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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역대 왕조 순서와 역사 (양사오 문화 에서 ~ 청나라 까지)
    카테고리 없음 2021. 7. 17. 16:09

    1. 양사오 문화(BC 5000 ~ BC 3000)

     

    중국 황화의 중류 지역에서 나타난 신석기시대  문화로서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까지 존속하였다. 양사오문화의 유적은 산시성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허난성 서부와 산시성 남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간쑤성과 칭하이성의 경계, 남쪽으로는 후베이성의 서북지방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양사오문화는 백색, 적색, 흑색 토기에 인면, 동물,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채도를 특징으로 하여 채도문화라고도 한다.

     

    2. 룽산 문화(BC 3000 ~ BC 2000)

     

    중국의 황화 유역에서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 무렵까지 존재했던 신석기시대 후기의 문화로서 마치 달걀껍질처럼 얇고 정교하게 제작된 흑도와 회청색의 도질토기인 회도를 특징으로 한다.

     

    3. 하 왕조(BC 2070 ~ BC 1600 무렵)

     

      

    사기》〈하본기〉에 의하면, 하왕조의 시조 우왕은 기원전 2070년 왕조를 개국하여, 황허의 홍수를 다스리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으로 순이 죽은 뒤,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 우는 제위를 민간의 현자에게 양여하려고 하였으나, 제후는 우의 아들 계를 추대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선양제가 없어지고 상속제에 의한 최초의 왕조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17대 걸왕 이르러 정치가 포악을 극하였으므로 민심을 잃어서 상나라 탕왕에게 멸망하였다. 만일 하왕조가 실재해 있었다면 그 위치는 오히려 산시성 남서부를 중심으로 한 황토대지에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4. 상 왕조(은나라 BC 1600 ~ BC 1046)

    은 문헌에 따라 은이라는 명칭도 나타나 한때는 국가의 명칭을 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은은 상왕조의 마지막 수도일 뿐이며, 은()이라는 명칭은 상 왕조가 멸망한 뒤 주()에서 상의 주민들을 낮게 호칭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명칭은 상()이다.

     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에 군림하였던 실재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상은 고고학적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중국의 가장 오랜 국가이다. 상나라 전기는 기원전 1600년부터 1300년까지이고, 도읍을 은으로 바꾼 상나라 후기는 1300년부터 1046년까지이다.

     

    5. 주 왕조(BC 1046 ~ BC 771)

    나라는 왕실의 일족과 공신을 지에 두어 다스리도록 는 봉건제도로 유명다. 봉건이란 말의 원래의 뜻은 곧 주나라의 국가체제를 지칭하는 이었으며, BC 11세기 주나라 무왕 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호경에 정여 주왕조를 건설였을 때 나라의 기초를 굳히기 위여 실시한 제도였다.

     

    견융이 침략하여 기원전 771년 유왕이 살해되고 제후에 의해 옹립된 평왕이 호경(현재의 시안 시 부근)에서 부도 낙읍(현재의 뤄양 시)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 이후를 동주(기원전 770년 ~ 기원전 256년)라고 구분한다.

     

    6. 춘추전국시대(BC 770 ~ BC 221)

    BC 770년, 주()왕조가 뤄양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시대를 서주시대, 이후를 동주시대라고 한다. 동주시대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누어 진다.

    춘추시대는 주왕조가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진나라의 대부인 한· 위· 조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BC 770 ~ BC 403년).

     


    전국시대는 그 이후부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이다.

     

     

    7. 진나라(BC 221∼BC 206)

     

    중국 주()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였다가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

     

    8. 한나라​ (BC 206 ~ AD 220)

    기원전 206년에 고조 유방이 세운 왕조로서 서기 9년에 왕망이 정변을 일으켜 신나라를 건립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서기 25년에 한나라 왕조의 후예인 유수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다시 한나라를 건립했으니, 그가 광무제이다. 역사에서는 전자를 전한 또는 서한, 후자를 후한, 또는 동한으로 구분한다. 후한은 서기 220년에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강압에 의해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제위를 물려줌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전한 (BC 206 ~ AD 8) 수도: 장안



    신나라 (AD 8 ~ AD 23) 수도: 장안


    후한 (AD 23 ~ AD 220) 수도: 낙양

     

     

    9. 위진남북조시대(221∼589)

     

    중국 역사상 후한()이 멸망한 다음 해부터 수()의 문제()가 진()을 멸망시키기까지의 시대.

