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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조 명사들의 호(號) 정리역사/한국사 2023. 6. 11. 22:51
* 강세황 : 표암(豹菴), 표옹(豹翁) :
“어려서부터 등에 ‘표범’처럼 흰 얼룩무늬가 있어서, 스스로 장난삼아 그렇게 호를 지었다.” 「표옹자지(豹翁自誌)」
김홍도의 스승. 문사(文士)였지만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고 불렸던 문인화가였다.
* 강희맹 : 사숙재(私淑齋) :
‘사숙(私淑)’이란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를 흠모해 홀로 그 학문과 도리를 배우고 익혔다’는 의미임. 맹자는 공자가 이미 사망한 후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은 공자를 사숙하면서 이룬 것’이라고 말함. 『맹자』 「이루하(離婁下)」편.
강희맹은 자신이 오직 성인을 본받아 학문을 익혔다는 사실을 말하거나, 자신의 학문과 예술은 홀로 터득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냄.
세종에서 성종 연간에 서거정과 쌍벽을 이룬 문장가이자, 좌찬성(종1품)에까지 오른 문신. 형 강희안과 함께 조선 전기의 최고 형제 문장가이자 문인화가로 명성이 높았다. 강희맹은 송죽도(松竹圖)와 산수화를 잘 그렸고, 강희안은 인물 산수화에 능숙했다.
* 고경명 : 제봉(霽峰) :
그의 스승 송순이 세운 면앙정(俛仰亭)이 있던 ‘제월봉(霽月峰)’에서 취함.
송순의 제자이자, 면앙정을 중심으로 활동한 호남가단의 핵심 일원이었음.
호남의 사림이자 호남가단의 일원으로 학문과 시문에 뛰어났다.
임진왜란 초기 의병장으로 전라도 장흥과 담양에서 7,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왜적을 격퇴하려고 북상하다가 금산 전투에서 순절했다.
훗날 백사 이항복은 “수많은 호남의 시인들 중에서도 고경명이 가장 뛰어났다. ... 시보다 그 절개와 의로움을 더 소중하게 여기다보니, 시가 가려졌을 뿐이다.” 면서, 절의(節義)에 가려져 그의 시문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했다.
* 곽재우 : 망우당(忘憂堂) :
‘근심을 잊고 살겠다.’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명성을 떨친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의병장. 남명 조식의 제자이자 외손(外孫) 사위였다. 전라도 영암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며, 돌아와서는 낙동강 가 창암진(蒼巖津, 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부근에 망우정(忘憂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호를 망우당(忘憂堂)이라 하며 도인처럼 지냈다.
* 권근 : 양촌(陽村) :
권근이 은둔해 살던 곳. 그의 탄생·성장과 관련. 충북 충주시 소태면 양촌마을.
이색의 제자였으며, 조선의 개국공신이 됨. 『양촌집(陽村集)』
* 권대재 : 돈간재(敦艮齋) :
주역 간괘의 ‘돈간지길(敦艮之吉, 艮에 돈독하게 함이니 吉하다)’에서 취함.
간(艮)은 ‘그치다. 머무르다’는 뜻이므로, 거처할 곳을 얻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함.
『주역(周易)』에서는 ‘온갖 사물의 끝마침과 시작함은 간(艮)보다 더 왕성한 것이 없다‘라고 함.
경기도 안양 병산(屛山) 아래에 돈간재(敦艮齋)라는 서재를 짓고 살았다.
효종과 숙종 연간에 활동한 문신. 남인과 노론 및 소론의 당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벼슬을 한 탓에 환국(換局) 때마다 부침을 거듭했다. 남인이 최대 정적인 송시열의 처벌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청남(淸南)과 온건파인 탁남(濁南)으로 분열할 때, 청남의 편에 서서 송시열의 처벌을 적극 주장했다. 전라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 호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남인 청남 계열의 실력자였다.
* 권상하 : 한수재(寒水齋), 황강거사(黃江居士) :
주자(朱子)의 시 구절인 ‘秋月照寒水’에서 취함.
청풍의 ‘황강(黃江, 충북 제천군 한수면 황강리)’ 옆에 거처하며 은둔의 삶을 살았다.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 서인 노론 계열의 학통을 계승한 정통 주자학자이다. 숙종 연간의 환국정치에 환멸을 느껴, 늦게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마와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 권율 : 만취당(晩翠堂) :
‘늦게까지 변하지 않는 푸름을 간직한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문신 출신의 명장.
천자문 “비파만취(枇杷晩翠)”, 송나라 범질(范質)의 글귀 중, “더디게 자라는 개울가의 소나무는[遲遲澗畔松] 울창하게 자라 늦게까지 푸름을 간직한다[鬱鬱含晩翠]”
사시사철 푸른빛을 띠는 비파나무와 소나무에 비유하여, 늦게까지 변하지 않는 푸름을 간직한다. 늙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거나 꺾지 않는 지조 있는 삶을 살겠다는 의미.
* 권필 : 석주(石洲) :
태어나고 자란 곳인, 마포 서강 부근 ‘현석촌(玄石村)의 물가[洲’]라는 의미.
선조와 광해군 연간에 시문으로 일세를 풍미한 시인이자 문장가.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를 싫어하여 평생 야인처럼 살다가 44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기대승 : 고봉(高峯) :
고양시 행주에 있는 ‘고봉산(高峯山)’ 아래에 행주 기씨 집성촌이 있었음. 출생지.
16세기 ‘사림의 전성시대’를 빛낸 대학자. 그가 8년여에 걸쳐 서신 왕래를 통해 이황과 벌인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은 조선 성리학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보다 26년 연상으로 스승이나 다름없었던 이황이 대등한 입장에서 논쟁을 할 만큼 학문적 식견이 높았다.
* 기정진 : 노사(蘆沙) :
‘노령산(蘆嶺山) 아래 마을 옆을 흐르는 강인 하사(下沙)에서 사는 사람’
19세기 마지막 성리학의 거장. 외세 배격과 개항에 반대한 위정척사 운동의 선봉장이기도 했다.
* 길재 : 야은(冶隱), 금오산인(金鰲山人) :
‘풀무질이나 하며, 대장간에서 대장장이로 숨어 살고 싶다’
경북 구미 금오산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삶.
고려 말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유학을 배워 벼슬길에 나섰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경북 구미에 물러나 은둔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킴. 구미에서 가르친 제자 김숙자의 학통이 김종직(김숙자의 아들), 김굉필, 조광조 등으로 이어져 사림파를 형성함. 정몽주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과 사림파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음.
* 김굉필 : 사옹(蓑翁) :
‘도롱이를 걸쳐 두른 늙은이’
‘사(蓑)’는 짚이나 띠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옛적의 비옷인 ‘도롱이’를 뜻한다. ‘사옹(蓑翁)’은 ‘도롱이를 걸쳐 두른 늙은이’를 말한다. “비록 큰 비를 만나서 겉은 젖을망정 속은 젖지 않겠다”는 뜻.
김굉필은 정여창과 ‘지동도합(志同道合)’의 인연을 맺고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이후 죽을 때까지 사림의 지사로 뜻을 같이 했다. 정여창이 온건파였다고 한다면, 김굉필은 강경파에 가까웠다.
무오사화 때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임금의 정치를 비난하거나 시국을 비방했다.”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곤장 80대의 형벌을 받고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를 당했다.
혹독한 추위에 떨어야 했던 유배지 평안도 희천에서, 죄가 감등(減等)되어 따뜻한 남쪽의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을 때에도, 또 다른 재앙이 자신을 덮칠 것을 예견했다. 1504년(나이 51세, 연산군 10) 9월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죄목이 더해진 김굉필은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김굉필은 처음 호를 사옹(蓑翁)이라 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명호(名號)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순수한 처세의 도리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이를 고쳤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김굉필 사후 사람들은 그의 호를 ‘사옹(蓑翁)’이라고 칭하기보다는 ‘한훤당(寒暄堂)’이라고 불렀다. 그의 문집 역시 『한훤당집(寒暄堂集)』이라고 되어 있다.
한훤당에서 ‘한’은 ‘추울 한(寒)’이고, ‘훤’은 ‘따뜻할 훤(暄)’이다. 추위와 더위를 뜻하는 ‘한훤(寒喧)’은 계절의 순환과 같은 자연의 변화와 조화를 상징하는 성리학적 우주관을 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일두 정여창, 사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본문 참조.
* 김득신 : 백곡(柏谷), 구석산인(龜石山人), 괴강노옹(槐江老翁) :
자신의 세거지였던 충남 천안시 목천읍의 ‘백전리(柏田里)’에서 취함. 자신이 살았던 괴산군 좌구산 아랫마을인 ‘구석산촌(龜石山村)’에서 따옴. 괴산을 끼고 흐르는 ‘괴강(槐江)’에서 취함.
59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입지전적인 문신이자 시인.
* 김병연 : 난고(蘭皐) :
‘난초 언덕’ ‘난초 향기 가득한 언덕’. 선비의 고고한 기상과 기품을 의미.
일명 ‘김삿갓’이라 불린 조선 말기의 방랑 시인. 그가 태어난 지 4년째 되는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를 지낸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것이 문제가 되어 멸문지화를 당했다. 당시 그는 하인의 도움을 받아 형 김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몸을 피해 숨어 살다가,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했다. 그런데 김익순의 행동을 비판한 내용으로 과거에 급제한 후, 뒤늦게 그가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벼슬을 버린 채 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특히 그는 당시 세도정치 아래에서 부패할 대로 부패한 권력과 자신의 배불리기에 급급한 부자들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시를 많이 지었는데, 이로 인해 ‘민중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김상헌 :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
‘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미음(渼陰)마을’, 김상헌의 은거지인 ‘석실(石室)’에서 비롯.
병자호란 때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주전론(主戰論)과 척화론(斥和論)의 수장. 71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압송되어 큰 고초를 겪었다. 대명의리(大明義理)와 척화(斥和)의 상징으로 숭상 받으면서, 서인 노론 계열의 정치적·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가 은거지로 삼았던 미음(渼陰) 마을 부근에 석실(石室)이 있었다. 김상헌의 사후에 그의 후손들이 이곳을 세거지로 삼아 살면서, 석실서원(石室書院)을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집안의 자제와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학의 공간으로 사용함.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도 석실서원에서 김상헌의 후손인 미호 김원행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의 3대 연행록(燕行錄)의 저자(김창업, 홍대용, 박지원)가 모두 석실서원 출신이며, 순조 이후 안동김씨의 60년 세도 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 역시 김상헌의 직계 후손이다. 19세기 초·중반 권력을 좌지우지한 세도 가문 안동 김씨의 역사는 김상헌과 석실서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김숙자 : 강호산인(江湖散人) :
‘세상사를 잊고 자유롭고 한가롭게 사는 사람’ ‘세상의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마음 가는대로 사는 사람’
길재의 수제자이자 김종직의 아버지로, 사림파의 적통을 이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
* 김시습 :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峯):
매화와 달, 수락산 만장봉(萬丈峰,東峯)에서 취함.
김시습이 특별히 좋아했던 것이 ‘매화[梅]’와 ‘달[月]’이다.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정한 31세(1465년, 세조 11) 무렵, 이 두 가지 사물을 취해 ‘매월당(梅月堂)’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김시습은 수락산 동쪽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峰)을 애호하여 ‘동봉(東峯)’이라 부르고, 자신의 호까지도 ‘동봉(東峯)’으로 하였다.
아홉 번이나 과거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천재 율곡 이이가 천재라는 기록을 남긴 유일한 인물이 김시습이다.
‘시습(時習)’은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취한 이름이다.
김시습의 재주에 탄복한 세종대왕은 크게 칭찬하면서, 훗날 나라의 재목으로 크게 쓰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비단을 하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 내가 친히 보고 싶지만, 세상의 풍속과 이목을 놀라게 할까 염려된다. 마땅히 그 집안에 권하여 재능을 감추어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고 기르게 하라. 그의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렸다가 장차 크게 쓸 것이다. - 『율곡전서』, 「김시습전」
김시습이 21세 때 발생한 한 ‘사건’이 천재의 운명을 ‘광인(狂人)의 삶’으로 바꾸어버렸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옥좌에 오른 ‘왕위 찬탈 사건’이었다.
그는 평생 세속 밖을 떠돌아 다녔으며, 일부러 광태(狂態)를 부리고 이성을 잃은 모양을 보여서 자신의 본모습을 가렸다.
“뜻을 얻지 못하여 세상에 사는 것 보다는 소요(逍遙)하며 한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으니, 천년 후에 나의 속뜻을 알아주기 바라네.”
천재로 태어났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광인 행세를 하며 평생 방랑의 삶을 살아야 했던 김시습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매월당 김시습과 서계 박세당’ 본문 참조.
* 김안국 : 모재(慕齋) :
부모님에 대한 ‘사모(思慕)와 추모(追慕)’의 뜻과 마음을 담은 호. 나이 스무 살이 못 되어 연이어 부모님을 잃었다. 모재(慕齋)라 자호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김굉필의 제자로 중종 시대 조광조, 기준 등과 함께 사림파의 도학정치와 개혁정치를 선도함. 기묘사화 때 겨우 죽음을 면하고, 파직되자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이후 복직되어 대사헌과 대제학 등을 지내며 사림파의재건과 성장에 크게 공헌했다.
* 김안로 : 희락당(希樂堂) :
‘안락함을 희구(希求)한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뜻을 함께 했다고 하여 유배형에 처해지기도 했으나, 자신의 아들이 중종과 장경왕후의 딸인 호혜공주와 혼인해 왕실의 맏사위가 되자, 조정에 복귀해 권력을 남용하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척신(戚臣)이자 권신(權臣)이 되었다. 그의 부친 김흔은 한양 남산 기슭에 ‘안락당(安樂堂)’이라 이름붙인 집을 짓고 살았다. 김안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곳에 살면서, 아버지가 취한 ‘안락의 뜻을 희구(희구)한다’는 의미를 담아 다시 ‘희락당(希樂堂)’으로 이름을 짓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장경왕후 사후 중종의 왕비가 된 최대 정적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유배당한 후 사사(賜死)당하고 만다.
* 김원행 : 미호(渼湖) :
그가 거처하던 석실서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미호(渼湖)“에서 취함.
지금의 한강 주변 경기 남양주시 덕소와 수석동, 그리고 강 건너편의 미사리 일대를 조선 시대에는 미호(渼湖)라고 불렀으며, 석실서원(石室書院)은 미호(渼湖)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청음 김상헌의 후손으로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숙종과 경종 연간의 당쟁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두 형이 죽음에 이르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평생 학문에만 전념했다. 석실서원(石室書院)에 칩거하며 제자 양성과 학문 연구에 열중했다. 그가 경영한 석실서원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는데,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훗날 고위관료가 된 이들 외에도 홍대용, 정철조, 황윤석 등 자연과학과 서양 문물에 밝았던 실학자들도 많았다. 박지원은 김원행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석실서원으로 갔다가, 홍대용을 만나 평생을 함께하는 동지가 되기도 했다.
* 김육 : 잠곡(潛谷) :
경기도 가평 잠곡의 지명을 호로 취함.
김육은 나이 34세 때 경기도 가평 잠곡의 청덕동(淸德洞)에 홀로 들어가 우거할 결심을 한다. 김육은 잠곡의 지명을 취해 자신의 호로 삼았다.
조선의 16세기가 ‘사림의 시대’였다면, 조선의 17세기는 ‘보수의 시대’였다. 사계 김장생 → 신독재 김집 → 우암 송시열로 계보를 잇는 보수적 성리학자들이 정치와 경제 권력을 독점한 것은 물론, 사상과 지식 권력까지 장악한 채, 자신들에게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핍박했기 때문이다.
김육은 신분 질서와 사회 통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호패법(號牌法)’을 통해 사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수파 관료들에 맞섰다.
그가 들고 나선 것은, 과중한 공물(貢物)에 따른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주어 민생을 개선하려는 목적을 지닌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었다.
선조 13년인 1580년 한양의 서부 마포리에서 태어난 김육은,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지산(芝山) 조호익에게 처음 가르침을 받다가, 15세 때 해주에 가서 율곡 사후 서인(西人)의 큰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던 우계 성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로 인해 김육은 당색(黨色)으로 보면 서인의 정통에 속했다.
김육은 26세(1605년, 선조 38)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연이어 성균관시(成均館試)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광해군 즉위 2년 째 되는 해(1610년)에, 김육은 태학생(太學生)의 신분으로, 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등,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해 달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를 성사시켰다.
그런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大北派)의 영수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온당치 않는 일이라는 상소문을 올려 반대하고 나섰다.
조식의 제자였던 정인홍은 자신의 스승은 제외시키고 이황만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당시 김육은 성균관의 학생회장 격인 재임(齋任)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하여, 성균관 유생들과 상의한 끝에, 유학자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버렸다.
이 일로 말미암아 김육은 정치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광해군은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지워버린 김육을 엄하게 처벌하려고 했으나, 이항복과 이덕형의 간청으로 사건이 무마되면서, 김육은 간신히 처벌만은 면할 수 있었다.
김육은 경기도 가평 잠곡의 청덕동(淸德洞)에 홀로 들어가 우거할 결심을 한다. 이때 김육의 나이 34세였다.
아무런 생계 수단 없이 무작정 잠곡으로 옮겨 온 김육은, 처음 토굴을 파서 거처를 꾸미고 살았다. 몸소 화전(火田)을 일구고 농사를 짓다가, 그것으로도 연명할 수 없으면 숯을 구워 한양까지 무려 130여 리의 길을 걸어가 팔기도 했다.
이렇듯 농부의 삶을 살면서, 김육은 백성의 곤란과 고통을 몸소 뼈저리게 체험했다.
1613년 나이 34세에 시작된 김육의 잠곡 생활은,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1623년 나이 44세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10년 동안 백성들과 더불어 살면서 실제 농부의 삶을 살았던 김육은, 중앙 정계에 있으면 도저히 알 수 없었을 ‘민생 현장’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10여 년 동안이나 중앙 정계를 떠나 있던 사람이, 조정에 나오자마자 곧바로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한 것으로 보아, 김육은 잠곡에서 농부로 살면서 ‘대동법’과 관련한 정책 구상을 이미 마무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동법은 백성의 삶을 안정시킨 조선 최고의 개혁 정책이라고 평가되는데,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에서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경제 개혁 정책이었다.
그 하나는 지방 군현의 가구 단위로 부과하던 공물을, 토지 소유 면적을 기준으로 부과하도록 바꾼 것이다.
가구 단위로 조세를 부과하는 방식은, 토지의 소유 여부 또는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공물을 납부하도록 했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소유할수록 이익을 얻는 폐단을 낳았다.
다른 하나는 지방 토산물을 거두어들이는 조세 방식을, 일정한 수량의 베나 쌀로 납부하도록 바꾼 것이다. 이것은 지방 토산물(현물)의 납부에 따른 점퇴(點退, 받은 물건을 살펴보아 마음에 들지 아니한 것은 도로 물리침)와 방납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주었다.
1623년 첫 번째 논쟁에서 참패한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가 된 1638년(인조 16, 나이 59세)에 다시 대동법 시행을 임금에게 건의하면서, 이 논쟁에 재차 불을 지폈다.
김육의 건의는 지방 토호 세력과 양반 계층, 그리고 방납 활동을 하는 상인들과 관리들이 중앙의 보수파 관료들과 결탁해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또다시 좌절되고 만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646년(인조 24) 나이 67세에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다시 논쟁이 붙었지만, 보수파 관료들의 반대와 세수입의 감소를 염려한 인조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대동법은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
인조가 사망하고 효종이 새로 즉위하자, 김육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관료들은 또다시 삼남(충청도·경상도·전라도)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의견을 올렸다. 조정은 공납제를 개혁해 대동법을 시행하자는 김육의 개혁파(한당)와, 대동법을 반대하고 공납제의 일부 개선과 호패법의 실시를 주장하는 김집의 보수파(산당)로 분열되었다.
온 조선을 뒤흔든 대논쟁의 결말은 ‘호서 지역(충청도) 실시, 호남 지역 불가’라는 절충안으로 매듭지어졌다.
그 후 5년이 지난 1657년(효종 8, 나이 78세), 김육은 다시 효종에게 호남 지역에도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청했고, 다음 해 비록 전라도 해안 주변의 마을에서나마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 해 김육은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육의 고군분투로 뿌리를 내리게 된 대동법은, 단순히 조세 체제의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대동법은 조선 후기 상공업과 시장 경제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와 쌀만 조세로 수취하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중앙 관청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때, 공인(貢人)이라는 민간 상인에게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물품을 조달하도록 했다. 그래서 공인 계층은 관청과 민간 수공업을 중계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관청에 납품할 물건을 주로 한양의 시전(市廛)이나 지방의 장시(場市)들을 통해 조달했다. 이로 인해 시장 경제가 크게 성장했고, 상공업 활동은 활발해졌다.
일반 백성들 역시 쌀이나 베를 마련해 조세를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산한 다른 여러 농산물이나 물품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상업적 농업을 경험하거나 상품 교환 경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시장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은 이렇듯 조선 후기 농업, 수공업, 상업의 생산 및 교환 활동을 자극하면서, 상품과 시장 경제의 싹을 틔웠다.
대동법 같은 개혁 정책으로 양대 전란의 후유증을 말끔히 털어내고, 새롭게 사회 경제적 활력과 성장 동력을 찾았기 때문에, 조선은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들어와 경제 부흥과 문화 융성을 맞이할 수 있었다.
대동법을 가리켜 ‘조선 최고의 개혁 정책’이라고 하는 이유다.
* 김인후 : 하서(河西) :
그가 살던 집이 ‘황룡강의 서쪽’에 있었음.
중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며,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 인근에 황룡강이 있으며, 그를 기리기 위해 필암서원(筆巖書院)이 세워짐.
* 김일손 : 탁영(濯纓) :
‘갓끈[纓]을 씻는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충의지사이자 시인인 굴원의 『어부사(漁父詞)』에 나오는 「창랑가(滄浪歌)」의 글귀에서 취함.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겠지만,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나의 발을 씻을 따름이다” 세상이 맑아 도리가 행해진다면 갓끈을 씻고 몸가짐을 가지런히 한 다음 벼슬을 하겠지만, 세상이 탁해 도리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발이나 씻고 초야에 묻혀 은둔의 삶을 살겠다는 뜻.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한 사림의 절의지사. 그가 사관으로 일하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권력에 꺾이지 않는 직필(直筆)의 상징.
* 김장생 : 사계(沙溪) :
그가 거처했던 충남 논산의 ‘사계천(沙溪川)’에서 취함.
처음 예학(禮學)의 대가인 구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을 배웠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성리학의 큰 흐름을 예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문하에는 아들 김집을 비롯해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강석기, 장유, 최명길 등 한 세기를 지배한 학자와 문사와 정치가들이 포진해 있었다. 자신을 비롯해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무려 네 사람이 동방 18현(東方十八賢)으로 뽑혀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학통을 계승한 제자들이 17세기 이후 조선의 정치와 학문의 권력을 움켜쥔 서인 노론 계열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덕분이다.
서인의 영수였던 김장생은 1602년(선조 35) 봄에 북인의 영수 정인홍과 크게 갈등을 빚고 관직에서 해임된 후, 한양을 떠나 연산 임리(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사계천(沙溪川) 옆으로 거처를 옮긴 적이 있다.
돈암서원(遯巖書院)은 김장생을 배향한 서원으로,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9개 서원 중 한 곳임.
- 遯은 ‘돈’ 또는 ‘둔’으로 읽는데, 우리 한한대자전에는 ‘둔’으로 되어 있다. 주역 64괘중 위에 乾(天), 아래에 艮(山)이 있는 괘로서, 천산돈(天山遯) 또는 천산둔(天山遯)이라고 읽는다. 은둔(隱遁)의 괘로서 용기 있게 물러나는 것을 상징한다.
* 김정호 : 고산자(古山子) :
‘옛 산을 좋아해 찾아다니는 사람’
조선의 지도와 지지를 종합하고 완성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든 지리학자이다.
* 김정희 : 추사(秋史), 완당(阮堂), 보담재(寶覃齋) :
‘금석역사가’, 청나라 학자이자 김정희의 스승인 ‘완원과 옹방강’
김정희는 정확한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호를 사용했다.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적게는 100여 개에서부터 많게는 500여 개나 된다.
