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춘추좌씨전』의 占辭 해석 연구 -주희, 모기령, 정약용의 해석을 중심으로/김영우
    경서/춘추 2023. 4. 1. 10:28

    『춘추좌씨전』의 占辭 해석 연구 -주희, 모기령, 정약용의 해석을 중심으로 김영우 

     

    • 연구목표
    • 『주역』연구의 역사를『주역』해석사라 할 수 있을 만큼 역해석의 문제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어떤 점에서 역 해석은『주역』 그 자체에 대한 사실적 해석이라기보다는 해석자의 철학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일지 모른다. 본 연구가 탐구 대상으로 하는 주희, 모기령(毛奇齡, 1623~1716),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도 모두 자신의 주역 저술이 주역 본래의 의미를 밝혔다는 데 의심이 없었다. 주희는『주역』을 해석하면서 비록 부분적으로는 해석을 유보한 채 남겨두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해석이 주역의 ‘본래 의미’를 찾는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희의 주석서는 그 제목이 ‘『주역본의周易本義』’이다. 주희의 역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주석서를 저술한 모기령 또한 비록 제목은『중씨역仲氏易』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하였으나 『주역』의 본래 의미를 밝혔다는 확신이 있었다. 정약용 또한『주역사전周易四箋』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그런데 이들 세 학자가 자신의 역해석이『주역』의 본래 의미를 밝혔다는 확신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춘추좌씨전』과『국어國語』에 나오는 점사(占辭)에 있었다고 파악한다. 주희는『주역』해석에 있어서는 『주역』이 본래 점사였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춘추좌씨전』의 변점(變占)을 고증하여 밝혔고, 모기령도 같은 관심에서 『춘추좌씨전』의 서법만을 모아『춘추점서서春秋占筮書』를 저술하였다. 정약용의 경우는 보다 극적인데 그는 춘추좌씨전의 관점(官占)사례가 새로운 주역 해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주역』에 관한 객관적 해석을 지향한다면『춘추좌씨전』해석은 반드시 검토해야 할 내용이다. 그런데 본 연구에서 보다 관심을 갖는 내용은『주역』에 관한 객관적 해석 문제가 아니라, 『춘추좌씨전』을 주목함으로써 주희, 모기령, 정약용 역학에 대한 심화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다. 특히 다산과 모기령은 각각『춘추관점보주 春秋官占補註』,『춘추점서서春秋占筮書』라는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공통적으로 주희의 역학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 다산은 모기령을 비판하고 주자를 옹호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러한 비판과 수용의 교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춘추좌씨전』 점사에 대한 비교 연구가 어느 정도 밝혀 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다.
    • 기대효과
    • 1) 정약용 역학에 관한 역학사적 조망

      다산에 대한 최근까지의 연구 성과가 주로 다산 자신의 역학 이론을 다산의 시각에서 연구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 왔다면 본 연구는 다산의 역학을 주희 모기령의 역학과 비교함으로써 다산 역학에 대한 보다 진전되고 심화된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산의 역학을 단순히 다산학 그 자체가 아닌 중국역철학과 비교함으로써 다산의 역학을 역학사적 조망 아래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다산학 연구에 기여

      󰡔주역󰡕을 해석한다는 것은 문장과 글자의 자의(字意)를 따지는 훈고학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윤리적 실천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문제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역 해석사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해석자의 사물 인식과 윤리관이 각축되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다산의 역학에 대한 해명은 다른 경전에 대한 연구에서 기대할 수 없었던 다산의 자연관, 윤리관, 학문관 등에 대한 해명에 기여할 것이다.