     

     

    10. 삼국시대(220~280)

     

    중국의 후한 멸망 후, 위()ㆍ촉()ㆍ오() 3국이 분립한 시대

     

     위나라: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씨 세력은 촉한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급격히 성장한 사마의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제위마저 내주고 말아 46년의 역사로 그 끝을 맺는다.

     

     촉나라: 220년 사실상 한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위왕 조비가 헌제를 내쫓고 제위를 찬탈하자, 당시 익주와 한중을 점거하고 있던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역사적으로 “촉한”이라 불린다). 수도는 성도이다.

    유비 사후 유선에 이르러 진지 · 황호와 같은 간신의 발호와 무리한 북벌로 점점 쇠망의 길을 걷다가, 264년 위의 대대적인 정벌에 43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오나라: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의 하나로 친자 3대에 걸쳐 구축되었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인재를 갖추었으며, 잦은 군사적 진출 시도에서는 미흡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방어전에서는 양호한 전적을 보였다. 상황에 따라 촉한 · 위와 화평을 맺는 유연한 외교술을 펼쳤다.

    마지막 황제인 손호가 서진의 사마염에게 항복함으로써 삼국 시대는 그 끝을 맺는다.

     

     

    11. 서진(265년 ~ 317년)

     

     

    촉한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의 중신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건국했다.

     

     

    12. 동진(317년 ~ 420년)

     

    중국의 서진 왕조가 유연(4세기 말부터 6세기 말까지 중국 북쪽 경계 지역에 존재했던 유목민족의 국명이다)의 전조에게 멸망한 후, 사마예에 의해 강남(江南)에 세워진 진의 망명 왕조이다. 서진과 구별하여 동진이라고 부른다.

     

     

    13. 5호 16국(304~439) 

     

    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멸망한 후, 5개의 비한족을 비롯한 16개의 국가가 회수 북부에 여러 나라를 세우며 난립하던 시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전조(304~329)가 건국된 304년부터 북위(386~534)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5호는 흉노, 선비, 저, 갈, 강 등 다섯가지의 오랑캐(胡:비한족을 격하시켜 부르는 말)를 가리키는 말.

    16국이란 말은 북위 말엽의 사관 최홍이 쓴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유래하였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세워진 나라의 숫자는 16개가 넘는다.

    16국: 한(전조), 성한, 전량, 후조, 전연, 전진, 후연, 후진, 서진, 후량, 남량, 남연, 서량, 북량, 하, 북연

     

     

    14. 남북조시대(420~589)

    한족이 세운 남조와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다,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440년, 남북조 전기 강역도: 하늘색이 북위,  빨간색이 송


     

    560년, 남북조 후기 강역도:  하늘색이 북주,  파란색이 북제

                                           분홍색이 후량,  빨간색이 진

    북조

    화북에서는 선비족 탁발부가 건국한 북위가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북방 유목민의 부족제을 해체하고 귀족제에 의거한 중국적인 국가로 탈피했다.

    북위는 육진의 난을 거치면서, 534년에 동위, 서위로 분열하였다. 동위는 550년 북제로 정권이 바뀌고, 서위는 556년에 북주가 대신했다. 577년 북주는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

     

    남조

    420년 유유가 동진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한다. 송나라의 창시자 유유와 함께 군사에서 공적을 세우며 등장한 이가 소도성이었다. 소도성은 6대 명제의 뒤를 이은 폐제 욱을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한 후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500년에 일어난 소연(蕭衍;후에 양의 무제)의 반란은 동혼후의 동생 소보융(화제)을 옹립해 건강으로 진군하여 포위하였고 건강에 입성한 소연은 다음해 502년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양나라를 건국하였다. 557년 진패선은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나라를 건국했다.

     

     

    15. 수나라(581년 ~ 618년)

     

     

    그 후 581년 양견이 북주의 정제로 부터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올라 수나라를 건국한다. 589년 수나라는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화북의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의 5개 왕조를 가리켜 북조라고 불렀고, 여기에 수나라도 합쳐야 한다는 설도 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서진이 멸망한 후 분열되었던 중국을 약 300년 만에 재통일한 왕조이다. 그러나 2대 황제 양제 때 폭정으로 인해 멸망하고, 그 후 약간의 혼란기를 거쳐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수도는 대흥성(大興城: 현재의 시안)이었다.