그를 대표하는 호는 추사(秋史)와 완당(阮堂)이다.
추사(秋史)는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과 역사학(歷史學)의 권위자였다.
‘추(秋)’는 ‘춘추(春秋)’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春秋’는 공자가 쓴 춘추 전국 시대 노(魯)나라의 편년체 역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연원한 말이다. 현존하는 동아시아 최초의 역사서가 다름 아닌 『春秋』다.
금석학은 고동기(古銅器, 구리로 만든 옛날의 그릇이나 물건)나 비석(碑石)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실증과 고증, 해독과 해석의 방법을 통해 연구하는 학문으로, 고고학과 역사학의 한 분야다. 즉 금석학은 곧 역사학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김정희는 31세가 되는 1816년 7월,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승가사를 유람하다가 비문을 발견해, 이끼를 벗겨내고, 희미해진 글자들을 수차례에 걸쳐 탁본을 반복해 확인했고, 마침내 그것이 진흥왕의 옛 비석임을 밝혀냈다. 1천 2백년 전의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환히 밝혀져서, 무학대사의 비(碑)라는 황당하고 기궤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김정희는 47세가 되는 1832년,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는 절친한 벗 권돈인에게, 또 다른 진흥왕 순수비인 함경도 함흥의 황초령비를 찾아가 탁본한 다음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권돈인은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황초령비를 다시 찾아내 탁본해서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이후 김정희는 다시 진흥왕 순수비와 삼국사 관련 기록과 문헌을 깊이 연구했고, 마침내 ‘진흥왕의 두 순수비를 상고한다’는 뜻의 이른바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혹은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라고 부르는 걸출한 금석역사학 논문을 썼다.
‘추(秋)’라는 글자에는 ‘춘추(春秋)’라는 의미가 담겨있고, 다시 ‘춘추’에는 김정희의 역사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述而不作’과 ‘實事求是’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고 본다.
‘사(史)’에는 ‘역사 혹은 역사가’의 뜻과 의미가 담겨져 있다.
유홍준 교수는 김정희의 삶과 학문을 대표할 호는 추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김정희의 삶과 학문을 총체적으로 조명한 평전의 제목을 『완당평전』이라고 붙였다.
청나라에 가기 이전 김정희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북학파의 두뇌나 다름없던 초정 박제가였다.
김정희는 24세가 되는 1809년(순조 6)에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私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연경에 도착한 김정희는 스승 박제가와 인연을 가졌던 청나라 지식인을 통해, 당대 최고의 대학자였던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게 된다. 이 두 사람과의 만남은 김정희의 삶과 학문 및 예술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김정희는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이후 지속된 교류를 통해, 명실상부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1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옹방강과 완원 중 김정희가 먼저 찾아가 만난 사람은, 당시 47세의 나이로 청조학(淸朝學)이라 일컫는 청나라의 학술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대학자 완원이었다. 김정희는 완원을 찾아가 사제(師弟)의 도의를 맺었다.
김정희를 만난 완원은, 비록 자신보다 22년이나 연하였지만, 그의 자질과 학문적 수준에 몹시 기뻐했으며, 자신이 편찬의 책임자로 참여해 각 권마다 서문까지 썼을 만큼 정성을 기울인 『13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 한 질을 선물로 주었다.
모두 24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방대한 규모의 서적은, 유학의 13경(十三經)에 대해 한(漢)나라에서부터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학자들의 저술을 총정리하고 종합해놓은 경전 연구의 최고 대작(大作)이었다.
완당(阮堂)이라는 호 역시 이때 김정희가 완원과 맺은 사제의 인연으로 탄생했다. 완원(阮元)에서 ‘완(阮)’자를 따와, 김정희가 마침내 자신의 당호를 ‘완당’이라고 한 것이다.
완원을 만난 이후, 김정희는 청나라의 원로학자인 옹방강을 찾아가, 또한 사제의 도의를 맺었다. 당시 나이 78세였던 옹방강은 명실상부 청나라 학계를 대표하는 원로학자였다. 특히 옹방강은 고서화와 희귀 금석문(탁본)과 전적 수집에 남다른 관심과 탁월한 수완을 보여, ‘석묵서루(石墨書樓)’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서고에 무려 8만 점에 달하는 수장품을 보관하고, 이를 학문 연구의 자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옹방강은 김정희에게 이 서고를 마음껏 둘러보도록 허락했고, 김정희는 조선에서는 평생 구경할 수 없는 진귀한 서적과 금석학의 자료들을 직접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옹방강 역시 김정희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여러 서적과 서화는 물론, 귀중한 금석문의 탁본까지 선물로 주었다.
더욱이 완원과의 만남에서 ‘완당’이라는 호를 얻었던 것처럼, 김정희는 옹방강과의 만남을 통해 ‘보담재(寶覃齋)’라는 호를 얻었다.
소동파를 사랑했던 옹방강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소동파를 보배롭게 여기는 서재’라는 의미로 ‘보소재(寶蘇齋)’라고 한 뜻을 좇아, 김정희는 ‘담계(覃溪) 옹방강을 보배롭게 여기고 받드는 서재’라는 뜻으로, 자신의 서재 이름을 ‘보담재(寶覃齋)’라고 하고 또 하나의 자호로 사용했다.
30대로 들어서면 김정희의 호는 추사보다도 완당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된다. 김정희의 여러 기록과 서화 작품들을 살펴보더라도, 그가 ‘추사’라는 호보다는 ‘완당’이라는 호를 더 애호(愛好)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가 <세한도(歲寒圖)>이다.
김정희의 고고한 기상과 정신세계를 집약해놓았다고 평가받는 <세한도>는 그의 생애 최고 걸작품이었다.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째 되는 1844년 김정희가 나이 59세 때,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화제(畵題)를 써준 <세한도>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오른 대학자이자 예술가였던 김정희의 학문 세계와 예술의 미학을 가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는 명작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김정희는 수많은 호를 제쳐 두고, ‘阮堂’ 혹은 ‘阮堂老人’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그림의 제목에 해당하는 화제(畵題)에서 김정희는 ‘歲寒圖 蕅船是賞 阮堂(세한도. 우선시상. 완당)’이라고 썼다. 이 화제를 풀이하면, ‘세한도. 우선(蕅船) 이 그림을 감상해보게. 완당’이라는 뜻이다. 이상적의 호가 우선(藕船)인데, 김정희는 이를 우선(蕅船)이라 바꿔 쓴 것이다. 그림의 제목에 ‘阮堂’이라고 쓰고 낙관을 찍은 김정희는 그림에 붙이는 글, 즉 ‘발문(跋文)’에서는 ‘阮堂老人’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59세였던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은 독보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이상적이 스승이 그려준 <세한도>를 가지고 청나라를 방문해, 그곳의 이름 높은 학자와 문사들에게 보여주자, 아낌없는 환호와 찬사가 쏟아졌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던지 무려 16명이 앞을 다투어 <세한도>에 제찬(題贊)을 썼을 정도로, 당시 김정희의 국제적 명성과 권위는 높았다.
김정희가 학문에 있어서 고증학과 금석학과 역사학의 독보적인 권위자였다면,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조선의 서예(書藝)와 차(茶) 문화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사대부와 지식인들 사이에 큰 유행과 융성을 불러일으킨 대가였다.
김정희의 삶에서 서예나 차와 관련한 호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추사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만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창적인 서체를 얻을 수 있었다.
김정희는 평생에 갖고 싶은 세 가지를 말하면서, 그 첫 번째로 중국의 단계 지방에서 나는 돌로 만든 단연(端硯)이라는 벼루를 꼽았을 만큼, 벼루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컸다.
‘세 개의 벼루’를 뜻하는 ‘삼연재(三硏齋)’나 ‘삼연노인(三硯老人)’, ‘벼루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그림’에서 의미를 취한 ‘연도암(硏圖庵)’, ‘임금이 하사한 벼루를 기린다’는 뜻의 ‘사연당(賜硏堂)’, ‘벼루를 갈고 다듬는다’는 뜻의 ‘마연도인(磨硏道人)’, ‘오래된 벼루’에 빗대어 지은 호인 ‘고연재(古硯齋)’ 등이 있다.
김정희는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隸書)에 모두 뛰어났지만, 그 가운데 전서(篆書)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고,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 자신의 서예 실력을 길렀다고 한다.
서예 문화와 함께 김정희가 유행시킨 또 다른 문화는 ‘차(茶)’였다. 조선에 들어와 사라지다시피 한 차 문화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라면, 그의 뒤를 이어 19세기 조선에서 차 문화를 본격적으로 발전·융성시킨 사람은 바로 김정희였다.
김정희는 글씨를 써서 답례로 초의선사에게 보내주곤 했는데, ‘명선(茗禪)’ 즉 ‘차[茗]가 곧 선(禪)’이라는 명작을 써준 것이 대표적이다.
청나라 연경에 가기 이전 김정희는 ‘玄蘭’과‘秋史’라는 호를 썼고,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교류하면서 ‘阮堂’과 ‘寶覃主人’ 등의 호를 얻었고,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보담주인’과 비슷한 뜻을 갖는 ‘寶覃齋’, 혹은 ‘覃齋’라는 호를 썼다.
고증학과 금석학의 독보적인 권위자로서 자신만만하게 스스로를 드러낸 호로는 ‘실사구시재(實事求是齋)’와 ‘상하삼천년종횡십만리지실(上下三千年縱橫十萬里之室)’을 꼽을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삼천년, 공간적으로는 10만 리에 걸쳐 있는 학문과 지식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자부심이 크다.
옹방강이 직접 새겨 보내준 인장에 적혀 있던 ‘동해제일통유(東海第一通儒)’도 당당함을 나타낸다.
김정희의 나이 55세인 1840년(헌종 6), 조정의 권력을 쥔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의 사건[윤상도 옥사사건]을 다시 들춰내, 그 배후로 김정희를 지목해 누명을 씌운 다음,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는 우의정 조인영, 형조판서 권돈인, 병조참판 김정희로 대표되는 반(反)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한 안동 김씨의 공격이었다. 특히 안동 김씨의 칼날은 정치적 경쟁 세력인 명문가 경주 김씨의 종손이었던 김정희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김정희는 국문을 받던 중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다행히 옛적에 함께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를 탐문하기도 했던, 절친한 벗 조인영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간곡한 상소를 올려, 그나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생활 도중 <세한도>와 같은 우리 예술사에서 길이 빛날 위대한 걸작을 남겼다.
나이 63세가 되던 1848년 12월 6일 비로소 유배지에서 풀려나, 다음 해 1월 한양으로 올라온 김정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 1851년 7월까지 한강변에 거처를 마련해 생활했다.
그리고 1년이 조금 넘는 북청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과천에 머물며 말년을 보냈다.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지었던 호는 ‘과칠십(果七十)’과 ‘칠십일과노인(七十一果老人)·칠십일과(七十一果)’였다. 70세가 되는 1855년에는 ‘과천의 칠십 세 늙은이’, 사망한 71세에는 ‘칠십일 세의 과천 늙은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 김조순 : 풍고(楓皐) :
‘단풍나무 언덕’
정조의 개혁 정치에 협력했던 노론 시파의 핵심 인물이다. 정조가 죽고 왕세자가 임금[순조]이 된 후, 그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자,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의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을 뛰어넘는 권력을 행사하며 국정을 주도했다. 19세기 60년 안동 김씨 세도 정치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김조순은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단풍나무 천여 그루를 심고, 스스로 ‘단풍나무 언덕’이라는 뜻의 ‘풍고(楓皐)’를 자호로 삼았다. 단풍나무는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유독 궁궐에 많이 심어졌기 때문에 ‘풍금(楓禁)’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다. 풍금(楓禁)은 ‘단풍나무가 많지만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금역(禁域)’이라는 말로, 단풍나무는 예로부터 궁궐을 상징하는 나무였다고 한다.
* 김종직 : 점필재(佔畢齋) :
‘책에 담긴 뜻은 알지 못한 채 입으로 글자만 읽는다’ 책을 건성건성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
길재와 김숙자의 학통을 이어 김굉필과 정여창에게 전한 성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 그의 중앙 정계 진출로 사림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가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戊午史禍)가 일어남.
* 김집 : 신독재(愼獨齋) :
『대학(大學)』의 구절, ‘군자(君子)는 필신기독야(必愼其獨也).’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 삼간다.’ 사대부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오히려 더욱 예를 지켜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로 해야 한다는 의미.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자 우암 송시열의 스승. 효종 즉위 이후 보수파인 산당(山黨)의 수장이 되어 대동법의 시행을 극력 반대해 잠곡 김육의 한당(漢黨)과 크게 대립을 빚었다.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 연구에 전념했고,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예(禮)의 실천’을 강조했다.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문묘에 배향됨. 동방 18현(東方十八賢)의 한 사람.
* 김홍도 : 단원(檀園) :
단원(檀園)은 원래 명나라 시절 사대부 화가로 이름을 날린 이유방(李流芳)의 호.
이유방은 문사(文士)로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뛰어났다. 김홍도는 비록 화원의 신분이었지만, 이유방처럼 시·서·화에 두루 통달한 ‘고상한 문사’를 자신의 평생 모델로 삼았기에, 단원(檀園)을 自號로 취했다.
김홍도는 조선 최고의 화가이다.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 인물화, 불화, 동물화, 초충화(草蟲畵) 등, 그림에 관한 한 모든 방면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준 독보적인 인물이다.
김홍도는 7~8세 어린나이부터 20세 때까지 경기도 안산에 살던 강세황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그림 공부를 하였다.
스승인 강세황으로부터 ‘신필(神筆)’이라는 극찬을 들을 정도로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던 김홍도는, 21세 때 이미 도화서의 궁중 화원으로 영조의 즉위 40주년과 칠순을 기념하는 잔치를 묘사한 <경현당수작도(景賢堂受爵圖)>를 그렸고, 1773년(영조 49) 나이 29세 때는 당대 최고의 화원만이 참여할 수 있는 임금의 어진(御眞)과 왕세손(훗날의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이름을 올릴 만큼 일찍부터 명성을 떨쳤다.
1781년(정조 5) 어진을 모사한 공로로 2년 후 찰방(察訪)에 제수되었고, 1791년(정조 15)에 다시 어진을 그린 공로로 연풍 현감(延豊縣監)에 임명되는 영광을 입었다. 화원 출신으로 현감에 오른 사람은 김홍도 이전에 겨우 2명 남짓 있을 정도로, 중인 출신이 목민관이 된다는 것은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자세한 내용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본문을 참조.
* 남공철 : 금릉(金陵) :
경기도 광주(廣州, 지금의 성남) 청계산 아래 ‘금릉(金陵)’이란 지명에서 취함.
초계문신과 규장각 각신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북학파의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와도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노론 시파로, 정조 사후에 한 때 노론 벽파에게 밀려나 조정을 떠났지만, 김조순 등과 함께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다. 정조가 서거하자, 시골에 들어가 은둔의 삶을 살고자 했던 곳이 성남시 청계산 아래의 금릉(金陵)이라 불린 곳이었다.
노론 벽파 정권을 이끌던 정순왕후가 사망한 후, 다시 조정에 복귀한 남공철은 승승장구를 달렸다. 1817년(순조 17)에 우의정에 오른 다음 14년 동안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었고, 74세가 되는 1833년에 영의정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해, 봉조하(奉朝賀, 조선 시대에 종2품 이상 관리로 사임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던 벼슬)가 되는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 맹사성 : 고불(古佛) :
순수하고 참된 도인(道人)의 마음[古佛心]에서 취함. 맹사성이 풍류삼아 소를 타고 다니는 것을 즐겼기 때문에 생겨남.
황희 정승과 더불어 세종 시대를 빛낸 명재상이자 청백리.
* 문익점 : 삼우당(三憂堂) :
세 가지를 근심함. ‘나라의 국운이 떨치지 못하는 것, 공자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는 것, 자신의 도가 서지 못하는 것’.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목화 재배 및 면포의 생산과 보급에 헌신함.
* 박규수 : 환재(瓛齋) :
‘벼슬하는 사람의 집’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18세기 실학사상과 19세기 개화사상의 가교 역할을 한 대학자이자 선각자다. 김옥균 등 개화파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박규수의 제자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 대동강으로 무단 진입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격퇴함. 사신으로 간 청나라에서 양무운동을 목격하고 개항과 개국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귀국 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맞서 여러 차례 개국의 필요성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김옥균, 홍영식, 김윤식, 서광범, 유길준, 박영효 등에게 만민 평등 사상과 개화사상을 설파하였다.
‘환(瓛)’은 벼슬아치가 조복이나 관복을 착용하고 임금 앞에 나아갈 때 손에 들고 있는 옥으로 만든 옥홀(玉笏)을 뜻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환(瓛)’은 ‘벼슬하는 사람’을 뜻한다. 조정에서 물러나 집에 머무를 때조차도 벼슬하는 사람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는 호이다.
* 박문수 : 기은(耆隱) :
‘숨어 사는 것을 좋아함’, ‘늙어서 숨어 산다’
청명함과 정의로움의 상징인 암행어사 박문수로 유명함.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했지만, 노론이 집권한 영조 연간에 주로 관직생활을 했다. 탕평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의 개혁을 주도했으며,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제정한 균역법(均役法)은 그의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도승지, 함경도 관찰사, 병조판서, 경기도 관찰사, 예조판서에 이어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기까지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했지만, 호에 담긴 뜻을 보면 출세나 양명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탐관오리는 혹독하게 대하고, 백성에게는 자애로웠던 암행어사이자 관리로 큰 명성을 떨쳤지만, 정작 그의 참뜻은 명예나 출세보다는 조용하게 사는 삶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박세당 : 서계(西溪), 서계초수(西溪樵叟) :
수락산 밑 개울 서계(西溪), 수락산 ‘서계(西溪)의 나무꾼’.
수락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개울이 박세당이 호로 삼은 ‘서계(西溪)’이다.
김시습이 세상을 떠난 지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7세기 중반, 또 한 명의 기사(奇士)가 수락산을 찾아온다.
그는 조선을 지배한 유일한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유학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밝힌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낙인이 찍혀 죽음을 맞은 ‘조선 철학의 이단자(異端子)’ 박세당이다.
박세당은 자신의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색경(穡經)』이라는 서책까지 저술했다. 『색경』은 유학자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농업에 종사하고, 또한 농업 기술 등 실용적인 지식을 익히는 데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살아있는 사례로, 18세기에 만개했던 ‘실학 운동’의 선지자적 역할을 한 서책이다.
평소 김시습을 누구보다 염모했던 박세당은, 수락산에 들어온 이후 김시습의 옛 자취를 직접 탐사하고, 그가 남긴 뜻을 되살려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박세당은 김시습이 거처하던 옛터가 남아 있는 수락산 동봉 서쪽 석림사(石林寺) 곁에 사우(祠宇, 사당)를 세워 김시습의 삶과 남긴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우를 세울 재물이 없어서 ‘매월당 영당(影堂) 권연문(勸緣文)’ 한 통을 지어 석림사의 승려들에게 보내, 재물과 양식을 구해 공역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박세당의 노력은 1686년(58세) ‘동봉사우(東峯祠宇)’를 세우고, 이어서 충청도 홍산현 무량사(無量寺)에 있는 김시습의 자화상(自畵像)을 모사하여 봉안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었다. 4년 후에는 조정으로부터 ‘청절사(淸節祠)’라는 사액까지 받았다.
이렇게 김시습과 박세당은 2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한 ‘기이한 인연’으로 맺어졌다.
박세당은 수락산 아래 석천동에 거처하며 몸소 농사를 짓고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유학의 경전에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와 주석을 단 『사변록(思辨錄)』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는 20년 후에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는 빌미를 제공했다.
또한 당시 주자학자들이 금서(禁書)이자 요서(妖書)로 배척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장자의 『장자(莊子)』에 주해(註解)를 다는 연구 작업도 했다.
죽음을 맞기 1년 전(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으면서,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송시열을 ‘올빼미’에 비유해 비판한 일로 파란을 일으켰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다음 해(1703년) 조정 안의 노론 세력과 이들에게 아첨하는 사대부, 부화뇌동한 성균관의 유생들이 한패거리가 되어, 박세당이 주자의 장구(章句)와 주해(註解)를 불경하게도 함부로 고치는 이른바 ‘사문난적’의 중죄를 지었다면서, 형벌에 처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결국 박세당은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고, 전라도 옥과로 유배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연로하다는 이유로 다행히 유배될 위기를 모면하고 수락산 석천동 집으로 돌아왔으나, 불과 석 달 후인 1703년(숙종 29) 75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그 어떤 권력과 사상도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과 사상이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순간, 그것은 사람을 해치는 칼날이 된다. 17세기 조선에서는 ‘주자학’이 그랬다.
그런 점에서 박세당은 17세기 조선에 불어 닥친 ‘주자학’의 광풍(狂風)에 맞서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운 지사(志士)이자 투사(鬪士)였다.
* 박세무 : 소요당(逍遙堂) :
‘한가롭게 노니며 살겠다.’
조선 시대 아동용 학습 교재였던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저자. 사관으로 재직할 때 직필을 하다가 권신 김안로의 미움을 사 마전군수로 좌천되었다. 권력과 이욕을 좇지 않고 평생을 삶.
* 박연 : 난계(蘭溪) :
난초가 피어있는 계곡이 아름다워 붙인 호. 충북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 옥계폭포.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3대 악성(樂聖)이라 불림. 세종 때의 음악가로 악보 편찬, 새로운 아악기의 제작, 음악 이론을 정리하고, 궁중 음악을 정비함.
* 박인로 : 노계(蘆溪) :
만년에 고향(경상도 영천) 부근의 ‘노계(蘆溪, 갈대 개울)’에 은거해 살았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의 3대 가사 시인이라 일컬어진다.
가사의 대가였던 그가 노계의 풍경을 아름답게 읊은 「노계가(蘆溪歌)」는 가사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한 편으로 손꼽힌다. 박인로를 제향하는 도계서원(道溪書院,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소재) 앞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도천 개울이 노계(蘆溪)임.
* 박제가 : 초정(楚亭) :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을 흠모하고 ‘초사(楚辭)’를 좋아함.
‘초정’이라는 호는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초(楚)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굴원(屈原)이, 당시 최고의 강대국인 진(秦)나라에 맞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부국강병책을 건의했다가, 정적(政敵)들의 중상모략으로 실각한 후, 자신의 비분강개한 심정을 읊은 「이소(離騷)」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초나라의 운명을 구하려고 애썼지만, 끝내 간신들의 이간질과 중상모략으로 쫓겨난 굴원은, 분통한 마음에다 자신의 충성심과 결백함을 끝내 보여줄 수 없게 되자, 돌을 안은 채 멱라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쳤다.
그 후 초나라는 날로 쇠약해졌고, 수십 년 뒤 진나라에 멸망당하고 만다.
굴원이 지은 「이소」는 초나라의 노래라고 해서 ‘초사(楚辭)’라고도 하는데, 박제가는 여기에서 ‘초(楚)’자를 따와 초정(楚亭)이라는 호를 지었던 것이다.
나의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고, 본관이 밀양이다. 『대학(大學)』의 한 구절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뜻을 취해 이름을 ‘제가(齊家)’라고 하였다. 또한 ‘초사(楚辭)’라고 부르는 「이소(離騷)」의 노래에 의탁하여 ‘초정(楚亭)’이라고 自號하였다.
1778년(정조 2) 3월, 박제가는 이덕무와 함께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던 청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번암(樊巖) 채제공을 수행해 청나라 사신 길에 따라 나선 것이다.
당시 박제가는 몇 개월 동안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조사한 청나라의 경제와 풍속, 그리고 문물과 제도 중, 조선에서 시행하면 이로움과 편리함을 얻을 만한 것들을 모두 기록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박제가는 3개월 만인 그해 9월에, 청나라에서 얻은 견문을 하나의 학설(學說)로 만들고, 자신의 개혁 구상을 총 정리해 『북학의(北學議)』를 1차 완성한 다음, 저자 서문까지 썼다.
박제가는 수 년 동안 내용을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했고, 체계를 갖추어 책을 완성했다. 그리고 1798년(정조 22)에는 다시 『북학의』의 핵심 내용을 간추리고 새롭게 보완하여, 정조에게 『북학의』 「진소본(進疏本)」을 올렸다.
