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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종의 문학잡설(17)] ‘사무사(思無邪)’좋은 글 2023. 4. 26. 23:43
[김승종의 문학잡설(17)] ‘사무사(思無邪)’ 2
김승종/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당대에 전승되던 노래의 가사에서 공자(B.C. 551 ~ B.C. 479)는 305편을 선별하여 시집을 엮었다. 그러니까 단순한 철습(掇拾)이 아니었다. 정치학자 윤리학자 정치가 교육자에 이어 공자는 최초로 자취가 분명한 문예비평가이며, 후세에 ‘시의 경(經)’으로 존숭된 이 시집에는 공자의 비평 안목이 적용되어 있다. 『논어』 등에 수록된 시 관련 언급들은 공자 비평의 일부이자 그 선별 기준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는 “시 305편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시 305편은, 「경(駉)」의 말(馬)들처럼- ‘나쁜 기운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란 유연하고 완곡한 명제에서도, 내포된 그 기준 둘을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나쁜 기운이 있는 작품’은 배제한다. 둘째, 305편이 대등하지는 않다. 최상에서부터 모종 아래 등급을 거쳐, 최소한 나쁘지는 않은 작품[읽어도 해가 되지 않는]이 두루 편재한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의도와 지침은 소신 있는 비평가라면 초래될 논란을 무릅쓰고 독자들에게 표시하여야 할 용기 있는 태도이다. 다시 문제는 ‘나쁜 기운’과 ‘차등(差等)’의 척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시경』 학자들이 공자의 비평 이념이라고 한 ‘중용(中庸)’, 즉 양극(兩極)와 양단(兩端)을 지양한 중도 중정의 중용이 공자에게 시 선별의 원칙이었고, 또 차등 평가에서도 기준이었다고 하겠다. “즐거워도 음란하지 말고, 슬퍼도 마음을 손상하지 말아야 한다(樂而不淫 哀而不傷)”(『논어』 「팔일(八佾)」)는 언급은 그 한 표출일 것이다.
공자의 후학들은 중용을 천하의 대도(大道)로 평가하면서도 그 실천이 너무 어렵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공자가 무언중에, 우리 인간에게 두루 내재하는 천부의 천품(天稟), 즉 ‘인지상정(人之常情)’을 염두에 두고 그것이 중용의 바탕이라고 격려하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인지상정이 있어 중용을 실천할 수 있고, 또 중용을 이행하여 인지상정을 회복할 수도 있다, 시 창작에서나 감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전문가가 제시한 평가 기준을 참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시들이 좋은 시이고, 어떤 시들이 더 좋은 시인지 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여러 처지와 운명을 동정하고 공감하는 조율(調律)의 시각과 관련 보편 정서’가 존재하며, 이 시각과 정서에 호소하거나 일으키는 시에 우리는 공명(共鳴)하고 그 정도(程度)도 체감하고 있다.
새삼 ‘사무사(思無邪)’의 관점에서 오늘의 시를 읽어도 좋을 것이다. 어느 잡지를 폈다가 다음 시를 금방 쉽게 발견하였다.
등대 집 하나 짓고 싶다
열 평도 커 반 뚝 떼어 버리고
일 층은 주방 이 층은 침실 삼 층은 작업실
밤마다 시의 등불 켜 두고 싶다.
바닷가가 아니라 깊은 내륙,
시의 등불로 도시의 밤을 지켜주는.
먹고사는 일에 파묻히고
배반과 시기에 눈이 멀어
나조차 잊어버릴 날 많은 내 마음속에도
등대 집 하나 세우고 싶다.
그곳에서 아직 낱말조차 되지 못한 자음모음의 별들을
새벽녘까지 품고 뒹굴다가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의미 없는 것들을 위해
온종일 빛을 뿜어 줄
햇볕 닮은 시를 낳고 싶다
- 「등대 집」/함명춘
시인과 화자를 분리하여도 자기 선도(善導)의 의지를 과감하게 노출해 관심을 끈다. 그만큼 자신의 시가 어떠해야 하는지 신념이 투철해서일 것이다. ‘먹고사는 일에 파묻히고/배반과 시기에 눈이 멀어/나조차 잊어버릴 날 많은 내 마음속에도/등대 집 하나 세우고 싶다’가 더욱 주목된다. 아무래도 감추고 싶거나 쑥스러워서 굳이 피력하기가 저어되는 토로를 자기성찰의 하나로 진술하고 있다. 진솔한 윤리성 표백만으로는 ‘상등 준마’가 될 수 없다는 독자 여러분도 있을 것이고, 그저 성찰의 진정성을 강조하려는 시인의 시략(詩略)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시 등 문학작품 감상에서 작품의 화자와, 시인•작가를 분리하며 동일시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다음 시[어떤 민요의 가사]는 여러분이 편집할 시집에, 공자를 따라 ‘사무사(思無邪)’가 아니라며 수록하지 않을 것 같다. 인지상정(人之常情)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화자와 시인을 동일시 할 것도 같다.
뒷동산에 할미꽃
꼬부라진 할미꽃
싹 날 때에 늙었나
호호백발 할미꽃
천만가지 꽃 중에
무슨 꽃이 못되어
가시 돋고 등 굽은
할미꽃이 되었나
탄로(嘆老)에 동정으로 가슴 저미나 하였는데, 다시 읽어보니 자신을 할미꽃에 은유한 노년의 그것이 아니다. 뭐, ‘싹 날 때에 늙었나’라고? 뭐, ‘가시 돋고 등 굽’었다고? 흠, 그래 그렇군, 그럼 너나 가시 하나 없고 등 쭉쭉 곧은 노인이 되어라’고 독자들도 같은 심보가 되어 비아냥거릴 것 같다.
우리는 두 시를 읽고 다 안다. 전자에는 자성과 배려, 후자에는 자만과 조소가 있다. 전자에는 우리를 서로 다정한 이웃으로 살게 하는 동정과 유대가 있고, 후자에는 그것들이 없다. 대신 교만과 인색이 있다. 공자는 매우 지탄하였다. “비록 주공과 같은 훌륭한 재능을 지녔다 해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나머지는 더 볼 것이 없다.(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 不足觀也已)”(『논어』 「태백(泰伯)」)
출처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http://www.suwonilbo.kr)'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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