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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이대방록 (明夷待訪錄)/황종희(黃宗羲1610~1695)
    철학/동양철학 2023. 7. 29. 09:24

    명이대방록 (明夷待訪錄)

     

    만민(萬民)을 위하여 전제군주제를 비판하다

    전제군주제의 전통을 비판하다

    인구와 영토의 방대한 규모에서 오늘날 아시아 제일의 대국인 중국은 2천 년 이상 지속된 전통적 제국(帝國)의 유산 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그 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정교하게 다듬어진 전제(專制)군주 체제를 토대로 해서 장기적 지속을 누리고 방대한 규모의 인구와 영토를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황제(皇帝)의 전제주의 전통에 대해 가장 철저히 분석해 비판한 책으로 유명한 것이 1662년에 나온 황종희(黃宗羲)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이다.

    그 시기는 19세기 말 황제 체제가 근대화의 장애 요인으로 본격적 비판을 받아 붕괴되기 꼭 250년 전이었다.

    『명이대방록』에서 전제군주제를 비판할 수 있었던 논거는, 천하 또는 국가를 군주나 왕조의 정권과 구분하고 인민을 위한 정치라는 유교의 민본적(民本的) 이념을 최대한 확장한 데 있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대개 천하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군주의] 한 성씨(姓氏)의 흥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萬民)의 근심과 즐거움에 있다.

    그러므로 [폭군인] 걸(桀)ㆍ주(紂)가 망함은 잘 다스려지는 원인이 되고 진시황(秦始皇)과 몽골(蒙古)가 일어남은 어지러워지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역사에서 진 제국의 성립 이래 한 번도 잘 다스려진 시대가 없었다고 비판하였으며, 군주의 국가 사유화, 즉 전제 정치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전제주의 비판에 대한 역사적 의미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기원전 221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천하통일을 이루고 중앙집권적 군현제(郡縣制)를 전국에 시행한 진시황이 중국 최초의 황제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진(秦)ㆍ한(漢)나라로부터 근세의 명(明)ㆍ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왕조의 교체는 있었으나 제국체제는 그 때마다 부활했으며, 황제는 1911년 공화(共和)혁명으로 이듬해 중화민국이 수립될 때까지 존속했다.

    특히 황제는 근대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관료 행정의 도움을 받아 제국 내 만민의 군주이자 가부장(家父長)이었으며 스승으로서 성인(聖人) 행세를 했다.

    그는 유교의 도덕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워 천하ㆍ만민에 대한 무한 책임을 주장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무제한적인 권위의 전제주의 이념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였다.

    이러한 황제의 도덕적 권위와 통일 제국의 힘은 바깥으로 세계 만국에 대한 황제의 종주권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세계사에서 로마 제국만이 중국에 필적할 만한 규모의 통일을 시간적으로 훨씬 오래 지속했다는 것은 중국 사회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장기적 안정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우선 괄목할 정치적 업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중국의 전제 체제가 전면적 비판을 받게 된 것은 19세기 말 근대화에 낙후하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그러한 정치 체제가 지목된 이후부터라 할 것이다.

    근대 이후 눈부신 발전을 한 서유럽 국가들의 민주적 개방 사회와 경쟁적 국제 질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이 정체된 결과 그러한 국가들의 압박을 받고 민족적 위기 의식이 싹텄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황제의 전제적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명ㆍ청 시대에 그러한 정치 체제를 비판했던 황종희는 뒤늦게 20세기 초 공화혁명 시기에 들어 민권(民權)의 선구자로서 중국의 루소라는 찬양을 받기도 했다.

    그의 『명이대방록』의 전제군주 비판은 아직 18세기 서유럽 계몽주의 사조의 합리성과 자유주의 인권 사상에 비할 만한 수준의 철저함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서유럽 계몽주의보다 선행할 뿐 아니라 중국의 오랜 전제군주제적 전통과 그 유례없는 정교함을 고려하면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매우 심각하다.