여기에서 박제가는 조선이 개국 초기부터 유지해온 ‘농본상말(農本商末, 농업을 근본으로 삼고 상업을 말단으로 하는 경제 체계)’과 ‘해금책(海禁策, 바다를 통한 외국과의 각종 교역과 교류를 금지하는 정책)’이 시대에 뒤떨어져 무용(無用)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상공업을 장려하고, 바닷길과 선박을 이용한 외국과의 통상을 추진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이보다 12년 전인 병오년(丙午年, 1786년) 1월, 정조의 요청에 따라 지은 ‘병오소회(丙午所懷)’라는 글에서는, 당시 사학(邪學)이라고 핍박받던 천주학의 뿌리인 서학(西學)을 도입하려고 한다는 비난과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서양인 선교사와 학자들을 초빙해 나라의 우수한 인재들을 교육시키자’는 혁신적인 의견을 정조에게 상소하기까지 했다.
이때 정조의 명에 따라 ‘소회(所懷)’를 올린 조정의 대소 신료가 370여 명에 달했는데, 국가 차원에서 서학(西學)을 도입하고, 서양인 선교사에 대해서도 필요하다면 유화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박제가가 유일했다.
조선의 19세기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고, 정조의 죽음은 곧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1801년(순조 1),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청나라에 갔다 돌아오자마자, 박제가는 사돈 윤가기의 ‘동남 성문 밖 흉서 사건’에 연루되어, 죄를 뒤집어쓴 채 유배형에 처해졌다.
4년이 지난 1805년, 박제가는 죄인의 신분에서 풀려났지만, 자신의 뜻과 크게 어긋나 버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유배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
* 박지원 : 연암(燕巖) : ‘제비바위’
박지원은 1771년 개성 유람에 나섰을 때, 개성 부근의 장단 보봉산에 있던 화장사(華藏寺)에 올랐고, 별천지가 있겠다는 생각에 동행한 백동수와 함께 그곳으로 가보았다. 황해도 금천군의 일명 ‘제비바위 협곡’, 곧 ‘연암협(燕巖峽)’이었다.
박지원은 이곳에 매료되어 장차 이곳에 집터를 닦아 살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곳에 있던 ‘제비바위’ 즉 ‘연암(燕巖)’을 취해 자호로 삼았다.
바위틈은 깊숙이 입을 벌려 저절로 동굴을 만들고, 제비가 그 속에 둥지를 틀었으니, 이곳이 바로 연암(燕巖, 제비바위)입니다.
8세기 조선의 문예 부흥과 지식 혁명을 이끈 두 개의 재야 지식인 그룹이 있었다. 그 하나가 성호 이익에게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학문을 배우고 사상의 영향을 받은 성호학파라면, 다른 하나는 연암(燕巖) 박지원과 담헌(湛軒) 홍대용을 비조(鼻祖, 시조)로 하여 사제(師弟) 혹은 사우(師友) 관계를 형성한 북학파라고 할 수 있다.
북학파는 자신들이 추구했던 신학문과 지식 경향을 가리켜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경세제민학(經世濟民學)·경세제국학(經世濟國學)·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이라고 불렀다.
‘북학파’란 용어는 박지원의 제자였던 박제가가 1778년(정조 2) 청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저술한 『북학의(北學議)』에 연원을 두고 있다.
북학파의 주요 멤버는 박지원,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이었다.
1731년생인 홍대용과 1730년생인 정철조는 스승 김원행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 사이였다. 그들은 1737년생으로 자신들보다 예닐곱 살이나 연하인 박지원과는 평생 동지이자 친구로 만났다.
또한 1741년생인 이덕무와 1748년생인 유득공, 1750년생인 박제가와 1754년생인 이서구는 사상적으로는 북학에 뜻을 함께한 동지였고, 문학적으로는 백탑시사(白塔詩社)를 맺어 함께 활동한 시동인(詩同人)이었다. 이들은 신분과 나이를 떠나 모두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때 홍대용은 이들 그룹의 고문이자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다.
박지원,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가 당시 권세를 누린 노론 명문가의 자제였던 반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는 사회적 냉대와 멸시를 감내해야 했던 서얼 출신이었다. 이들은 나이와 경륜, 신분의 귀천과 벼슬의 고하를 떠나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2월 5일 새벽에 한양의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 서소문 밖 풀무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영조 때 경기도 관찰사, 대사간, 지돈령부사 등 최고위 관직에 올랐던 할아버지 박필균으로 인해 한양의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삼종형(三從兄, 팔촌형)인 금성위(錦城尉,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와 혼인해 얻은 부마 칭호) 박명원을 따라가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그토록 열망했던 청나라에 가는 기회를 얻게 된다.
5월에 길을 떠난 박지원은 6월 압록강을 건너 8월에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燕京, 베이징)에 들어섰다. 그러나 당시 황제가 열하(熱河)에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그곳으로 갔다가 다시 연경으로 돌아왔고, 10월에 귀국하였다.
이때의 여행 체험을 기록한 책이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 고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걸작 『열하일기(熱河日記)』다.
평생 권세와 명리를 멀리한 채 가난하게 살았던 박지원은 50이 다 된 늦은 나이에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큰형까지 세상을 떠난 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선공감 감역(종9품)에서 시작해, 평시서 주부(종6품), 사복시 주부(종6품), 한성부 판관(종5품) 등 여러 관직을 거친 다음, 박지원은 1791년 나이 55세 때 경상도 안의현(安義縣)의 현감이 되어, 한 고을을 직접 맡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양선(颺扇, 풍력을 이용해 겨 따위를 없애는 농기구), 수차(水車)와 베틀, 그리고 물레방아 등을 손수 제작해 이용후생에 힘썼다. 현재 함양군 안의면에는 안의현감 시절 박지원이 제작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를 기념하는 ‘연암 물레방아 공원’이 세워져 있다.
1796년 안의현감에서 물러난 박지원은 이후 충청도 면천군수(1797년)로 나갔다가, 다시 강원도 양양부사(1800년) 직을 맡았다. 면천군수 시절에는 농업 및 토지 개혁과 상업적 농업 및 과학적 영농 기술에 대한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담은 『과농소초(課農小抄)』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
양양부사로 부임해서는 환곡(還穀)의 방출과 수납을 조ᄌᆞᆨ해 백성들을 착취하는 아전들의 부정비리를 바로잡는 한편, 역대 임금들의 필적을 봉안한다는 명분으로 궁속(宮屬)들과 결탁해 관리를 구타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예사로 벌인 천후산(天吼山) 신흥사(新興寺) 승려들의 횡포를 뿌리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감사가 조정의 권세가와 연결되어 있던 승려들을 처벌하려고 하지 않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얼버무리기만 하자, 박지원은 아무 미련 없이 관직을 사직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버렸다. 1801년이었다.
정조가 사망한 후 권력을 장악한 노론의 권신과 세도가문 아래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품은 개혁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박지원은 이전에 살았던 연암협으로 돌아갔다.
* 박팽년 : 취금헌(醉琴軒) :
‘가야금에 취하다’
집현전의 젊은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 충의와 강단 있는 선비이면서도 평소 가야금 타는 것을 좋아했으며, 악기와 음률에도 능통했던 풍류지사.
* 서거정 : 사가정(四佳亭), 정정정(亭亭亭) :
‘네 가지의 아름다움’, ‘네 가지를 좋아함’. ‘정정하게 살다’
서거정이 좋아했던 4가지는 매화, 대나무, 연꽃, 해당화인데, 그는 집안에 이 네 가지 꽃과 식물을 심어놓고 즐겨 감상하였다. ‘정정(亭亭)’은 ‘늙었으나 허리가 굽지 않고 꼿꼿한 모양’, ‘산이나 나무가 높이 우뚝 솟아 있는 모양’
45년 동안 세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여섯 왕을 섬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서예가, 학자.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국가적 편찬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향약집성방을 국역했으며, 우리나라의 역대 명문장을 모아 『동문선(東文選)』을 엮는 등, 조선 전기 국가 제도와 학문 및 문장의 정비에 큰 공적을 남김.
* 서경덕 : 화담(花潭) :
‘꽃 못’
박연 폭포와 황진이, 서경덕을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하는데, 서경덕의 인품과 절행(節行)을 사모했던 황진이가 그를 추앙하는 마음으로 박연 폭포와 자신을 포함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는 말을 지었다.
서경덕은 세상의 명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화담(花潭) 가 조그마한 초가집에 거처하며, 지극히 단순하면서 소박한 삶을 살았다. 또한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간혹 산수 유람을 떠났던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화담에서 보냈다. 화담은 서경덕의 삶의 전부였다고 과언이 아니다.
화담과 그 주변의 자연 풍경은 조선의 호사가(好事家)들이 반드시 유람해야 할 명승지였다. 특히 봄이 되어 바위틈에 핀 철쭉꽃이 만발하여 물에 붉게 비추는 ‘화담’은, ‘꽃 못’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장관이었다고 한다.
서경덕이 화담 가에 집을 짓고 거처하면서 그 지명을 취해 자호로 삼기 시작한 이후, 화담은 퇴계 이황의 안동, 남명 조식의 합천, 율곡 이이의 파주처럼 서경덕 사상의 본향으로 재탄생했다.
서경덕은 독특한 학풍과 여러 기행(奇行)으로 이황, 조식, 이이와는 또 다른 학문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정통 성리학과는 다소 거리를 둔 유학 해석과 학문 방법으로 명성을 떨쳤다.
서경덕은 성리학의 정통 학설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는 다른 기(氣)를 중시하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학설을 주장하였다.
‘이기이원론’은 관념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관념인 理가 물질인 氣의 주재자(主宰者)라고 보기 때문에 물질보다 관념을 중시하는 ‘관념론 철학’이라고 한다면,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물질인 氣를 만물의 본체로 보고, 理·氣를 一體로 본다는 점에서 ‘유물론’ 철학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서경덕은 학문하는 방법에서도 정통 성리학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주자의 학문 방법은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면 앎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독서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면 마침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독서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방법을 부정하고, 먼저 궁리와 사색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직접 탐구한 후, 독서를 통해 확인하는 방법으로 학문을 했다.
이러한 서경덕의 독특한 학문 방법은, 훗날 국가 차원에서 역대 임금의 업적 중 선정(善政) 만을 모아 편찬한 편년체 사서인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자세하게 실릴 만큼, ‘서경덕식 공부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609년(광해군 1) 홍이상이 지방의 선비들과 발의하여 화담의 옛터에 ‘화곡서원(花谷書院)’을 세우고, 서경덕과 그의 제자인 박순, 허엽, 민순 등을 배향했다.
정계와 학계에 두루 포진한 서경덕의 제자들은 하나의 학풍을 형성하며, ‘목릉성세(穆陵盛世, 목릉은 선조의 능으로, 수많은 인재가 등장해 조선 문화를 꽃피웠다하여, 후대에 선조의 시대를 목릉성세라 일컬음)’를 주도했다.
이에 서경덕의 제자와 후학들이 조선 유학사에서 최초의 학파라고 할 수 있는 ‘화담학파(花潭學派)’를 이루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유현(儒賢) 가운데 두루 쓰일 재능을 갖춘 이는 정암(靜庵) 조광조와 율곡(栗谷) 이이뿐이다. 하서(河西) 김인후와 중봉(重峯) 조헌 같은 이는 절의(節義)가 도학(道學)보다 높고, 화담(花潭) 서경덕은 소강절(邵康節)과 비교해도 또한 불가하지 않다.”
-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 「인물(人物)」
자세한 내용은 ‘화담 서경덕과 토정 이지함’ 본문을 참조.
* 서명응 : 보만재(保晩齋) :
‘만년에도 절개를 잘 지켰다’.
정조 즉위 직후 문치와 개혁 정치의 산실로 기획·설치된 규장각의 첫 번째 제학(提學)으로 임명될 정도로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다. 북학파의 비조(鼻祖)라고 불릴 만큼 이용후생의 학문을 중시했다. 북학파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 서문을 쓴 사람이 서명응과 박지원이었다. 성호학파나 북학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 달성 서씨 가문의 실학(實學)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한다. 그가 남긴 저술을 모아 엮은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는 정조로부터 ‘우리나라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거편(巨篇)’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해동농서(海東農書)』를 저술한 아들 서호수,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를 남긴 손자 서유구,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쓴 손자며느리 빙허각(憑虛閣) 이씨 등, 무려 3대까지 이어져, 가장 번성한 ‘실학자 가문‘을 형성했다.
정조와 맺은 충의와 인연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아, 그의 나이 65세가 되는 1780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 정조가 위의 뜻을 담은 ‘보만(保晩)’이라는 호를 내렸다. 이에 노년에 자신의 집 이름을 보만재(保晩齋)로 바꾸고, 또한 자신의 호로 삼았다.
* 서유구 : 풍석(楓石) :
‘섬돌 위에 심은 단풍나무’.
할아버지 셔명응과 아버지 서호수로 이어온 달성 서씨 가문의 이용후생학을 종합하고 집대성한, 19세기 최고의 실학자이다. 18년에 걸쳐, 113권 52책, 250만 자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농업 서적이자 실학 서적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를 저술했다.
20대의 젊은 시절, 선영(先塋)이 있던 경기도 장단의 학산(鶴山) 아래 살면서, 정원에 섬돌을 쌓고, 다시 그 위에다 단풍나무 10여 그루를 심어 병풍처럼 둘렀다. 그 옆에 ‘풍석암(楓石庵)’이라 이름붙인 서재를 만들고 독서에 전념했다.
* 성삼문 : 매죽헌(梅竹軒) :
올곧고 강직한 군자의 기질과 품격을 상징하는 ‘매화와 대나무’.
서거정이 지은 시 「매죽헌(梅竹軒)」 “대나무는 성인(聖人)의 맑은 기상이고, 매화는 선인(仙人)의 뼈대이네.”
집현전의 학자로 학문적 재능과 실력이 출중해서 세종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음. 사육신의 한 사람.
* 성수침 : 청송당(聽松堂) :
‘솔바람(소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듣는 집’
그의 집이 종로구 청운동으로, 사방을 두르고 있는 소나무 숲 가운데 거처하였다.
조광조의 수제자로 현량과에 천거되어 벼슬길에 올랐지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청송당이라 이름붙인 집에 은둔한 채 세상을 멀리하고 경서 연구에만 전념했다. 그는 사림의 적통을 이은 조광조의 수제자이기도 했지만, 또한 서인의 종조(宗祖)가 되는 우계(牛溪) 성혼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훗날 사림파는 물론이고 특히 서인 당파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다. 송시열의 「청송당기(聽松堂記)」.
성현 : 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 ‘명예와 이익을 좇는 것에 게으르다’, ‘둥둥 떠 있고, 휴식함’
성종의 명으로 당시까지 전해온 음악 이론과 각종 음률과 악보 및 악기를 총망라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했고, 고려 때부터 성종 때까지의 풍속, 지리, 역사, 문물, 제도, 음악, 문학, 인물, 설화 등을 집대성한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저술했음.
‘게으름을 조롱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우의적이고 역설적인 표현 방법으로) 명예와 이욕을 좇아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속적인 삶과 거리를 두며 살겠다는 뜻으로 ‘게으를 용(慵)’ 자를 취해 호로 삼은 사연을 기록해 놓았다.
「부휴자전(浮休子傳)」에서 “세상에 태어나서 산다는 것은 마치 둥둥 떠 있는 것[浮]과 같고, 죽어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마치 휴식하는 것[休]과 같다.” “둥둥 떠 있는 것과 같은 삶이 뭐가 영화롭고, 휴식하는 것과 같은 죽음이 뭐가 슬프겠는가” 삶도 특별한 가치가 없고, 죽음 또한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탈속(脫俗)의 철학이 담겨 있다.
* 성혼 : 우계(牛溪), 묵암(黙庵) :
경기도 파주 파평산 아래 ‘우계(牛溪)’에 살면서, 제자를 가르침.
아버지 성수침이 지은 청송당(聽松堂)에 살던 시기에는 묵암(黙庵)이라고 했음.
우계(牛溪) 가에서 평생 성리학을 탐구하고, 서실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다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성혼이 율곡 이이와 맺은 도의지교(道義之交)는 조선에서 성리학이 유일무이한 이념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율곡과 함께 서인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사후에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되는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동방18현(東方十八賢)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대학자.
* 송순 : 면앙정(俛仰亭) :
하늘을 우러러보아 부끄럽지 않고, 사람에게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은 삶.
‘俛仰亭’은 맹자가 말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두 번째 즐거움, 즉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부부작어인(俯不作於人)”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송순은 구부릴 부(俯) 대신, 같은 뜻을 가진 한자인 ‘구부릴 면(俛)’을 사용해 ‘俛仰亭’이라고 이름 붙였다.
漢詩 「면앙정가(俛仰亭歌)」, 가사 「면앙정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면앙정 송순과 송강 정철’ 본문 참조.
* 송시열 : 우암(尤庵) : ‘잘못이나 허물’
‘우암(尤庵)’이라는 송시열의 호 역시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이었던 사상 논쟁의 과정에서 탄생했다. ‘우(尤)’라는 한자는 ‘잘못 혹은 허물’을 뜻한다.
‘그대가 이처럼 말이 많으니, 말에 허물[尤]이 적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내가 마땅히 그대의 서실(書室)에 우(尤)라고 이름 붙여야겠다.’
김익희가 송시열과 논쟁을 하다가, 워낙 고집이 세어 한 치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려고 하지 않는 송시열에게 희롱삼아 지어준 호가 다른 아닌 ‘우암(尤庵)’이다.
송시열은 1607년(선조 40)에 태어나, 1689년(숙종 15)에 사망했다. 그는 조선의 유학자 중 유일하게 공자나 맹자 그리고 주자와 같은 반열인 ‘송자(宋子)’라는 극존칭을 얻은 인물이다. 그는 평생 자신이 주자학의 적통(嫡統)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면서, 주자학의 수호신으로 살았다.
나이 24세(1628년) 때 김장생에게 취학해, 10년 동안 주자학과 예학을 배운 송시열은, 김장생 사후 그의 아들인 김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그는 김장생과 김집의 학통과 당파를 이은, 서인 노론 계열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적 수장으로 일생을 보냈다.
병자호란 이후 북벌(北伐)을 국시(國是)로 내건 효종이 즉위하면서, 반청척화론(反淸斥和論)을 주창한 송시열은 조정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한다.
송시열에게 명나라는 사대(事大)의 예(禮)로 섬겨야 할 나라였고, 사상의 조국(祖國)이었다. 그런 명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의 청나라는, 성인의 도통(道統)을 끊어버리고 사상의 조국을 짓밟은 야만적인 오랑캐에 불과했다. 송시열은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공자와 주자의 도통과 정통성은 조선의 주자학으로 넘어왔다고 여겼다.
송시열의 나이 82세가 되는 1688년 10월 28일, 숙종은 그토록 바라던 첫 아들을 얻었다. 장희빈의 소생으로 훗날 경종이 되는 이다. 당시 송시열은 낙향해 남간정사(南澗精舍)에 은거한 채, ‘조선의 주자’로 군림하면서, 임금에 버금가는 권위와 위세를 누리고 있었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집권 세력도 송시열의 문하생이자 추종자들인 서인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서인의 집권 세력이 어떻게 손을 써볼 틈도 주지 않고, 남인의 비호를 받는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호(定號)하고, 종묘(宗廟)에 고하는 절차까지 일사천리로 마무리해버렸다.
송시열은 ‘원자의 작위와 정호’ 그리고 ‘종묘 고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오히려 숙종의 분노를 사, 집권 세력이 다시 남인으로 바뀌는 기사한국(己巳換局)을 불렀다.
숙종은 기사환국 직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당사자라는 죄목을 물어, 송시열을 제주도 유배형에 처했다.
송시열이 제주도에 도착해 귀양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문하생과 추종자인 서인 세력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대거 관직에 중용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그리고 숙종은 국문(鞠問)을 해 죄의 실상을 낱낱이 묻겠다면서, 송시열을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한양으로 발길을 재촉하던 송시열은 1689년 6월 7일, 전라도 정읍에 당도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뜻밖에도 사약이 도착했다. 결국 송시열은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았다. 그때 송시열의 나이 83세였다.
그러나 송시열이 죽음으로 다져놓은 서인(노론) 세력의 정치적 명분과 사상적 권위는, 이후 그들이 조선의 정치권력을 다시 장악하고 장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는 초석(礎石)으로 작용했다.
그는 양대 전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예학(禮學)을 근본으로 삼아 기존의 신분 질서와 지배 체제를 더 공고히 다지는 방식으로 타개하려고 한 정치적 보수주의자였고, 춘추의리와 주자학의 절대 권위를 앞세워,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통제하려고 한 보수적인 이데올로그였다.
그러나 노론 세력의 장기 집권은 훗날 조선을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영조의 즉위와 함께 노론 세력은 장기간의 권력 독점을 통해 조정을 부정과 부패로 곪게 만들었고, 피의 숙청을 통해 정치적 경쟁자나 비판세력의 씨를 말려버렸고, 주자학의 권위와 정통성에 도전하는 그 어떤 사상적 학문적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는 공포 정치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 송준길 : 동춘당(同春堂) :
‘세상 만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 한다(與物同春)’. 포저(浦渚) 조익의 「동춘당기(同春堂記)」. 송준길이 대전 회덕에 중건한 별당의 이름이 동춘당(同春堂)인데, 보물 제209호.
사계 김장생의 제자로 연하인 우암 송시열과 더불어 서인 세력을 규합해 국정을 주도함. 생전에 ‘양송(兩宋)’이라 불리며, 서인 당파를 하나로 결집시켜, 향후 조선을 ‘서인(특히 노론 계열)의 나라’로 만든, 공적 아니 공적을 인정받아, 훗날 송시열과 나란히 동방18현(東方十八賢)으로 추존되어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되는 호사를 누렸다.
* 신사임당 : 사임당(師任堂) :
‘태임을 스승으로 삼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유학자들이 이상국가로 삼은 주(周)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스승으로 본받아, 자식(율곡 이이)을 성현으로 키우겠다는 뜻과 의지로 세운 자신의 당호.
율곡 이이의 학문적 성취는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스스로 공부해 이룬 것이 대부분이지만, 처음 그에게 학문을 가르친 사람은 신사임당이었음을 밝힘. 『율곡전서』 「연보」.
문왕이 성군과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어머니 태임의 남다른 태교와 자식 교육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태임은 예부터 최고의 현모로 추앙받았다.
* 신숙주 : 희현당(希賢堂), 보한재(保閑齋) :
‘현인(賢人)을 희구하라’, ‘한가함을 보존한다’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을 빛낸 학자였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적극 가담함.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큰 기여. 요동으로 유배당한 명나라 학자 황찬을 열세 차례나 찾아가 언어와 문자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이를 훈민정음 창제에 적극 활용. 황찬이 신숙주에게 ‘희현당(希賢堂)’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고 함.
명리를 멀리하고 한가롭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호. 『보한재집(保閑齋集)』
* 신위 : 자하(紫霞) :
관악산의 ‘자하동(紫霞洞 )’ 계곡 이름에서 취함.
순조와 헌종 연간의 문신이자 학자로, 시문·그림·서예 등 모든 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청조 고증학에 밝아 청나라 최고의 학자였던 옹방강과 교유했음.
관악산의 최고 절경으로 자하동 계곡을 꼽을 수 있다. 신유는 조상 대대로 전해온 자하산장(紫霞山莊)을 물려받아 경영하면서 관악산 자하동을 자주 드나들었음.
『자하집(紫霞集)』 : 김택영이 중국에서 그의 시 600수(首)를 모아 간행.
* 신윤복 : 혜원(蕙園) :
김홍도의 호에서 ‘원(園)’을 따왔다. ‘혜(蕙)’는 난초의 일종인 혜란(蕙蘭).
줄기 하나에 한 송이 꽃이 피어 향기가 넘치는 것은 ‘난(蘭)’이요, 한 줄기에 예닐곱 송이 꽃이 피지만 향기가 조금 덜한 것은 ‘혜(蕙)’이다.
윤복은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불린다. 그러나 신윤복은 당시 어느 누구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성(性과) 연애 그리고 여성’을 그림의 소재와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한 화풍을 독자적으로 개척한 대가(大家)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성과 연애에 대한 본능’을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묘사하고 표현해, 당시 사회의 금기와 인습과 관습을 철저하게 허문 파격의 화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예술적 아름다움을 갖춘 에로티시즘’의 화가라고 하겠다.
