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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岳飛)/만강홍(滿江紅)카테고리 없음 2021. 7. 20. 02:37
書法作品欣賞系列行書岳飞詩詞《滿江紅》
怒發沖冠,憑欄處、瀟瀟雨歇。擡望眼、仰天長嘯,壯懷激烈。三十功名塵與土,八千裏路雲和月。莫等閑、白了少年頭,空悲切。 靖康恥,猶未雪。臣子恨,何時滅。駕長車,踏破賀蘭山缺。壯誌饑餐胡虜肉,笑談渴飲匈奴血。待從頭、收拾舊山河,朝天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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怒髮衝冠, 憑欄處, 瀟瀟雨歇.
성난 머리칼 투구를 찌르고,
난간에 기대서니 오던 비도 그친다.
擡望眼 仰天長嘯, 壯懷激烈.
눈을 치켜뜨고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니
비장한 마음에 피가 솟구친다.
三十功名塵與土 八千里路雲和月.
서른 나이에 얻은 세상공명은 티끌 같아서,
전선을 치달은 팔천리에 뜬구름과 달빛만 스칠 뿐이라.
莫等閒, 白了少年頭, 空悲切.
어느때 한가한 적이 있었던가.
소년이 어느덧 백발이 되었으니,
공허하고 슬픈 마음에 가슴이 에인다
靖康恥, 猶未雪 ;
하지만 아직 정강의 수치를 갚지 못했으니,
臣子恨, 何時滅?
이 한스러움을 신하된 자가 어찌 잊겠는가.
駕長車踏破 賀蘭山缺!
이제 전차를 몰아 하란산을 돌파하리라.
壯志飢餐胡虜肉, 笑談渴飮匈奴血.
장부가 뜻을 세웠으니
주리면 오랑캐의 살을 뜯어먹고,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
이제 진두에 섰으니
빼앗긴 산하를 모두 수복한 후에야
천자의 궁궐을 조회하리라.
중국 북송때의 명장 악비(岳飛 1103~1141)의 사(詞) <만강홍(滿江紅)>입니다.
작품에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무목유서(武穆遺書)의 저자로 사조삼부작 전반의 주제의식과 모티브를 제공하는 악비(岳飛)는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애국, 충절의 대명사로 인식되며, '민족지광(民族之光)'으로 불릴만큼 후세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죠. 무장의 패기가 느껴지는 <만강홍(滿江紅)>도 중국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군가나 노래로 만들어져 중국인들의 민족자존을 상징하며 애송되는 작품입니다.
『사조영웅전』서두에 등장하는 이야기꾼 장십오(張十五)가 취해서 읊는 '靖康恥, 猶未雪 ; 臣子恨, 何時滅? 駕長車...'대목이나,『소오강호(笑傲江湖)』에서 조천추(祖千秋)가 영호충(令狐沖)에게 술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에서 와인을 마실 때는 야광배(夜光杯)에 따라 마셔야 한다며 인용하는 '壯志飢餐胡虜肉, 笑談渴飮匈奴血'부분이 바로 만강홍(滿江紅)입니다. 특히 조천추가 이 만강홍을 인용하는 직전의 대목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葡萄美酒盛入夜光杯之后, 酒色便與鮮血一般無異,飮酒有如飮血.
와인을 야광배에 따르면 빛깔이 새빨간 핏빛이 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것이 피를 마시는 것 같습니다.