    사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군주가 없는 정치 체제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러한 사상의 출현도 매우 상상하기 힘든 희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서유럽에 가까운 봉건영주제(封建領主制)를 겪었다는 일본에서도 중세의 형식적 군주로서 존속했던 고대 천황(天皇) 제도를 오늘날까지도 폐지하지 못하고 있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근대 군국주의 시기는 물론, 최근 민주화 이후에도 권위의 상징으로 추앙되어 근린 국가들에 불편한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 제국 체제는 중세의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재통일 이후 더욱 발달하여 명ㆍ청시대에 이르러서는 제도상의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

    한편으로 상업화 등 새로운 사회 발전에 따라 체제 모순의 내면적 균열은 깊어갔으나 전제군주제의 가을은 아직 햇빛 눈부신 높푸른 하늘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금서로 묶인 『명이대방록』의 외로운 경고음은 부귀공명에 들뜬 과거 시험, 학문을 위한 학문에 매몰된 고증학의 번영, 물샐 틈 없는 정부의 문화 통제와 탄압, 이른바 문자옥(文字獄) 속에 한동안 파묻히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시대

    황종희는 17세기,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에 절강성(浙江省) 여요(餘姚)에서 태어났다.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와 함께 청나라시대의 3대 사상가로서 만주족(滿洲族)의 중국 침입에 저항해 세충영(世忠營)이란 부대를 끌고 의병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 투쟁이 무위로 돌아간 다음에도 지식인의 지조를 지켜 청나라 조정의 초무(招撫)에 응하지 않고 재야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당시는 중국 전제주의 체제의 모순이 심화된 명ㆍ청의 왕조 교체기로서 망국적 당쟁(黨爭)과 민중 반란, 이민족 침입 등 숱한 변란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무한의 권위를 갖고서도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황제, 그 전제 권력에 기식하는 부패한 관료와 환관(宦官)의 파쟁 및 권력 남용, 부패 정치에 저항하는 유교적 관료ㆍ지식인의 저항 운동 실패와 그에 따른 참혹한 당쟁의 재난, 유민(流民)의 대규모 반란 등이 이 시기를 특징짓는 현상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명나라는 동북 변방에 있던 만주족의 침입을 불러들였다.

    유교적 지식인으로서 윤리와 경세(警世) 의식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던 의로운 사대부들은 생명을 걸어야 했고, 당시 1억 5천만에 달했을 민중은 기근과 전염병, 비적과 반군ㆍ해적ㆍ의용병ㆍ청조 침입군이 난마와 같이 뒤얽힌 전란과 약탈의 대혼란 속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이 참혹한 시대를 황종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시대로 표현했다. 중국에서는 새 왕조가 일어날 때마다 한동안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하다가 그 뒤에는 주기적인 왕조 교체와 함께 어김없이 제국 붕괴의 대재난이 이어졌는데, 그 재난 또한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참담한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왕조 말의 주기적 참화는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중국의 역사는 통일 제국의 재건에서만 탈출구를 찾았고 이 제국의 재건을 책임질 천명(天命)을 받은 새 왕조의 도래를 기다렸다.

    새 황제는 도덕적으로 대성인이며 하늘의 위임을 받은 진명천자(眞命天子)로서 천하 만민을 먹이고 인간다운 윤리 질서를 되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중과 오랑캐의 반항으로 몰락한 명나라 왕조의 정치는 어떠했는가?

    황종희는 한때 이 망해 가는 왕조의 부흥을 위해 무장 투쟁에까지 참여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멸망이 기정사실화된 다음 황종희는 그에 대한책임자로서 황제 정치의 죄업을 냉정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왜 망했는가?

    전제주의적 제국 체제에서 황제 한 사람의 책임은 얼마나 큰 것인가?

    이것이 이 위대한 저술을 위한 궁극적 질문이었다.

    그는 명나라의 역사를 통해 여러 원인을 탐색했는데, 그 연구 방법의 특징은 문헌 자료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개인이 아니라 제도 속에서 몰락의 기본적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전제군주제도를 중심으로 한 제국 체제에 궁극적 책임을 묻고 그 해결책을 새로운 제도적 대안의 탐구에서 얻고자 했다.

    그 대안은 유교 사상에서 드물게 보는 철저한 제도 개혁, 즉 변법(變法)이었다.

    이러한 사상 체계의 철저함은 당시 대두하기 시작한 동아시아 실학(實學)의 사상계에서도 매우 돌출된 것이었다.

    순환하는 우주 시간과 복고적 이상주의

    이와 같은 황종희의 철저한 개혁 사상은, 그가 명나라의 몰락 과정을 눈물과 피로 몸소 체험한 데 기인하고 있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정계를 뒤흔든 동림당(東林黨) 사건으로 정의파 관료이던 부친이 환관 일파에 체포되어 재판도 없는 참혹한 고문을 받아 동료들과 함께 희생되는 참상을 겪었다.

