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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전투(古昌戰鬪) / 대야성전투(大耶城戰鬪)역사/한국사 2023. 6. 18. 15:22
고창전투(古昌戰鬪)
고려 전기 안동 지역에서 고려 태조와 후백제 견훤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병산전투(甁山戰鬪)라고도한다.고창전투는 929년(태조 12년) 12월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된 고창 지역을 구원하기 위한 고려의 원병 파견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정월까지약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고려군은 죽령을 넘어 풍기와 영주를 거쳐 봉화 방면으로 진행하여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를 거쳐 예안 지역에 이르러 저수봉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다.저수봉 전투에서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의 선봉대가 승리하자 왕건은 병산에 주둔하였고, 저수봉 전투에서 패한 후백제군은 후퇴해 석산에서 둔을 치면서 병산전투가 전개되었다.전투에 대한 전설을 살펴보면, 안동의 호족인 삼태사(김선평,권행,장길) 의 활약에 의해 고려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진모래 전설’에 따르면 견훤은 원래 지렁이의 화신이었는데, 전시에는 모래땅에 진을 쳐 신변이 위태로우면 모래 속으로 들어가 웬만해선 그를 물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삼태사 군사들은 전략을 세워 흐르는 강을 막아 못을 만들어 물속에 소금을 수없이 넣어 염수를 만들어 놓고 접전을 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치열한 싸움이었다.견훤은 싸움이 점점 불리해지자 당황하여 지렁이로 둔갑해서 모래 속으로 기어들었다. 삼태사군은 이때다 하여 염수의 못물을 터뜨렸다. 소금물이 흘러내리니 아무리 둔갑한 지렁이일지라도 견딜 재주가 없었다.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 패주하여 안동 땅에서 물러갔다고 한다. 또 ‘밥박골’의 안중 할머니가 고삼 뿌리를 섞은 독한 술을 빚어서 후백제군의 장수들에게 제공하여 대취하게 한 후, 이 사실을 삼태사군에게 통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전설도 전한다.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고려는 고창전투(古昌戰鬪)에서 후백제의 시랑 김악(金渥)을 사로잡았고, 죽인 사람의 수가 8,000명이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가 대승을 거둠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할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이후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싸움에서 입장이 불분명했던 안동·청송 일대의 30여 고을이 잇따라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곧이어 명주(溟州)(현 강릉)부터 흥례부(興禮府)(현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110여 성(城)이 역시 고려에 귀부하였다.이에 고려는 이 전투에서 공이 많았던 김선평(金宣平), 권행(權行 또는 幸), 장길(張吉)에게 대광(大匡)과 대상(大相)의 관계(官階)를 주어 포상하였고,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안동의 옛 지명이 고창이며, 이 전투 이후 동쪽을 평안케 했다는 의미로 안동(安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후삼국시대의 패권을 다투는 격전지로는 안동과 합천 지역을 들 수 있는데,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은 이 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920년 보마군(步馬軍) 1만인으로 대야성(大耶城)(현 합천)을 쳐 함락시킨 견훤은 군사를 진례성(進禮城)(현 무주)으로 옮겼다. 다급한 신라경명왕(景明王)은 아찬 김률(金律)을 고려에 파견해 구원을 청하였다.그 뒤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안동·상주 지역에서의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는 열기를 더해갔는데, 고려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가 925년 잠시 화친을 맺어 전투를 그쳤다. 이것은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强)에게 대야성 문소성(聞韶城)(현 의성)의 군사를 이끌고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상주 지역)을 공격하게 했으나, 성중의 병정이 왕건을 위해 지키므로 이기지 못하고 아무런 승산 없이 대치해오다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강화를 맺었기 때문이다.그러나 926년 왕건에게 보낸 견훤의 조카 진호(眞虎)가 죽자, 견훤은 왕건의 조카 왕신(王信)을 죽이고 다시 고려를 공격하였다. 927년 견훤은 근품성(近品城)(현 상주)을 공취하고,고울부(高鬱府)(현 영천)를 습격하였다. 