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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도(화제시) / 정섭鄭燮 (1693~1765)미술/문인화(서화) 2022. 10. 15. 07:45
黃石圖
황석도(화제시) / 정섭鄭燮 (1693~1765)
屢遊泰岱何曾見 누유태대하증견
幾過匡廬未遇之 기과광려미우지
惟有穀城山下路 유유곡성산하로
一卷黃石帝王師 일권황석제왕사
板橋老人鄭燮爲涇川賢坦畵并題, 乾隆癸未夏日
판교노인정섭위경천현탄화병제, 건륭계미하일
태산을 여러 번 유람하면서도 보지 못했고
여산에 몇 차례 들러서도 만날 수가 없었는데
오로지 한 곳 곡성산 아래 길을 가다가
제왕의 스승이 되게 했던 누런 바위를 보았네
(건륭 계미년 여름에 사위 경천을 위해 판교노인 정섭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다)
▶ 泰岱(태대): 태산泰山. ‘岱’는 태산의 별칭이다. 태산은 대종岱宗 또는 대악岱岳이라고도 한다.
▶ 匡廬(광려): 여산廬山을 가리킨다. 백거이白居易는 「草堂記」에서 ‘匡廬奇秀, 甲天下山(광려산은 특이하고도 아름다워 산 중에 으뜸이라 할 수 있다).’이라고 했다.
▶ 涇川(경천): 정섭鄭燮의 사위의 자字
▶ 賢坦(현탄): 사위를 가리킨다. 동진東晉 때 태부太傅 극감郄鑒이 사위를 구할 때의 일화에서 유래된 ‘동상탄복東床坦腹’이란 전고를 인용한 것이다.
▲ 정섭鄭燮의 「황석도黃石圖」
다음은 제목에 들어있는 ‘黃石’과 관련된 일화를 전하는 사기史記 속 기록이다.
良夜未半往. 有頃父亦來喜曰: 當如是.
양야미반왕. 유경부역래희왈: 당여시.
장량이 한밤중이 되기 전에 (노인을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갔다.
조금 있다가 노인이 오더니 기뻐하며 말했다.
“마땅히 이래야지!”
出一編書曰: 讀此則爲王者師矣. 後十年興. 十三年孺子見我濟北, 穀城山下黃石卽我矣.
출일편서왈: 독차즉위왕자사의. 후십년흥. 십삼년유자견아제북, 곡성산하황석즉아의.
(그러더니 노인이) 책 한 권을 꺼내며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면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고, 십 년 후에는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십삼 년 뒤에는 네가 나를 제나라 북쪽에서 만나게 될 것인데
곡성산 아래 있는 누런 바위가 바로 나다.”
遂去, 無他言, 不復見. 旦日視其書, 乃太公兵法也. 良因異之, 常習誦讀之.
수거, 무타언, 불부견. 단일시기서, 내태공병법야. 양인이지, 상습송독지.
(말을 마친 노인이) 말없이 떠난 뒤 다시 볼 수 없었다.
날이 밝은 뒤에 (노인이 준) 책을 보았더니 《태공병법》이었다.
장량은 참으로 신기하게 생각하며 날마다 읽고 외우며 그 뜻을 깊이 익혔다.
(…)後十三年從高帝過濟北, 果見穀城山下黃石, 取而葆祠之.
(…)후십삼년종고제과제북, 과견곡성산하황석, 취이보사지.
(노인과 헤어진) 십삼 년 뒤, (장량이) 고제를 따라 제나라 북쪽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노인이 말한 대로) 곡성산 아래서 누런 바위를 본 장량은
(그 바위를 집으로) 가져다 보물처럼 받들며 제사를 지내주었다.
- 《사기史記⋅유후세가留侯世家》 중에서
다음은 사위를 뜻하는 ‘賢坦’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일화인데
왕희지王羲之와도 관련이 있는 동상탄복東床坦腹이란 성어가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郄太傅在京口, 遣門生與王丞相書, 求女婿. 丞相語郗信: 君往東厢, 任意選之.
극태부재경구, 견문생여왕승상서, 구여서. 승상어치신: 군왕동상, 임의선지.
태부 극감郄鑒이 경구에 있을 때 문하생을 시켜 승상 왕도王導에게
왕씨네 문중에서 딸을 사위를 고르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다.
왕도가 서신을 가져온 사람에게 말했다.
“아들들이 있는 동쪽 사랑채로 가서 마음에 드는 대로 골라보시게.”
門生歸白郄曰: 王家諸郞, 亦皆可嘉, 聞來覓婿, 咸自矜持. 唯有一郞, 在床上坦腹臥, 如不聞.
문생귀백극왈: 왕가제랑, 역개가가, 문래멱서, 함자긍지. 유유일랑, 재상상탄복와, 여불문.
문하생이 돌아와 극감에게 말했다.
“왕씨네 자제들은 모두 칭찬할 만했는데 사위를 구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안절부절못하는 중에
한 공자만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침상 위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었습니다.”
郄公云: 正此好. 訪之乃是逸少, 因嫁女與焉.
극공운: 정차호. 방지내시일소, 인가여여언.
극감이 말했다.
“바로 그 녀석이다.”
(그런 뒤에) 탐문을 해보니 왕일소(즉 왕희지)라 바로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아량雅量》 중에서
사위를 위해 그림에 시를 덧붙인 이 작품은
정판교가 세상을 뜨기 이태 전인 건륭乾隆 계미년癸未年(1763) 작이다.
◈ 정섭鄭燮 [1693~1765]
청대淸代의 화가이자 시인으로 자는 극유克柔이고 호는 판교板橋이며 장쑤성江蘇省 흥화興化 사람이다. 어려서 집안이 가난하였다. 과거에 응시하여 강희제康熙帝 때 수재秀才가 되었고 옹정제雍正帝 때 거인舉人이 되었으며 건륭제乾隆帝 때 비로소 진사進士가 된 뒤에 산동의 범현范縣과 유현濰縣에서 지현知縣을 지냈다. 고을 사람들을 도와 소송에서 이기게 한 것 때문에 지방호족들의 미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간 뒤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시詩∙서書∙화畵 모두 특색 있는 작풍을 선보였으며 그림에서는 양주팔괴楊州八怪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특히 난초와 대나무 그림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림으로는 《묵죽도병풍墨竹圖屛風》이 잘 알려져 있고, 문집으로는 《판교시초板橋詩鈔》와 《도정道情》이 있다.
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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