    폭넓은 재야 독서층의 사회 여론을 대변하던 동림파의 실패는 그 전통을 이은 복사(復社)운동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이 복사운동은 전국에 걸친 문인 결사로서 특권 지식층인 신사(紳士)들 뿐 아니라 하층의 서민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독서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생원(生員)으로서 하층 신사에 속했던 황종희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부친의 유지를 이었다.

    절강에서의 남명(南明)부흥운동에 참여하면서 그의 인생은 청나라 조정의 사면을 얻을 때까지 열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유랑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서도 재야의 한족(漢族) 지식인을 기용하려는 강희제(康熙帝)의 회유 정책에 끝내 응하지 않고 은둔 생활로 일관했으나, 제자인 역사학자 만사동(萬斯同)과 자기 아들만큼은 명사관(明史館)에 보내 명 제국의 정사(正史)인 『명사(明史)』의 편찬을 도왔다.

    또한 황종희 자신도 많은 저술을 남긴 저명한 역사가였으므로 자료나 방법 면에서 『명사』 편찬의 성공에 적지 않은 기여가 있었다.

    『명이대방록』의 역사관은 전통적 유교의 복고(復古)사관과 순환(循環)사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황종희는 명나라와 같은 개별 왕조의 정통성이나 왕조사의 흥망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 제국부터 명말청초까지 거의 1,900년에 걸치는 전제군주제의 역사 전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나는 한 번은 잘 다스려진 시대이고 한 번은 어지러운 시대라는 맹자(孟子)의 말을 늘 의심했다. 어째서 삼대(三代) 이후로 어지러움만 있고 잘 다스려짐은 없는 것인가?

    이에 호한(胡翰)이 말한 12운(運)이란 것을 보니 주(周)의 경왕(敬王) 갑자(甲子)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한 번 어지러운 운이었다.

    앞으로 20년이면 '대장(大壯)' 운으로 바꿔 들어가 비로소 한 번 다스려짐을 얻으니 삼대의 융성함이 아직은 절망이 아니다.

    ··· 내 비록 늙었으나 [은(殷)의] 기자(箕子)가 [주(周)] 무왕(武王)의 방문을 받는 것 같은 것은 혹시 바랄 수 있을지!

    기우는 때의 이른 새벽 밝아오나 아직 훤하지 못하다 해서 어찌 끝내 말을 감춰 두기만 할 것인가?

    저자가 대망한 삼대란 중국 역사의 초기인 하(夏)ㆍ은(殷)ㆍ주(周), 세 왕조를 말하는 것으로 성인이 군주가 되어 다스리던 이상적인 시대를 가리킨다.

    주나라 경왕 갑자년은 공자가 사거(死去) 한 2년 뒤인 기원전 477년이니 삼대 이후 난세는 2천 년 이상 지속되었던 셈이다.

    역사적 사실이 분명치도 않은 까마득히 먼 고대를 이상화한 다음 그 이후로는 줄곧 난세만 계속되었다는 저자의 사관은 송나라 이래의 도학(道學)에서 제기한 이상주의 사조와 공통성이 있다.

    그러나 주자학(朱子學)이 정통론(正統論)의 입장에서 삼대 이후 잃어버린 '도의 계통', 즉 도통(道統)의 회복을 탐구하는 도덕적 이상주의를 추구했다면 황종희의 이상주의는 이 장기적 난세의 원인을 전제군주제도에서 찾는 역사가의 관점이 뚜렷하다.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호한이란 사람은 14세기 원말명초(元末明初) 시기의 학자인데, 그가 말한 12운의 이론에 의하면 이와 같은 장기적 치란(治亂)의 변동은 순환적인 우주적 시간의 필연적 운수(運數)에 따른 것이다.

    황종희는 이 순환적 우주 시간표에서 곧 예정된 잘 다스려지는 시대의 도래를 2천 년 전과 같은 삼대의 회복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셈이다.

    단순한 왕조 순환을 넘어 역사의 순환 사이클이 거대한 만큼 현실 비판의 지표로서 복고적 이상은 더욱 급진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삼대 시절 주(周)나라에게 망한 은왕조의 현인 기자가 『홍범(洪範)』을 새 천자인 주나라의 무왕에게 바쳤듯이, 황종희는 새 시대를 열 성인군주를 기다려 그의 경세서(經世書)인 『명이대방록』의 개혁안이 채택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적인 천하ㆍ만민을 사유화한 전제군주제

    『명이대방록』은 체제 개혁의 이론으로서 첫 3편의 글에서는 군주와 신료(臣僚), 법이 대체 무엇인지 다시 묻고 있다.