여인 풍속화나 연애 혹은 성애(性愛) 풍속화라고 불러도 좋을 신윤복의 그림은, 정조 시대 조선 사회가 일부 계층을 중심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였던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가 없었다면 신윤복의 파격적인 그림은 결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혁 군주 정조가 사망하고 노론과 세도 가문의 보수 반동 정치가 휩쓴 순조 이후로는, 신윤복처럼 성리학이 극도로 혐오한 인간의 성과 연애 본능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린 화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해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본문 참조.
* 신흠 : 상촌(象村), 현옹(玄翁) :
자신의 별장 옆에 있던 ‘상두산(象頭山)’에서 따옴. ‘도가적 삶’을 의미.
조선 중기 한문학을 대표하는 4대 문장가를 일컫는, 이른바 ‘계택상월(谿澤象月)’에서 상(象)은 신흠의 호인 상촌(象村)을 가리킴.
문장력이 뛰어나 각종 외교문서와 의례문서의작성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학문에도 깊은 식견을 갖춰 명성이 높았다.
경기 금촌에 있던 자신의 별장 옆 상두산(象頭山) 아래에서 전원생활을 함.
현옹(玄翁)의 현(玄)은 세속의 명예와 이익에 초탈한 자긍심의 표현임을 「현옹자서(玄翁自敍)」에서 밝힘.
* 심사정 : 현재(玄齋) :
명나라 말기 남종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의 아호였던 ‘현재(玄宰)’에서 취함.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일컬어지던 조선의 대표 화가. 중국의 문인화인 남종화풍과 북종화법까지 수용해 그림을 그렸다. 조선의 화풍에 중국의 화풍을 접목시킴.
* 안견 : 주경(朱耕), 현동자(玄洞子) :
‘인주로 짓는 농사’ ‘신선이 사는 곳에서 살다’
인주로 농사를 짓는다는 표현은 화가임을 나타냄. ‘현동(玄洞)’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三神山]에 비견됨. 도가의 이상향에서 살고 싶었던 안견의 소망이 담겨 있음.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화가. 정선,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미술을 대표하는 3대 거장으로 불림.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언의 풍경을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우리 미술사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 안정복 : 순암(順菴), 영장산객(靈長山客) :
“천하의 일은 순리(順理)뿐이다!” ‘영장산의 손님’
조상의 선영이 자리하고 있는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이주했다. 이때 ‘암(菴)’자 모양으로 집을 짓고 ‘순암(順菴)’이라고 이름 붙였다. ‘천하의 일은 오직 순리(順理)일 뿐이다’라는 뜻을 취한 이름이었다.
‘순암’이라는 그의 호에서는, 서학에 대해 배타적이면서, 유학의 여러 분야 중 가장 보수적인 성격을 띠는 예학(禮學)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광주 덕곡리에 있는 영장산은 조상의 선영이 있던 성지(聖地)였다. “영장산 속에서 독서하며 ‘영장산객’이라고 자호하였다.”
『동사강목』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안정복은, 이익의 수제자로 이익 사후 성호학파를 이끈 인물이다.
안정복은 이익에게 가학(家學)을 전수받은 가계(家系) 측의 수제자인 이병휴가 타계한 1776년 나이 65세 이후부터 실질적으로 성호학파를 이끌었다.
1780년대에 들어와 성호학파는 유학의 경전 해석과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태도와 방식을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하면서, 우파(보수파)와 좌파(진보파)로 분열되었다. 당시 안정복은 우파의 수장으로 좌파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공격했다.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때로는 동조하기까지 했던, 이익의 높고 깊고 넓은 학문 세계와 정신세계를 따라가기에는, 안정복의 삶과 철학에 드리운 유학과 성리학의 그늘이 너무도 짙고 어두웠다.
* 안평대군 : 비해당(匪懈堂) :
‘게을리 하지 말고 임금을 섬기라’. 장차 임금이 될 큰형 문종을 잘 섬기라는 뜻으로, 아버지 세종이 안평대군의 집에 내린 당호. 『詩經』의 「증민(蒸民)」편에 나오는 ‘숙야비해 이사일인(夙夜匪懈 以事一人,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한 분 임금만을 섬기네)에서 취함.
세종의 셋째 아들로 시문은 물론 서예와 그림, 음률에 능숙했던, 당대 최고의 예술가. 계유정난 때 형인 수양대군에 의해, 김종서·황보인 등과 결탁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려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채 죽임을 당했다.
* 양사언 : 봉래(蓬萊), 해객(海客) :
‘금강산의 별칭인 봉래산(蓬萊山)’, ‘해금강을 좋아함’
금강산을 너무나 사랑해 이 산의 여름 별칭인 봉래산(蓬萊山)을 취해 호로 삼았고, 금강산 삼일포 주변 해금강의 풍경을 무척 좋아했음.
양사언은 물론 형 양사준과 동생 양사기 모두 시문에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 소식·소순·소철)와 견주어지곤 했고, 특히 서예에 뛰어나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더불어 조선의 4대 명필로 일컬어지고 있다.
* 양산보 : 소쇄옹(瀟灑翁) :
기운과 기상이 ‘맑고 깨끗하며 시원한 늙은이’
전남 담양 창평에서 태어나고 자란 양산보는 한양으로 올라가 조광조의 문하생이 되었다. 현량과에 합격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전남 능주로 유배형에 처해지자, 따라나서 유배지에서 스승을 모셨다. 조광조가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사(賜死)당하자, 슬픔과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소쇄원(瀟灑園)을 짓고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 후 소쇄원을 중심으로 이종사촌간인 면앙정 송순, 사돈 간인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사촌 김윤제,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과 교유하며, 호남사림과 호남 가단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양산보가 지은 소쇄원은 인공적인 멋보다는 자연적인 멋을 중시했던 조선의 건축 미학과 정원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다.
* 양성지 : 눌재(訥齋) :
‘말이 서툴거나 어눌함’ 『논어』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剛毅木訥近仁(강의목눌근인, 강직하고 굳세며 질박하고 어눌함은 仁에 가깝다)’
세조가 ‘나의 제갈량’이라고 부를 만큼 뛰어난 지략과 경륜을 갖춘 문신이자 학자. 집현전 출신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에 동조함. 실제 양성지는 말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개진하는데 힘을 쏟음. 자신의 단점을 호(號)로 취해 극복한 인물.
* 유금 : 기하(幾何) :
서양에서 들어온 유클리드 ‘기하학(幾何學)’에 탐닉함. ‘기하(幾何)’는 ‘숫자를 헤아려 묻고 밝혀낸다‘는 뜻.
연암 박지원을 따른 북학파의 일원이었으며, 『발해고(渤海考)』의 저자로 유명한 유득공의 작은아버지다.
* 유몽인 : 어우당(於于堂) :
‘쓸데없는 소리로 뭇사람들을 현혹케 한다’
『장자(莊子)』 「천지(天地)」편 ‘어우이개중(於于以蓋衆)’에서 유래.
자유분방한 사고의 소유자였으며, 우리나라에서 야담(野談)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 이 야담집은 당시 사대부를 지배하고 있던 성리학의 구속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계층의 이야기를 자유분방하게 기록한 파격적인 책이다.
“공자는 박학한 것으로 자신을 성인에 비교하고, 쓸데없는 소리로 뭇사람들을 현혹케 하고, 홀로 서글픈 노래를 연주하며 천하에 명성을 판 사람이 아닌가?”
* 유성룡 : 서애(西厓) :
유성룡의 고향인 하회마을을 감싸고 돌아가는 낙동강의 ‘서쪽 언덕’
퇴계 이황의 제자로, 임진왜란의 국난을 타개한 명재상이자 경세가(經世家). 징비록(懲毖錄)의 저자.
* 유언호 : 즉지헌(則止軒) :
주역의 뇌천대장(雷天大壯) 괘를 잡괘전(雜卦傳)에서 ‘대장즉지(大壯則止, 크게 융성하면 그쳐야 한다)라고 하였던 것에서 취함.
연암 박지원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절친. 영조 때 홍봉한을 중심으로 한 척신 정치(戚臣政治)의 혁파가 사림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정치적 결사인 이른바 ‘청명류(淸明流) 사건‘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왕세손 시절 때의 정조를 잘 보좌하여, 정조 즉위 이후 크게 출세해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가 쓴 「자지(自誌)」에 호의 유래를 적음. 유언호가 일생의 길흉을 점쳤는데, 뇌천(雷天) 대장괘(大壯卦)가 나왔다. 이에 따라 주역의 가르침에 따라 대장즉지(大壯則止)에서 뜻을 취해, 자신의 집에 편액하고 자호로 삼았다. ‘그쳐야 할 때와 그쳐야 할 곳을 아는 것’을 지침으로 삼았다.
* 유형원 : 반계(磻溪) :
‘우반동의 개울’
전북 부안 변산(邊山)에 위치한 우반동(愚磻洞)은, 허균이 일찍이 마음을 빼앗겨 정착하려 했을 만큼, 아름다운 산수와 풍요로운 물산을 자랑하는 곳이다.
허균은 1608년(선조 41, 나이 40세) 가을에 관직에서 해임되자, 정사암(靜思庵)이 있던 곳에 집터를 잡아 중수하고, 생계를 연명할 약간의 전장(田莊)까지 갖추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허균은 틈만 나면 우반동을 찾았다.
그러다 1618년 역모를 꾸몄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다.
허균이 세상을 떠난 지 35년이 지난 1653년, 또 한 명의 풍운아(유형원)가 우반동을 거처로 삼으며, 이곳은 ‘혁명과 개혁의 땅’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한다.
실학의 대부인 성호 이익이, 조선이 개국한 이래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시무(時務)를 알았던 사람은 오직 율곡 이이와 유형원 뿐이라고 했고, 북학파의 비조(鼻祖, 시조)인 담헌 홍대용이 우리나라 사람이 저술한 책 가운데 경세유용지학(經世有用之學)은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유형원이 지은 『반계수록(磻溪隧錄)』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만큼 조선 최고의 개혁서로 평가받고 있는 『반계수록』이었다.
유형원은 1622년(광해군 14)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유형원이 태어나 지 불과 1년 만에 그의 아버지 유흠(劉歆)은 이른바 ‘유몽인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자결하고 만다.
그 후 유형원은 외숙부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우고 익혔다.
이원진은 훗날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 남인 실학파의 산실 역할을 한 이익의 당숙이었다. 또한 김세렴은 중국 사정에 밝고, 사신으로 일본에도 내왕한 적이 있는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다.
1653년(효종 4) 나이 32세 겨울에, 할아버지 유성민의 전장(田莊)이 있던, 전북 부안현 변산의 우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우반동에 몸을 맡긴 이후, 유형원은 자신의 호를 ‘반계(磻溪)’로 삼았다. 반계는 ‘우반동의 개울’이라는 뜻이다. 실제 우반동의 중앙으로 흐르는 개울의 이름이 반계이다.
유형원은 우반동에 거처한 첫해부터 49세가 되는 1670년까지, 무려 18년에 걸쳐 나라와 백성을 구제할 체제 개혁 대책을 연구했고, 그 성과를 집대성한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반계수록』은 토지 제도 개혁을 다른 ‘전제(田制)’, 재정 및 상공업 개혁을 다룬 ‘전제후록(田制後錄)’, 교육 개혁을 담은 ‘교선제(敎選制)’, 관료 제도의 개혁을 다룬 ‘직관제(職官制)’, 녹봉제 개혁을 담은 ‘녹제(祿制)’, 국방 개혁을 담은 ‘병제(兵制)’, 지방 체제와 행정 개혁을 다룬 ‘군현제(郡縣制)’ 등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어느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정치·경제·사회·교육·국방·행정 등 모든 방면을 두루 다룬 방대한 규모의 개혁서(改革書)였다.
이 책이 ‘조선 최고의 개혁서’라고 불리는 까닭은, 경자유전(耕者有田)과 토지 공유제(土地公有制)를 근간으로 하는, 농민 중심의 토지 개혁을 최초로 제기했다는 점 때문이다.
유형원은 토지 개혁을 통해, 자신의 경작지를 소유한 자영농이 나라의 재정과 국방을 담당하는, 부강한 조선의 미래를 그렸다.
18세기 들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토지 개혁론, 즉 이익의 ‘한전론(限田論)’과 박지원의 ‘한전론(限田論)’ 그리고 정약용의 ‘여전론(閭田論)’과 ‘정전론(井田論)‘ 등은 모두 유형원의 토지 개혁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형원은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초야에 묻힌 채 재야 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유형원과 같은 현인(賢人)이 나왔지만, 이 현인을 중용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성군은 출현하지 않았으니, ‘보수의 시대’이던 17세기 조선의 ‘비극’이다.
* 유홍기 : 대치(大致), 대치(大癡) :
‘크게 이루다[大致]’. ‘크게 어리석다[大癡]’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화 혁명인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중인[본래 역관 집안 출신이지만 의업(한의사)에 종사함] 출신의 개화사상가임. 조정 밖의 정승이라는 뜻의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리며, 개화와 근대화를 통해 조선을 총체적으로 개혁하려고 했으나,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환란을 피해 몸을 숨긴 후 행방불명됨.
* 유희춘 : 미암(眉巖) :
‘초승달 혹은 눈썹 모양의 바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해남의 집 가까이에 있는 눈썹 모양의 바위[眉巖] 이름을 호로 취함.
16세기 조선의 생활사와 일상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보물 제260호 『미암일기(眉巖日記)』의 저자.
호남사림의 대부였던 외할아버지 금남 최부의 학통을 계승해,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과 더불어 가장 명망 높았던 호남의 학자였음. 어린 명종을 대신해 섭정하던 문정왕후의권력 전횡을 비판하다 제주도에 유배되어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지만, 선조가 즉위한 후 사면되어 전라도 관찰사, 이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에 올랐다.
* 윤두서 : 공재(恭齋) :
‘공경(恭敬)을 갈고닦는 군자(선비)의 길’
윤두서는 『중용(中庸)』의 구절 속에서 ‘공(恭)’자를 취해 自號로 삼았다. “君子(군자)는 篤恭而天下平(독공이천하평)이니라.” 이 말은 ‘군자가 뜻을 두텁게 하고 공경(恭敬)하면 천하가 화평하다’는 뜻이다.
윤선도가 사망하기 3년 전인 1668년, 해남 윤씨 가문에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예술가가 태어났다. 그는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자화상>을 그린 선비 화가 공재(恭齋) 윤두서이다.
윤선도에 이은 윤두서의 등장으로 해남 윤씨 가문은 명실상부 호남 제일의 명문가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 집안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한 집안에서 문학과 회화 양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연이어 나온 곳은 해남 윤씨 가문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윤두서는 강보에 쌓인 채로 윤선도의 큰손자(윤두서에게는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었고, 이때부터 호남 제일의 명문 해남 윤씨 대종가를 이끄는 종손으로 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족보상으로도 윤선도는 윤두서의 직계 증조부가 되었고, 윤두서는 윤선도의 직계 증손자가 되었다.
윤선도가 문학에서 최고봉의 자리에 도달했듯이, 윤두서는 문인화가(文人畵家)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 해남 윤씨 가문의 명성을 크게 빛냈다.
호는 그 사람의 삶과 철학 혹은 그의 사람됨과 행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호 이외에 그 사람의 인품과 감정까지 읽을 수 있는 드문 사례가 존재하는데, 바로 윤두서의 ‘자화상’이 그렇다. 이러한 경우는 윤두서를 제외하면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이 유일하다고 할 정도로 드물다.
우리 미술사에서 최고의 인물화로 평가받는 윤두서의 <자화상>은 일찍부터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그림이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듯한 강렬한 눈빛과 멋들어지게 그려진 수염이 무척 인상적이다. 마치 도사나 검객에 가까운 외양을 띠고 있다.
조선의 인물화를 많이 보면 볼수록 개성미(個性美)보다는 인위적인 전형미(典型美)를 확인하게 된다. 즉 성리학이 이상으로 여긴 성현의 인품과 풍모에 가능한 한 가깝게 그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풍조나 사회적 환경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미덕(美德)이 아니라 일탈이었기에, ‘자화상’다운 ‘자화상’을 남긴 사람은 윤두서와 강세황 밖에 없었다.
자화상은 특정 종교나 사상이 숭배하는 ‘절대적인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개성과 자아의식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윤두서는 성리학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이른바 ‘타자화된 나’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온전한 나’를 그렸던 것이다. ‘근대적 자아’를 향해 막 발걸음을 뗀 조선의 표상이기도 했다.
「어부사시사」가 없었다면 최고의 시인 윤선도가 존재할 수 없었듯이, <자화상>이 없었다면 독보적인 문인화가 윤두서 또한 없었을 것이다.
「어부사시사」 한 편과 <자화상> 한 점 만으로도, 윤선도와 윤두서는 우리 문학사와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충분히 장식하고도 남음이 있다.
* 윤두수 : 오음(梧陰) :
윤두수의 선영(先塋)이 있는 경기도 장단의 ‘오음리(梧陰里)’에서 취함.
시와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에서도 명필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어영대장이 되었다가, 이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오음유고(梧陰遺孤)』
* 윤선도 : 고산(孤山), 해옹(海翁) :
‘외롭게 홀로 서 있는 산’. ‘바다로 간 늙은이’
‘고산’이라는 윤선도의 호는 해남 윤씨가문의 별장이 있던 양주에서 비롯되었다. 한강 주변에 위치한 이곳은 홍수가 나 강이 범람하면 사방이 물에 잠기곤 했는데, 유독 ‘퇴매재산’만 우뚝 솟아 남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물바다에 외로운 섬처럼 솟아 있는 이 산을 가리켜 ‘고산(孤山)’이라고 했는데, 윤선도는 이 ‘고산’이 세상의 비난과 비방에 맞서 홀로 선 자신의 고고한 기상은 물론, 외롭고 고독했던 자신의 인생과 닮았다고 해서 自號로 삼았다.
윤선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미수(眉叟) 허목은 윤선도 사후 ‘신도비(神道碑)’를 썼다. ‘해옹(海翁) 윤참의(尹參議) 비문(碑文)’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허목은 “공(公, 윤선도)이 바다로 들어간 이후, 내가 호를 해옹(海翁)이라고 붙였다.
‘바다로 들어간 이후’란, 1637년 윤선도의 나이 51세에, 인조가 청나라 군대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등질 목적으로 제주도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우연히 발견하게 된 보길도에 매료되어, 그곳에 터를 잡고 은거할 결심을 한 때이다.
그는 한양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해남과 관계를 맺은 시기는 나이 8세 때인 1594년(선조 27), 백부(伯父)인 관찰공(觀察公)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해남 윤씨 대종가(大宗家)의 대를 잇는 종손(宗孫)이 되면서부터였다.
실제 관계로는 작은아버지였지만 족보상으로는 큰아버지였던 윤유기에게 양자로 들어가면서, 윤선도는 호남 제일의 명문가이자 대부호였던 해난 윤씨의 대종손(大宗孫)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30세(1616년, 광해군 8)에 권신(權臣) 이이첨을 탄핵하는, 이른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는데, 당시 윤선도는 고작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했을 뿐, 아직 관직에도 나가지 않은 포의(布衣)의 신분이었다.
12월 21일 상소를 올린 윤선도는 불과 이틀 후인 23일, 권신 이이첨을 모욕했다는 일종의 괘씸죄가 더해져, 당시 가장 춥고 혹독한 유배지로 악명을 떨친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쫓겨 가야 했다. 이듬해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유배지를 옮겼지만, 그 다음해 정신적 기둥이었던 양부(養父) 윤유기를 잃는 슬픔을 겪었다.
유배지에서 7년여 가까운 세월을 보낸 윤선도는, 1623년(나이 37세) 3월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선조 시대 사림이 東人과 西人으로 분당(分黨)할 때, 윤선도의 가문은 호남에서 몇 안 되는 동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윤의중(윤선도의 할아버지), 이발(윤의중의 외조카), 정언신(윤선도의 사돈인 정세관의 조부) 등이 정여립 역모 사건과 정개청 옥사 사건에 연좌되어 희생당했다. 이들 사건은 서인이 동인을 탄압하고 참살한 일종의 사화(士禍)였다.
이들 사건 이후 다시 조정의 실권을 쥔 동인은 서인 세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둘렀고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면서 남인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섰다. 이때 윤선도의 가문은 남인의 편에 서면서, 호남 제일의 남인 명문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서인의 전횡과 농단에 더 이상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윤선도는 1635년(나이 49세) 겨울 끝내 성산현감 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낙향한다.
해남으로 낙향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땅끝 해남에서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지방 사족(士族)들과 가복(家僕)들로 의병(義兵)을 구성해 배를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이미 강화도는 함락되어 다시 남해로 뱃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다가 임금이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주도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런데 제주도로 가던 도중 뜻밖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보길도를 발견하고, 그곳에 터를 잡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붙이고,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은거하기에 이르렀다.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자, 조정의 서인 세력은 윤선도가 강화도까지 와서 한양을 지척에 두고서도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는, 이른바 ‘불분문(不奔問, 달려와서 문안하지 않았다)’의 죄를 물어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형을 내렸다. 1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한 윤선도는 1639년(나이 53세) 2월, 유배지에서 풀려나 해남으로 돌아온다.
이때부터 13년을 해남의 금쇄동(金鎖洞)과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을 오가며, 시인 묵객의 삶을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윤선도는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의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우리 시조 문화의 최고 걸작들을 연이어 지었다.
윤선도는 효종의 산릉(山陵) 문제와 인조의 계비(繼妃)인 조대비의 복제(服制) 문제로 서인 세력과 이른바 예송논쟁을 벌이다가, 74세의 고령임에도 춥고 혹독한 곳으로 유명한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더욱이 다음 해(1661년)에는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을 배척하고 삼년설을 논리적으로 밝힌 ‘예설(禮說)’이 다시 문제가 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의 형벌까지 더해졌다.
삼수의 유배 생활은 5년이 지난 1665년(나이 79세)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지면서 비로소 끝이 났다. 광양으로 옮겨온 지 2년이 지난 1667년(나이 81세) 7월, 윤선도는 마침내 임금의 특명으로 해배(解配)되고, 8월 해남으로 돌아왔다가, 9월 보길도의 부용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부용동의 낙서재에서 눈을 감는다. 이때 윤선도의 나이 85세였다.
1652년 나이 66세에 효종이 부를 때까지 윤선도는 금쇄동과 보길도의 부용동을 오가며, 한시와 시조의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그 시들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나이 65세(1651년) 때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였다. 「어부사시사」가 없었다면 윤선도도 없었고, 윤선도가 없었다면 「어부사시사」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이 시조는 우리 문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 윤증 : 명재(明齋) :
<대학>의 ‘명명덕(明明德, 명덕을 밝힘)’에서 취함.
전통적으로 서인의 명문가 중 하나인 파평 윤씨 출신으로, 신독재 김집과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회니시비(懷尼是非)’ 이후 소론의 영수가 되어 송시열과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을 빚었다. 송시열과 절교한 이후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큰 곤욕을 겪었다.
윤증은 일찍부터 주자학 이외의 모든 사상과 학문을 이단으로 모는 송시열 등 노론 계열의 독선과 아집, 그리고 보수성과 폐쇄성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맞서 싸웠으며, 선비의 길과 학문의 도리를 오직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에서 찾았다.
- 회니시비(懷尼是非) : 송시열이 살던 회덕(대전 읍내동)과, 윤증이 살던 이성(尼城, 논산시 노성면)의 첫 자를 따 회니시비라 한다.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을 송시열이 정성을 들이지 않고 작성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회니시비는 주자학 도통주의에 입각하여 정국을 운영하려 했던 노론계와, 이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현실적으로 정치를 운영하고자 했던 소론계의 대립이, 송시열과 윤증 간의 감정과 얽혀 일어난 사건이었다.
* 윤휴 : 백호(白湖) :
‘흰 호수’
윤휴는 1644년 나이 28세 때, 아버지와 조상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여주(驪州)로 이사해, 백호(白湖) 가에 거주지를 정하였다.
백호는 여주군 금사리에 있었는데, 이곳에 제방을 쌓기 전 금사천에 있던 호수였다고 한다.