     

    16. 당나라(618년 ~ 907년)

     

    수나라 왕실의 외척이자 선비계 귀족인 이연이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장안에서 당 왕조의 개국을 선포하고 고조로 즉위하였다. 당나라는 선비족 계열의 귀족인 이연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할 정도로 매우 번영했고, 정치와 경제와 문화 등 다방면적으로 완벽히 발달된 제국이었다. 현재까지도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대제국으로 평가받는다. 당나라는 한족왕조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위진남북조를 통일한 유목민 중심의 북조의 수나라를 계승했기에 한문화와 유목문화의 융합의 결정체라 볼 수 있다. 당나라는 이전의 단일된 한문화에서 다문화적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엄밀히 보면 한족만의 왕조라 보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당나라 희종 연간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인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17. 5대10국 (907년~960년)



     

    중국역사에서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 부터, 송나라가 건립된 960년까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화북을 통치했던 5개의 왕조(오대)와 화중·화남과 화북의 일부를 지배했던 여러 지방정권(십국)이 흥망을 거듭한 정치적 격변기를 가리킨다. 오대 십국의 오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뜻하며, 십국은 오월, 민, 형남, 초. 오,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포함한다.

     

     

    18. 요나라(916년 ~ 1125년)

     

     

    ​(분홍색이 요나라, 초록색이 서하, 밑이 송나라)

    4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거란의 8부족은 9세기말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916년 질라부의 야율아보기가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동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19. 송나라(960년~1279년)

     

     

    (북송)


    (남송)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개봉(카이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송이었으나, 춘추시대의 송, 남북조 시대의 송 등과 구별하기 위해 황실의 성씨를 따라 조송이라고도 부른다. 통상 1127년 금나라의 확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 임안(지금의 항저우)에 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이라고 불러 구분하였다. 북송·남송 모두 합쳐 송, 송 왕조라고도 한다. 수도는 개봉, 남쪽으로 옮긴 후 실질적인 수도는 임안이다. 훗날 원나라에게 멸망당한다.

     

     

    20. 서하(1032~1227)

     

    중국 북서부의 간쑤 성, 산시 성에 위치했던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왕조이다. 왕성은 (李)씨이다. 전성기에는 북으로는 고비 사막, 남으로는 난주, 동으로는 황허, 서로는 옥문에 이르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초록색이 서하, 파란색이 금나라, 밑이 송나라)

     

    탕구트족은 자신의 나라를 "크고 높은 나라"(大白高國)라고 불렀었다. 당나라는 탕구트족을 평하부, 남산부, 동산부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9세기 후반 황소의 난 당시 평하부의 탁발사공이 장안의 수복에 결정적 기여를 하여 당나라로부터 황실의 성인 이씨를 하사받고, 하국공으로 봉해진다. 1005년 송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덕명은 송나라와 화의하고 송 황실로부터 조씨 성을 하사받고 은주, 유주 절도사의 직책을 받는다. 1038년까지는 송나라의 신하국이었다.

     

    1038년 서하의 원호가 조씨 성을 버리고 탕구트어에 의한 성으로 바꾸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의 이름을 대하로 정해 고대 중국 하나라의 계승을 자처하였고 연호를 천수예법연조로 고쳤다. 서하 문자를 제정하고 관제를 확립하는 등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려 하였다. 서하는 송나라에게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송나라는 서하 황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하는 1227년 칭기즈 칸의 몽골군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21. 금나라(1115년~1234년)

     

    여진은 본래 갈족, 말갈족, 선비족이 융화된 민족이다. 삼국 시대 갈족과 선비족이 대륙에 침투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5호 16국 시대 나라를 세웠다. 선비족은 6개의 부족이 강성하다가 탁발부가 5호 16국을 정리하고 화북을 통일 북위을 세운다. 이후 말갈, 갈족은 선비족의 예하 부대에 포함되어 그들의 영향을 받다가 점차적으로 요동으로 이동하였다.

    (파란색이 금나라)

     

    여진족 완안아골타가 세운 왕조로 1115년 아골타가 국호를 대금, 연호를 수국이라고 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정식으로 금나라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수도는 북송 시대에는 상경 회령부, 남송 시대에는 중도였으며, 몽골의 침략 이후로 수도를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1125년에 여진의 금왕조는 거란족의 요를 합병(거란족 중 왕족의 한 명인 야율대석은 거란족을 포섭해서 서요를 세우나 징기즈칸에 의해 망한다.)하고 1153년에 수도를 요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라고 불렀다. 1215년에 몽골이 중도를 불태우고 1237년에 중도 북쪽에 대도를 건설하였다.

