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虞美人(우미인) /이욱(李煜 937~978)/등려군카테고리 없음 2021. 7. 7. 14:16
虞美人 (우미인) 几多愁(기다수) (등려군)
春花秋月何时了? (춘화추월하시료) 꽃피는 봄날 달밝은 가을은 어느 시절이었나
往事知多少。(왕사지다소) 잊지 못할 옛일은 많고 많더라.
小楼昨夜又东风 (소루작야우동풍) 초라한 누각에 지난밤 또 봄바람이 불고故国不堪回首月明中。(고국불감회수월명중) 밝은 달 바라보니 고향 생각에 못 견디겠네
雕栏玉砌应犹在 (조란옥체응유재) 아름다운 난간 옥돌 계단는 그대로 있겠지
只是朱颜改。(지시주안개) 다만 이 몸만 늙었구나
问君能有几多愁? (문군능유기다수) 묻나니 그대 시름이 그 얼마인가?
恰似一江春水向东流。(흡사일강춘수향동유) 흡사 동쪽으로 흐르는 봄의 강물과 같구나
등려군이 부른 우미인
此调原为唐教坊曲: 이곡의 원래 곡조는 당나라의 악부의 교방곡이다
初咏项羽宠姬虞美人 因以为名。: 최초에 읊은것은 항우가 사랑한(애첩)
우미인(우희)를 말하는것으로 그것을 근거로 사패명을 '우미인'이라 불렀다
又名一江春水 또 다른이름 일강춘수로 불렸으며、玉壶水(옥호수)、
巫山十二峰(무산십이봉)等 등이며。双调(쌍조),五十六字(56자),
上下片各四句(상하편 각4구),皆为两仄 (개위양측) 转两平韵 (전양평운)으로 되어 있는곡이다。
<<李煜(이욱)>>이욱(李煜:937~978)의 자는 중광(重光)이다. 5대10국 시대에 남당의 마지막 왕이었기에 이후주(李後主) 또는 남당후주(南唐後主)라고도 불린다. 서화와 음악을 비롯한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고, 특히 사(詞)의 영역에서는 당나라 말기와 5대10국 시대를 통틀어 제1인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는 크게 전후 기로 나누어진다. 전기의 작품은 우아하고, 진실성이 풍부하다. 후기의 억류 시대에 들어서는 침울하고 비장한 취향을 곁들여저, 일반적인 노래에 지나지 않았던 사를 지식적 가치의 문학으로 고양시켰다. 이욱은 예술성이 풍부하고 진실한 감정 표현으로 ‘사(詞)의 제왕’이라 불리운다.
남당(南唐)은 양자강 하류의 곡창 지대를 영유한 그 무렵의 문화 중심지였지만, 북방에서 일어난 송나라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서기 975년에 항복해 멸망하고, 이욱 또한 체포되어 3년 뒤에 특히 故国不堪回首月明中 (밝은 달 바라보니 고향 생각에 못 견디겠네)이 귀절이 송 태종의 분노를 샀다는 말이 전해진다 하여 송 태종에게 독살 당하여 세상을 떠났다.이욱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남당(南唐)의 마지막 왕으로 자는 중광(重光), 호는 종은(鍾隱)이다. 역사적으로 이후주(李後主)라고 불리는 그는 운명적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송(宋)에 신하의 예를 다하는 가운데 국세가 헤아릴 수 없이 기울어 가는데도 매일 연회를 베푸는 등 방탕한 생활로 15년간 재위하다가 송이 금릉(지금의 난징)을 점령하자 항복했다. 이후 북송의 수도였던 변경(지금의 허난성 카이펑)으로 끌려와 3년 동안 굴욕적인 구금 생활을 하다가 결국 송 태종 조광조에 의해 사사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황제의 자리에 관심이 없었고, 황제가 그의 성격에 맞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유약했다. 나라가 패망해도, 굴욕적인 구금생활을 해도, 더 나아가 그의 애첩이 조광조에 의해 유린당하는 등의 치욕을 당해도 어쩌지 못하고 술과 시로 버티다가 결국 독살당했다.
이욱은 글씨도 잘 썼다. 위의 글씨는 우미인(虞美人) 앞 구절이다.
風回小院庭蕪綠,柳眼春相續。
작은 뜰에 바람 불어 풀은 무성한데
버들 꽃망울이 봄을 이어가네
憑闌半日獨無言,依舊竹聲新月似當年。
반나절 난간에 기대어 홀로 말이 없는데
대나무 소리 초승달 여전히 그때와 같구나
笙歌未散尊罍在,池面冰初解。 (前佳)
술잔 앞에 생황 노랫가락 아직도 아련히 들리는 듯한데
연못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구나
燭明香暗畵楼深,满鬓清霜殘雪思難任。(禁)
촛불 밝고 향기 은은한데 화려한 누각 밤은 깊어가고
서리 같은 백발 눈 내리는 듯하였으니 아, 생각조차 감당하기 어렵구나
虞美人(우미인) 李煜(이욱)
春花秋月何時了 往事知多少
춘화추월하시료 왕사지다소
봄꽃 피고 가을달 뜨던 시절 그 언제 다했는지,
하많은 지난날 그 얼마나 아시는가?
小樓昨夜又東風 故國不堪回首月明中
소루작야우동풍 고국부감회수월명중
초라한 누각엔 지난 밤 또 봄바람 불어왔거늘
휘영청 달 밝으니 감히 고개 돌려 고국을 보지 못할레라.
雕欄玉砌應猶在 只是朱顔改
조란옥체응유재 지시주안개
화려한 난간이며 계단은 그 자리 그대로 있으련만
다만 변한 것은 젊었던 내 청춘뿐이로다.