      (3) 한국 역학 연구의 저변 확대

      근대 이후 한국에는 아직 한국은 물론 중국 역학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서가 출간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역학사를 보더라도 송대 역학 일변도로 연구되어 온 경향이 뚜렷하다. 그런 점에서 다산의 역학이 갖는 지위와 성격은 분명하다. 이 연구가 성공적으로 수행될 경우 역학사 전반에 관한 우리의 연구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가 집중적으로 연구할 텍스트는 주희의『역학계몽』과 모기령의 『春秋占筮書』정약용의『春秋官占補註』이다.『역학계몽』의 서문과 1, 2장은 소강절의 상수역학을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3장과 4장은 주역의 점법과 점에 대한 해석 방법을 기술한 부분이다. 3장의「明蓍策」은「계사전」의 내용에 근거하여 시초법을 복원한 내용이지만, 4장의「考變占」은 한대 역학이론과『춘추좌씨전』의 점사에 근거하여 變占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모기령과 정약용이 시초법과 점변을 모두『춘추좌씨전』에 근거하여 설명한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모기령의『春秋占筮書』는『춘추좌씨전』의 17개 사례와 『국어』의 3개 등 모두 20개의 서법 사례에 대해 원문과 주석을 붙인 것이다. 모기령이 『춘추점서서』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역이란 기본적으로 점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모기령은 이 책을 통해 복희와 신농이 팔괘와 육십사괘를 만드는 데는 변역(變易)과 교역(交易)의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된 반면 문왕의 연역은 팔괘와 육십사괘를 가지고 반역(反易)과 대역(對易) 그리고 이역(移易) 이라는 별도의 방법을 가지고 새롭게 창작한 것이라는 자신의 오역설이 옳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정약용의『春秋官占補註』는 『춘추좌씨전』과 『국어』의 점사 사례에 대한 원문을 싣고 자신의 주석을 붙인 것이다. 이 책에서 인용한 사례는 모기령의 『春秋占筮書』와 동일하게 모두 20 가지이다. 정약용이 춘추좌씨전에서 주목했던 두 가지 서점이 모두 후일 그가 역학의 핵심 이론으로 주장한 효변(爻變)의 방법으로 괘를 해석한 대표적 예였음을 볼 때 다산 역학에서 『춘추좌씨전』이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 한글키워드
    • 추이,주희,춘추좌씨전,호체,정약용,모기령,주역 역학계몽,주역사전 상수역학 춘추,괘효사,주역사전,서법,역리사법
    • 영문키워드
    • Chong Yagyong/ Chu Hsi / Chou-I pen-i / Four Commentaries on the Book of Changes / Mao Qiling/ the Four Methods in I Ching or the I-li si-fa / the hexagram-transformation tui-yi/ the hexagram-line transformation hsiao-pien/ the nuclear trigram hu-ti /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官占 사례는 『주역』의 점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갖는다. 주희는『춘추좌씨전』을 근거로 변하는 효가 발생했을 때 점을 판단하는 방법을 복원하고 이를『역학계몽』에 수록하였다. 주희가 점을 판단하는 방법을 복원한 것은 『주역』을 그 기원에서부터 해석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모기령은 역의 기원이 卜筮에서 비롯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는『주역』은 주대의 문왕이 推移의 방법에 의해 새롭게 편집한 책이라는 관점에서 주희의 變占에 대해 비판한다. 정약용은 모기령의 推移를 이어 받지만 효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추이 이외에 효변을 적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산의 효변은 효를 기존의 해석처럼 괘에 종속된 한 획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획의 변화에 따라 본래의 괘가 다른 괘로 변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다산은『춘추좌씨전』을 통해 효변을 새롭게 발견하고『주역』의 효사를 일관되게 해석하는 해석방법론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최근 모기령과 다산 역학의 영향 관계에 관한 논문이 다수 발표되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의미있는 논점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 영문
    • Interpretation of Divination Statement in Spring and Autum Period Annals with Commentary of Zuo -- from the Perspective of Zhu Xi, Mao Qiling, and Chong Yag-yong