    전제군주에 대한 비판의 기본적 근거는 「군주란 무엇인가?」란 글에 나와 있는 대로 사람의 개인적 이익을 군주의 약탈로부터 보호하고 천하 공익(公益)에 대한 군주의 책임을 밝히는 데서 출발한다.

    생물이 나온 시초에는 사람마다 각기 스스로 자기를 위하고 각기 스스로 이익을 구했다. 공공의 이익은 일으키지 못하고 공공의 손해는 제거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기 한 몸의 이익과 손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천하가 이익을 받고 손해를 면하도록 보통 사람보다 천 배, 만 배 근로를 하는 요(堯)ㆍ순(舜)ㆍ우(禹)와 같은 먼 고대의 성인군주가 나왔다고 한다.

    바꿔 말해 군주의 자격은 본래 사람의 성정으로 볼 때 너무 고생스러워 떠맡기 싫어하는 자기희생의 자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세의 군주들은 천하의 이익과 손해를 좌우하는 권력을 자기 손에 쥐고는 천하의 이익은 모두 자기에게 돌리고 천하의 손해는 모두 타인에게 돌아가게 하며",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스스로를 위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구하지 못하게 해서 자신의 큰 사적인 일을 천하의 큰 공적인 일로 삼았다"는 것이다.

    천하 만민을 위해 일하도록 공적인 위탁을 받은 제국의 공권력 기구를 군주 일가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개인적 사유물로 만든 책임이 전제 군주 제도에 있다는 논리이다.

    바꿔 말해 "옛적에는 천하가 주인이고 군주가 손님이었는데",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가 손님이 되어" 군주가 천하를 위해 경영하기는커녕 천하의 노동력과 자녀를 수탈해서,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자랑한 대로 자기 한 사람의 재산을 늘린다.

    그러고서도 전제군주는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나는 정말 내 자손을 위해 창업을 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미 천하를 사유재산으로 본 이상 이를 경쟁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끈을 묶고 빗장을 굳게 채우지만" 끝내는 자신이나 그 자손의 피와 살이 으깨지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처럼 공주에게 "너는 어찌하여 내 집안에서 태어났느냐"는 비통한 말을 할 지경이 된다고 한다.

    국가와 민간을 공과 사의 범주로 구분하고 군주에게 국가의 공적 책임을 추궁하는 점에서 황종희의 군주론은 유교적이다.

    그러나 국가의 공적 권위가 민간 이익의 보호에서 나온다는 이 논리는 민생을 강조하는 유교 민본주의(民本主義) 사상의 새로운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익을 의리(義理)와 대립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공적 천하를 강조했던 중국의 유교적 통치 이념에는 전제군주의 가부장적 가산(家産) 관념이 짙게 깔려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와 만민을 사유화한 결과는 그 사유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전제정치의 강화와, 왕조 말 천하의 쟁탈전이라는 참혹한 대규모 약탈이 반복되는 비극적 왕조 순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아시아 전제정치의 역사에서 이토록 빛나는 자기성찰의 기록이 있었던가?

    17세기 명말청초의 중국은 중화제국의 근본적 결함과 내재적 위기를 처음 발견했던 시기였으나 아직 그것을 해체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다.

    이 혼란을 수습해 제국의 기능을 더 큰 규모로 회복시킨 것이 북방에서 침입한 후진 민족인 만주족이었다는 것은 역사에서 국제적 계기가 매우 중요함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공직의 협력자로서 군신의 권력 분할

    그렇다면 전제군주의 무한 권력을 억제할 방법은 무엇인가?

    『명이대방록』에 제시된 방법으로 그중 핵심적인 것은 세 가지가 있다. 모두 중국의 이념과 제도 속에서 전통적으로 착상된 것이지만 황종희의 새로운 해석이 주목된다.

