로 인해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3]

     

    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1780. 6. 1 ~ 1831. 11. 16)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이자 군사학자전쟁론의 저자[1]이며 나폴레옹 시대의 탁월한 전략가 중 한 명이자 서양 최초의 군사 사상가이자 철학자라 불리는 인물.

    프로이센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조부 증조부는 목사였고 할아버지는 역시 목사이며 유명한 신학교수였다고 한다. 삼촌중에 한 명도 목사였다하고 한다. 훗날 전쟁론 집필 때 철학적 사유와 서술 방식엔 신학교수였던 할아버지의 학문적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목사 집안이었지만 클라우제비츠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대왕 밑에서 하급장교 중위를 지냈는데 전쟁이 끝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엄명에 따라 군대에서 쫓겨난다. 원래 프리드리히 대왕은 부르주아들을 경멸해서 장교단에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전쟁 시엔 귀족수가 크게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가 전쟁이 끝나자 귀족 출신이 아닌 자들을 모두 쫓아낸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전역 하고 나서도 장교 출신임을 들어 von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고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신분상승 욕구와 군복무를 갈망했고 그의 형제 중 3명이 같이 입대 했다.


    당시 12세에 참전[2]하여 15세에 사관학교에 들어갔으며,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에게 군사학을 배웠다. 그의 능력이 출중하여, 프로이센 왕실의 아우구스트 왕자 직속 부관이 되어 왕자에게 전쟁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 훗날 아우구스트 왕자와의 연줄 덕으로 국왕이 되는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둘째 왕자 빌헬름(빌헬름 1세)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살았던 시기가 프랑스 혁명 시기인지라, 인생의 상당부분을 나폴레옹 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후위대를 맡아 나폴레옹군을 저지하다가 사로잡혀, 파리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귀국하여 샤른호르스트를 도와 군 개혁에 몸담았으나 1812년 패전한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요구에 의해 동맹을 맺고[3] 러시아 원정에 꼬붕으로 끌려가 참전하자, 탈영을 감행 프로이센 출신 탈영병 2만 명을 모아 러시아군에 종군한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 군대와 대적하여 이긴 세력이 없으니, 나폴레옹의 군대보단, 나폴레옹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상대해야 한다'는 게릴라전이나 물자 보급을 약화시키는 지연전을 주장하고, 이것이 먹혀들어 1812년 보로디노 전투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에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813년 프로이센군과 접촉하여 프로이센이 대불동맹에 가담하는 계기가 된 프로이센 - 러시아 협력을 구축하였다. 러시아군 신분으로!

    이후 해방전쟁의 결과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귀양을 떠난 1815년에서야, 지난 군영 무단이탈과 적군에 대한 종군혐의로 찍혀있던 그는 프로이센 왕이 귀국을 허락해 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후 육군대학 교장과 포병감 등을 지내고, 이 시기부터 《전쟁론》에 손을 대, 6~7장을 제외한 장의 초고를 사망하기 전까지 완성한다.

    그나이제나우 장군 휘하의 참모장을 역임하다가 유럽 콜레라에 걸려 51세의 비교적 젋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4] 사후에 그의 부인이 전쟁론을 출판하였다.

    2.1. 전쟁론[편집]

    그의 저서 《전쟁론》은 아시아의 《손자병법》과 더불어 시대를 초월한 군사전략서로 꼽힌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 라는 내용은 전쟁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적인 언급으로, 전쟁론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아는 말 중 하나다.

    사실 꽤 많은 이들이 이 문장 하나만 보고 전쟁론을 접어버린다. 전쟁론은 유명세에 비해 제대로 읽은 사람은 전문가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책이다. 민간인들은 군사 부문에 대한 배경 지식의 부족으로, 군인들은 클라우제비츠의 철학적 사유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제대로 읽기 쉽지 않다. 거기다 책 자체도 난해하게 쓰였는데, 직접적인 서술보다는 문학적, 철학적 표현들을 많이 사용했다. 저자 말로는 그 당시 유행보다는 쉽게 썼다고 했다는 게 아이러니. 사실 클라우제비츠가 머릿말에 반면교사로 달아놓은 문장 보면 전쟁론은 그때 기준으로는 어렵지 않게 쓴 책 맞는 것 같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책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내용 정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전쟁론을 끝까지 읽은 사람도 드물뿐더러, 그중에는 오독하고 주화입마한 사람도 흔하다.

    3. 그 외[편집]

    • 일생과 업적만 보자면 호전광 같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은 위대한 서사시와 위대한 영웅을 남기는 게 아니라 전쟁은 욕심과 자만에서 탄생되며 남는 건 눈물과 고통, 피만 남게 되는 비참한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라는 명언을 남겼을 정도로 전쟁이 주는 위험과 피해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간혹 군대에서 정신교육 관련 문제가 나올 때 정훈 장교들이 이 사람 이름을 묻는 경우도 있다. 장병들의 정신교육 교재들 대부분의 첫 페이지에는 이 사람 명언이 적혀있기 때문(...) 하지만 엘랑 비탈식 정신력 주의와 전쟁론의 "전쟁 의지"는 전혀 다르다.
    • 히틀러가 마지막으로 내린 초토화 작전명이기도 하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는 그의 이름을 딴 기갑사단도 존재했다.
    • 소설 혼블로워에서 주인공을 더 빛나게 하는 조연으로 나온다. 이론만 아는 백면서생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혼블로워만 바라보는 역할이다.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사의 게임 빅토리아에서 전쟁술을 쓴 앙투안 앙리 조미니식 사고와 함께 초기에 선택할 수 있다. 조미니는 사기 120, 조직력 104, 클라우제비츠는 사기 76, 조직력 133이 된다. 대부분의 인공지능 국가가 조미니를 고르는데, 화력이 강해질 수록 조직력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클라우제비츠가 더 좋다. 다만 초기의 클라우제비츠는 약소국에게도 사기 문제로 신나게 발려나간다는 게 문제.
    • HOI 시리즈의 클라우제비츠 엔진은 그의 이름을 따왔다.
    • 문명 5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클라우제비츠의 유산 이라는 정책이 등장한다. 무려 50턴 동안 모든 유닛에 어지간한 고유 유닛의 전투력 증가치보다 높은 25%의 증가치를 부여해줘 적 문명들을 손쉽게 요리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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