      The example official divination (guan dian 官占) in Spring and Autumn Period Annals with Commentary of Zuo (SACZ, hereafter)is equipped of a significant referential value in understanding divination signs in The Changes of the Zhou. Zhu Xi recovered the ways to determine the divination signs when there emerges changes in line statement (yaoci) based on SACZ, and thereby stated in his book Englihtenment in Study of Changes (易學啓蒙). The reason for such a recovery started from the belief that The Changes of the Zhou should be interpreted from its origin. Mao Qiling (毛奇齡), while acknowledging the origin of the Changes starts from the actual practice of prediction bu shi (卜筮), still criticized Zhu Xi's theory of bian zhan (變占) from the point of view that it is King Wen of Zhou dynasty who newly edited The Changes of the Zhou via tui yi (推移). Tasan Chong Yag-yong adopts Mao's method of tui yi on the one hand, while arguing for additional application of changes of line ao bian (爻變). Here, Tasan does not see the line ao as referring to one line of a divination (trigram), but understands that a change in one line transforms the whole divination into another one. Tasan is thus proposing, through the new findings in SACZ, the unique method of interpreting the line statement of The Changes of the Zhou in a consistent wa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춘추좌씨전"의 관점 사례에 주목하여 주희, 모기령, 정약용 세 사람이 춘주좌씨전을 근거로 자신의 역학을 어떻게 구성하였는가를 탐구한 연구이다. 처음 연구에 착상할 때는 세 사람이 동일한 문헌에 대해 공통된 관심을 갖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시작했지만,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 연구가 세 사람의 역학사상의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완결된 논문으로 작성하고, 2011년 3월 26일 실학학회에서 발표하였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官占 사례는 『주역』의 점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갖는다. 주희는『춘추좌씨전』을 근거로 변하는 효가 발생했을 때 점을 판단하는 방법을 복원하고 이를『역학계몽』에 수록하였다. 주희가 점을 판단하는 방법을 복원한 것은 『주역』을 그 기원에서부터 해석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모기령은 역의 기원이 卜筮에서 비롯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는『주역』은 주대의 문왕이 推移의 방법에 의해 새롭게 편집한 책이라는 관점에서 주희의 變占에 대해 비판한다. 정약용은 모기령의 推移를 이어받아 괘사를 해석하지만, 효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추이 이외에 효변을 적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산의 효변은 효를 기존의 해석처럼 괘에 종속된 한 획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획의 변화에 따라 본래의 괘가 다른 괘로 변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다산은『춘추좌씨전』을 통해 효변을 새롭게 발견하고『주역』의 효사를 일관되게 해석하는 해석방법론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향후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수정과 보완을 거쳐 2011년 6월 등재지 "한국실학연구"에 게재할 예정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를 통하여 정약용의 효변론이 주희의 괘변, 모기령의 이역과 어떤 점에 차이가 있는지를 밝혔고, 나아가 주희, 모기령과 구분되는 다산 역학의 특징 또한 추론할 수 있었다. 다산의 역학 세계는 실로 방대한 영역에 걸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주희의 역학이 복서의 기원을 탐구하였으나 그 주된 관심은 리에 대한 탐구에 있었다. 반면 다산의 역학은『주역』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이를 통한 주대 문화의 복원과 군자의 수양 공부, 복서의 기원과 정신 그리고 복서 방법에 대한 완벽한 복원 등 많은 부분에 걸쳐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방대한 부분들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본 논문은 모기령과 다산 역학의 영향 관계에 대한 문제를 어느 정도 명확히 했다고 자부한다. 다산역학의 이러한 연구가 향후 다산과 청대 학술과의 비교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색인어
    • 역학, 주역, 춘주좌씨전, 효변, 고변점, 이역, 추이, 모기령, 주희, 정약용,

     

    한중(韓中) 인물기사(人物記事)의 한 국면(局面) - ‘난리’를 기사화한 정약용(丁若鏞)과 모기령(毛奇齡)의 경우 -
    An Aspect of Historical Writings of Personages in Korea and China - with A Focus on Jeong Yak-yong and Mao Qiling Who Recorded Social Upheavals