    하나는 군주와 관료 사이의 권력 분할이고,

    둘째는 군주라는 사람의 통치보다는 법에 의한 통치가 더 안정적이라는 것이며,

    셋째는 학교라는 기관을 통한 사대부 지식층의 공공적 여론, 이를테면 개방된 공론장(公論場)을 제도화해 불가침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군신(君臣)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하란 무엇인가?」란 글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천하는 커서 한 사람이 다스릴 수는 없고 다수인이 일해 나눠 다스린다. 그러므로 내가 벼슬에 나아감은 천하를 위한 것이고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며 만민을 위한 것이고 한 사람의 성(姓)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군주가 바라는 속마음을 미리 아는 것은 환관ㆍ후궁(後宮)의 마음이며 군주를 따라 죽거나 망명하는 것은 사적인 측근의 일이라 한다.

    그런데도 "세상의 신하된 자들은 이 뜻을 모르고 신하가 군주를 위해 설치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군주가 천하와 인민을 신하에게 나눠 준 다음에야 다스릴 수 있다고 하면서 '천하와 인민을 군주의 전대 속 사유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처럼 군주ㆍ왕조와 국가를 구분할 줄 모르고 신하 관료들이 군주와 그 정권만을 위해 맹목적 충성을 바친다면 군주와 관료 사이의 자율적 협력이 필요한 천하ㆍ인민의 통치는 파탄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또 군주와 신하를 부자 관계에 비유하는 세속적 견해도 잘못된 것이니, "군신의 개념은 천하로 인해 생긴 것이며 나에게 천하의 책무가 없으면 군주도 나에게 길손이다.

    군주에게 벼슬하러 나아가 천하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군주의 노예이며 천하를 위해 일할 때 군주에 대해 스승과 벗이 된다"고 했다.

    중국은 고대에 유교적 전제 군주제가 형성될 때부터 군주가 갖는 공적 기능과 사적 기능 사이의 구분이 애매하고 그 영향으로 행정 기구인 관료제에서도 군주의 측근 기구가 재상 중심의 정규 행정을 압도하고 있었다.

    급기야 절대적 전제군주제의 확립자인 명나라 태조(太祖)에 이르러서는 재상마저 폐지되고 말았다. 황종희가 재상권의 부활을 주장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거슬러 군주와 관료의 권력 분할을 시도한 것이었다.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법에 의한 통치

    중국의 전통적 전제주의는 폭력적인 통치 도구로서 형법을 법의 핵심이라 생각하는 잘못된 법의 관념에 현실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유교에는 원래 군주의 전제를 견제하는 도덕정치의 이념이 있었으며 그러한 전통을 대표하는 것이 맹자(孟子) 학파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덕치 이념은 고대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전제주의 통치를 분식ㆍ미화하는 이중적 기능을 하게 되고 전제군주권을 둘러싼 동의와 견제라는 두 기능의 모순이야말로 동아시아 유교권 정치의 주요 특색을 이루었다.

    덕치의 기반은 천하 인민을 위한 민본주의이므로 그것이 전제군주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해야 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덕치가 전제군주제를 지지하는 이념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유교의 군주론에 따르면 덕치의 최고 책임자인 군주는 삼대의 이상적인 성인 군주를 이념형으로 삼고 있으며, 그 성인이란 통치 대상인 천하ㆍ인민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진 유덕자로서 천명으로부터 그 통치의 정당성을 승인받은 자이다.

    그런데 도덕적 무한 책임은 그 반대 급부로 무한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그리하여 현실의 절대권력을 장악한 군주는 이 도덕적 무한 권위를 통해 만인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성인 군주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유교의 도덕적 군주가 형법을 실질적 권력 도구로 삼고 있는데도 유교적 덕치 이념에 의거하여 법은 이념의 지위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한 도구로서 중국의 전통적 법률은 군주의 전제정치를 위한 수단일 뿐, 군주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거나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역할을 갖지 못했다.

    『명이대방록』의 「법이란 무엇인가?」란 글에서는 "삼대 이전에는 법이 있었는데 삼대 이후에는 법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은 전통적인 법가의 형법과는 다른 개념으로서, 군주의 사적인 도구로서의 법이 아니라 삼대 이전의 성인 군주와 같은 이상적 통치에서나 가능할, 인민의 삶을 위한 공적인 법이다.

    저자는 후세의 법의 실태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것이 삼대 이전의 법이니 나 한 몸을 위해 만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후세의 군주는 천하를 얻고 나면 오직 왕조의 수명이 길지 못하고 자손이 보유하지 못할까만 두려워해 미연의 걱정을 해서 법을 만들기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 법이란 것은 한 집안의 법이지 천하의 법이 아니다.

