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디저널] 뚝향나무 가지에 까치 날개처럼 흰 눈이 쌓인 날, 꼬부랑 할머니가 살고 있는 오두막 옆 꼬부랑길로 연 날리려 올라갔다. 이 근처에 오면 항상 눈처럼 깨끗한 향나무 향기가 났다. 할머니의 사립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6.25때 철없이 인민군에 따라간 아들 어서 돌아오라고 늘 문을 열어놓는다고 했다. 사립문 문기둥에는 눈에 꺾였는지 바람에 꺾였는지 아직 생생한 커다란 향나무 가지 하나를 얻어놓았다. 할머니는 정화수도 없이 늘 아들이 돌아오라는 소원을 빌었고, 반쯤 누운 커다란 꼬부랑 향나무는 이 소원을 하늘까지 전했다.
정월(正月)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는 즐겁게 놀기에 아주 바빴다. 연날리기, 얼음지치기, 팽이치기 등 정신없이 놀며 먹던 강정, 과상 같은 설음식들이 다 끝나갈 무렵, 좋은 구경거리와 먹을거리가 생겼다. 뒷집 기혁이네 작은 누나가 시집간단다.
마당에는 차일(遮日)을 쳐놓았고 바닥은 멍석을 깐 후 그 위에 돗자리를 깔았고 병풍까지 드리웠다. 다리가 긴 교배상 위에는 나무 기러기 한 쌍, 촛대 2개와 청실홍실로 이어진 술잔, 향나무, 대나무와 솔가지를 꽂은 꽃병에다 색종이까지 걸어놓았다. 교배 상 양 옆에는 암탉 한 마리와 수탁 한 마리를 도망가지 못하게 보자기로 싸놓았다. 겁이 난 닭들은 연신 꾹꾹 꼭꼭 거린다. 신랑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이윽고 연지곤지 찍고 원삼을 입은 고운 신부가 나온다. 이윽고 집례가 홀기를 부르면 혼례가 시작된다. 구경꾼들은 신랑신부에 관심이 있고, 아이들은 교배 상에 놓인 밤, 대추, 과자에만 관심이 있다.
교배 상에서처럼 향나무가 늘 푸른 나무의 한 가지로 여러 곳에 들어가지만 화려한 주연은 아니다. 도시의 정원에서도 향나무는 대부분 어느 한 쪽엔가 있기는 하다. 오솔길 따라 자그만 옥향나무들을 줄지어 심어두었지만 여기서도 단풍이나 소나무, 느티나무처럼 주인공은 아니다. 궁이나 오래된 사찰, 능, 서원, 관청의 뜰에 향나무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많으면 분위기가 어두워질까 몇 그루만 심어 놓았다. 은행나무처럼 결코 주변을 압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향나무가 없으면 왠지 꼭 있어야 할 나무가 없어 보인다. 제사 때도 향이 주가 되지는 않지만 향을 피우지 않으면 제사가 진행되지 않는다.
이렇게 주연(主演)이 아니어서인지 한시(漢詩) 등 우리 문학작품에서 향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드물다. 그런데 성삼문(成三問)은 젊은 시절 안평대군의 최측근이었기에 『비해당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에 눈향나무(만년송萬年松)를 소재로 한 시를 남겼다.
올해 한 치가 자라고 (금년장일촌 今年長一寸)
내년에 한 치가 자라니 (명년장일촌 明年長一寸)
오로지 빨리 자라지 않지만 (유기불송성 維其不速成)
이 때문에 만년에 이른다네 (시이년지만 是以年至萬)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중국에는 없는 우리 고유종인 눈향나무(만년송萬年松)의 우수성을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화분의 만년송은 반드시 가지와 푸른 잎이 마치 실이 아래로 드리운 듯하고, 줄기는 구불구불하여 북은 이무기가 숲에서 뛰어오르는 듯하며, 향기가 맑고 강한 것이라야 좋다고 했다. 잎이 흰빛을 띠고 가시가 있는 것은 하품이라 하였다. 2월이나 3월에 좋은 것을 골라 가지를 떼어내어 다른 그릇에 꽂은 다음 그늘진 곳에 놓아두고 천천히 물을 주면 살아나 다시 새잎들이 무성해진다. 금강산과 묘향산 두 산의 꼭대기에 자라는데, 승려들이 베어 부처님 앞에 피우는 향으로 쓴다.