    초록

    영어The thesis performs a comparative examination of the historical writings on the incidents that jolted the contemporary society, particularly the distinctive ones by Jeong Yak-yong whose pen name was Dasan and those by Mao Qiling who lived in the late period of Ming Dynasty and in the early period of Qing Dynasty, and elucidates their aspects. And this is intended to grasp the total configuration and significance of the historical descriptions of which the details have yet to be verified. The comparative examination with the Chinese case is designed to ensure a more objective view of the historical descriptions of the incidents that took place in Korea. The historical writings by Mao Qiling focused on featuring the loyalty to the monarch and to parents that revealed itself through the contemporary wartime upheavals. Also, opinions were rarely presented on incidents in the writings, while a factual description of the incidents was provided. Dasan's historical writings include details about Shinyu Saok ('Heresy Case in Shinyu Year of 1801') that he experienced and personages that he came to know through the incidents derived from it, and they are pierced by 'slander', 'false accusation', and 'distress from innocence'. Furthermore, the center of gravity is placed not on the incident itself but on its cause, through which new light was brought on the incident that entirely changed his life, to reveal its hidden side. Both authorships are vivid recordings of incidents that derived from respective contemporary social issues and include writings mos of which don't reveal opinions. On the other hand, while Mao Qiling's writings were backgrounded by his experience of 'wartime upheavals' which could be either directly or indirectly related to the author, Jeong Yak-yong wrote about things that proliferated from what he was personally involved in. Furthermore, while Mao's purpose lay in presenting incidents, Jeong put his focus on narrating his case by revealing incidents. Accordingly, their descriptions are seen as diverging.한국어본고는 당대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건을 취재한 記事 중 독특한 특징을 지닌 茶山 丁若鏞의 기사와 명말청 초의 인물인 毛奇齡의 기사를 비교․검토하여 각각의 양상과 그 보편적 의미를 규명하였다. 이는 아직 그 면면이 확인되지 않은 기사의 총체적 면모와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다. 중국의 경 우와 비교․검토를 한 것은 우리나라 기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 모기령의 인물기사는 주로 당대의 전란을 통과하면서 드러난 인물의 충효열을 기록한 작품이 중심을 이 루고 있다. 또한, 작품 속에 사건에 대한 의론이 개진되는 경우가 드물고, 사건 그 자체를 곁가지 없이 있 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다산의 기사에는 자신이 겪은 ‘辛酉邪獄’과 그로인해 파생된 사건을 통해 알게 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 겨있는데, 여기에는 모두 ‘모함’과 ‘무고’, ‘억울함’이 관통하고 있다. 또한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건이 일 어나게 된 원인에 무게중심을 싣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사건을 재조명하여 그 이 면을 드러내고 있다. 두 경우 모두 서사․서술적 측면에서 변화의 양상이 감지되는 당대 기사의 흐름에서 ‘사건 전달’이라는 기 사의 본래적 특성에 충실하여 자기시대의 사회적 이슈에서 파생된 사건들을 즉사적으로 기록하였고, 의 론이 드러나지 않는 작품이 대부분이라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러나 모기령은 작가에게 있어 직접적일 수도 있지만 간접적으로도 볼 수 있는 ‘전란’이라는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다산은 자신이 직접 겪은 일에서 양산된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또한 모기령은 단순히 사건을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둔 데 반해, 다산은 사건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내․외부의 구분 없이 ‘기사’ 장르라는 통합적인 시각에서 보면, 두 경우 모두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달 한다는 목적 아래 기존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켜내고자 하는 인간 본능이 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국경을 초월한, 기사의 보편적인 양상 중 하나로 읽혀진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朝ㆍ淸 記事의 몇 가지 樣相
     3. 사례로서의 毛奇齡과 丁若鏞의 人物記事
      3.1 전란을 통과한 인간상의 구현 -모기령의 경우
      3.2 옥사와 유배, ‘억울함’에 대한 시선 - 다산의 경우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정약용(丁若鏞)의 청(淸) 모기령(毛奇齡) 악론 비판 : 『악서고존(樂書孤存)』 권6 ‘박(駁)’부를 중심으로
    On Jeong Yak-yong’s Criticism of Mao Qi-ling in Chapter 6 of Akseo Gojon

    초록

    영어Very little has been studied on Jeong Yak-yong’s criticism of Mao Qi-ling, an early-Qing Confucian scholar, in Chapter 6 of his Akseo gojon. The essay overviews Mao’s music theory and Jeong’s criticism of it in so far as they appear in the Gojon. By the way, the inclusion of the “advertising and criticizing” Mao in the Gojon seems absurd, because Mao’s theories, as is Jeong’s own, are nearly dogmatic and heretical, and therefore had little evil influence on their contemporary studies on music. The essay pays attention to the fact that Jeong had maintained an envious and hostile attitude towards Mao and suggests that the question be solved through an interdisciplinary investigation into Jeong’s studies of Scripts, especially of the donctrine of Change.한국어청(淸) 고증학자 모기령(毛奇齡, 1623~1713)의 악론(樂論)을 소개하고 비판한 『악서고존(樂書 孤存)』 제6장은 음악학계의 선행연구가 거의 없는 분야이다. 이 글은 정약용의 소개와 비판을 중심으로 모기령 악론의 내용을 개관하고, 그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을 살펴본다. 한편 모기령 비판은 『악서고존』의 체재나 이 책을 저술한 뜻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모기령의 악론은 정약용 악론만큼이나 독단적이어서 당대 악론에 끼치는 악영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경학자(經學者)로서 정약용이 모기령에 대해 ‘경쟁의식을 넘어선 반감’이 있었다는 사실 을 단서로, 정약용이 모기령 비판에 지면과 노력을 할애한 이유를 ‘다산 경학 또는 역학(易學)’이 라는 더 큰 맥락 안에서 찾아야 함을 향후 과제로서 제시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문제 제기
    2.  『악서고존』에 나타난 모기령의 악론
    3. 『악서고존』의 모기령 비판
    4. 나가며
    참고문헌
    ABSTRACT