    그래서 진 제국이 봉건제를 군현제로 바꾼 일 같은 역사상의 제도 개혁들도 군주 및 왕조의 사리를 위한 것이었지 천하를 위한 개혁은 아니었다고 한다.

    천하를 위한 삼대의 법은 "법이 느슨할수록 어지러움은 더욱 일어나지 않으니 이른바 법 없는 법이라 한다."

    그 반면에 후세의 법은 아래보다 위의 사적 이익을 지키려 감시하다 보니 법이 매우 엄밀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이 엄밀할수록 천하의 어지러움은 바로 그 법에서 생기니 이른바 법 아닌 법이라 한다." 즉, 진나라 이래 옛 성인 군주의 법이 탕진된 결과 삼대의 제도를 모범으로 한 급진적 개혁이 필요하며, 후세의 '법 아닌 법'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통치하는 법이 있는 다음에 통치하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치에서 법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유교적 통론을 뒤집은 것이었다.

    학교를 통한 지식층의 공론장

    그 다음으로 『명이대방록』은 구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세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재상의 부활과 같은 관제(官制)의 개혁, 학교 교육과 과거제 등 다양한 관료 채용 제도의 개혁, 수도의 이동, 분권적 변경 방위 체제, 토지 재분배, 군사제도, 국가 재정, 말단 행정 실무자인 서리(胥吏)제도, 환관제도의 개혁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치 조선 후기에 전개된 실학의 경세 사상을 보는 것 같다. 그중 「학교」란 글은 단순히 인재 교육과 선발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유력한 국정 기구의 하나로 구상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학교는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이지만 옛 성인 군주는 그 뜻이 이에 그치지 않고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가 모두 학교에서 나오게 한 다음에야 학교의 뜻이 비로소 갖춰진다"는 것이다.구체적으로는 국가에서 설립한 학교를 정치적 여론 기구로 제도화하려는 것이었다.

    황종희에 의하면 옛적에는 "천자가 옳다 한 것이 반드시 옳지는 않고 천자가 그르다 한 것이 반드시 그른 것은 아니었다.

    천자도 마침내 감히 시비를 스스로 정하려 하지 않고 시비를 학교의 공론에 맡겼다."

    그런데 "삼대 이후에는 천하의 시비가 한결같이 조정에서만 나와" 모두 천자의 독단을 따르고, 심지어는 "학교란 것이 과거 시험의 경쟁으로 부귀에 마음이 물든 결과 마침내 조정의 세력과 이익으로 그 본령이 변질"되었으며, 인재가 간혹 초야에서 스스로 나와도 학교와는 전연 관련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국가 권력이 학문과 교육을 지배한 결과 나타난, 황폐한 현상에 대해 이처럼 통절한 비판이 또 있겠는가?

    당시 중앙의 태학(太學)과 지방 군현의 학교에서 시행되었던 정기적 학술 강론은 민간을 대표한 학관(學官) 및 신사층이 황제ㆍ관료들과 만나 학술과 국정을 논하는 공론장이기도 했다.

    학교에서의 국정 비판은 국가 권력이 침해할 수 없는 면책권을 갖는 것이어서 황제 권력에 대한 민간 지식층의 견제 역할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유교적 이상주의자의 구세 사상

    『명이대방록』에서 제기된 나머지 여러 개혁안 중에도 역사적으로 토론할 만한 의의가 있는 실제적 내용이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했다.

    급진적 이상주의에는 비현실성이 따르기 쉽지만 저자의 이상주의는 그 시대의 모순이 그만큼 우심했으며,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저자의 구세적 소망이 그만큼 간절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역사적 체험에서 우러난 이 이상적 청사진의 실현을 누구에게 기대하고 있었을까?

    분분한 학계의 논란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머지않아 도래할 미래의 성인 군주였을 것이다. 2천 년에 걸친 전제군주 시대에 살았던 지식인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힘을 새로운 유형의 군주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황종희는 끝내 유교의 사상가로 머물렀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전제군주제의 논란이 일어난 사회적 배경은 무엇일까?

    중국의 역사는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끊임없는 긴장 관계 속에 있었다.