이어 경주로 진격해 신라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를 세워 왕(敬順王)으로 삼았다.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공산(公山)에서 견훤과 결전했으나, 크게 패해 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 등이 전사하였다. 왕건은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 위기를 모면하였다.이듬해 견훤은 강주(康州)를 공격해 3백여 인을 죽이고,부곡성(缶谷城)(현 군위)을 공격해 1천여 인을 참살하였다. 이렇듯 강한 견훤의 세력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것이 929~930년의 고창전투이다. 그 해 7월견훤은 갑병(甲兵) 5천여 인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했고, 왕건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성주 홍술(洪述)을 전사시켰다. 견훤은 계속해서 고창군으로 밀려들었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승산이 없어 보였던 왕건에게 크게 패해 8천여 인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다음날 견훤은 잔병을 모아 순주성(順州城)(현 풍산)을 습격해 빼앗고, 그 백성을 전주로 옮겼으나 크게 타격을 받은 처지였다.왕건이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고창 지방의 재지호족(在地豪族)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방호족으로 성주였던 김선평과 권행 장길을 들수 있다.고창전투는 한반도 재통일(再統一)의 최종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투였으므로, 패배한 후백제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고창전투
[ 古昌- ]
분류군사/외교 > 전투와 전술 > 통일전쟁 > 고려
시대 :고려시기 :930년(태조 13) 1월전투지역 :경북 안동시 와룡면전쟁상대국 :후백제상세내용
930년 정월 경상북도 고창(현 안동) 병산 일대에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대패시킨 전투.
이 무렵 후삼국통일을 목적으로 한 고려와 후백제간의 무력충돌은 정도를 더해 갔다. 925년에 인질을 교환하여 맺어진 외교관계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나, 인질들이 죽은 뒤로는 무력충돌이 심화되었다. 927년의 공산전투(대구 팔공산)에서 고려군은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이 전사하고 왕건은 호위 없이 도주하는 참패를 당하여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이후 고려는 설욕을 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이 안동 일대는 고려군이 남진을 하여 신라에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로서 후백제군과 자주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 무렵 경상도 일대로 향한 견훤의 군사행동은 전보다 활발해졌다. 927년의 공산전투에서 승리하여 중요한 요충을 확보한 뒤 929년에 의성·순흥·영주지역을 침범하고, 문경과 고창군도 포위하였다. 이러한 후백제의 경상북도 진출에 따라 고려는 이에 대응하는 군사행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마침내 929년 12월 왕건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고창을 구하기 위하여 출전하여 후백제군과 930년 정월 서로 대치하였다. 이때 고려군은 병산(甁山)에 주둔하였고, 견훤이 지휘하는 후백제군은 석산(石山)에 진을 치고 해가 질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마침내 고려군이 점차 승기를 잡아 후백제군의 필사적인 저항을 꺾고 대승을 거두었다. 패퇴한 견훤은 군사를 돌려 순주(順州)를 공격하여 민가를 약탈한 뒤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의 시랑 김악(金渥)이 생포되고 전사가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안동·울산·청송·강릉에 이르기까지 11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였고, 후백제와의 관계에서 열세를 극복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안동지형도
고창 전투도
연관목차
대야성전투
[ 大耶城戰鬪 ]
유형사건시대고대/삼국/백제, 고대/삼국/신라성격전투, 백제와 신라의 전투발생·시작 일시642년 8월종결 일시642년 8월관련장소경상남도 합천군 일대관련인물·단체의자왕(義慈王), 윤충(允忠), 김품석(金品釋), 죽죽(竹竹), 용석(龍石)정의
642년(선덕여왕 11)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
역사적 배경
640년대 접어들면서 백제는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642년(의자왕 2) 7월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8월에는 고구려 군사와 연합해 신라의 대중국교통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을 공격하였다. 대야성전투는 이러한 백제의 공세가 절정에 달한 사건이었다.