백호 가에 자리를 잡고 거처한 윤휴는 여기에서 일생을 마칠 계획을 정하고, 자신의 호까지 ‘백호’로 삼았다.
윤휴는 일찍부터 당시 성리학자(주자학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성리대전(性理大典)』·『주자대전(朱子大典)』·『근사록(近思錄)』·『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주자 이전 시대의 원 유학(原儒學) 즉 선진(先秦)과 진(秦)·한(漢)·당(唐) 시대의 경서와 주석을 널리 읽고 참고해, 주자의 학문 및 사상적 권위를 스스로 넘어섰다.
윤휴는 특별히 스승을 따로 모시지 않고, 오로지 자득(自得)과 체득(體得)의 방법으로 높은 학문적 경지에 올랐다. 주자의 권위를 넘어서 독자적인 경전 해석과 저술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스스로 탐구하고 사색하면서 얻은 결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윤휴는 나이 25세가 되는 1641년, 자신의 이름을 고치고 ‘개명설(改名說)’을 지어 그 뜻을 밝힌 적이 있다.
윤휴의 원래 이름은 정( )이었다. 그런데 광해군 때 인목대비를 폐해 서인(庶人)으로 강등하라는, 이른바 ‘폐모론(廢母論)’을 상소한 이정(李挺)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윤휴의 아버지는 정( )과 정(挺)의 소리가 같다고 해서 항상 “우리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그러한 자와 같게 할 수 있겠는가.”하며 고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개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선친이 남겨준 이름을 쉽게 고칠 수 없었던 윤휴는 오랫동안 고심해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휴(鑴)로 고쳤다.
휴(鑴)란 글자는 대개 ‘큰 종’이나 ‘솥’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서, 그 무겁고 강하고 웅장하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성질과, 그 속이 텅 비어 환히 볼 수 있고, 또한 포용할 수 있는 덕(德)을 취택하려고 한다는 뜻을 밝혔다.
윤휴와 송시열의 관계는, 윤휴가 포의(布衣) 신분이었을 때에도 학문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특히 윤휴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에 주자의 해석과는 다른 독창적인 주석(註釋)을 담은 저술을 잇달아 내놓자, ‘주자학의 수호신’임을 자처한 송시열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젊은 시절부터 윤휴는 ‘천하의 이치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서, 주자의 학설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공공연하게 ‘반주자학’의 입장을 피력했다.
이에 송시열은 본격적으로 윤휴를 두고 성인인 주자의 사상과 학문을 그릇되게 어지럽히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공격했다.
윤휴는 1667년(나이 51세)과 1668년(나이 52세)에 연이어 『대학설(大學說)』과 『중용장구보록서(中庸章句補錄序)』를 저술해 세상에 내놓았다.
윤휴의 확고한 견해와 끊임없는 저술 활동은 송시열의 분노와 윤휴에 대한 증오심을 가중시켰다. 성인(聖人)인 주자가 이미 모든 학문의 이치를 명명백백하게 밝혀놓았는데, 감히 윤휴 따위가 주자학을 더럽히고 모욕하고 있다는 게 송시열의 생각이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적 사상적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오던 송시열과 윤휴의 갈등과 대립은, 1674년(현종 15, 나이 58세) 벌어진 제2차 예손 논쟁에서 윤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송시열이 파면·유배당하고, 서인 세력이 대거 실각하게 되자,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송시열과 그를 추종하는 서인 세력의 윤휴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은, 결국 숙종 6년인 1680년 남인 세력을 조정에서 대거 축출한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해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권력을 거머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사사(賜死)했다. 5월 20일 오후, 유배지인 갑산으로 향하던 중 서대문 밖 여염집에 머물며 혹독한 국문 탓에 얻은 장독(杖毒)으로 신음하고 있던 윤휴 앞에 한 사발의 사약이 내려왔다. 그때 윤휴의 나이 64세였다. 송시열보다 10년 늦게 세상에 나왔지만, 그보다 9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주자학의 광기(狂氣)가 지식 사회를 휩쓴 조선의 17세기에 윤휴만큼 ‘사상계의 혁신’을 당당하고 용감하게 외친 선비는 없었다.
윤휴의 죽음 이후, 오늘날 ‘실학’이라고 일컫는 새로운 사상과 지식 경향이 재야 지식인들 사이에서 출현하기 이전까지, 조선의 지식 사회는 주자학의 공포 정치에 굴복한 나약한 존재였을 뿐이다.
‘침묵’과 ‘굴종’으로 얼룩진 오욕의 시대였다.
* 이광사 : 원교(圓嶠, 員嶠) :
33세 되던 때 서대문 밖 ‘원교(員嶠, 둥그재)’라고 불리는 나지막한 산 아래에 집을 구해 살았고, 그 산 이름에서 취함. 신선처럼 살고 싶었던 이광사의 마음이 담겨 있음.
원교(員嶠)는 도가서(道家書)인 『열자(列子)』의 「탕문(湯問)」편에 나오는 신선이 산다는 다섯 산[대여(岱與)·원교(員嶠)·방허(方虛)·영주(瀛州)·봉래(蓬萊)]의 하나이다.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서체를 이룩한 서예가이자,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배워 강화학파를 형성한 사상가.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했지만, 노론이 옹립한 영조가 즉위하자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이 집안은 소론의 명문가였고, 그의 아버지 이진검은 예조판서까지 지낸 소론의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1755년에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그 지방 젊은이들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남녘의 신지도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광사의 아들이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저술한 이긍익.
* 이규경 : 오주(五洲) :
세계(지구)를 크게 ‘다섯 개의 주’로 나눈 서양의 세계 지리관에서 취함.
서얼 출신의 북학파 학자이자 규장각 4검사관으로 명성을 떨쳤던 청장관 이덕무의 손자이다. 백과전서적 학풍을 준시한 가학(家學)을 계승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각종 사물을 비롯하여, 고금의 경전, 역사, 문물과 제도, 풍속과 지리, 인물과 시문(詩文)은 물론, 명물도수(名物度數 ; 名目, 事物, 法式, 數量을 아울러 이르는 말) 등에 이르기까지, 세상 만물과 모든 분야의 학문과 지식을 고증·변증하는 전무후무한 저술 작업을 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이긍익 : 연려실(燃藜室) :
‘명아주 지팡이[청려장(靑藜杖)를 태워 불을 밝히고 역사를 저술하는 방’
원교 이광사의 아들. 아버지가 당쟁으로 희생당해 절도(絶島)에서 죽음을 맞은 잔혹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야인으로 지내며, 책을 저술하는 일로 평생을 보냈다. 평생의 연구와 저술을 종합하여 조선의 야사(野史)를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완성했다.
이 역사서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역사 서술 방법은 물론, 특정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그 발생 원인에서부터 전개 과정, 그리고 결과 및 영향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라는 체제를 새롭게 선보였다.
그의 호 ‘연려실(燃藜室)’은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역사에 관심이 많은 아들의 서실 벽에 아버지 이광사가 써준 것인데, 그 유래를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의 서문 격에 해당하는 「의례(義例)」에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내가 어렸을 때 ,일찍이 유향[전국책(戰國策)을 저술한 한(漢)나라의 역사가]이 책을 교정할 때 태을선인(太乙仙人)이 청려장(靑藜杖)을 태워 불을 밝게 해주었다는 고사를 흠모하였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손수 쓰신 ‘연려실(燃藜室)’이라는 세 글자를 받아 서실의 벽 위에 붙여 두고, 각판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했다. ... 이 책이 이루어지자, 마침내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 이달 : 손곡(蓀谷) :
이달이 은거해 지낸 곳.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蓀谷里)’에서 취함.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 시문에 뛰어나 선조 때부터 삼당파(三唐派) 시인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았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약점 때문에 평생 불우하게 살았다. 허균의 시문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남겼는데, 허균은 세상에 버림받은 스승의 불우한 삶을 안타깝게 여겨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써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 이덕무 : 선귤당(蟬橘堂), 청장관(靑莊館), 매탕(槑宕), 간서치(看書痴), 아정(雅亭) : ‘매미와 귤’. ‘해오라기’. ‘매화에 미친 바보’. ‘책만 보는 바보 혹은 책에 미친 멍청이’. ‘우아하다’
“내가 예전 남산 부근에 살고 있을 때 집의 이름을 선귤(蟬橘)이라고 하였다. 집이 작아서 매미[蟬]의허물이나 귤[橘]의 껍질과 같다는 뜻에서였다.”
청장(靑莊)은 해오라기의 별명이다. 이 새는 강이나 호수에 사는데, 먹이를 뒤쫓지 않고 제 앞을 지나가는 물고기만 쪼아 먹는다. 그래서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한다. 이덕무가 ‘청장’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다.
‘청장관(靑莊館)’은 이덕무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며, 그의 글과 기록을 모두 모아 엮은 전서(全書)의 제목이 될 정도로, 생전과 사후 모두 항상 그를 따라다녔던 이덕무를 대표하는 호이다.
개성이 넘치는 호가 ‘매화에 미친 바보’라는 뜻을 가진 ‘매탕(槑宕)’이다. ‘매(槑)’는 ‘매화 매(梅)’의 고자(古字)이고, ‘탕(宕)’은 ‘어리석다’는 뜻이다.
‘간서치(看書痴)’라는 별호(別號)를 썼다. 이 별호의 뜻은 ‘책만 보는 바보 혹은 책에 미친 멍청이’다.
‘아정(雅亭)’은 이덕무가 만년에 마지막으로 지은 자호이다. 이 자호는 이덕무와 정조의 각별했던 인연을 담고 있다.
이덕무가 죽기 한 해 전인 1792년 4월, 정조는 수도 한양을 그린 지도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시제(詩題)로 하여 칠언고시(七言古詩) 1백운(韻)을 짓게 했다. 여기에는 이덕무를 비롯한 검서관은 물론 여러 조정 대신들까지 참여했다. 이때 정조는 우등(優等)으로 여섯 사람을 뽑아 그들의 시권(詩卷)에 각각 어평(御評)을 했는데, 이덕무의 시권에는 어필(御筆)로 친히 ‘아(雅)’자를 썼다. 이덕무가 제출한 ‘성시전도 시(詩)’는 ‘우아하다’는 최고의 찬사였다.
지존인 임금이기에 앞서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정조에게 받은 극찬이었기 때문에, 이덕무는 ‘아(雅)’라는 어평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고, 이를 후손들이 두고두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자호를 ‘아정(雅亭)’이라 하였다.
정조는 이덕무가 사망한 3년 후, 그의 아들 이광규에게 친히 내탕금(內帑金, 조선 시대에 내탕고에 넣어 두고 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을 하사하고, 어명을 내려 이덕무의 유고(遺稿)를 문집으로 엮어 출간하도록 했는데, 이 유고집의 이름이 다름 아닌 ‘아정유고(雅亭遺稿)’이다.
* 이덕형 : 한음(漢陰) :
한강 남쪽은 한음(漢陰)
이덕형은 광주(廣州) 이씨로 본관이 경기도 광주이다. 이덕형이 죽어 묻힌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이 두 곳은 모두 한강 이남에 자리하고 있다.
이덕형은 자신의 호처럼 ‘한음(漢陰)’에 뿌리를 두고 세상에 나왔으며, 또한 자신의 육신과 혼백을 ‘한음(漢陰)’에 묻고 세상을 떠났다.
이덕형은 벼슬에 나선 이후 온갖 화려한 경력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이미 1591년(선조 24) 31세 때 나라 안의 선비들을 통솔하고 학자들을 대표하는 문형(文衡, 예문관 대제학)에 올라, ‘최연소 문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을 호종하고 북쪽으로 피난 가던 도중에는, 뒤따라온 왜군에게 붙잡힐 급박한 상황에 봉착하자, 스스로 조그마한 배를 타고 나아가 대동강 한가운데서 적군과 담판을 지어 위기를 모면했다.
또한 직접 명나라에 들어가 원군(援軍)을 데려와 불리한 전쟁의 형세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도 했다. 이와 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1598년(선조 31) 불과 38세의 나이에 정승(우의정)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나이에 좌의정을 거쳐 1602년(선조 35) 42세 때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최연소의 나이로 요직(要職)을 두루 거쳤는데, 30여 년 관직 생활 동안 최고 관직인 영의정을 세 번, 나라 안의 선비와 학자들을 대표하는 문형을 세 번이나 지냈다.
광해군 즉위 후 이이첨 등 일부 간신배 무리가 권력을 전횡하고 농단하다 못해, 인목대비를 폐서인 하려고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이로 말미암아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았고, 북한강 가 용진(龍津)나루의 사제촌(莎堤村,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으로 낙향해버렸다.
이덕형이 죽자, 이덕형보다 먼저 파직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이항복은, 일생의 벗의 죽음을 애도하며 직접 그를 염하고, 애도의 글을 지었다. 이덕형의 묘지(墓誌)도 이항복이 썼다.
이덕형이 죽고 난 후 150여 년이 흐른 18세기 중반, 북한강(용진강)과 운길산 그리고 수종사를 놀이터 삼아 이웃하고 자란 또 한 명의 걸출한 선비가 나왔다. 그는 바로 1762년 두물머리 부근 마재 마을에서 태어난 다산(茶山) 정약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본문 참조
* 이산(정조) : 홍재(弘齋),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 :
“군자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붕당(朋黨)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취해 온 세상이 협력하도록 하겠다!”
“달빛이 비추는 개울은 만(萬)개이지만, 밝은 달은 하나일 뿐이다!”
“해와 달의 광화(光華)가 한 사람에 의해 널리 퍼져 나간다!”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정조는 스스로 다양한 호를 지어 자신의 뜻과 철학을 세상에 드러냈다.
홍재(弘齋),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 등, 정조가 남긴 호는 다른 어떤 선비들의 호보다 독특하고 다채롭다.
정조는 임금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학자에서 찾았던 사람이다.
정조가 가장 먼저 사용한 호는 왕세손 시절 자신이 거처하던 동궁의 연침(燕寢, 침소 혹은 침전)에 이름붙인 ‘홍재(弘齋)’였다.
‘선비는 가히 도량(度量)이 넓고, 마음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 『논어(論語)』 「태백(泰伯)」편
정조는 증자가 선비가 갖추어야 할 자질로 언급한 ‘홍(弘)’과 ‘의(毅)’ 중, 홍(弘)을 취해 자신의 생애 첫 호로 삼았다. 여기에서 홍(弘)은 ‘관대하다 혹은 넓다’는 뜻으로 도량이 넓은 것을 말하고, 의(毅)는 ‘굳세다’는 뜻으로 마음이 굳센 것을 가리킨다.
정조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사를 빛낸 최고의 성군으로 자신의 치세(治世)를 이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정조의 제왕론(帝王論)인 ‘군사(君師)’, 즉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는 독특한 철학에 있었다.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임금에게 죽을 때까지 학문적 자질과 능력을 요구한,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문치(文治)의 나라였다. ‘경연제도(經筵制度)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임금은 끊임없이 학문을 닦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학생에 다름없었다. 이때 임금은 제자였고 유학과 성리학에 능숙했던 엘리트 집단 출신의 신하들은 스승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켜 버렸다. 그는 ‘군사(君師)’라고 자처하며, 오히려 신하들을 가르쳤다. 경연의 자리에서도 시험 대상은 정조가 아니라 신하들이었다.
정조는 왕세손 시절부터 학문과 독서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당대의 어떤 지식인이나 학자들보다 높고 넓은 정신세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정적들을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가르쳐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정조는 일찍이 어떤 임금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184권 10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개인 문집(文集)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겼다.
『송자대전(宋子大典)』의 우암 송시열이나, 『성호사설(星湖俟說)』과 『성호전집(星湖全集)』의 성호 이익, 그리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다산 정약용에 견줄 만한 저술 분량이다.
더욱이 송시열과 이익은 83세까지 장수했고, 정약용 역시 75세까지 살았던 반면,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단명(短命)했다.
정국이 안정되자, 정조는 전격적이고 과감한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남인(南人)인 번암(樊巖)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한 것이다. 80년 만에 나온 남인 출신의 정승이었다.
『정조실록』에도 채제공을 ‘특별히’ 우의정에 임명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정조의 행동은 숙종 이후 80여 년 가까이 조정에서 배척당한 남인을, 노론을 견제할 정치 세력이자, 개혁 정치의 파트너로 삼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세력 판도의 변화와 더불어, 정조는 『서경(書經)』에서 또 다른 뜻을 취해 자호를 지었다. 재위 14년이 되는 1790년, 자신의 침실에 새로이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는 “붕당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취해 온 세상이 협력하도록 하겠다.”라는 ‘탕평(蕩平)’의 정치 철학이 담겨 있었다. ‘탕탕평평’은 유학의 3경(三經) 중 하나인 『서경』 「홍범(洪範)」 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탕평정치(蕩平政治)는 영조 때 처음 나왔다. 이때 탕평책의 핵심은 ‘쌍거호대(雙擧互對)’였다. 이것은 한 당파의 인물을 등용하면 반드시 대등한 직위에 상대 당파의 인물을 등용하는 인사 정책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붕당의 머릿수를 맞춰 채우는 형식적인 정책에 불과했다. 남인을 등용하면서 노론을 등용하고, 소론을 등용하면서도 노론을 등용한다면, 다른 당파와 비교해 노론은 2~3배 이상의 세력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조정을 장악한 노론은 자기 당파의 사람들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요직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정조는 영조 시대의 탕평책을 획기적으로 개혁한 새로운 탕평책을 추진했다. 정조는 탕평책의 핵심 취지와 기본 철학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었다. ‘붕당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 있는 인재를 취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정조 탕평책의 근본정신이었다.
영조 시대와 다른 정조 시대 탕평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붕당을 초월해 그동안 조정에서 배척당한 채 재야에 묻혀 있던 인재들을 과감하게 중용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인 실학파의 거목인 성호 이익의 종손(從孫) 금대(金帶) 이가환이다.
정조 탕평책의 두 번째 특징은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조는 37세 이하의 당하관(堂下官) 가운데 참신하고 유능한 관료들을 선발해 초계문신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규장각(奎章閣)에서 학문 연마 및 연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매월 두 차례의 구술 고사와 한 차례의 필답 고사를 통해 성적을 평가하고 상벌을 내렸다.
정조는 몸소 초계문신들에 대한 강론에 나서는 한편, 직접 시험 감독이 되어 채점을 하기도 했다.
규장각이라는 공간과 초계문신이라는 제도를 통해, 정조는 한 사람의 스승이 되어, 제자나 다름없는 젊은 개혁 인재들을 가르쳤다고 하겠다.
이 때문에 규장각은 국왕과 조정의 중신 그리고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젊은 관료들이 모여 학문을 연구·토론하고, 나라의 정책과 발전 방향을 의논하는 실질적인 정치의 중심 무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 초계문신 가운데 정약용은 정조가 가장 총애한 ‘최우등 개혁 인재’였다. 탕탕평평의 원칙에 따라 초계문신을 선발했기에 남인 출신의 정약용은 물론, 정조 시대 내내 최대의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의 서영보, 노론 시파의 김조순, 소론의 서유구 등 다양한 당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정조 탕평책의 세 번째 특징이자 가장 혁신적인 정책은 ‘서얼허통(庶孼許通)’이다. 정조는 신분과 출신 배경을 초월해 인재들이 자신의 재주와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 서얼허통의 가장 큰 수혜자가 다름 아닌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 서얼 출신의 규장각 ‘4검서관’이다. 1779년(정조 3) 이덕무를 시작으로 차례로 검서관에 발탁된 이들 4검서관은, 정조 시대의 ‘문치와 문예 부흥’에 큰 공을 세웠다.
정조는 사망하기 2년 전인 1798년에 다시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새로운 호를 지었다.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까지 지어 발표했다.
하나의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는 것처럼, 한 사람의 제왕으로서 만백성에게 두루 은택(恩澤)을 베풀겠다는 정조의 뜻과 의지가 반영된 대표적인 개혁 정책은 ‘노비 제도의 혁파’와 ‘신해통공(辛亥通共)’에서 찾을 수 있다.
정조는 노비 역시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민(臣民)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찌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겠느냐?”라고 역설했다.
정조의 이러한 사고는 유학의 ‘민본주의’ 사상보다 한발 더 나아간 근대적 개념의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신해통공’은 시전 상인들의 독점적 상업 특권과 횡포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있던 소상인, 행상(行商), 그리고 노점상 등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해주는 경제 조치였다.
정조는 184권 100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저작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겼다. 『홍재전서』의 편찬 작업은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1차는 정조가 살아있던 1799년(정조 23) 12월에 이루어졌다. 12월 21일 규장각에서 2본의 필사본을 완성해 정조에게 올렸다. 이때 정조가 자신의 어제 필사본에 붙인 이름이 『홍우일인재전서(弘于一人齋全書)』였다.
정조가 사망한 직후에 규장각에서 다시 정조의 어제를 정리해 편찬하는 2차 작업을 하여, 이듬해(1801년, 순조 1) 12월 11일에 완성된 필사본을 순조에게 올렸고, 그 이름을 동궁(왕세손) 시절 정조가 처음으로 자호한 홍재(弘齋)를 취해 『홍재전서』라고 했다.
정조가 생전에 간행한 자신의 문집에 이름 붙인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는 그가 사용한 마지막 호라고 할 수 있다.
이 호는 『상서대전(尙書大傳)』 「우하전(虞夏傳)」에 나오는 ‘일월광화 홍우일인(日月光華 弘于一人)’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해와 달의 광화(光華, 빛)가 한 사람에 의해 널리 퍼져 나간다.”라는 뜻이다.
정조는 이전 ‘만천명월주인옹’에서 달을 빌렸듯이, 여기에서는 달은 물론 해까지 빌려 밤낮없이 만백성에게 빛을 비추는 것이야말로 제왕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밝혔다.
당시 정조는 3단으로 된 보관함을 따로 만들어 ‘홍우일인재전서’라고 이름 붙인 문집을 간직했고, 다시 여기에 한 편의 글과 명문(銘文)을 지어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정조는 이 글의 마지막에 명문을 새겨 성군(聖君)과 현자(賢者)의 도리와 단서를 터득해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던 자신의 일생을 노래했다.
* 이색 ; 목은(牧隱) :
‘소나 양을 치는 목자(牧者)로 숨어 살고 싶다’
고려 말기 유학의 종주이자 신진 사대부의 스승. 입신양명이나 출세보다는 은일(隱逸)하는 삶을 더 가치 있다고 여김.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조준, 권근, 하륜 등이 그의 문하.
* 이수광 : 지봉(芝峯) :
이수광이 거처하던 동대문 밖 인근의 산봉우리 이름이 ‘지봉(芝峯)’
우리 역사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저자. 임진왜란 이후 한양 도성 흥인지문(동대문) 밖 낙산 동쪽 상산의 지봉(芝峯) 아래에 거처하면서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가 쓴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에 지봉(芝峯)에 대해 기록.
* 이순신 : 덕암(德巖) : ‘
큰 바위’와 같은, 큰 인물이 되길 바람.
시호인 충무공(忠武公)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음. 덕암(德巖)이란 호는 「서원겸사기(書院兼史記)」란 필사본에 게재되어 있음. 덕곡(德谷)이라는 호가 있었다고도 함.
참고로 여해(汝諧)라는 이순신의 자(字)는 그의 어머니가 서경에 나오는 순(舜) 임금의 “오직 너[汝]라야 세상이 화평케[諧]되리라”는 말에서 뜻을 취해 지어주었다고 함.
* 이숭인 : 도은(陶隱) :
‘질그릇을 굽는 도공으로 숨어 살고 싶다’
이색의 제자로 고려의 개혁을 주도한 신진 사대부의 일원이었는데, 조선의 개국을 반대하다 유배형에 처해졌고, 장살(杖殺)당함.
* 이식 : 택당(澤堂) :
주역(周易) 64괘 중 하나인 ‘택풍대과(澤風大過)’에서 따옴.
북인이 권력을 장악했던 광해군 시절에 이식은 세상사로부터 물러나 거처할 곳을 찾으려고, 주역의 괘를 살펴보았는데, 때마침 ‘택풍대과(澤風大過)’가 나왔다. 이 괘에는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无悶)’, 즉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음. 이 구절이 마음에 든 이식은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택풍당(澤風堂)’이라 이름 지었으며, 사람들이 그를 택당(澤堂)이라고 불렀다.