笑談渴飮匈奴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목이 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인육을 뜯어먹고, 피를 마시는 중국인의 식인풍속(Canivalism)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부적절할 것 같고, 와인과 피의 비유는 소설과 영화로 나온 다빈치코드(The Da Vinci Code. 2006)에서도 문제되는 '최후의 만찬'장면에서의 'Drink all of you from this, this is my blood.'의 성경구절에서 처럼 예수가 와인이 피의 대용품이라고 설명함으로서 와인의 지위를 결정적으로 높여주는 역활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예수의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면모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Denis Diderot(1713~1784)는 'Canivalisme' 항목에서 최후의 만찬과 성체성사를 식인풍속과 관련해서 설명하기도 하더군요.(신학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요한복음 2장 1절이하 '가나의 혼인잔치'(The wedding at Cana)에서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대목(They did this; the steward tasted water, and it had turned into wine.)은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영국의 詩人 바이런이 케임브리지대학에 재학중일 때 이 구절에 대한 논술시험을 치르면서, 한 줄 답안을 쓰고도 최고 점수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죠. 바이런의 답안은 'The water met its Master and blushed.(물이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다)'였답니다.^^b 음주와 흡혈의 문화적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가 있긴 하더군요. 하지만 옛날 효자들이 병든 부모를 살리기 위해 허벅지살을 베어 먹이거나(割股),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는(斷指) 효심을 식인문화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조금은 억지가 있겠지요.^^
만강홍(滿江紅)은 중화음식점 이름으로 더 익숙한데, 개구리밥이라죠.^^ 겨울철에는 색깔이 붉은 빛으로 바뀐다는데, 물빛에 비쳐 더 붉게 보여서 滿江紅이라고 한답니다. 이 사(詞)는 악비가 금나라를 치기위한 1차 북벌을 성공해서 청원군절도사(淸遠軍節度使)로 승진도 했으나, 적의 후방까지 깊숙히까지 진출하는 바람에 보급지원이 원활하지 못해서 1134년 8월하순 악주(鄂州),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으로 철수할 때 전군의 사기도 충천하고 내리는 비마저 그치자, 악비가 감개무량해하며 지은 작품이랍니다. 그런데 만강홍 중에 백발운운하는데, 이 작품 당시 악비가 31살입니다. 상투적인 문학표현인지, 아니면 전장을 헤매다보니, (원래 직업군인들이 조금 빨리 늙는 경향이 있기도 하죠.) 겉늙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판본에 따라서는 '朝天闕'이 아닌 '朝金闕'로 되어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만강홍(滿江紅)>이 정말 악비(岳飛)의 작품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모양입니다. 주로 <만강홍>이 명대부터 인용되고 알려지는데, 명나라때의 작품이 악비의 이름으로 가탁되어 진 것이라는 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일단 악비관련 자료를 수집했던, 악비의 손자 악가(岳珂 1183~1243)가 편찬한 『악왕가집(鄂王家集)』에 이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논란이 '駕長車踏破賀蘭山缺!'의 하란산(賀蘭山)이라는 지명과 관련되는 것 같은데, 일단 하란산은 닝샤(寧夏)회족자치구에 있다는 주석이 있고 그렇게 알려져왔습니다. 이 지역은 중국의 시인들이 서역으로 나가며 그 일대를 배경으로 작품을 쓸 때 상투적으로 인용하는 지명이기는 한데, 당시 금나라의 주력은 지금의 지린성(吉林省)이니까, 악비가 목표로 삼을 이유가 없는 전혀 뜬금없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구절도 1489년 명나라의 왕월(王越)이라는 장수가 닝샤(寧夏)의 하란산일대에서 말갈족을 칠때 항전구호(踏破賀蘭山闕)라는 주장이 있어서 이 작품이 적어도 명대의 작품이며 악비의 이름이 가탁된 것이 아닐까하는 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의 주장으로는 하란산(賀蘭山)은 3곳이 있다고 하는군요. 앞의 닝샤(寧夏)회족자치구 뿐아니라, 장시성(江西省) 간저우(贛州)에도 하란산이라는 지명이 있었고, 허베이성(河北省) 츠셴(磁縣)에 송나라때 하란산으로 불린 지명이 있었는데, 츠셴(磁縣)의 옛지명이라면 위치로 볼 때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김용다관에도 관련 글이 올라있고, 이렇게 <만강홍>의 하란산을 추정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넓은 땅덩어리에서 이런 옛날 지명까지 찾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죠.^^
악비(岳飛)
악비(岳飛 1103~1142)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땅인(湯陰)의 가난한 농가출신으로, 19에 군에 입대했으나, 황하의 범람으로 홍수에 아버지 악화(岳和)를 여의고, 정강의 변(靖康之變)이 있던 1126년 23의 나이에 본격적인 군생활을 시작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어머니 요씨(姚氏)는 군대로 떠나기 전에 아들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글자의 문신을 새겼다는데, 나라 국(國)자에서 점을 뺏다는군요. 빼앗긴 국토를 수복해서 살아 돌아오면 나머지도 새겨주겠다며... 글쎄요.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이 살아오기보다 오히려 국가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어머니들! 가미가제(神風)특공대로 아들을 내보내며, 죽어서 야마토다마시(大和魂)로 돌아올 것을 당부했다던 일본의 어머니들도 장한 어머니들이시겠죠. 아무튼 精忠報國 네 글자는 악비가 평생을 지켜나가는 신념이 됩니다. 흔히 우리 이순신장군을 악비에 비견하기도 하는데, 악비도 120여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전승무패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금나라의 군대에게 악비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적이었는지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넷째 아들인 올술(兀術 ?~1148)은 연전연패 끝에 '撼山易, 撼岳家軍難'(산을 옮기기는 쉬워도, 악비의 군대를 이기기는 힘들다.)고 털어 놓기도 합니다.