경과
642년 8월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군사 1만인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야성 도독(都督)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김품석은 재지세력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음으로써 대야성 지방의 상당한 재지세력들이 이탈하였다. 검일은 이 일을 원망하다가 백제군과 내통해 창고에 불을 질렀다.
백제 군사가 대야성을 공격해 왔을 때 재지세력인 죽죽(竹竹)과 용석(龍石)은 백제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으나 김품석은 싸우지도 않고 보좌관인 아찬(阿飡) 서천(西川)의 주장에 따라 항복하여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대야성의 남녀 1천여 인은 사로잡혀서 백제의 서쪽지방으로 천사(遷徙)되었다.
결과
이 전투의 공으로 윤충은 의자왕으로부터 말 20필과 곡식 1천석을 받았다. 반면 신라는 죽죽과 용석에게 각각 급찬(級飡)과 대나마(大奈麻)의 벼슬을 추증했으며, 처자들도 상(賞)과 함께 왕도인 경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신라는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서부 국경지역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대백제 방어선도 압량(押梁: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지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대야성의 함락으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정치능력에 대한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야성의 책임자는 선덕여왕의 세력기반인 김춘추의 사위였으므로 반대파들의 정치공세가 적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의 정치는 대신(大臣)으로 불리는 소수 귀족들에 의해 구성된 회의체를 통해 운영되고 있었다. 대신들의 합의에 의해 국가의 중대사는 결정되었다. 진평왕(眞平王) 사후 남자로서 적절한 왕위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여주(女主)인 선덕여왕의 즉위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대립·갈등하였고, 결국 그들 간의 정치적인 타협에서 나온 정치운영 형태였다. 여왕지지파와 여왕반대파는 균형을 이루어 서로 대립하고 견제하였는데, 대야성의 함락으로 여왕지지파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수세에 처한 신라는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두 방면으로 대응하여 나갔다. 먼저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파견해 외교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영토할양을 강요당하며 원병요청에 실패하였다. 다음으로 적극적인 대응책으로서 새로이 압량주(押梁州: 경산)를 설치하고 군주(軍主)에 김유신(金庾信)을 임명해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백제의 가혜성(加兮城)을 비롯한 7성을 함락시키는 등 상실된 대야성 지역은 김유신에 의해 점차 탈환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압량주 도독(都督)을 역임한 지역과 새로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은 김유신의 군사적인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신라는 당면한 직접적인 위기는 일단 벗어날 수 있었으며, 김유신의 대백제 군사활동의 성공은 여주지지파들의 정치적인 위상을 강화시켜 주는데 큰 몫을 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김유신은 백제군을 대야성 밖으로 유인해 격파하고, 백제 장군 8인을 사로잡고 1천인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사로잡은 8인을 대야성 전투 때 죽은 김품석 부부의 유해와 교환하는 한편, 백제의 경내를 공격해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이 공으로 김유신은 이찬(伊飡)의 벼슬을 받고 더하여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그리고 김춘추는 고구려와 왜(倭)에 대한 외교노력은 실패했지만 입당(入唐)한 뒤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간 목적은 단순히 외교에 머문 것이 아니라 국왕 중심의 지배체제를 지향하는 내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당제(唐制)의 적극수용[漢化政策]이라는 정치적인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김춘추는 당나라가 대고구려 원정을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백제 공략을 위해 당을 끌어들이는 원병 요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20만 구원군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야성 전투의 결과, 일시적으로 백제가 신라를 압도했지만, 이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몰리게 된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군권(軍權)을 장악한 김유신과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후 양자가 연합해 새로운 중대(中代) 왕실의 핵심세력을 형성했으며, 바로 이들의 주도 하에 삼국통일(三國統一)이 성취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야성전투 [大耶城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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