조선 중기 최고의 문장가 중 한 사람. 이 시기의 한문 4대가를 가리켜 ‘계택상월(谿澤象月)’이라고 한다.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 상촌(象村) 신흠, 월사(月事) 이정구의 호에서 각각 첫 글자씩을 따서 붙인 명칭이다.
이식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으나,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백아곡(白鴉谷,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소재)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은둔의 삶을 살았다. 본래 이식의 집안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은 서인 계열의 핵심이었다.
* 이안눌 : 동악(東岳) :
서울 남산의 별칭인 ‘동악(東岳)’에 살았기 때문.
조선 중기 문학사를 빛낸 시동인 ‘동악사단(東岳詩壇)’의 주창자.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4,379수(首)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 이언적 : 회재(晦齋) :
회암(晦庵)을 우러러 본받다.
성리학을 집대성해 유학사를 빛낸 주자(朱子)를 본받겠다는 일념으로,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유래한 ‘회재(晦齋)’를 호로 삼았음.
이언적은 ‘회재’라는 호 외에 ‘자계옹(紫溪翁)’이라는 自號도 사용했는데, 자옥산 계곡을 사랑하였기에 ‘자옥산 계곡의 늙은이‘라는 뜻으로 지었다.
이언적은 1491년(성종 22) 경주부 양좌촌(지금의 경주 양동마을)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양동마을은 오랜 세월 이언적의 외가인 경주(慶州) 손씨와 친가인 여강(麗江) 이씨가 더불어 세거지로 삼은 집성촌락이다.
열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이언적은 외가에 의탁해 성장했다. 학문 역시 외삼촌인 우재(愚齋) 손중돈을 통해 배웠다. 손중돈은 김종직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유학을 익히고 성리학의 글을 배운 사림의 문사였다. 이언적은 손중돈을 통해 김종직으로부터 발원하는 사림의 학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유학사상 최초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참여해 독자적인 철학적 견해를 내보이는 것으로, 성리학에 대한 사림의 지적 수준을 크게 일으켰다.
이 논쟁의 와중에 할아버지 이수회의 상(喪)을 당했는데, 이 때문에 다음 해 사림을 발칵 뒤집어놓은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1521년 8월,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에 올라 조정에 다시 나간 이언적은, 이때 중종의 명에 따라 이름에 ‘언(彦)’자를 더했다. 이전까지 그의 이름은 이언적이 아닌 이적(李迪)이었다. 중종이 단성(丹城) 출신의 어떤 사람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선비’라는 뜻을 가진 ‘언(彦)’자를 사용하게 해, 비로소 ‘이언적(李彦迪)’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중종은 비록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림의 인사들을 내쳤지만, 유학의 나라인 조선의 왕이 사림과 유생을 배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당시 사림의 신망을 받던 이언적을 중용했다. 이언적은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의 설서(設書)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1530년(나이 40세)까지 이언적은 六曹와 三司의 요직을 거치면서 비교적 순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1531년 1월, 자신의 아들이 중종의 사위가 되는 권간(權奸) 김안로가 세자를 가르치고 돌보는 실질적인 후견인에 다름없는 세자 보양관(輔養官)을 맡게 되자, 이언적은 외척(外戚)과 간신배의 발호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이 일로 이언적은 사간원 사간(司諫)에서 성균관 사예(司藝)로 좌천당했고, 얼마 뒤 김안로를 따르는 간신배들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자, 아예 벼슬에 대한 미련을 내동댕이치고 낙향해버렸다.
낙향한 이언적은 자신으로 인해 고향 마을에 화가 미칠까 염려해, 따로 자옥산(紫玉山) 기슭에 거처를 짓고 은거했다.
‘회(晦)’자의 뜻이 ‘감추다 혹은 숨기다’이고, 이언적이 당시 거처하던 곳의 이름까지 ‘독락당(獨樂堂)’이라 붙이고, 어지러운 세상과 부패한 권력에 등을 진 채 ‘홀로 즐기는 삶’을 살았다.
정승의 자리까지 오른 김안로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종친은 물론 왕족까지 축출하고 살해하는 등, 공포 정치를 펼쳤다.
그런데 이 해에 자신의 최대 정적(政敵)이었던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오히려 중종의 미움을 사, 전라도 진도로 유배형에 처해진 뒤 끝내 사사당했다.
이언적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다시 등용되는 것을 막고 있던 김안로가 죽자, 중종은 즉시 이언적을 불렀다. 장악원 첨정(僉正)으로 다시 벼슬길에 오른 이언적은,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과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거쳐 한성부 판윤,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좌참찬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53세가 되는 중종 38년(1543년)에 잠시 외직인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가, 다음 해 11월 중종이 죽고,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의정부 좌찬성으로 임명되어 조정에 복귀했다.
인종이 재위한 지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언적에게 다시 고난이 찾아왔다. 인종은 후사가 없었기에 그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이 왕위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원대군(명종)은 당시 나이가 12세에 불과했기에, 그의 모후(母后)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철의 여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권력욕이 강했고 정적을 다루는 데 무자비했다. 그녀는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을 제거하고,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사림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사림은 또 다시 대재앙을 맞게 되니,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그 당시 이언적은 역모 사건을 다루는 의금부의 수장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하고 있었다.사림의 영수가 사림에게 죄를 물어 역적으로 만드는 ‘사화(士禍)’의 가해자가 되는 참으로 가혹한 순간이었다. 이언적은 사림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끝까지 추국(推鞫)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으며, 사림의 인사들을 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독단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을사사화를 막지 못한 이언적의 소극적 처신은 훗날 율곡 이이의 비판을 샀지만, 또 한편으로 서애(西厓) 류성룡과 같은 이는 이언적의 처신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변호하기도 했다.
문정왕후와 그 친족(親族) 동생인 윤원형 일파는 자신들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사화의 칼날을 정면으로 이언적에게 겨냥했다. 윤원형과 이기가 앞장 서 1546년(명종 1) 9월 이언적을 모함해 탄핵했고,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관직을 삭탈해버렸다.
그리고 다음 해 윤9월 문정왕후를 비난한 글을 붙였다는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를 물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형에 처했다. 이 사건이 조선사 최후의 사화로 기록된 ‘정미사화(丁未士禍)’다.
정미사화는 당시 사림의 영수이자 스승으로 존경받던 이언적을 제거하고 사림파를 몰살하려는 정치적 음모였다. 그런데 오히려 이언적은 조선의 북쪽 끝 강계 유배지를 성리학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의 장소로 바꾸어버렸다.
그곳에서 그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구인록(求仁錄)』, 『봉선잡의(奉先雜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의 역작을 저술했다. 이들 저술은 조선의 성리학사에 길이 남을 명저였다. 특히 유학의 여러 경전에 흩어져있는 ‘인(仁)’에 관한 성현의 언행과 해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구인록』은, 사림이 추구한 선비 정신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노작(勞作)이었다.
유배지에서 보낸 6년의 삶은 이언적의 정신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사림의 큰 별이자 정신적 지주로 만들어주었다. 생애 마지막 6년간의 유배 생활은 이언적이 훗날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와 함께 ‘동방4현(東方四賢)’ 중의 한 사람으로 유학의 성지인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일두 정여창, 사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본문 참조.
* 이용휴 : 혜환(惠寰) :
‘은혜로운 경기 고을에 사는 사람’, ‘환(寰)’은 수도 인근의 ‘경기 고을’을 말함.
작은아버지였던 성호이익의 가학(家學)을 배워 새롭고 기이한 문장과 글쓰기로 일가를 이루었다. 번암 채제공의 뒤를 이어 남인의 영수가 된 이가환의 아버지이기도 한다. 북학파를 대표하는 문장가가 연암 박지원이었다면, 성호학파를 대표하는 문장가는 단연 이용휴였다.
한양 인근의 경기 안산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기이하고 괴이하고 날카롭고 새롭다’는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으면서, 문단의 기린아 혹은 문제아라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으며, 걸출한 학자와 문사들이 즐비했던 18세기를 지배했던 최고의 문장가였다.
* 이이 :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이이의 직계 선조들이 살던 경기도 파주 파평면의 율곡(栗谷) 마을에서 취함.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황해도 해주 인근(황해도 벽성군 고산면 석담리) 고산(高山)의 석담구곡(石潭九曲)의 경치에 반해 지음.
성인의 삶을 향해 나아갈수록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자신을 가리켜 ‘어리석다[愚]’는 뜻으로 지음.
이이는 19세가 되는 1554년(명종 9) 우계(牛溪) 성혼을 만나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는데, 성혼의 가계(家系)는 조광조를 계승한 사림의 적통(嫡統)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이와 성혼의 ‘도의지교’는 기호사림파에게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즉 정암(靜庵) 조광조의 학통이 이이와 성혼에게 계승되었다는 서인 세력의 ‘적통론’의 명분과 정당성을 십분 살려준 게 두 사람의 ‘도의지교’였다는 얘기다.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의 제자였다. 그는 조광조가 목숨을 잃은 기묘사화 이후 두문불출하다가, 경기도 파주에 은둔해 살았다. 성혼이 10세 무렵 파주의 우계(牛溪)에 집터를 정해 거주한 후,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직접 성혼을 가르쳤다.
이이와 성혼은 평생 동안 ‘도의(道義)’ 즉 성리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큰 뜻을 공유하는 우정을 쌓았을 뿐 아니라, 예학(禮學)의 대가인 사계(沙溪) 김장생이나 임진왜란 때 칠백의총(七百義塚)으로 유명한 중봉(重峯) 조헌과 같은 제자들 또한 함께 가르치고 길러냈다. 이 때문에 훗날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종사된 조선의 명현(名賢) 14명에 이이와 나란히 성혼의 이름이 올랐다.
41세(1576년, 선조 9) 때, 이이는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해주 석담으로 은거한다. 먼저 청계당(聽溪堂)을 세운 이후 다음 해에 일가 친족들을 불러 모아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짓고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이때 해주 사람들과 더불어 향약(鄕約) 및 사창(社倉)을 의논해 세웠다.
청계당 동쪽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워 제자들을 양성하고,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어 성리학의 본거지로 삼으려 하였다.
‘은병정사’와 「고산구곡가」는 모두 성리학을 완성한 남송(南宋)의 주자(朱子)가 거처한 무이산(武夷山)과 관련되어 있다. 주자가 거처한 무이산의 산봉우리인 대은병(大隱屛)에서 ‘은병’을 취해 은병정사를 세웠고, 또한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에 빗대어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이이는 ‘은병정사 학규(學規)’를 만들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양반 사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 서얼(庶孼)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제자로 받아주었다. 단, 과거 시험을 공부할 목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은 아무리 높은 신분이라고 하더라도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이이는 각종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아홉 번을 차지했다. 이에 사람들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즉 ‘아홉 번이나 장원한 분‘이라고 칭찬하며 탄복했다.
자세한 내용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본 글 참조.
* 이익 : 성호(星湖) :
이익이 거주하던 곳에 있던 호수 이름.
이익이 살고 있던 첨성촌의 집은 ‘성호지빈(星湖之濱)’, 곧 성호라고 불리는 호수가에 자리하고 있었고, 별빛이 아름답게 비추는 호수인 이 ‘성호(星湖)’를 自號로 삼았다.
이익의 집안은 남인 명문가였다. 그의 아버지 이하진은 숙종 때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을 지낼 만큼 남인을 대표하는 거물급 인사였다.
남인이 대거 숙청당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났다. 이때 이하진은 진주목사에서 파직을 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안도 운산(雲山)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익은 1681년 10월 18일 아버지가 귀양살이하던 운산에서 출생했다. 이익이 태어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1682년 6월 14일 아버지 이하진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이익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선대로부터 집안의 터전이 되어온 광주(廣州, 지금의 경기도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익은 평생토록 첨성촌에서 지냈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이익에게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둘째 형 이잠(李潛)이었다.
1706년(숙종 32) 이잠은 예전에 세자(장희빈 소생으로 훗날의 경종) 책봉을 격렬하게 반대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논박하고, 권·척신(權戚臣)들이 사방에서 세자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다는 요지의 상소를 했다.
그러나 이미 남인을 내친 숙종은, 이잠의 상소가 남인의 잔당이 노론의 대신을 모함하는 것이라 여겨, 이잠을 잡아들인 다음 친히 국문했다. 이잠은 무려 18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신(拷訊)을 당했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버티다 끝내 장살(杖殺)당하고 만다.
이익은 과거 공부나 벼슬에 나갈 뜻을 버렸고, 이때부터 죽음을 맞는 1763년까지 무려 57년간 성호가의 집 성호장(星湖莊)에 몸을 의탁한 채, 독서와 사색과 저술을 일생의 소임으로 알고 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익은 이전 시대 조선의 어떤 지식인도 밟지 않은 학문의 영역을 섭렵했고,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지식의 경지에 올랐고, 명실상부한 실학의 일인자이자 큰 스승으로 우뚝 솟았다.
그리고 그의 지적 작업은 나이 80세 때 집안의 조카이자 제자들이 정리해 편찬한 『성호사설』에 고스란히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18세기 조선의 지식인이 도달한 학문과 지식의 넓이와 높이, 그리고 깊이를 보여주는 명저 중의 명저다.
이익이 이룩한 거대한 지적 탐구와 작업의 결과물은, 그의 직전 제자와 그를 사숙(私淑)한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실학의 최대 학파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성호학파’를 형성했다.
* 이중환 : 청담(淸潭), 청화산인(靑華山人), 청화자(靑華子) :
‘맑은 못’. ‘청화산(靑華山)’에서 취함.
이중환은 충북 괴산군과 경북 상주시, 경북 문경시 3개 시군에 걸쳐있는 청화산(靑華山)을 좋아하여 여러 해 동안 머물렀으며, 자신의 저서인 『택리지(擇里志)』에서 ‘청화산은 그 형세가 좋고 기운이 빼어난 복지(福地)’, ‘그곳의 계곡은 물이 맑고 경치가 빼어나다’고 기록하였다.
남인 명문가인 여주 이씨 출신으로 성호학파의 스승 이익과 한 집안 사람이다. 이중환은 이익의 재종손(再從孫)이었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이익에게 큰 영향을 받음.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지만, 치열한 당쟁 중에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 유배형에서 벗어난 뒤로는 노론 일색인 세상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지역의 교통, 경제, 지리, 풍속, 문화, 인물 자료 등을 수집하고 정리해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했다.
* 이지함 : 토정(土亭) :
마포나루에 흙을 쌓고 지은 ‘흙 집’
이지함은 마포나루에 거처할 집을 흙으로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 다져 정자를 지어 토정(土亭)이라고 이름 짓고, 이로 말미암아 ‘토정(土亭)’이라고 自號하였다. 자신의 뜻과 삶의 지향이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반촌(班村)에 있지 않고, 천한 상인이나 온갖 장사꾼이 모여드는 나루터와 시장에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지함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다.
정통 성리학을 세운 程子나 朱子보다는 장횡거와 소강절의 학문과 사상에 가까웠던 서경덕처럼, 특정 학문이나 학설에 구속당하지 않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는 물론이고,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 등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고, 경제(經濟)에 밝아 수많은 기행(奇行)을 남겨, 스승의 이름을 더욱 빛낸 제자로는 단연 토정 이지함을 꼽을 수 있다.
이지함은 당시 조선의 사대부 사회에서 금기하다시피 한 ‘상업(商業)’과 ‘해상 교역(海上交易)’을 국부(國富)와 안민(安民)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몸소 이를 실천에 옮긴 기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평생 충청도 보령의 해안 지역과 한양의 마포나루를 무대로 활동했다. 16세기 마포나루는 전국 각지의 온갖 물산(物産)이 모여들던 상업과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다.
특히 이지함은 마포나루의 ‘토정’을 근거지 삼아 몸소 상인이 되어 내외(內外)의 강해(江海)와 산천(山川)을 누비고 다니면서, 탁월한 수완으로 막대한 재물을 모았다가, 다시 가난한 백성이나 사정이 급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기행을 일삼았다.
이지함의 친조카로서 서경덕의 학통을 이은 북인(北人)의 영수이자 선조 때 영의정까지 지냈던 아계(鵝溪) 이산해는 자신의 숙부 이지함에 대한 글을 남겼다. 율곡 또한 이지함의 행적에 대한 글을 남겼다.
이지함의 기행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기록은 어우당(於于堂) 유몽인이 지은 우리 역사 최초의 야담집(野談集) 『어우야담(於于野談)』이다.
이지함은 단순히 가난한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일정한 생산 능력을 갖추도록 가르친 다음에 생산한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때에도 그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능력과 수준에 맞도록 기술을 가르쳤고, 일종의 공장제 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는 선진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해 백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양반 사대부일지라도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마땅히 재물(財物)과 재용(財用)에 힘쓰고 몸소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독특한 철학의 소유자가 이지함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이지함은 유학의 종조인 목은(牧隱) 이색의 6대손으로 양반 사대부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명문가의 출신이었지만, 평생을 포의(布衣)로 지내며, 성리학의 족쇄나 사회의 인습에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1573년, 나이 57세 때 유일(遺逸, 초야에 숨어 있는 인재)로 천거되고, 다음해에 6품직을 제수 받아 포천현감으로 나갔다. 이때 이지함은 포천현감으로 부임하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그의 독창적인 사회경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본말상보론(本末相補論)’과 ‘삼대부고론(三大府庫論)’을 상세하게 밝히면서,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위해서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과 광업을 적극 장려할 것을 건의했다.
‘본말상보론’은 본업(本業)인 농업과 말업(末業)인 상공업의 어느 한쪽도 폐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말업으로 본업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삼대부고론’은 상책(上策)을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이자 인심을 올바르게 하는 ‘도덕지부고(道德之府庫)’로, 중책(中策)을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대해를 이루듯이 어질고 현명한 인재들을 모아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인재지부고(人才之府庫)’로, 하책(下策)을 땅과 바다를 이용해 온갖 재물을 생산하는 ‘백용지부고(百用之府庫)’로 본 것이다.
앞의 두 가지(道德之府庫와 人才之府庫)는 현실적으로 열기 어렵고, 예전부터 있던 것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지만, ‘百用之府庫’는 이지함만의 독창적인 사회 경제 사상이었으며, 임금과 사대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백용지부고’가 비록 하책이지만 성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권도(權道)라고 하였다.
이지함이 사망한 후 200여 년이 지난 정조 때, ‘양반 상인론’과 ‘해외통상론’을 통해 부국 전략을 추구했던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실천에 옮긴 역사적 모델로 제시한 유일한 인물이 다름 아닌 ‘이지함’이었다.
상업과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던 마포나루에 흙집을 짓고 거처하며, 스스로를 ‘토정(土亭)’이라고 자처하면서, 양반 사대부의 허울을 벗고 몸소 상인이 되어 나라의 부(富를) 늘리고, 백성의 가난을 구제하는 데 힘썼던 이지함이야말로, 16세기에 이미 300년 이후 조선의 사대부가 어떻게 변신해야 개항과 근대화의 거센 물살 앞에서 생존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 선각자였다고 하겠다.
자세한 내용은 ‘화담 서경덕과 토정 이지함’ 본문 내용 참조.
* 이하응 : 석파(石坡) :
‘바위 언덕’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타고난 처세술과 정치적 수완으로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올리고, 10년간 섭정을 하면서 세도정치를 무너뜨리고 왕권강화책을 도모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 북동쪽에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石坡亭)’이 일부 남아 있다. 주변의 거대하고 수려한 바위 풍경이 별장을 에워싸고 있었기에 ‘석파정(石坡亭)’이라고 이름 붙였다.
* 이항로 : 화서(華西) :
‘청화산(靑華山)의 서(西)쪽’
조선 말기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창시자.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지키고, 사학(邪學)의 뿌리인 외세와 개화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위정척사파의 수장이다. 그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의 벽계(檗溪)라는 개울가 집에서 평생 주자학을 연구하고 수호하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양평군에 자리하고 있는 청화산(靑華山)의 서쪽에 벽계(檗溪)가 있다고 해서 자신의 호를 화서(華西)라고 하였다.
화서(華西)는 곧 이항로 자신이자, 위정척사파의 본거지였다.
* 이항복 : 백사(白沙), 필운(弼雲) :
‘흰 모래’ 혹은 ‘하얀 모래사장’, ‘경복궁을 보필하다’
옛날 이항복이 강 나루터 노인의 호가 욕심나서, 노인이 세상 뜨기를 기다렸다가, 연후에 그 ‘백사(白沙)’를 자기 호로 삼았다는 일화가 있었다.
북악산 기슭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하고 있는 백사실(白沙室) 계곡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신병주 교수).
이항복은 말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백사(白沙)’라는 호를 얻어 사용할 수 있었다. 이항복 생전에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그의 호는, 그가 어려서부터 살았던 인왕산 필운대(弼雲臺)에서 취한 ‘필운(弼雲)’이었다.
인왕산은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의 소재지이자, 서울의 주산인 북악을 보좌하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중 우백호에 해당한다. 인왕산은 또한 필운산(弼雲山)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경복궁을 보필하는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는 필운산처럼, 임금을 보좌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뜻을 ‘필운’이라는 호에 새겼던 것이다.
조선의 관포지교라 할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으로 유명한 이항복과 이덕형.
이항복과 이덕형이 처음 만난 시기는 1578년(선조 11)으로, 이항복의 나이 23세, 이덕형의 나이 18세 때였다고 한다.
이항복은 19세에 권율의 딸인 안동 권씨와 이미 혼인했고, 이덕형 역시 17세에 이산해의 딸인 한산 이씨와 혼인해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오성’은 선조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항복을 호성일등공신으로 봉하면서 내린 작호(爵號)이자 군호(君號)였던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서 비롯되었다.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이항복을 ‘오성 대감’으로 불렀다.
반면에 ‘한음’은 이덕형의 실제 호였다.
어린 이항복의 남다른 기상과 자질을 눈여겨본 이가, 권율의 아버지이자 선조 즉위초기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었다. 장차 나라를 이끌 인재가 돌 인물임을 알아챈 권철은 아들 권율에게 아직은 서생(書生)에 불과했던 이항복을 사위로 삼으라고 권했고, 권율 역시 이항복이 마음에 들어 흔쾌히 자신의 딸을 이항복과 맺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본문 참조.
* 이현보 : 농암(聾巖) :
‘귀머거리 바위’. 자연을 벗 삼아 은둔해 살면서 세상사와 벼슬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호.
국문가사로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사대부 시인으로,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
경북 안동의 영지산 기슭 ‘농암(聾巖)’이라는 바위 곁에 집을 짓고, 그 뜻을 취해 호로 삼았다.
직접 쓴 「애일당중신기(愛日堂重新記)」의 기록.
“바위 앞에 큰 개울이 있고 위쪽으로는 급하게 흐르는 여울이 있어서, 여울 물 소리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의 귀를 막아 잘 듣지 못하게 된다. ... 은둔하여 벼슬살이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사람이 거처하기에 마땅한 곳이다. 이로 말미암아 바위를 농암(聾巖)이라 이르고, 또한 늙은이의 자호(自號)로 삼았다.”
* 이황 : 퇴계(退溪), 도수(陶叟)·도옹(陶翁)·도산노인(陶山老人)·도산진일(陶山眞逸)·도산병일수(陶山病逸叟), 청량산인(淸凉山人): 이이 : 율곡(栗谷
평생 ‘물러날 퇴(退)’ 한 글자를 마음에 품고 살다. 이황은 자명(自銘)에서 자신이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던 뜻은 바로 ‘물러날 퇴(退)’ 한 글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벼슬에 나아가면 가다가 넘어졌고[進行之跲(진행지겁)], 벼슬에서 물러나 숨으면 올곧았네[退藏之貞(퇴장지정)]”
고향 온계리에 흐르는 ‘토계(兎溪)’라는 시내 이름을 ‘퇴계(退溪)’로 바꾸고, 마침내 자신의 호로 삼았다. 당시 이황은 ‘퇴계(退溪)’라는 제목의 시문(詩文)까지 짓고, 자신의 호에 ‘물러날 퇴(退)’자를 넣은 뜻을 설명했다.
