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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이황《매화시첩》/ 한시
    카테고리 없음 2021. 3. 18. 20:24

    마지막 유언으로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할 만큼 매화를 아꼈던 퇴계 이황. 《매화시첩》은 우리나라 문학사상 최초의 단일 소재의 자작, 친필로 된 단행본 시집이다.
    퇴계선생의 매화시는 72제 107수에 달하며 그 중 62제 91수가 《매화시첩》에 수록되어 있다. 제작시기로 보면 42세 때인 중종 37년(1542)에서 시작해 70세로 타계한 해까지를 망라한다. 도산서원 장판각(藏板閣)에 《매화시첩(梅花詩帖)》목판 원판이 있음.

     

     

    퇴계 선생(退溪 先生 )의 매화(梅花) 사랑                                                                                                      檀紀 4342年(2009) 3月 15日 發行                

                                                                                             陶雲會 運營委員 申 恒 烈

     

     

    퇴계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선생은 타고나신 성정(性情)이 출세보다 학문이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 벼슬하는 것도 아니요. 속세(俗世)를 떠나 자신의 안녕을 추구함도 아니며,오직 면학(勉學) 일념으로 일생동안 학문연구에 정진하신 분이다. 뜻 없는 관로(官路) 길에 무려 72 번을 임금께 벼슬을 사양 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주자학(朱子學)을 발전시켜 도덕적(道德的) 실천윤리(實踐倫理)를 최우선(最優先)으로 후진양성(後進養成)의 교육이념(敎育理念)에 이바지 하는 것이 자신의 사업이요 취미요 목표였던 것이다.

     

     선생의 단편시『산림 속에서 내 뜻을 펄 수 있게, 임금도 꼭 나를 믿어 주겠지.(畢志林壑中, 吾君如岵恃)』하는 이 한구절의 시에도 선생의 심정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이 가진 집념은 오직 향촌에서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닦아 착한 사람을 많이 기르는 일이 자신의 사업이요 취미로 여겨 이것만이 천리의 벼리(紀綱)에 순종하는 길이다. 라고 하셨기에 선생이 남기신 대다수의 시와 글 속에 강호(江湖) 산수(山水)의 자연을 벗 삼아 향촌(鄕村)에서 조용히 책을 숙독(熟讀)하고 사색(思索)하며 진리(眞理) 추구(追求)에 여생을 보내고 싶은 선생의 심정들이 내포되어 있는것이다.

     

     선생은 한평생 성리학 연구에 취중하여 이(理)기(氣)를 이원론을 조화시켜 도덕사회 구현으로 성선설(性善說)에 입각한 선인(善人)만이 하늘의 뜻에 따라 살수 있다는 우주의 생생(生生)법칙이 인간 존재가치로 형성된다는 퇴계학의 경(敬)사상을 정립시킨 세계가 추앙하는 대학자 이기도 하다.

     

     아울러 실천윤리(實踐倫理)를 최우선시(最優先視)하는 교육이념(敎育理念)으로 당대 문하(門下)에 국가(國家) 동량(棟樑)으로 300 여명의 많은 제자(弟子)와 인재(人材)를 배출시킨 이 나라 불세출(不世出)의 교육자(敎育者)요 구도자(求道者)였던 것이다.

     

    선생께서 이로서 군자의 도에 비유되는 청냉옥결(淸冷玉潔)한 매화를 더욱 좋아 하시지 않았나 보아지는 것이다.

     

    선생의 매화시첩 첫머리에 실린 "옥당억매(玉堂憶梅)"는 이렇게 적혀져 있다.

         

           玉堂憶梅(옥당억매) : 壬寅年(42세) 옥당에서 매화를 그리다.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뜰 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치지) 풍진의 세상살이 꿈속에서 들락날락하네,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에 달을 보니,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기러기 슬피 울 제 그대 생각이 애절 하구나.

     

     

      差池치지, 시경에서 나온 말로 어지러운 마음입니다

     

      퇴계연보에 의하면 선생 42세. (中宗 37년) 그 해 형조정랑(刑曹正郞)겸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바로 어사(御使)로 임명되어 충청도 군읍의 흉년 구제사업을 순찰하고 상경 12월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셨는데, 그 해 2월 어느 날 밤 옥당(弘文館)에 숙직(宿直)하면서 뜰에 선 매화나무를 보고 고향집의 매화를 그리며 이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先生趣尙高潔 常有急流勇退之志 雖處榮官 非其所樂也 是年春 在玉堂直廬 有憶梅詩>

     

    「선생께서는 항상 취미가 고상하고 깨끗하여 언제나 빨리 물러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비록 높은 자리에 있었으나 즐겁지 않았다. 이 해 봄에 옥당에서 숙직할 때 지은 憶梅詩가 있다.」