問君能有幾多愁 恰似一江春水向東流
문군능유기다수 흡사일강춘수향동류
그대에게 묻나니, 하많은 시름 그 얼마이던가?
흡사 동으로 흐르는 한줄기 봄날 강물과도 같나니.
虞美人(우미인)의 시(詩)
漢兵己略地 四面楚歌聲
한병기약지 사면초가성
大王義氣盡 賤妾何聊生
대왕의기진 천첩허료생
한군이 이미 초나라를 덮었고
사면은 온통 초나라 노래인데
대왕의 기운 이미 다하니
내 구차히 살아서 더 무엇 하리.
항우(項羽)의 해하가(垓下歌)에 화답(和答)한 시(詩)로써, 이 시(詩)를 남기고 우미인(虞美人)은 자결(自決)을 했다고한다.
우미인( ?-BC 202)이름은 우희. 사기 (史記)에는 이름이 '우'로 되어 있고, 한서(漢書)에는 성이 '우'로 되어 있다. 항우는 해하(지금의 안후이 성 링비 현 남동쪽)에서 한(漢)나라 고조 유방의 군대에 포위되어 사면초가의 형국에 있을 때, 막사에서 주연을 벌여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한탄했다.
그때 곁에 있던 우미인이 노래로써 그에게 화답했다고 하는데 그 가사만이 전하고 있다.
괄지지(括地志)에 의하면 그녀의 묘지는 호주 딩위안 현[定遠縣 : 지금의 안후이 성에 있음] 동쪽 30㎞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항우(項羽)의 애첩(愛妾). 우미인은 속칭이고 우는 성(姓)이면서 이름이라고도 한다. 항우는 진(秦)을 타도하고 서초(西楚)의 패왕(霸王)이라고 칭하여 한(漢)의 유방(劉邦 ; 고조(高祖))과 패권을 다투었으나 패배하여 포위되었다. 항우는 밤에 사방을 포위한 한군(漢軍)이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유방이 이미 초를 점령하고 초나라 백성이 모두 적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진중에서 주연을 베풀고 우미인에게 석별의 노래를 부르게 하자, 우미인이 이에 노래로 대답하고 자살하였다 한다. 안후이 성[安徽省] 정원(定遠) 동쪽에 묘가 있는데 묘에 돋아난 풀이 우미인곡(虞美人曲)을 들으면 춤을 추어 움직이므로 이 풀을 우미인초(草)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후한 때 사람. 이름은 없어졌다. 낭중(郎中) 우시(虞詩)의 딸이었다. 양가의 자녀로 13살 때 순제(順帝)의 액정(掖庭)에 들어갔다. 충제(冲帝) 유병(劉炳)과 무양장공주(舞陽長公主)를 낳았다. 순제 때 작호(爵號)가 더해지지 않았다. 충제가 요절한 뒤 대장군(大將軍) 양기(梁冀)가 정권을 잡자 다른 집안이 현달하는 것을 미워하여 우씨(虞氏)를 억압하면서 단지 ‘대가(大家)’로만 부르게 했다. 영제(靈帝) 희평(熹平) 4년(175) 헌릉귀인(憲陵貴人)으로 임명되었다.
이욱[李煜, 937~978.8.15]자 중광(重光). 호 종은(鍾隱). 초명 종가(從嘉). 중주(中主) 경(璟)의 여섯째 아들이다. 성격이 온화하였으며, 학문과 문예를 좋아하고 서화(書畵)의 기법과 감상에도 뛰어났다. 예술가 기질의 정치가로서 정치정세가 급박한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신하들과 주연(酒宴)에 빠져 국가의 멸망을 초래하고 사로잡혀 죽었지만, 음률(音律)에 정통하고 사(詞)의 작자로 이름이 높았다. 작풍은 나라가 망하기 전의 화려한 유미적(唯美的) 경향인 것과, 망국 이후의 침울한 주정적(主情的) 경향인 것으로 대별되지만, 사(詞)를 서정시로서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垓下歌(해하가) 項羽(항우)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騶不逝
력발산혜기개세 시불리혜추불서
騶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추불서혜가내하 우혜우혜내약하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천하를 덮었건만
때가 불리했도다, 추도 달리지 않는구나
추가 달리지 않으니, 내 어찌하랴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한단 말인가
項羽(항우 BC 232 ~ BC 202)는 중국 진나라(秦 : BC 221~206) 말기의 장수이며 진을 멸망시킨 반란군의 지도자.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 한(漢 : BC 206~AD 220)을 세운 유방(劉邦)과 관중[關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항우가 패함으로써 중국에서 봉건제가 일소되었다
항우는 한을 세운 유방과 관중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으며, 그의 패배로 중국에서 봉건제가 일소되었다.항우는 진나라가 전 중국을 통일할 때 진에 흡수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초나라 유력가문의 후손이었다. 진에 대항하는 반란에 합류하여 초군의 최고 지휘자가 되었다. 항우가 이끄는 군대는 진의 수도를 점령하고 마지막 황제를 처형한 후 옛 통치체제를 회복시키려고 했다. 우선 옛 초 왕실의 후예를 맞아 회왕이라고 하고, 반란에 가담했던 여러 장수들에게 전국의 여러 지역을 분봉해주었다. 자신은 옛 초나라의 영토에서 패왕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는 곧 회왕을 살해했고, 각지의 장수들이 패권을 놓고 싸우게 되었다. 그중 가장 강력했던 서부 지역의 유방이 초를 공격했고 유방은 패한 후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