    전제군주인 황제는 통일ㆍ안정의 구심점으로서 역사적 역할이 있었고 사대부 내지 신사층은 군주에 봉사하는 관료를 배출하면서도 지역 사회의 지배층으로서 분권적 자율성이란 경쟁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2. 유교의 복고적 역사관이 오히려 급진적 개혁 사상을 뒷받침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교에 있어서 고대란 관념은 시간적인 고대인 동시에 이상으로서의 고대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었다.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순환하는 현실의 역사 속에서 고대의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복고 사상은 이 어지러움의 순환을 저지하고자 투쟁하는 지식인의 사명 의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3. 전제군주제 비판을 뒷받침한 이론으로 민본주의란 무엇인가?

    천하의 공공성을 대표하는 유교의 민본주의는 사실은 군주뿐 아니라 사대부 지식인도 공유하는 가치였다.

    특히 황종희는 역사적으로 점차 군주의 전제적 권력에 눌려 위축되어 온 사대부의 주체성을 재강조해 군주와 대립하는 권력의 분할을 위한 논리와 제도적 대안을 제시했다는 데 시대적 의미가 있었다.

    4. 유교 실학의 개혁론에서 법치와 지식인의 공론장이라는 개념은 어떤 위치를 갖는 것인가?

    유교의 제도개혁론은 대개 효율적 관제(官制) 개혁에 중점이 있으나 황종희는 이에 머물지 않고 정체(政體) 자체의 변경이라는 의미까지 제시했다.

    유교적 도덕정치의 이념, 정치ㆍ학문ㆍ교육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유교 이념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군주, 즉 성인이라는 사람의 통치가 갖는 한계를 비판하고 정치의 구속으로부터 학문ㆍ교육의 자율성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유교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상적 확장의 성격을 갖고 있다.

    중국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사상가 황종희(黃宗羲)의 저서.

    1663년에 완성되었다.

    군주론(君主論) ·신하론(臣下論) ·법제론(法制論) ·학교론(學校論) 등 13편으로 되어 있다.

    군주론에서는 천하를 사유재산처럼 생각하는 전제군주의 폐해를 철저하게 폭로하여 ‘천하가 주인이고 군주는 손님이다’라고 갈파하였다.

    또, 학교론에서는 학교에 의회적 기능을 주어 세론(世論)을 대변하게 하는 등 국가체제의 전반적 개혁을 구상하였다.

    청말 개혁파와 혁명파의 지사(志士)들은 그의 민본주의적(民本主義的) 주장 때문에 황종희를 중국의 루소로 기리고, 이 책을 발췌하여 선전 팸플릿으로 사용하였다.

    황종희 (黃宗羲 , Huang Zong-xi) 1610~ 1695 (85)

     

    황종희는 1610년[명 만력(萬曆) 38년] 8월 8일 절강성(浙江省) 여요현(餘姚縣) 황죽포(黃竹浦) 남뢰리(南雷里)에서 동림당(東林黨) 명사였던 아버지 황존소(黃尊素, 1585-1626)와 어머니 요씨(姚氏) 사이에서 5형제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동림당과 엄당(내각과 환관 중심의 집권파) 사이의 당쟁을 직접 보고 들음으로써 시국에 관심과 인식을 심화시켜 갔다.

    그가 17세 되던 해(1626년) 그의 아버지는 삭탈관직되고 동림당 동지들과 함께 환관 위충현(魏忠賢) 일파의 탄압을 받아 옥사하였다.

    황종희는 20세 되던 해(1629년)에 아버지의 유명(遺命)에 따라 양명학 우파 계통의 기철학자인 유종주(劉宗周)에게 나아가 배웠고, 또한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겸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사학에도 힘써 절동사학(浙東史學)의 발전에 기여하여 그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21세 때는 남경으로 가서 복사(復社)에 참가하고 이후 많은 집회와 결사에 참가하여 활동하였지만, 과거(科擧)에는 21세부터 33세까지 네 번 응시하여 모두 낙방하였다.

    황종희가 35세 때인 1644년 명나라는 결국 망하였고, 이후 그는 치열한 반청활동을 전개하여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40세(1649)에 이르러 그의 반청활동은 끝나지만, 때로 지명수배를 받기도 하면서 도피․은신생활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그 사이에도 저술을 내기도 하였다.

    황종희는 천문학, 역산(曆算), 도장(道藏), 불교 및 음악 등에 두루 박식하였다.

    그의 저술은 철학(經學), 정치, 역사, 지리, 천문, 역산(曆算), 전기(傳記) 및 시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철학 저술로는 『명유학안(明儒學案)』, 『송원학안(宋元學案)』, 『맹자사설(孟子師說)』,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 등이 있다.