     

     선생은 일찍이 104수의 매화시로서 따로 「매화시첩(梅花詩帖)」을 지은 바 있어. 「퇴계문집(退溪文集)」에 실린 10여 수의 매화시를 합치면 모두 110여 수의 매화시를 지으신 샘이다.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매화를 좋아하셨다. 퇴계의 경물시(景物詩) 가운데 매화시가 특이하게 눈에 뜀을 볼수 있다. 일찍이 매란국죽(梅蘭菊竹)은 군자의 사우(四友)로 지취(志趣)가 있어 선비들이 좋아했지만. 선생의 경우 특히 그 중에서 매화를 더욱 좋아 하셨다.

     

     그것은 매화가 추운 겨을 온갖 시련과 풍상을 겪으면서도 외로이 혼자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봄이 되면 제일 먼저 옥설(玉雪)같고 홍옥(紅玉)같이 새하얀 꽃을 어김없이 피우고 그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지조를 사랑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매화는 은사(隱士)나  절의(節義)의 지사로 등장하지만 선생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녀(仙女)나 애인으로, 드디어는 반녀자와 같이 가까워지게 된다. 선생이 매화를 좋아한 것은 청정(淸淨)과 순수(純粹)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스스로도'천향(天香)이라 극찬한 향기도 있지만, 무엇보다 퇴계 자신의 환경과 그의 선천적' 천석고황(泉石膏肓)' 과 '조월경운(釣月耕雲)'을 즐기는 성품이 매화의 그 속기(俗氣) 떠난 출세간(出世間)의 자태(姿態)와 영합(靈合)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소동파(蘇東坡)가 매화의 자태를 두고 '고오청냉(孤傲淸冷)' 빙청옥결(氷淸玉潔)' 이라 공감 했으며, 매화와 더불어 일생을 같이 하면서 일찍이 서한(西漢)의 시인 매복(梅福: 西漢 때의 詩人, 字가 子眞, 梅花를 지극히 사랑하여 梅仙이라 불렀음)과 같이,매화와 더불어 높은 구도 자(求道者)의 자세를 연마 한듯하다. 라고 후세인들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매화 와의 인연은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사후까지 이어진 듯하다. 고제자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이 쓴 선생연보에 의하면,선생은 1570년(庚午年) 12월 신축일(辛丑日) 유시(酉時)에 운명(殞命)하셨는데, 이날 아침에도 선생은 시인(侍人)에게 "분매(盆梅)"를 침소 밖으로 가지고 나가 "물을 주라"고 일렀다고 적고 있다.

     도라가신 날까지 매화를 생각한 그 정성으로 매화와의 인연은 마침내 천상으로 이어졌으니, 하찮은 나무에까지 미친 선생의 지극한 정성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憶陶山梅(억도산매) : 己巳年(69세) 도산서당의 매화를 생각하다.

        

         湖上山堂幾樹梅(호상산당기수매)   호숫가 도산서당 몇 그루 매화꽃이,

         逢春延停主人來(봉춘연정주인래)   봄철을 맞이하여 주인 오길 기다리네,

         去年已負黃花節(거년이부황화절)   지난해 국화시절 그대를 버렸으나,

         那忍佳期又負回(나인가기우부회)   아름다운 그 기약을 또다시 저버릴 손가,

     

      선조 2년(1569) 정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자, 숙배하지 않고 병으로 세 번 사양하였드니 사면이 허락되었으나,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임명되셨다. 또 우찬성(右贊成)에 제수 되자 대궐로 들어가 성은에 감사하고 향리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아뢰는 등 거듭하여 차자(箚子)를 올리던 시기에 도산서당의 매화 핀 봄소식을 듣고 느낀 감회를 쓰다.

    라고 기록으로 전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참고문헌: 퇴계선생 일대기, 매화시첩, 퇴계년보, 기타 등

     

     

                                                                                  

            退陶及門 諸賢錄 卷之 三 < 申演(號:寓軒公 : 漢城右尹)  直系 胄孫     

                                                                         石山 申恒烈>   謹識

        

    陶山及門諸賢雲仍之會, 陶雲會報 第9號(2009. 3. 15.발행)에 揭載한 글임

     

    퇴계선생시 옥당억매를 신축년 원단에 삼가쓰다

     

    梅花詩(매화시)玉堂憶梅

    退溪 李滉(퇴계 이황, 1501~1570)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정원의 매화는 가지마다 눈 쌓였고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치지)

    티끌 같은 속된 세상 꿈길도 어지럽네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마주하니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기러기 우는 소리에 그모습(도산매화) 그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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