    저자

    • 김세중 [ Kim, Se-Joong | 전북대학교 강사 ]

     

    조선후기 모기령(毛奇齡) 경학의 수용 양상

    Articles : Learning Types of Mo Ki-Ryung(毛奇齡)`s Confucian Classics Studies in the Latter part of Choson Dynasty
    김문식 ( Moon Sik Kim )
    사학지  38권  123-145(23pages)
     
     

    모기령(毛奇齡): 학술이 단정하지 못한 대가

     

    글: 주운(周雲)

     

    기실 학술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은 현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고이래로 있었다. 일찌기 한나라때, 누군가 가짜경서를 만들거나, 유명학자의 제자를 사칭하며 여기저기 사기를 치고 다녔다. 그후, 이런 기풍은 계속되었다. 청나라때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청나라때의 학풍은 역대중 비교적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학술이 단정하지 못한 일은 역시 발생했다. 그중 비교적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모기령이다.

     

    모기령은 청나라 초기의 저명한 학자이고, 건가학파(乾嘉學派)의 대표인물중 하나이다. 학술성취도 아주 높고, 시문, 서예등 분야의 성취도 있으며, 명망도 아주 높았다. 만일 오늘날이라면, 역시 대가급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원사(院士)같은 것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문과에 원사가 있다면. 다만 유감인 것은 이런 원사급별의 인물이 학술도덕측면에서 올바르지 못한 점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청나라의 또 다른 학자인 전조망(全祖望)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전조망은 모기령의 여러가지 학술이 단정하지 못한 행위를 열거하고 있다. 대체로 나누면 3가지이다: 첫재는 학풍이 경솔하다는 것이다.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고 함부로 결론을 내린다. 예를 들어 선인의 서적에서의 잘못이 이미 후세인들에게 시정되었는데 모기령은 이를 알지 모하여, 여전히 책에서 선인의 잘못된 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또 예를 들어 동한 가평연간에 한나라조정은 유학경전 <주역>, <상서>, <노시>, <의례>, <공양전>, <논어>, <춘추>를 돌에 새겨 태학(太學)에 두었다. 세칭 "가평석경(嘉平石經)"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원래 <좌전>이 업었다. 다만 모기령은 진지하게 고증하지 안혹, <좌전>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전조망은 이를 "고증하지 않고 헛소리를 했다"고 조롱했다.

     

    만일 상기 행위가 학풍이 탄탄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모기령의 두번째 학술부단행위는 성격이 비교적 엄중하다. 학술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번 자신의 논점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고의로 거짓내용을 날조했다. 역사상 발생하지 않은 일을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는 당나라때 이미 태학, 중용이 논어, 맹자와 병렬적이었다고 말했고 소경(小經)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기실 당나라때 그렇게 한 적은 없다. 이것은 모기령이 억측으로 날조해낸 것이다. 그외에 그의 글에 나오는 일부 고대의 역사자료는 다른 사람들이 찾아보면 고서에 아예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도 고인을 사칭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모기령의 세번째 학술부단행위는 권력에 굴종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학술주장을 감히 견지하지 못한 것이다. 절강사람인 노함적(盧涵赤)은 모기령의 은인이다. 노함적은 일찌기 <속충표기>를 썼고, 모기령이 서문을 써준다. 나중에 청나라정부는 문자옥을 일으킨다. 모기령은 <속충표기>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우려한다. 급히 노함적의 아들(노함적은 이미 죽었음)에게 편지를 써서 그에게 <속충표기>라는 책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그 책에 서문을 썼다는 것도 부인한다. 다만 책은 거기에 있었고, 모기령이 쓴 서문도 직접 붙어 있었다. 필적만 봐도 그것은 모기령이 쓴 것이라고 알 수 있었다. 어찌 이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 노적함의 아들은 아주 화가 났고, 이 일을 공개해버린다. 모기령은 즉시 비난을 받는다.

     

    모기령은 일생동안 주희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주 글을 써서 비판했다. 말년에, 더더욱 주희를 비판하는 글을 모아서 춮판한다. 이름은 <사서개착(四書改錯)>이라고 한다. 나중에 청나라가 주희를 존중하고, 그를 공묘에 배향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모기령은 그 소식을 들은 후, 아주 두려워한다 .즉시, <사서개착>이라는 책을 절판시킨다. 이것도 당시 학술계의 웃음거리가 된다.