‘도산(陶山)에 숨어 사는 병든 늙은이’
이황이 주인공인 천 원짜리 지폐 앞면에는 이황의 초상화가 있고, 뒷면에는 도산서원의 전신인 도산서당(陶山書堂)을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새겨 있다. <계상정거도>는 겸재 정선이 1764년에 그린 것으로, 이황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의 모습을 담고 있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퇴계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도산(陶山)에 세운 강학소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전국 각지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선비와 제자를 수용하기에 퇴계가의 집은 너무도 좁고 답답했기에, 거처를 옮길 목적으로 마땅한 장소를 찾아다니다가, 퇴계 남쪽에 있는 도산에서 좋은 터를 발견했다. 그 후 5년 가까운 시간 각고의 공을 들여, 1561년 가을 마침내 도산서당은 완성되었다. 도산서당이 완성되자, 이황은 곧바로 ‘도산기(陶山記)’라는 글을 짓고, 이곳에 담긴 자신의 뜻을 밝혔다.
‘陶山’이라는 이름은 옛적에 산속에 질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인데, 이황이 평생 추구했던 성리학의 도(道), 곧 인간의 참된 본성과 인격을 도야(陶冶)하는 산이기도 하다.
도산십이곡은 이황이 스스로 쓴 발문에서 ‘도산노인’이 지었다고 밝힌 국문 시가로, 앞의 여섯 곡은 ‘뜻’을 말하고, 뒤의 여섯 곡은 ‘학문’을 말하였다고 밝혔다.
이황이 말한 ‘뜻’이란 벼슬이나 출세와 같은 세속의 이욕(利慾)을 쫓아다니지 말고 자연 속에서 참된 본성을 기르라는 것이고, ‘학문’이란 만권의 책을 쌓아 두고 성현의 도(道)를 힘써 궁구하라는 것이다.
‘퇴계’라는 장소가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고 싶었던 이황의 뜻이 깃든 곳이었다면, ‘도산’은 이러한 이황의 뜻을 현실로 만들어준 공간이었다.
자신의 비석에 ‘退陶晩隱’이라고만 새기라고 거듭 유언을 남길 만큼, 이황의 삶과 철학에서 ‘퇴(退)’자와 함께 ‘도(陶)’자가 지닌 의미는 거대했다.
청량산(淸凉山)을 무척 좋아해 청량산을 가리켜 ‘오가산(吾家山)’, 곧 ’우리 집안의 산‘이라고 불렀으며, 자신을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불렀다.
풍기 군수로 있던 1549년 봄에, 주세붕이 지은 「청량산 유람록(遊淸凉山錄)」을 고을 사람들에게 얻어, 세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면서 청량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1552년 4월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올라갔다가, 「청량산유람록」을 지은 주세붕과 만나 친분을 쌓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세붕의 특별한 요청에 따라 「청량산유람록」에 발문(跋文)까지 써주게 되었다. 이 글에서 이황은 청량산을 가리켜 ‘오가산(吾家山)’, 곧 ’우리 집안의 산‘이라고 불렀다.
1553년 나이 53세 무렵부터 스스로를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불렀다.
자세한 내용은 ‘퇴계 이황’ 본문 내용 참조.
* 임상옥 : 가포(稼圃) :
‘채마밭’에서 곡식이나 채소를 가꾸며 살고 싶다는 소망.
평북 의주 출신의 무역상인. 최초로 조선과 청나라 간 국경 지대의 인삼 무역권을 독점해 큰 부를 축적했다. 당시 그는 조선 전역은 물론이고, 청나라에까지 ‘조선 제일의 부자’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거상이자 거부였다.
굶주린 백성과 수재민을 구제한 공적을 인정받아, 상인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곽산군수(郭山郡守)와 구성부사(龜城府使)에 임명되기도 했다.
실제 말년의 임상옥은 대저택을 버리고, 수많은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은 재산을 빈민 구제에 쓰게 한 뒤, 자그마한 집에 살면서 채마밭을 가꾸며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 임윤지당 : 윤지당(允摯堂) :
주자가 말한 ‘윤신지(允莘摯)’에서 취함.
조선의 유일한 여성 성리학자. 그녀가 남긴 저술인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는 조선 여성이 남긴 최초의 철학 서적이다.
윤신지(允莘摯)는 태임(太任)과 태사(太姒)를 존경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신(莘)’은 문왕의 부인이자 무왕의 어머니가 되는 태사(太姒)의 고향 마을을 가리키고, ‘지(摯)’는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의 고향 마을을 일컫는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이상적인 여성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그녀의 오빠이자 스승이었던 녹문(鹿門) 임성주가 모두에게 존경받는 여성이 되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지어준 호.
* 장승업 : 오원(吾園) :
“너희만 원(園)이냐, 나도 원(園)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를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삼재(三齋)와 삼원(三園)’이다. 여기에서 삼재(三齋)는 진경산수화를 창시한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말한다. 삼원(三園)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가리킨다.
그가 자신의 호를 ‘오원(吾園)’이라고 지은 것은 남다른 자부심 때문이었다. 자신도 당시 최고의 화가로 추앙받던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못지않은 천재 화가라는 자부심을 담아, “너희만 원(園)이냐, 나도 원(園)이다!”라고 일갈하듯, ‘오원(吾園)’이라는 호를 지었던 것이다.
술만 있다면 장승업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려주었다. 술에 취해 낙관을 잃어버리기 일쑤여서 그림에 다양한 낙관이 찍히게 되었고, 낙관 없이 이름만 써넣은 것도 많았기에, 오늘날 장승업 그림의 ‘진위’를 가리는 게 쉽지 않게 되었다. 현재 장승업의 진짜 작품으로 확인된 것만 140여 점에 달한다고 한다.
조선 회화의 전통기법과 근대적인 회화 기법을 동시에 보여주었기에, 미술사적으로 볼 때, 장승업은 조선 회화와 근대 회화를 잇는 징검다리이자 토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정도전 : 삼봉(三峰) :
삼각산(三角山) 삼봉(三峰) 또는 도담 삼봉(嶋潭三峯)에서 취함.
이성계가 나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성계를 이용해 조선을 세웠다.”
조선은 군사적 기반을 갖춘 이성계 세력과 유교적 이념으로 무장한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나라다. 이성계가 힘을 쓰는 ‘몸체’였다면, 정도전은 머리를 쓰는 ‘두뇌’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은 정도전의 정치 철학과 머릿속 설계도에 따라 건설된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 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하나가 ‘신권 정치(臣權政治)’라면, 다른 하나는 ‘한양 도성(漢陽都城)’이다.
臣權政治란 재상(宰相)이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어 통치하는 것이다. 유교 국가가 이상으로 삼은 ‘민본(民本)과 왕도(王道)’를 이루기 위해서는, 임금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고, 자신과 같은 지식 엘리트 집단에서 나온 재상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도전이 유교 국가의 이념과 철학을 철저하게 구현해 건설한 도시가 수도 ‘한양(漢陽)’이었다. 정도전은 『주례(周禮)』의 원리인 ‘좌묘우사 면조후시(左廟右社 面朝後市)’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단, 관청, 시장 등 주요한 공간의 자리를 잡았다. 즉 북악(北岳) 아래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세우고, 그 왼쪽인 지금의 종로에 선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宗廟)를, 오른쪽인 인왕산 아래 자락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했다. 그리고 육조(六曹) 등 조정의 주요 관청들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좌우에 배열해 세우고, 다시 종로에 저잣거리(시장)를 조성하도록 했다.
또한 정도전은 경복궁은 물론이고,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융문루 등 궁궐의 주요 건물 하나하나에 유교적 이념과 이상을 새겨 이름을 지었다.
1791년(정조 15)에 국가 차원에서 다시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을 수정 편찬했다. 1865년(고종 2)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한양 도성 설계의 공적을 인정해 시호를 하사해 달라고 청하고, 이에 고종이 1870년 마침내 문헌(文獻)이라는 시호와 함께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정도전의 삶과 철학 그리고 죽음은 조선이 망해 갈 무렵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
정도전의 호 삼봉은 도담 삼봉이 아니라 ‘삼각산(三角山) 삼봉(三峰)’이다!
『삼봉집』에 실려 있는 여러 편의 시를 통해 삼봉의 지명과 위치를 가늠해 본 결과, 삼각산이 옳을 듯하다.
전해오는 전설이나 설화는 정도전의 호가 ‘도담 삼봉’이라고 하지만, 정도전 자신과 그와 시대를 함께했던 스승과 벗들이 남긴 문헌은 그의 호 ‘삼봉’이 ‘삼각산 삼봉’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는 그의 호 삼봉이 ‘삼각산 삼봉’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여러 편의 시와 글이 존재한다.
정도전이 남긴 글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행적을 연도별로 기록해놓은 『삼봉집』 「부록(附錄)」의 「사실(事實)」편을 찾아보아도 ‘단양’이나 ‘도담 삼봉’이라는 단어나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맹자의 사상은 두 가지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하는데, 그 하나가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 하는 천명개혁(天命改革)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民]이 가장 우선이고, 그 다음은 사직(社稷, 국가)이고, 가장 마지막이 임금[王]이라고 한 민본(民本) 사상이다.
정도전은 삼각산 삼봉재에서 야심만만하게 ‘역성혁명과 민본 사상’의 정치 철학과 이를 구현할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치적 구상을 마무리한 다음, ‘천명(天命)의 소재’를 찾아 이성계를 만나러 머나먼 변방으로 길을 떠났던 것이다.
* 정몽주 : 포은(圃隱) :
‘채마밭에서 채소나 가꾸며 숨어 살고 싶다’
이색의 수제자로 고려 왕조의 개혁을 이끈 신진 사대부의 수장이었으나, 조선의 개국을 끝까지 반대하다 이방원의 수하에게 살해당함.
* 정선 : 겸재(謙齋) :
주역(周易)의 ‘겸괘(謙卦)’에서 취함. ‘謙亨 君子有終, 겸손함은 형통하게 하니, 군자가 끝을 둘 곳이다’
조선 고유의 화풍인 ‘진경산수화’를 개척해, 진경시대(眞景時代)를 연 사대부 출신의 화가.
겸양과 공경과 절제의 미학. <금강전도(金剛全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정약용 :
여유당(與猶堂), 다산(茶山), 사암(俟菴), 삼미자(三眉子) 10여개의 호를 사용.
- 여유당(與猶堂) : “신중하라!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신중하라!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與兮若冬涉川]. 경계하라!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猶兮若畏四隣].”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사람은 물이 뼈를 에는 듯 차갑기 때문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건너지 않는 법이다. 또한 사방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남의 시선이 자신에게 미칠까봐 염려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나서지 않는 법이다. ···
그가 생전에 저술한 500여 권의 서적을 모두 모아 간행한 전서(全書)의 제목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그의 고향 마을 생가에 오늘날에도 걸려 있는 당호(堂號) 역시 여유당(與猶堂)이다.
- 다산(茶山) : 유배지 만덕산(萬德山)의 ‘차(茶) 나무’와 ‘팔경(八景)’
- 사암(俟菴) : 미래의 새로운 세대를 기다리며···
-삼미자(三眉子) :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고 난 후 남은 마마 자국 때문에 눈썹이 세 마디로 나뉘었는데, 이를 두고 三眉子라고 自號
자세한 내용은 여유당(與猶堂) 정약용(丁若鏞) 본글 참조.
* 정약전 : 매심재(每心齋), 손암(巽庵) :
‘매심(每心)이란 뉘우칠 회(悔)이다’, 주역의 ‘손괘(巽卦)’에서 따옴.
우리 역사 최초의 해양 생물학 서적이자 어류도감이라고할 수 있는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이자 실학자이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이기도 하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辛酉邪獄) 때(44세) 흑산도로 유배를 가, 그곳에서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정약용이 쓴 「매심재기(每心齋記)」의 기록 “내 둘째 형님[정약전]이 고향집이 있는 초천으로 돌아가서, ‘매심(每心)’이라고 재실의 이름을 짓고 내게 기(記)를 써 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매심(每心)’이란 뉘우칠 회(悔)이다. 나는 뉘우침이 많은 사람이다. 항상 마음에 뉘우침을 새기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재실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라고 밝혔다. ... 뉘우침이 마음을 길러주는 일은, 분뇨가 곡식의 싹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는 것과 같다. 분뇨는 썩은 오물이지만 곡식의 싹을 길러 좋은 양식을 만든다. 뉘우침은 더러운 죄와 잘못으로부터 좋은 덕성을 길러준다. ...”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손암(巽庵)’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들어간다’는 뜻과 의미를 갖고 있는 주역의 손괘(巽卦)에서 따온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흑산도에서 벗어나 육지로 ‘들어가’ 고향집을 찾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 정여립 : 죽도(竹島) :
‘대나무가 많은 섬’
죽도는 ‘육지 속의 섬’이다. 금강 상류의 두 물줄기가 만나 사방을 에워싸고 흐르기 때문에 마치 섬처럼 보인다. 산죽(山竹)이 무성하게 자라서 한겨울에도 대나무 잎이 보인다고 한다. 죽도라는 이름은 이러한 까닭에 붙여진 것이다.
경기도 파주에 머물며 강학하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갔다.
정여립은 대단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변론(辯論)에 능숙하고 박학다식해서, 율곡과 우계의 신망을 얻었고 정치적 후원까지 받았다.
서인(西人)의 파당적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정여립은, 율곡이 사망한 후 서인을 떠나 동인(東人)이 되었고, 이듬해인 1585년(선조 18) 4월 경연(經筵) 석상에서는 한때 스승으로 모셨던 율곡과 우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로 인해 조정과 사림 안에서 큰 논란이 일어났고, 선조가 나서 정여립을 크게 질책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렸다.
낙향한 정여립은 고향집과 가까운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전국 각지에서 그의 명성을 따라 찾아온 사람들을 만났다. 스스로 ‘죽도’라는 호를 썼기 때문에, 호남 일대에서는 그를 죽도선생(竹島先生)으로 불렀다.
죽도를 주요 무대로 삼아 활동한 정여립은 단순히 학문을 닦고 제자들에게 강론하는 일보다는 일종의 사회 조직인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데 더 힘을 쏟았다. 그가 조직한 대동계는 당시 조선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신분 질서와 장벽을 깨뜨리는 매우 파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여기에는 양반 사대부와 사림의 선비는 물론, 서얼, 무사, 무뢰배, 노비, 승려, 도사, 산적들까지 참여했다.
대동계는 왕조 체제와 양반 사대부 중심의 신분질서와 통치 때문에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던, 다양한 부류의 피지배 계층이 다수 참여하는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신분 차별이 없는 만민평등 사상에 의거해 조직된 정여립의 대동계는 호남 일대의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었다. 특히 전라도 해안 지역을 침탈해 백성들을 괴롭히고 살육했던 왜구(倭寇)들에 대한 무력행사까지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여립에 대한 신망과 존경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정여립은 매월 15일에 대동계의 구성원들을 한자리에 모아 활쏘기·말 타기·칼 쓰기 등 무술을 연마하는 한편, 자신의 급진적인 사상을 강론했다. 당시 정여립이 구성원들에게 강론한 급진 사상은 크게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천하는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므로 일정한 주인(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이다.
또 다른 급진 사상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라는 이른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이다.
‘天下公物說’과 ‘何事非君論’은 모두 조선의 지배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정여립은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죽었기에, 그의 글과 기록은 물론, 그와 관련된 정보 또한 정확하게 전해지는 것이 없다.
정여립의 야심찬 구상은 1589년(선조 22) 10월 ‘전주의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장계가 조정에 접수되고, 토벌군이 급파되면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정여립은 형세의 불리함을 직감하고 아들 정옥남, 박춘룡 등과 함께 죽도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토벌군이 죽도를 덮치자, 정여립은 잡혀서 심한 고문을 받을 경우 동지들을 발설할까 봐, 먼저 변숭복을 죽이고, 다시 정옥남과 박춘룡을 죽이려고 하다 실패하자 자결하였다.
역모나 모반 사건에 무척이나 예민했던 선조는, 송강 정철을 필두로 서인 당파를 앞세워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들여 고문하고 처형했다. 서인 세력 역시 이 사건을 기회삼아 자신들의 반대파인 동인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로 인해 당시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사람의 숫자가 1천여 명에 달했다.
자세한 내용은 ‘교산 허균과 죽도 정여립’ 본문 참조.
* 정여창 : 일두(一蠹) :
‘한 마리의 좀벌레’
정여창은 중국 송나라에서 발원한 성리학의 태두인 정이천(程伊川)의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天地間一蠹]’에서 ‘일두(一蠹)’라는 말을 취해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이천은 다른 사람의 은택을 입고 살면서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낼 뿐 다른 사람들에게 은택을 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한 마리의 좀벌레[一蠹]’에 불과하다고 했다.
농부는 무더위와 한겨울에 열심히 경작하여 내가 이 곡식을 먹고, 공인이 어렵게 기물을 만들어 내가 이를 사용하고, 군인이 갑옷을 입고 병기를 들고 지켜 내가 편안히 지낼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은택을 주지 못하고 그럭저럭 세월만 보낸다면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같은 존재이다.
‘일두(一蠹)’라는 정여창의 호는, 자신을 좀벌레로 낮추어 겸양의 뜻을 보였다고 하기 보다는, 간혹 나태함과 용렬함과 게으름의 미혹에 빠져드는 자신을 채찍질해, 무엇 하나를 하더라도 세상과 사람들에게 의롭고 이로운 일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정여창이 김종직을 처음 만나 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때는 성종 3년(1472년), 나이 23세 때였다. 그는 4세 연하이지만 ‘지동도합(志同道合, 뜻을 함께 하고 道를 합한다)’의 지기(知己)를 맺은 김굉필과 함께, 1년 전에 자신의 고향인 경남 함양 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김종직은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통 계보를 잇는 사림의 적장자였다.
무오사화로 인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삽입한 김일손은 사형을 당했고,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에 처해졌다.
당시 중앙 정계와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정여창도 사화의 피바람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는 김종직의 수제자로 당시 사림파의 적통을 계승한 거물이었고, 또한 김일손의 동문(同門)이자 절친한 지기였기 때문이다.
종성에서 유배 생활을 한 지 7년째 되는 1504년(연산군 10) 4월 초, 정여창은 나이 55세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종성에서 가르친 제자들이 무려 두 달에 걸쳐 고향 함양으로 운구해, 승안동 산기슭에 장사 지냈다.
그러나 그해 9월, 다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라는 참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스승 김종직에 이은 부관참시였으니, 당시 연산군이 정여창을 김종직의 뒤를 잇는 사림의 적장자(嫡長子)로 여겨 얼마나 증오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일두 정여창, 사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본문 참조.
* 정인지 : 학역재(學易齋) :
‘『주역』의 이치를 배우고 익히고 깨달아 세상을 밝히겠다.’
세종과 문종 시대의 문치를 주도한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 세종과 함께 훈민정음 서문을 쓸 정도로, 집현전을 이끌며 훈민정음 창제에 큰 기여.
* 정인홍 : 내암(萊菴), 부음정(孚飮亭) :
‘거칠고 볼품없는 초막’, ‘믿음을 가지고 술을 마신다면 허물이 없다’ 스승 조식을 좇아 산림처사로 지내면서 벗을 사귀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마음을 두었다.
남명 조식의 수제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맹활약했고, 광해군 즉위 후 집권한 북인의 정치적·학문적 수장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세력에 의해 대역죄인이자 패륜의 주범으로 몰려 철저하게 매장 당했다.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어도, 북인 정권의 실질적 수장이었기에, 광해군의 몰락과 서인의 권력 장악 이후 역적의 굴레와 실정(失政) 및 패륜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 정철 : 송강(松江) :
성산(星山) 앞을 흐르는 내(강)의 이름[松江]에서 취함.
김윤제는 자신의 정자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앞개울에서 멱을 감고 있던 소년 정철을 보고서는, 말을 걸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고, 어린 정철에게 빠져 그를 자신의 문하에 두고 제자로 삼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 다니느라 학문을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정철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김윤제의 외손녀인 문화 유씨와 혼인을 한 이후로는 경제적인 도움까지 받았다.
김윤제는 학문이 깊고 시문에 뛰어난 문사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부호여서 당시 성산 일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는 담양과 장성을 근거지로 삼은 호남사림의 유명 인사들과 사제 혹은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철은 이 개울(강)이 맺어준 스승 김윤제와의 인연을 잊지 않고, 또 늘 푸르른 소나무의 기개를 닮기 위해 ‘松江’을 自號로 삼았던 것이다.
「성산별곡(星山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1589년,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이른바 ‘정여립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정철은 우의정으로 발탁되고, ‘정여립 역모 사건’을 국문하는 최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동인 세력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선비가 줄잡아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훈구파와 척신(戚臣)들이 사림 세력을 탄압한 수차례의 사화(士禍)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의 선비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정철은 星山 앞을 흐르는 아름다운 내(강) ‘松江’의 자연 풍경은 물론, 그와 하나 되어 사는 선비들의 삶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문학적으로 완성시켰다. 그러나 정치가 정철은 ‘松江’의 아름다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잔혹한 ‘살인귀’의 이미지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면앙정 송순과 송강 정철’ 본문을 참조.
* 정철조 : 석치(石痴) :
‘돌에 미친 바보’
미호 김원행의 제자로 홍대용과 동문 사이다. 홍대용, 황윤석 등과 함께 18세기 최고의 자연 과학자였으며, 또한 서양 전문가였다.
벼루를 깎는 전문용 칼이 아닌 일반 휴대용 칼, 즉 패도(佩刀)만을 가지고 다니면서, 때와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치 밀랍을 깎듯이 쉽게 돌을 깎아 벼루를 만듦. 어떤 돌이든 가리지 않고 깎아 벼루로 만드는 것을 좋아해, 스스로붙인 자호.
* 조광조 : 정암(靜庵) :
“어진 사람[仁者]은 고요하다!”
“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같이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산과 같이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의 이치에 통달해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어서 물을 좋아하고, 학문과 지식에 대한 끝없는 욕구와 호기심으로 인해 여기에서 저기로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산다고 한 것이다.
김굉필이 사림의 역사에 기여한 공적은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공적은 유배지인 평안도 희천에서 정암(靜庵) 조광조를 가르친 일이다.
조광조는 호조, 예조, 공조 등 여러 관직을 거쳤지만, 대부분의 관직 생활을 관료들에 대한 감찰과 탄핵을 주요 임무로 하는 사헌부(司憲府)와 임금의 잘못에 대한 간쟁(諫諍) 및 논박(論駁)을 담당하는 사간원(司諫院), 임금에게 국정 자문을 하면서 정치의 시비를 가리는 간언(諫言)을 주로 하던 홍문관(弘文館)에서 보냈다.
이 당시 조광조는 반정공신(反正功臣)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조정의 언론과 간쟁을 담당하는 이들 3사(三司)에 신망 받던 사림의 신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해, 훈구파의 전횡에 맞서 싸우는 전초 기지로 삼았다.
중종의 후원 아래 조광조는 사림파를 중앙 정계로 적극 등용하면서, 자신이 내세운 성리학적 도학 정치를 하나둘씩 실행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 학문과 사상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개편되고, 사회의 풍속과 풍습 역시 점차 성리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음직(蔭職)으로 관직을 얻고 훈구파의 비호를 받아 부정비리를 일삼는 관리들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천거를 통해 사림의 명망 높은 선비들을 관직에 임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했고, 공신전(功臣田)과 녹봉의 감소를 추진했다.
조광조의 개혁 구상과 정치 행동이 점차 훈구파들의 숨통을 죄어오자, 반정공신과 훈구파 세력은 역모사건을 조작해 조광조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1519년 대사헌에 오른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반정공신들의 훈작(勳爵)을 삭제하는 문제를 제기하자, 훈구파들은 대반격에 나선다. 그들은 ‘주초위왕(走肖爲王)’ 곧 조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유언비어와 모함을 뒤집어씌워 조광조와 사림파를 몰아세운다.
당시 중종은 반정공신과 훈구파의 권력 전횡도 못마땅했지만, 지난 몇 년간 조광조가 보인 도학 정치에 대해서 더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임금까지 가르치려는 조광조의 독선과 사림파의 독주에 대해 염증까지 느끼고 있었다.
조광조는 전라도 화순군 능주로 유배되었다.
당시 성균관의 생도를 포함한 수많은 유생들은 힘을 모아 조광조와 사림파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석방을 탄원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오히려 중종과 훈구파의 사림파에 대한 위기의식을 부추겼고, 끝내 중종은 훈구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다. 능주에 유배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2월 16일 끝내 조광조는 사사당하고 만다.
이 사건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이은 사림에 대한 세 번째 탄압이자 학살이었다.