    1647년에는 『수시력(授時曆)』에 주석을 달고, 역법과 관련한 다수의 저술을 하였으며 (『春秋日食曆』, 『授時曆考』, 『大統曆推法』, 『授時曆假如』, 『回回曆假如』, 『西曆假如』, 『氣運算法』, 『勾肱圖說』, 『開方命算』, 『測圜要義』 등), 1652년에는 『율려신의(律呂新義)』를 저술하자 시어(侍御) 왕중위가 와서 가져가기도 하였다.

    황종희는 53세(1662) 때에 소년기 이래 파란만장한 삶의 총결산이라 할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을 쓰기 시작하였다.

    사회정치적인 면에서 전통적 사회질서가 와해돼가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태동하기 위한 격렬한 몸부림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한민족의 명조(明朝)가 이민족인 청조(淸朝)에 의해 무너지는 명말청초라는 전환기에 처하여, 황종희는 명조의 멸망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 그 원인을 분석하고 당시 사회의 문제점들을 해명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의 철학사상을 건립하였다.

    그는 명조 멸망의 원인을 정치상으로는 주로 명대에 극심했던 전제군주제의 폐해에서 찾고, 『명이대방록』을 저술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모색한 것이다.

    학문은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겸해야 한다는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사학에도 힘쓴 황종희는 제자인 만사동(萬斯同)과 전조망(全祖望)을 거쳐 장학성(章學誠)에 이르는 맥을 형성하였는데, 후대에 이를 절동사학(浙東史學)이라 불렀다.

    그는 청나라 조정의 부름은 거절하였으나, 『명사』(明史)의 편찬 사업에 협력을 요청받고는 아들 황백가(黃百家)와 제자 만사동을 보내어 협력하게 하였다.

    철학사가로서 황종희는 중국에서 최초의 체계적인 철학사라 할 수 있는 『명유학안(明儒學案)』(62권)과 『송원학안((宋元學案)』(100권)을 저술하였다.

    전자는 황종희가 생전에 완성하여 출판되었지만, 후자는 생전에 완성하지 못하여 아들 황백가(黃百家)에 이어 제자 전조망이 완성하였다.

    『명유학안』은 명대 초기부터 말기까지 200여명의 학자에 대해 사상의 요점과 특징, 그 행적과 학문적 연원관계 등을 서술함으로써 명대 200여년의 사상적 전개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특히 『명유학안』과 『송원학안』은 각 철학자 내지 학파의 핵심적인 원전 자료를 소개하고 그에 대한 저자의 견해 내지 평가를 덧붙이는 학안체(學案體)라는 저술양식의 효시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사상적인 면에서 황종희는 주자학과 양명학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스승 유종주의 영향 아래 양명학을 계승하는 입장에 서 있다.

    황종희는 주자학이 종래의 강한 도덕적 사회적 실천성을 상실하고 공소한 논의에 빠져버렸다고 비판한다.

    양명학에 대해서도 주관의 역동적 능동성의 발휘라는 본래의 의의에서 벗어나 무책임한 방종과 자의에 맡기는 데로 전락하였다고 비판한다.

    황종희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이와 같은 폐단으로 인하여 명조가 멸망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철학사상을 건립한 것이다.

    황종희는 주자학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기초하여 대상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주관의 보편성을 확인하고자 함으로써 사람들이 주관과 객관 간의 끝없는 긴장 속에 매몰되어 주체를 약화시키고 그리하여 종래의 사회적 실천성을 상실하고 공소한 논의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보고, 도덕적 주체를 확고하게 세움으로써 인식과 실천의 통일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유종주(劉宗周, 1578-1645)에까지 이어져온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주관의 역동적 능동성의 발휘라는 양명학 본래의 의의를 살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추구된다.

    또 태주학파(泰州學派)에 이르러 극명하게 드러난 바와 같이 양명학이 주관[心]을 극단적으로 절대화하여 점차 무책임하고 무규범적인 방종과 자의에 빠져버림으로써 오히려 참된 도덕 주체를 상실하고 허무주의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그는 양명학의 비판적 계승을 통해 확고하게 세운 도덕주체를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세계관으로 뒷받침하여 객관성을 확보함으로써 내용 있는 행위(윤리도덕적 실천)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로 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출처] 동양고전 (유학과 근대 세계) :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중국(명말~ 청초1663년 완성) 황종희(1610~1695)|작성자 조아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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