이렇게 악비는 연전연승하고, 강력한 북벌을 주장하지만, 송 고종(高宗)과 진회(秦檜 1090~1155)는 번번히 거절하고 금과 화친을 추진하죠. 1141년 악비의 군대가 개봉(開封)근처 4,50리 떨어진 주선진(朱先鎭)까지 진출하는데, 조정에서는 무려 12번에 걸쳐 회군할 것을 명령합니다. 결국 회군하게 되는 악비의 한스러움이 짐작이 되기도 하는데, 十年之力, 廢於一旦(십년 쌓은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구나)며 탄식했다고 전해집니다. (제 친구녀석 이야기로는 전투에 이긴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며, 악비가 충신이기는 하지만 국가경영은 다른 문제라는 조심스런 언급을 하더군요.^^) 결국 지금의 항조우(杭州)인 임안(臨安)으로 돌아간 악비는 병권을 박탈당하는데, 금과 화친을 추친하던 중에 올술(兀術)이 악비를 죽여야 화친을 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겁니다. 이 조건을 거절할 수 없었던지 일단은 악비가 반역의 죄목으로 투옥이 되는데, 진회(秦檜)가 아무리 악비의 주변을 수색해도 명목을 찾을 수 없자, 진회의 부인인 왕씨가 황제는 무소불위의 존재니까, 황제의 권위를 빌려 '莫須有'(혹시 있을지도 모른다)는 명목으로 악비와 그의 아들 岳云(1119~1142)을 엮을 것을 부추깁니다. 막수유(莫須有)! 기가 막히지요.^^
이 부분『송사(宋史)』<악비전(岳飛傳)>에 기록이 보이는데, 악비와 같이 금에 대항했던 장군이던 한세충(韓世忠 1089~1152)이 악비를 구명하고자 어떻게 아무런 증거도 없는 충신을 잡아넣을 수 있는냐고 묻습니다.
檜曰: 飛子雲與張憲書雖不明, 其事體莫須有.
악비, 아들 악운, 부하 장헌의 진술만으로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럴만한 사건이 혹시 있었는지도 모르잖소.
世忠怫然曰: 相公! 莫須有三字, 何以服天下乎?
혹시 있었을지도 모른다(莫須有)! 이 세글자로 어떻게 천하를 납득시킨단 말이오.1142년 1월27일 항쩌우(杭州)의 풍파정(風波亭)에서 39의 악비(岳飛)는 송 고종(高宗)이 내린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둡니다. 악비가 문무를 겸전한 인물로 전해지기도 하고, 그의 글들을 자손들이 정리해서『악충무왕문집(岳忠武王文集)』으로 편집되어 있기는 한데, 작품 속의『무목유서(武穆遺書)』같은 전문적인 병법서를 저술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데, 그가 39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을 감안하더라도 저술하기는 힘들었겠지요. 물론 악비는 이후로 복권이 되어 악왕(鄂王)으로 추증되고, 군신(軍神)으로까지 숭상되기에 이릅니다. 항조우(杭州)의 서호 인근 악비의 무덤이 있는 충렬사(忠烈祠)에는 그의 좌상과 함께 그의 죽음에 관여한 진회(秦檜), 진회의 부인 왕씨, 만사설(万俟卨), 장준(張俊), 왕준(王俊)의 5명이 악비의 거대한 좌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있는 철상(鐵像 五跪像)이 조성되어 있는데, 중국인 방문객들은 악비묘를 관람하기 전에 이 다섯명에게 침을 뱉는 것부터 시작하더군요. 그런데 작년(2005년) 10월 상해에서 진펑(金鋒)이라는 조각가가 꿇어앉은 진회부부를 일으켜 세운 입상을 전시하려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는군요. 물론 그 이전에는 중국정부가 오족공화(五族共和)의 입장에서 교과서에서 악비가 민족영웅이라는 서술부분을 제외시킨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도 있었죠. 동북공정과 악비격하 움직임은 결국 같은 맥락일까요?
곽정과 양과
요티아오(油条)
요티아오(油条) : 중국인들의 아침식사 / 진회(秦檜)가 얼마나 미웠으면 기름에 튀겨 자근자근 씹어먹어 버리고 싶어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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