     

    22. 원나라(1260년 ~ 1368년)

     


    (칭기스 칸 붕어 직후인 1227년의 몽골제국 지도)

    1206년 테무진은 몽골 지방의 동부를 흐르는 아무르 강의 지류인 오논 강변에서 부족연합의 군장인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면서 통일제국의 성립을 보았다.

    통일 이전 칭기즈 칸은 바이칼 호의 남쪽과 동남쪽의 초원지대에서 패권을 다투던 여러 부족장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으나 몽골 제국의 건국과 함께 그의 권위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의 호전적인 성격이 주변 여러 부족들을 향한 정복전쟁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공격목표는 중국 서북방의 변경국인 탕구트족의 서하왕국이었으며, 이어서 고원 북부의 오이라트나 서북방의 키르기스, 기타 삼림지대의 부족들을 정복해 나갔다. 또한 서요를 정벌하고 위구르·카를루크 등을 굴복시켰으며, 1211년에는 마침내 조상의 오랜 숙적인 금나라를 침입해 황허 강 이북과 만주 땅을 점령하고 금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갔다.

     

    (1294년 원나라 영토)

     

    제4대 칸인 몽케가 죽자,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케칸의 부재 중 대리로 일을 맡고 있던 막내동생인 아리크 부케는, 그의 부하와 우구데이계 제왕의 지지를 얻어 대칸위에 오르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시적인 화평조치를 취하고 급히 귀환하여, 그의 신복들로 구성된 쿠릴타이의 추대를 받아 제5대 대칸에 올랐다. 그 후 아리크부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1271년 국호를 원으로 개칭하였다.

     

    원나라 건국 당시 쿠빌라이의 세력은 몽골 고원과 기존 금나라가 점유하던 화북 지역에 불과했다. 장강 이남에 버티고 있던 남송은 뛰어난 경제력을 갖춘 것은 물론, 금나라 멸망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 충분히 원나라를 위협할 만한 군사력도 갖춘 터라, 그대로 유지시켰을 경우 원나라의 지배가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력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방화를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23. 명나라(1368년 ~ 1644년)

     

    (1415년 명나라)

     

    몽골이 건국한 원나라 왕조는 14세기에 들어와 제위상속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 통치능력이 저하되었다. 거기에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차례로 일어났기 때문에 백련교도가 1351년에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홍건군에 속한 장수였던 가난한 농부 출신 주원장(훗날 태조 홍무제)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홍무제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대외적으로 위협이 되는 세력인 남부 해안지역에서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고 북방을 정벌하였고 만주족 등 북방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성하였다. 하지만 영락제 이후 명은 퇴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정치적으로는 환관이 다시 득세하여 황제는 정사를 돌보지 못했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상업의 발달은 일부 기득권층에 토지가 집중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때문에 부를 균등하게 분배하지 못했고 관리는 점차 부패하고 토지를 잃은 유민이 속출하여 명나라의 명운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몽골족과 왜구의 침입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후기에는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 명나라를 압박하였다. 결국 1643년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16대 277년만에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24. 청나라(1616년 ~ 1912년)

     

     후금(1616년 ~ 1636년)

    금나라 멸망 이후, 여진은 야인 여진, 해서 여진, 건주 여진으로 나뉘었다.

    그 후 1586년 누르하치가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든다. 누르하치는 옛 금을 계승하고 부흥시킨 의미에서 다시 금이라는 이름으로 1616년 나라를 만든다. 이전에 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후금이라 불린다.

     

    (1896년 청나라 영토)

     

    누르하치의 후계자 홍타이지(재위: 1626~43년)는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1636년) 주변 각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다. 홍타이지의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재위: 1643~61년)때 섭접을 했던 삼촌 도르곤(예친왕)이 청의 팔기군을 거느려 산해관을 넘어서 이자성의 농민군을 격파하고 명나라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1644년)

     

    만주족이 세운 청은 원나라와는 달리, 한족을 중용하였으며 그들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기에 힘썼다.

     

    청은 1911년 10월 10일에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인해 결국 1912년에 멸망하였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청나라 황실은 자금성 내에서 청나라 소조정을 이루어 사실상 고립된 상태로 사직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펑위샹의 정변으로 인해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그 이후, 1949년에 국공 내전으로 인하여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출처 아주르블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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