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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庸 第三十三章/詩曰 奏假(格)無言 時靡有爭
    경서/중용 2023. 3. 23. 07:24

    中庸 第三十三章-4,5,6

    詩曰 奏假(格)無言 時靡有爭 是故君子 不賞而民勸 不怒而民威於鈇鉞

    시왈 주격무언 시미유쟁 시고군자 불상이민권 불노이민위어부월

    시경에, (제사를 올려) 나아가는데 이르러도 말이 없네, 이때 다툼이 있지 아니하네, 했다. 이런고로 군자는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이 힘쓰고 화내지 않아도 백성이 부월(도끼, 작두)을 두려워하듯 한다.

    ​詩曰 不顯惟德 百辟其刑之 是故君子 篤恭而天下平

    시왈 불현유덕 백벽기형지 시고군자 독공이천하평

    시경에, 나타나지 않은 덕이여, 많은 제후가 그것을 본받는다, 했다. 그러므로 군자는 도타움과 공손함으로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

    詩云 予懷明德 不大聲以色 子曰 聲色之於以化民 末也 詩云 德輶如毛 毛猶有倫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시운 여회명덕 부대성이색 자왈 성색지어이화민 말야 시운 덕유여모 모유유륜 상천지재 무성무취 지의

    시경에, 나는 밝은 덕을 품지, 큰 소리와 색은 아니다, 고 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리와 색으로 백성을 화육함은 말단이다. 시경에, 덕의 가벼움이 털과 같네, 라 했다. 털은 오히려 무리(비교대상)이 있으나 상천上天을 싣는 것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이 지극하다.

    中庸 第三十三章-4,5,6

    마태오 복음서 28장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가톨릭 교리서

    774 그리스 말 mysterion은 라틴 말로 ‘신비’(mysterium)와 ‘성사’(sacramentum)라는 두 가지 말로 번역되었다. 후대의 설명에 따르면, ‘성사’는 ‘신비’가 가리키는 구원의 감추어진 실재에 대한 표징을 더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의 신비이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비는 없습니다.”200) 거룩하시며 또 거룩하게 하시는 그분의 인성이 이루신 구원의 업적은 교회의 성사들(동방 교회에서는 ‘거룩한 신비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안에서 드러나고 작용하는 구원의 성사이다. 일곱 가지 성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펼치시는 표지이며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의미하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간직하고 이를 나눈다. 이러한 유비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성사’라고 부른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에 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을 통제하시므로 우리보다 높은 차원에 계심은 자명하다. 마치 2차원적 존재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듯 우리도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단지 교회에 계시된 진리로 그분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우리의 언어로 묘사하는 정도다. 분명한 점은 이 신학적 방법론을 따라가면 어떤 체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체계처럼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사’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여 준다. 교회를 통한 성사의 집전으로 우리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게 된다. 필자가 “안다”는 단어를 썼는데 이는 “믿다”의 단어보다 격이 높은 것이다. 믿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말을 듣고 인지하는 것임에 반해, 안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우리는 믿음과 체험을 통해 앎의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중용이라는 보이지 않는 진리의 개념을 우리는 이때까지 배워왔다. 중용 제일 첫 문장을 보자.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생명이라 한다. 생명을 좇는 것을 길이라고 한다. 길을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중용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털은 오히려 무리(비교대상)이 있으나 상천上天을 싣는 것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이 지극하다.” 중용이라는 형이상학적 체계를 중용 읽음를 통해 형이하학적 인간이 체계를 잡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신학과 교회를 통해 하느님을 이해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비록 중용을 완벽히 이해하고 신독을 실천하는 경지는 언어도단의 세계라 할지라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더 나은 지경에 도달했으면 한다.

    [출처]작성자 infinity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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