     

     

    정약용의 역학관 형성에 미친 모기령의 영향Mao Qiling’s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Jeong Yak-yong’s View of the Changes    방인 /Bang In 1 경북대학교

    초록 열기/닫기 버튼

    이 논문의 목적은 다산 정약용의 역학사상의 형성에 미친 모기령의 영향을 밝히려는 데 있다. 다산은 「제모대가자모역괘도설題毛大可子母易卦圖說」에서 모기령의 자모역괘설子母易卦說이 괘변설卦變說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고 비난하였다. 다산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 본다면 다산과 모기령의 추이설은 뚜렷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첫째, 다산이 『주역사전』에서 썼던 추이推移라는 용어도 모기령이 『중씨역』에서 이미 사용했던 용어이다. 둘째, 다산이 유취類聚와 군분群分의 관점에 의하여 역괘易卦를 벽괘辟卦과 연괘衍卦로 분류한 것도 모기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셋째, 다산이 소과와 중부를 벽괘에 포함시킨 것도 역시 모기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넷째, 모기령은 추이를 연역계사의 원리로 보았는데, 이 점에서도 다산의 견해는 모기령과 일치한다. 다산이 모기령의 추이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과 달리 효변설에서는 모기령의 영향을 받은 바가 거의 없다. 다산은 모기령이 역사易詞 해석에서 오류를 범하게 된 근본적 원인이 그가 효변에 대해서 무지無知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모기령은 효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다만 모기령은 효변을 점변占變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보았으며, 연역계사의 원리로 보지는 않았다. 모기령이 효변을 오역설五易說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효변을 역사易詞 해석의 원리로 간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산의 관점에서는 추이 뿐 아니라 효변도 역시 연역계사의 원리가 된다.


    This paper aims at analyzing Mao Qiling’s influence on Tasan Jeong Yak-yong’s view of the Changes. Tasan made a fierce criticism on Mao Qiling’s theory of the interchangeability between the so-called son hexagram and the mother hexagram. It must be acknowledged that Mao Qiling’s theory has a lot of ingenious aspects. But at the same time, it has a critical problem as Tasan indicated. Nevertheless, if we take Tasan’s statement as read, there is a danger to conceal the fact that he also accommodated some parts of Mao Qiling’s theory. Mao Qiling’s influence is especially conspicuous in his tuiyi(推移) theory. Firstly, the division of 64 hexagrams into two parts of bigua(辟卦) and yangua(衍卦) is influenced by Mao Qiling because it depends on Mao Qiling’s classification of gathered(類聚) and dispersed(群分) hexagrams. Secondly, the term of the tuiyi is also commonly used both in Tasan and Mao Qiling. Thirdly, the inclusion of the xiaoguo(小過) and zhongfu(中孚) hexagrams seems to be influenced by Mao Qiling. Fourthly, Mao Qiling’s standpoint that tuiyi is the principle of linking the hexagram image with the words and phrases of the Zhouyi(演易繫辭) is also shared by Tasan. On the other part, Tasan was hardly influenced in the case of yaobain (爻變) theory. According to Tasan’s opinion, the fundamental reason that Mao Qiling committed the fallacy lies in his ignorance about the theory of yaobian. But Tasan’s assertion that Mao Qiling was ignorant of the yaobian theory should be critcally reconsidered. Mao Qiling had the exact knowledge that the yao(爻) changes when it is laoyang or laoyin and that the previous original hexagram(本卦, bengua) is transformed into the altered hexagram(之卦, zhigua). However, he did not think that it should be the principle of linking the hexagram image with the words and phrases of the Zhouyi. Also the fact that Mao Qiling did not include the yaobain in the five yi theory(五易說) shows that he did not regard it as the method of interpreting the words of the Zhouyi. But from Tasan’s perspective, not only the tuiyi but also the yaobain becomes the principle of linking the hexagram image with the words and phrases of the Zhouyi.



    키워드열기/닫기 버튼

    정약용
    , 
    모기령
    , 
    유취類聚
    , 
    군분群分
    , 
    추이推移
    , 
    효변爻變
    , 

    Jeong Yak-yong(丁若鏞), Mao Qiling(毛奇齡), gathered hexagram(類聚之卦), dispersed hexagram(群分之卦), yaobian(爻變), principle of linking the hexagram image with the words and phrases of the Zhouyi(演易繫辭之法)

Designed by Tistory.