또한 김일손(金馹孫, 1464 ~ 1498)은 장건(張騫)이 서역에서 포도와 석류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중국문인의 글에 그 이름이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며, 만약 조선의 만년송이나 사계화(四季花), 옥매(玉梅) 등의 화훼가 중국에 갔더라면 맑은 완상(玩賞)을 즐기는 중국인들이 이들을 즐기고 화보(畵譜)를 편찬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들이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중국 문장가들의 글에 오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향나무 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고 귀하게 쓰였다. 『구약성서』에 기원전 10세기 즈음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 왕을 방문하여 그의 지혜를 시험해본다. 그의 박식함에 감탄한 여왕은 금은보화와 향료를 선물했으며, 솔로몬은 보내준 백단으로 향목(香木)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왕이나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향이 일반화된 것은 종교의식에서 향을 피우면서부터다. 불교나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발상지는 대체로 아열대 지방이다. 그 지방에는 각기 고유한 향나무들이 자랐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종교 행사에는 찌든 옷에서 풍기는 땀 냄새가 가득했다. 이런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향은 부정(不淨)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하여 천지신명과 연결하는 통로라고 생각하여 종교의식에 빠지지 않았다.
신라에 처음 향 피우는 풍습이 들어온 것은 6세기 초 중국의 양나라를 통해서였다. 『삼국유사』에 보면 양나라 사신이 향을 가지고 왔는데, 그 이름도 쓰임새도 몰랐다. 이에 두루 물어보게 하였더니 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墨胡子) 가 말했다. “이것은 향이란 것입니다. 태우면 강한 향기가 나는데, 신성한 곳까지 두루 미칩니다. 원하는 바를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불교가 퍼지면서 여러 의식에 향이 사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향의 재료는 향나무뿐이었다.
우리나라 어딜 가나 향나무를 볼 수 있다. 향나무의 분포지역은 한국, 일본, 중국, 몽골 지역이다. 수평적으로는 흑산도에서 평안북도에 이르는 각지에 분포하고 울릉도에 가장 많다. 수직적으로는 해발 600m 이하에 자생한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향나무는 늘푸른나무 침엽수로 키가 20m이상까지 이르는 큰 교목이다. 자생하는 향나무 종류로는 뚝향나무, 눈향나무, 섬향나무, 개설상나무(노송나무) 등이 있다. 눈향나무를 제외하고는 산속에 자생하는 예는 드물다. 예전부터 침향(沈香)이 비싸서 모두 채취했기 때문이라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향나무들도 대체로 궁이나 사찰, 묘소나 사당 같은 곳에 사람이 심어서 가꾼 나무들이다.
향나무는 암수 딴 그루이나, 때로는 암꽃과 수꽃이 한 그루에서 피는 경우도 있다. 수꽃은 가지 끝에 여러 송이가 모여 피어나는데, 한 송이가 3mm 쯤밖에 안 되며, 암꽃은 가지 끝이나 잎겨드랑이에서 피어난다. 그런데 향나무 씨앗에서 싹이 트는 과정이 흥미롭다. 향나무의 씨앗은 저절로 싹을 틔우기는 어렵고 새들을 이용해서 번식 시킨다. 향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새들에게 먹이로 내주어 열매를 소화시킨 후 남은 씨앗들을 배설물과 함께 어디엔가 뿌려놓는다. 새들의 뱃속에서 산성의 소화액에 적당히 부식된 향나무 씨앗은 껍질이 살짝 벌어진 상태로 새의 몸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싹이 틀 때까지 배설물에 쌓여 적당한 온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영양분도 공급받을 수 있다. 이때 비로소 싹이 틀 좋은 조건이 만들어진다. 지혜로운 방식으로 씨앗을 퍼트리는 향나무의 전략에 놀랄 다름이다.
사십여 년 전 선친께서 선물로 받은 작은 향나무 경대가 노모 방에 있다. 어머님 방에 들어갈 때마다 향나무향이 가득하고 아버님 생각도 난다. 어릴 적 가을 시사 때 제물, 축문, 향로까지 준비하여 묘전에서 진설을 하다가 향을 잊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아뿔싸,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럴 때는 주변 노간주나무를 베서 흰 변재(邊材) 속 분홍색 심재(深材)를 향으로 썼다. 올봄에도 고향에 가면 꼬부랑 언덕길을 올라 상큼한 향기를 맡으려 꼬부랑 할머니 집터에 가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