훗날 ‘사림의 전성시대’를 연 대학자 율곡 이이는 조광조가 도학, 즉 조선의 성리학에 끼친 공적을 평가하면서, “조광조가 없었다면 조선에 성리학은 없었다.”라며 극찬했다.
율곡은 앞서 인용한 「경연일기」에서, 우리나라에는 덕(德)을 닦고 인(仁)을 좇은 선비들은 많았지만, ‘일찍이 도학적 실천과 의리를 임금에게 권한 사람은 조광조가 최초’라고 언급했다.
자세한 내용은 ‘일두 정여창, 사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본문 참조.
* 조식 : 남명(南冥), 산해(山海), 방장노자(方丈老子)·방장산인(方丈山人) :
‘남녘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대붕(大鵬)’,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게’, ‘방장산의 늙은이’, ‘방장산에 사는 사람’
그는 당시의 성리학자들이 요서(妖書)라고 배척했던 책인 『장자(莊子)』에서 자신의 호를 취했다. 이 책의 첫 장에 ‘남명(南冥)’이라는 말이 나온다.
‘남명(南冥)’은 남녘의 아득한 바다이다. 곤(鯤)이라는 물고기는 상상 속의 동물이고, 이 곤이 변신하여 붕(鵬)이 된다. 붕(鵬)은 전설 속의 새로, 한 번의 날갯짓으로 9만 리 장천(長天)을 난다고 해서 ‘대붕(大鵬)’이라고도 한다.
남명은 곧 대붕을 상징하고, 모든 욕망과 권력, 세속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의 삶과 ‘위민(爲民)과 안민(安民)의 나라 조선’을 꿈꾼 그의 철학을 담고 있다.
그는 유학자로서는 특이하게도 칼을 차고 다녔는데, 이 칼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마음을 밝히는 것은 敬이고, 외물을 끊는 것은 義이다)라고 새겨 있었다.
또한 ‘성성자(惺惺子)’라고 이름 붙인 방울까지 차고 다녔는데, 이것은 나태하거나 교만해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일깨우겠다는 뜻을 갖고 있다.
명종이 그를 단성 현감으로 임명하자, 이를 거절했던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자손일 뿐이니, ···
- 『남명집』 「을묘사직소」
30세가 되는 1530년에 처가가 있는 경남 김해로 옮겨 홀로 남은 노모를 봉양하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그는 신어산 아래 탄동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산해선생(山海先生)’이라고 불리고, ‘산해(山海)’라는 호를 사용했다.
‘태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라는 뜻으로,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학문의 경지에 오르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조식은 지리산 아래 삼가현에서 태어났고,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지리산 자락 덕산(德山, 지금의 산청)에 묻혔다. ‘방장산의 늙은이[方丈老子]’ 혹은 ‘방장산에 사는 사람[方丈山人]’이라는 호에는 지리산에 대한 조식의 사랑이 가득 묻어 있다. 이 산은 ‘남다른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산’이라고 해서 지리산(智異山). ‘백두산이 흘러내려 이루어진 산’이라고 해서 두류산(頭流山),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해서 방장산(方丈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지리산을 끔찍이 사랑했던 그는 천왕봉을 더욱 가까이에서 대하고 싶은 마음에, 계부당과 뇌룡사를 떠나 덕산으로 거처를 옮긴 다음 산천재(山天齋)라고 이름붙인 집을 짓고 살았다.
68세가 되는 1568년에 새로이 즉위한 선조가 조식을 한양으로 부르자, 다시 벼슬을 사양하면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 상소문이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조선사 최고의 직언(直言)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 「무진봉사(戊辰封事)」이다. 여기에서 조식은 특히 ‘서리(胥吏)들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갉아먹고 있다’는 이른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주장하였다.
조식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평소 차고 다녔던 칼과 방울 중, ‘義(의로움)’를 상징하는 칼은 내암(萊菴) 정인홍이 물려받았고, ‘敬(공경함 혹은 두려워 함)’을 상징하는 방울은 동강(東岡) 김우옹이 물려받았다.
정인홍은 스승의 유지를 이은 ‘강우학파’의 맹주 대접을 받았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후 권력을 잡은 북인(北人) 대북파(大北派)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했다.
그리고 훗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서인(西人)들에 의해 ‘역적의 수괴’라는 혐의와 누명을 쓴 채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정인홍의 죽음과 더불어 조식의 학맥 또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황이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유학자로 찬사를 받는 동안, 조식은 오랫동안 잊힌 존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조영석 : 관아재(觀我齋) :
‘나 자신을 관조(觀照)하는 집’, 자기 성찰의 의미.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를 일컫는 ‘삼원(三園, 단원 김홍도·혜원 신윤복·오원 장승업)’ 이전에 크게 명성을 떨쳤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삼재(三齋, 겸재 정선·관아재 조영석·현재 심사정)였다. 三園이 전문화가였다면 三齋는 사대부 출신의 문인화가였다. 조영석은 인물화와 산수화에 뛰어났음.
* 조준 : 우재(吁齋), 송당(松堂) :
근심하는(탄식하는) 집, 소나무 소리가 넉넉한 서재. 고려 말기의 혼돈한 세상사를 근심함. 『송당집(松堂集)』
고려 말 전제개혁을 단행해 조선 개국의 기틀을 마련함. 정도전과 함께 조선 개국의 최대 공신.
* 조현명 : 귀록(歸鹿) :
‘사슴으로 돌아감’. 서울 중구 필동에 세거(世居)하면서, 귀록정(歸鹿亭)을 경영하고, 사계절의 풍치를 완상하는 생활을 즐겼다. 정자 아래에는 항시 푸른 줄로 사슴을 매어두었는데, 사슴은 십장생(十長生) 중의 하나로서 영물로 대접받고, 평화와 선(善)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평생 당색과 당파를 초월하여 화합과 탕평의 정치를 추구했던 조현명의 삶과 정치 철학은 사슴과 만g이 닮아 있다.
영조 즉위의 일등공신 중 한사람이었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할 때도 큰 공을 세웠다. 도승지,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당색과 당파를 초월한 탕평의 정치가이자 민폐의 근원인 양역(良役)의 개혁을 도모한 경세가였다.
* 채제공 : 번암(樊巖) :
그가 살았던 ‘번계(樊溪)’라고 불리던 개천에서 취함.
성호 이익에게 큰 영향을 입은 오광운의 제자로, 평생 성호학파의 학풍을 좇아 학문을 익히고 정치에 임했다. 영조 때 죽음을 무릅쓰고 사도세자를 변호해 정조의 신임을 얻었고, 정조 즉위 이후 남인의 영수로 문치와 개혁 정치를 주도하다시피 했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화성 축성을 지휘했다.
* 최립 : 간이(簡易) :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간단하고 평이함‘, 자신이 추구하는 삶과 문학의 철학이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간단하고 평이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고 하여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많이 작성했다. 개성 출신으로서 오산 차천로의 시와 간이 최립의 문장과 석봉 한호의 글씨를 일컬어 ‘개성의 문예삼절(文藝三絶)’로 불림.
역학(易學)에 관한 식견이 매우 심오하여, 저서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을 남김.
주역에서 역(易)의 뜻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간이(簡易)는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간단하고 평이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변역(變易)은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한다’는 것이고, 불역(不易)은 ‘바뀌지도 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 최부 : 금남(錦南) :
‘금성(錦城)과 해남(海南)’
자신의 고향인 나주의 옛 이름 금성(錦城)에서 금(錦) 자를 취하고, 처가이자 주요 활동 무대였던 해남(海南)에서 남(南자) 를 따옴.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함께 세계 3대 중국 여행기로 꼽히는 『표해록(漂海錄)』 (혹은 『錦南漂海錄』이라고도 함)의 저자. 성종 때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 도망친 노비를 잡아들이는 직책의 관리)으로 제주도에 갔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급하게 고향인 나주로 돌아오던 중 큰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명나라 절강성 영파현에 다다랐다. 그 후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거쳐 육로를 통해 반년 만에야 한양에 돌아왔고, 자신의 경험담을 기록한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했다. 사림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무오사화 때 누명을 쓰고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고,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함.
* 최북 : 호생관(毫生館), 호생자(毫生子), 칠칠(七七) :
‘붓으로 먹고 사는 놈’. 자신의 이름인 ‘북(北)자를 둘로 나누어 자(字)를 칠칠(七七)’이라고 했음. ‘최칠칠(崔七七)’이라고 불림.
‘최산수(崔山水)’라고 불릴 만큼 산수화를 잘 그려서 현재 심사정과 쌍벽을 이룰 정도였다. 술을 좋아하고 떠돌아다니는 것을 즐겨 온갖 기행을 낳았다.
* 최시형 : 해월(海月) :
‘사해(四海) 곧 온 세상을 비추는 달[月]’처럼, 밝고 맑게 세상 구석구석을 비추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의미로, 스승 최제우가 도통을 전수할 무렵 내려준 호이다.
최제우의 수제자로 동학(천도교)의 제2대 교주임. 동학의 전국적인 포교활동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스승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전수받고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다.
‘인시천 사인여천(人是天 事人如天, 사람이 바로 하늘이니, 사람을 섬기는 것을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이 하라)’라는 사상으로 발전.
* 최영경 : 수우당(守愚堂) :
‘자신의 재능과 지혜를 감추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재능과 지혜 이상의 것을 욕심내거나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실제 그는 높은 학행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경(敬, 공경하고 조심하고 삼가는 태도)과 의(義, 의로운 마음과 정의로운 행동)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아 정진하는 데 열성을 쏟았다.
남명 조식의 제자로 당시 사림파 사이에서 학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1590년 사림을 뒤흔든 ‘정여립 역모 사건’ 때 명망 높은 동인의 선비였던 그를 죽이려는 서인 측의 모함 때문에 역적의 수괴이자 유령의 인물인 ‘길삼봉(吉三峯)’으로 지목되어 고문을 받다 옥사하였다.
* 최익현 : 면암(勉庵) :
‘부지런히 힘쓰라’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로, 호남의 기정진, 영남의 이진상과 함께 조선 말기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위정척사파의 수장.
최익현은 성리학을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며, 개화와 근대화에 반대하는 위정척사의 수호신으로 살았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7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일본군에게 체포당해, 7월 8일 쓰시마[對馬島]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4개월여가 지난 11월 17일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항로는 제자인 최익현에게 ‘낙경민직(洛敬閩直)’이라는 글을 써주면서, ‘부지런히 힘쓰라’는 뜻으로 ‘면암(勉庵)’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낙경민직’의 네 글자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뜻과 의미를 담고 있다. 낙(洛)은 낙읍(洛邑)에 살았던 정자(程子)를 가리키고, 경(敬)은 정자의 거경궁리(居敬窮理, 경건하게 거처하며 이치를 궁구함)에서, 민(閩직)은 민중(閩中)에 살았던 주자(朱子)를 지칭하고, 직(直)은 주자의 경이직내(敬以直內, 경건함으로 내면을 바르게 함)에서 취한 것이다.
* 최제우 : 수운(水雲) :
‘물과 구름’. 천지자연 혹은 천지 생명을 의미. 어리석은 세상뿐만 아니라 천지자연과 천지 생명까지 구제하겠다는 의미.
동양의 전통사상인 유(儒)·불(佛)·선(仙)과 도참설(圖讖說) 및 후천 개벽(後天開闢) 등 민중의식을 융합해 ‘동학(東學)’이라는 독창적 이념을 창시했다. 동학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된 천도교(天道敎)의 제1대 교주임.
그는 본명이 제선(濟宣)이었는데, 1859년 구도를 결심할 때, ‘어리석은 세상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우(濟愚)’로 바꾸었다.
* 하륜 : 호정(浩亭) :
넓고 광대한 뜻을 품다.
고려 말 권신 이인임의 조카사위로서 권세를 누렸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이방원을 왕위에 옹립하고 왕권강화에 기여하였으며, 영의정을 네 차례나 지냄.
* 하위지 : 단계(丹溪) :
하위지가 태어날 때, 집 앞의 개울이 사흘 동안 붉은 빛을 띠어, ‘단계천(丹溪川)이라 함. 경북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영봉리)
단종에 대한 충의를 지키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의 한 사람.
* 한명회 : 압구정(鴨鷗亭) :
‘갈매기[鷗]와 친하게 지낸다[親狎]’, ‘세상일을 모두 잊고 강가에서 갈매기를 벗하여 산다’, 한명회가 한강 가에 세운 정자인 압구정(鴨鷗亭).
세조의 왕위 찬탈을 실질적으로 설계하고 지휘한 장본인. 세조 즉위 이후 성종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두 딸을 모두 왕비로 만들고, 세 차례나 영의정에 오른 권신이다.
한명회는 중국 북송 시대의 정치가 한기와 구양수의 옛이야기가 담겨 있는 ‘압구정’이라는 이름을, 명나라의 한림학사 예겸(倪謙)에게 직접 받아와 정자에 걸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러나 권력욕으로 가득 찬 권신 한명회의 삶은 ‘압구정’이라는 이름만 취했을 뿐, 거기에 담긴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 한백겸 : 구암(久菴) :
‘오래 머무르는 집’, 「물이촌구암기(勿移村久菴記)」에서 내력을 설명.
개인이 저술한 최초의 역사 지리서라고 할 수 있는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의 저자. 17세기 초에 저술된 이 책은 실증적이고 고증적인 역사 연구와 서술로, 18세기에 출현한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만년을 아우 한준겸의 별장이 있던 행주산성 아래에 있는 경기 양주 수이촌(水伊村)에서 지냈는데, 이곳에 자리를 잡고 생애를 마치기로 결심한 뒤, ‘평생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수이촌을 물이촌(勿移村)으로 고쳤다. 자신이 거처하는 방응 ‘오래 머무르다’는 뜻으로 구암(久菴 )이라고 하였다.
‘구즉안(久則安, 오래 머무르면 편안하다)’와 ‘안즉락(安則樂, 편안하면 곧 즐겁다)’을 언급하고, 다시 즐거움에 이르게 되면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다고 했다. 세상 어느 곳이든 오래 머무르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즐겁고, 즐거우면 옮기려고 해도 옮길 수 없게 된다.
* 한호 : 석봉(石峯) :
개성에 있는 ‘석봉산(石峯山)’에서 취함.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인근 금천에 위치해 있는 석봉산을 좋아해, 그 아래에서 살았다.
* 허균 : 교산(蛟山), 성소(惺所)·성옹(惺翁)·성성옹(惺惺翁) :
‘용을 꿈꾼 이무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도 홀로 깨어 있겠다!”
그가 태어난 강릉 외가의 뒷산 이름이 교산이다. ‘이무기의 정기’를 뜻한다.
이무기는 잠재적인 용이다. 허균은 용을 꿈꾸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허균이 쓴 「호민론(豪民論)」과 「유재론(遺才論)」은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글이다.
허균은 호민론의 첫 구절에서부터 “천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유학의 민본(民本) 사상보다 진일보한, 민권(民權)에 가까운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호민론」에서 허균은 백성을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나누었는데, 이 가운데 호민(豪民)을 ‘시대적 변고를 만나면 자신들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존재’로 보았다.
「유재론(遺才論)」을 통해서는, 모든 사람은 하늘로부터 같은 권리를 부여받아 태어났다는 ‘만민평등(萬民平等)의 사상’을 역설했다. 「유재론」에 따르면, 하늘은 사람을 세상에 내보낼 때 귀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해서 재주를 넉넉하게 주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해서 재주를 인색하게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하늘이 평등하게 부여한 재주를 ‘문벌(門閥)로 단속하고 과거(科擧)로 제한하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준 권리를 침해하는 불의(不義)한 일일 따름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도 홀로 깨어 있겠다!”
허균은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나 다름없었던 초당(草堂)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경덕의 학풍 탓인지는 몰라도, 허엽의 집안은 당시 양반 사대부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가풍을 띠고 있었다.
허균의 둘째 형 허봉은 서얼 출신인 손곡(蓀谷) 이달과 절친한 사이로 지냈으며, 허균과 허난설헌은 이달을 스승으로 삼을 만큼 가문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또한 여성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사대부가의 관례를 깨고 딸인 허난설헌이 자유롭게 시문을 짓고 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허균은 장성하면서 유학이나 성리학 이외에도 불교·도교·노장(老莊) 사상을 두루 섭렵했다. 명나라에 갔을 때 접한 서학(西學)과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조선에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유학 사상 최대의 이단자로 지목당한 이탁오의 사상에도 심취했다.
‘성(惺)’은 ‘고요하되 마음이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것’ 혹은 ‘고요하면서도 마음이 맑게 깨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삶’을 뜻한다.
또한 ‘성(惺)’이라는 글자에는 무엇인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다는 뜻과 함께, 무엇인가에 미혹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거기에는 성리학이든 혹은 불교이든, 혹은 도교이든 혹은 천주교이든 혹은 양명학이든 그 어떤 학문과 사상도 절대적인 것으로 숭배하지 않는다는 뜻이 새겨져 있다.
허균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꾼, ‘용을 꿈꾼 이무기’이다.
모든 차별과 불평등을 없애고,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허균의 시대뿐만 아니라, 신분 질서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가치이다.
지금도 용을 꿈꾸는 이무기, 곧 더 평등한 사회와 삶을 꿈꾸는 수많은 허균들이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허균은 스스로의 힘으로 용이 되려고 하는 모든 피억압·피지배 계층의 영원한 아이콘일 수밖에 없다.
자세한 내용은 ‘교산 허균과 죽도 정여립’ 본문 참조.
* 허련 : 소치(小痴) :
‘작게 혹은 조금 어리석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고 불렸다. 스승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1856년에 고향인 진도로 낙향하여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살면서, ‘조선남종화(朝鮮南宗畵)’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소치(小痴)’라는 호는 추사 김정희가 지어준 것인데, 중국 원나라 말기 남종 문인화의 4대가(황공망·오진·예찬·왕몽) 중의 한 사람인 황공망의 호 대치(大痴)에 빗대어 지어준 것임. 진도의 운림산방(雲林山房) 역시 이들 중 한 사람인 예찬의 아호인 ‘운림(雲林)’을 취해 지음.
* 허목 : 미수(眉叟) :
‘눈썹이 긴 늙은이’
자명비(自銘碑)에 “늙은이의 눈썹이 길어서 눈을 덮었다. 그래서 자호(自號)를 미수(眉叟)라고 하였다.”라고 적었다. 권위나 작위의 느낌이 없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소박하면서도 뭔지 모를 멋을 느끼게 하는 작호.
17세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남인의영수. 송시열과 치열한 예학(禮學) 논쟁을 벌였고, 주자학적인 유교 해석을 거부하고 스스로 원(原) 유학인 육경학(六經學)을 연구했다. 도가는 물론 불교에 대해서까지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송시열과 그 추종 세력들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큰 곤욕을 당했다.
* 허초희 : 난설헌(蘭雪軒) :
‘차가운 서리와 눈 속에서도 맑은 향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난초’
선조 때의 천재 여류 시인. 허균의 누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가풍 덕분에 일찍부터 시문에서 천재성을 발휘했지만, 결혼 이후 여성을 천시한 사회적 환경 때문에 불행하게 살다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함.
동생 허균이 누이 난설헌이 남기고 간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蘭雪軒集)을 엮은 다음, 당시 여성에 대한 아집과 편견이 심한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의 문사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들 중 주지번이라는 명나라 사신이 허난설헌의 시에 크게 탄복해 중국에 가져가서 『허난설헌집(許蘭雪軒集)』을 발간해 큰 인기를 얻었다. 18세기 초에는 그녀의 시가 일본에까지 전해져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차가운 서리와 눈’이 신분에 대한 차별보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더 가혹했던 조선의 제도였다면, 그 속에서도 ‘맑은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난초’는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
‘문득 감상에 젖어[感遇]’라는 시에 그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 홍길주 : 항해(沆瀣) :
신선이 마시고 산다고 전해오는 ‘깊은 밤중에 내리는 맑은 이슬(기운)’을 뜻한다.
그의 집안인 풍산 홍씨는 19세기 한양의 최대 명문가 중 하나였다. 그의 친동생 홍현주는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와 혼인해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졌고, 그의 친형 홍석주는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의 할아버지 홍낙성은 영의정, 아버지 홍인모 역시 우부승지의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홍길주는 일찍부터 벼슬에 큰 뜻을 두지 않고, 오직 독서하고 사색하며 저술하고 글을 짓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알고 살았다. 이로 인해 비록 생전에는 3형제 중 가장 한미했지만, 오늘날 19세기를 대표하는 명문장가로 3형제 중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다.
* 홍대용 : 담헌(湛軒) : ‘맑고 깨끗하고, 넓고 텅 비어 있는 집’
홍대용의 호 ‘담헌(湛軒)’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 있던 집에 붙여진 이름이다.
‘담헌’이란 집의 이름은 홍대용이 12살 때부터 스승으로 섬겼던 미호(渼湖) 김원행이 지어 줬는데, ‘담(湛)’이라는 글자에 담긴 대의(大意)를 훗날 홍대용은 ‘텅 비고 밝으며 넓어서 바깥 사물에 연루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
1765년(영조 41) 그의 나이 35세 때, 홍대용은 청나라 사신단의 서장관(書狀官)이 된 계부(季父) 홍억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갔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청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체험을 기록으로 남긴 연행록(燕行錄)은 오늘날까지 수백 권이 전해지고 있을 만큼 그 숫자가 많다. 대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연행록의 백미(白眉)로 알고 있지만, 사실 홍대용의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역시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노가재(老稼齋) 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3대 연행록 중 하나로 일컬어질 정도로 걸작이다.
『을병연행록』이라는 제목은 홍대용이 을유년(乙酉年)인 1765년 11월 2일 한양을 떠나 연경에 도착한 후, 병술년(丙戌年)인 다음 해 5월 2일 고향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붙여졌다. 을유년과 병술년에서 머리글자를 따와 『을병연행록』이라고 지은 것이다.
홍대용의 과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지식은, 특정한 스승에 연원을 두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거나 직접 각종 과학 기구를 제작해 실험해보는 과정을 통해 터득한 ‘자득(自得)’에 있었다.
나이 29세 무렵인 1759년에, 홍대용은 전라도 나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나주관아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그는 근처 동복(同福, 전라도 화순) 땅 물염정(勿染亭)에 은거하고 있던 석당(石塘) 나경적을 친히 찾아가 과학 기술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나경적과 그의 제자 안처인(安處仁)을 나주관아로 초청해 가르침을 받고, 3년여 가까이 공을 들여 과학 기구와 도구 등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들과 함께 연구하고 작업한 결과물이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와 자명종이었다.
홍대용은 수촌 마을의 집 담헌에 사설 천문대라고 할 수 있는 농수각을 세워 이들 기구들을 설치하고, 천체 관측과 과학 연구에 활용했다.
각종 과학 실험과 연구를 했던 홍대용은 1773년 나이 43세 무렵, 그 내용을 종합하고 정리한 『의산문답(毉山問答)』이라는 과학 서적을 세상에 내놓았다.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은 실옹(實翁)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지구설(地球說), 지전설(地轉說), 무한우주설(無限宇宙說)과 같은 자신의 과학 지식과 사상을 한껏 펼쳐보였다.
특히 지구는 둥글다는 지구설에 근거해 ‘중화(中華)와 오랑캐가 따로 있지 않다’고 논하면서, 모든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이것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에 빠져 있던 조선의 사대부나 지식인들의 편협한 사고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인식에 일대 경종을 울린 지성사적 쾌거였다.
오늘날 홍대용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과학자이자 과학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
* 황윤석 : 이재(頤齋) :
주역의 ‘이괘(頤卦 : 山雷頤卦, 말을 조심하고, 음식을 절제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음)에서 취함.
미호 김원행의 문하에서 홍대용, 정철조 등과 함께 수학했다. 천문 지리학과 산학(算學) 등에 밝았고, 특히 서양의 자연과학에 심취했던 실학자였다. 『이재난고(頤齋亂稿)』는 당대의 모든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음.
이재(頤齋)라는 호는 그의 아버지 황전이 『주역』 「이괘(頤卦)」의 「대상전(大象傳)」에서 뜻을 취해 지어준 것인데, 훗날 황윤석은 「목주잡가(木州雜歌)」를 지어 아버지가 지어준 자신의 호에 대해 밝혔다.
#명사들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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